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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프렌치 디스패치> 시사회가 열리던 날, CGV용산에 도착하자마자 깨달았다. 볼펜을 챙겨오지 않았다는 것을. 근처 편의점에서 300원짜리 모나미 볼펜을 사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왜 항상 볼펜을 빠뜨리는가. 영화 기자는 눈으론 영화를 보며 손으론 스크린에서 쏟아져 나오는 각종 정보를 수첩에 메모한다. 리뷰를 쓸 때 종종 주인공 이름 철자가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므로 메모는 필수다. 특히 <프렌치 디스패치>처럼 온갖 지명과 인명, 인물의 사연을 소개하는 내레이션을 정신없이 따라가야 하는 영화를 볼 땐 더더욱 그렇다.
잡지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프렌치 디스패치>는 한권의 ‘보이는 잡지’를 지향하는 영화다. 이번 영화는 웨스 앤더슨 감독이 어릴 때부터 즐겨봤던 잡지 <뉴요커>와 그가 사랑하는 프랑스에 헌정하듯 만든 작품이다. 이를 알고 있던 편집장은 지난주 편집회의에서 <프렌치 디스패치> 특집을 여는
‘프렌치 디스패치’의 폐간을 막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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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칭에 대한 변태적인 집착, 엉뚱한 상상력과 인공적인 세트. 웨스 앤더슨은 특정 장면만 잠깐 보는 것만으로 그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자기만의 세계가 확고한 비주얼리스트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개인의 취향을 고집 있게 드러낸 작품으로 기억될 듯하다. <프렌치 디스패치>의 배경인 프랑스의 앙뉘 쉬르 블라제는 가상의 도시이며 ‘더 프렌치 디스패치 오브 리버티, 캔자스 이브닝 선’이란 매거진은 실재하지 않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작품이 ‘68혁명’이 일어났을 즈음 프랑스를 배경으로 했고 잡지 <뉴요커>를 모티브로 삼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웨스 앤더슨은 고등학생 때부터 <뉴요커>를 탐독하며 수백권의 과월호까지 구입할 만큼 잡지의 세계에 매료된 팬이었다. 그는 잡지의 섹션을 나누듯 에피소드를 쪼갠 앤솔러지 형식으로 자신이 사랑했던 매체와 전설적인 저널리스트 그리고 프랑스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 매
웨스 앤더슨이 재창조한 아름다웠던 잡지의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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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칸토: 마법의 세계>는 <주토피아>를 만든 바이런 하워드와 재러드 부시 감독 듀오와 뮤지컬 <해밀턴> <인 더 하이츠>의 작곡가이며 <모아나>의 노래를 만든 린마누엘 미란다가 함께한 디즈니의 60번째 애니메이션이다. “라틴아메리카 문화의 교차로”라고 불리는 콜롬비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엔칸토: 마법의 세계>는 마법의 축복을 받은 마드리갈 일가에서 유일하게 마법을 갖지 못한 소녀 미라벨(스테퍼니 비어트리즈)이 위기에 놓인 가족을 구하기 위해 모험을 자처하는 ‘디즈니 히어로’ 이야기다. 라틴아메리카 문화의 화려한 색채와 비옥한 자연, 힙합에서부터 민속음악까지 아우르는 스펙트럼 넓은 린마누엘 미란다의 뮤지컬 넘버, 선악으로 대립하지 않는 새로운 스토리텔링 등 <엔칸토: 마법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다섯 가지 키워드를 준비했다. 9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화상으로 진행된 기자회견과 인터뷰가 바탕이 됐다.
키워드로 미리 보는 애니메이션 '엔칸토: 마법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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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신선한 공기와 사랑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두 가지가 없어도 절대 살아갈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는 것.” 요 네스뵈의 <킹덤>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 가족의 사랑에 대한 범죄소설이다. 가족을 위한다는 말이 가족의 범주를 정하고, 내부를 지키기 위해 외부를 배척하거나 공격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될 수 있을까. 요 네스뵈는 두 형제를 중심으로 범죄자의 심리를 추적해간다. 요 네스뵈의 대표작인 ‘해리 홀레’ 시리즈의 연장에서가 아니라 ‘스탠드 얼론’, 즉 시리즈에 포함되지 않는 소설 <킹덤>은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로위’라는 주인공이 바라보는 세상을 보여준다.
로위는 어렸을 적 아버지로부터 친구, 애인, 이웃, 지역, 국가 모두를 앞세우는 가치가 바로 가족이라고 교육받는다. 로위는 동생 칼을 잘 돌보려고 노력하는데, <킹덤>은 초반부터 로위의 세계가 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씨네21 추천도서 <킹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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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전 대법관의 독서 에세이. 어린 시절에 읽은 소설들에서 시작해, 여성으로 살아가기에 대한 사유를 보여준 작가들을 지나, 현대인의 삶을 담아낸 이야기들에 도달하는 <시절의 독서-김영란의 명작 읽기>는 개인의 성장사이자 생애사가 책을 통해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저자의 삶이 중심에 있고 책이 거드는 방식이 아니라, 독서 목록을 재구성하면서 개인사가 살짝 언급되는 식이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의 저작이 비소설을 포함해 다수 남아 있게 된 이유에는 남편 레너드 울프가 출판업자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문학사를 위해서는 너무나 행운이지만 버지니아는 마치 몸에서 뽑아낸 거미줄로 집을 짓는 거미처럼 작품 속에 자신의 인생을 온전하게 녹여넣는 방식으로 글을 써왔으므로 글 밖에서는 온전한 자신으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런 버지니아 울프의 구심점이 된 것이 바로 블룸즈버리그룹이었는데, 저자 자신은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발을
씨네21 추천도서 <시절의 독서-김영란의 명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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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달루시아의 개> <세브린느>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등을 연출한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자서전. 그는 1900년 2월22일 태어나 1983년 7월29일 세상을 떠났는데, <루이스 부뉴엘: 마지막 숨결>이 처음 출간된 해가 1982년이니, 영화의 초기 수십년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대학 시절까지의 이야기는 가족사를 중심으로, 이후 초현실주의를 접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예술관을 정립해나가고 영화를 만든 경험을 중심으로 서술해나간다. 1900년대 초반 성장기에 대한 회고에서는 이후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가 보여주는 어떤 정서(특히 욕망에 대한)가 어떻게 그 안에서 뿌리내렸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기술된다. 당연하게도, 책의 중반부는 20세기 유럽의 예술사(미술과 영화)를 대표하는 인명사전 수준이 되는데, 르네 마그리트와 그의 부인과 식사를 하고, 앙드레 브르통은 트로츠키를 만난 경험을 들려주고, 만 레이, 루이
씨네21 추천도서 <루이스 부뉴엘: 마지막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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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을 써서 생계를 유지한다. 그가 쓴 세권의 소설에는 모두 무언가를 잃는 사람이 등장한다. ‘나’가 사는 세계에서는 매일 무언가 하나씩 소멸, 삭제된다. 어느 날은 상자를 묶는 리본이, 어느 날은 새가, 다음에는 장미가, 어느 날에는 향수가 사라진다. 물건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억과 그것을 칭하던 단어까지 삭제된다. 의식적으로 ‘그것’을 기억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은 비밀경찰에게 강제로 연행되어 어디론가 끌려간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작가 오가와 요코의 소설 <은밀한 결정>의 내용이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박사가 사고 후 기억하는 기능을 잃어버리듯 <은밀한 결정>의 사람들도 기억을 강제로 빼앗긴다. 모두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홀로 추억하는 사람은 과연 행복할까? 은둔하며 사물을 기억하는 ‘나’의 엄마는 향수 냄새를 기억하고, 단어를 잃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다. “엄마는 사라진 것들을 왜 그
씨네21 추천도서 <은밀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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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이거 <첫 맥주 한 모금>이랑 비슷하네?”라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18페이지에 두둥! 하고 그 글이 나와버렸다. 1999년에 한국에서 출간된 후 절판되어 나 역시 몇년 전 도서관에서 겨우 빌려 읽었던 바로 그 책! 중고 서적으로 구매할까 했지만 원래 책 가격의 열배나 비싸게 팔고 있기에 포기했던 바로 그 책이었다. 쓰다 보니 무슨 홈쇼핑 광고 같은데, <첫 맥주 한 모금>은 제목만으로도 궁금해서 헌책방을 뒤지게 만들던 책이었다. 맥주는 첫 모금이 가장 맛있는데, 그걸 아는 프랑스인이라면 그 에세이는 더 볼 필요도 없이 재밌지 않겠는가. 게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류의 수필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어머, 이건 꼭 사야!’ 하는 책인 것이다. 재출간되면서 책 제목은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으로 바뀌었다. 맥주에서 크루아상으로, 주류에서 베이커리로 제목을 바꾸고 표지에는 가을 스웨터와 강아지풀 그림이, 내지에도 소재에 걸맞은 귀여운 삽화
씨네21 추천도서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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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매서워진 날씨. 귤을 까먹으며 하기 좋은 일 중 하나인 책읽기에 빠져보자. 소설부터 소설에 대한 소설까지, 얇은 책부터 두꺼운 책까지, 고르게 컬렉션했다.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11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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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에는 사회적 균열이 있습니다.” 1995년 자크 시라크 당시 대통령 후보가, 대선 토론회에서 엘리트 파리지앵들의 삶에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하류층 프랑스인들의 상황을 지적하면서 한 말이다. 같은 해, 파리 근교 게토에 사는 3명의 이민자 청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마티외 카소비츠의 <증오>가 큰 호응을 얻기도 했으니, 비단 그만의 우려는 아니었을 거다. 이로부터 정확히 10년이 지난 2005년, 시라크 대통령은 1만대에 가까운 자동차와 300여개의 건물이 불타고, 3천여명이 체포된 파리 외곽 소요 사태로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그리고 2018년, 파리 낭만의 상징인 샹젤리제 거리는 ‘노란 조끼’ 시위 중 전쟁터로 변했다. 노란 조끼 운동은 마크롱 정부의 유류세 인상과 부자세 감면 발표를 계기로 불붙은 대중운동으로, 프랑스 내의 계급적 불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장기간 계속된 강도 높은 시위에 프랑스는 노란 조끼 운동을 지지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로 나
[파리] 프랑스의 일그러진 캐리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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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사무실에선 어디로 눈길을 돌려도 디즈니의 친근한 캐릭터들과 눈을 맞출 수 있다. 미키 마우스와 인어공주, 백설공주 등 디즈니 프린세스들, <토이 스토리>의 친구들과 <스타워즈>의 R2D2까지 세대와 취향을 가로지르며 사랑받아온 캐릭터들이 손님을 반긴다.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디즈니+의 출시 2년째 되는 날인 11월12일, 한국에서도 디즈니+가 출시됐다. 디즈니, 픽사, 마블, 스타워즈, 내셔널지오그래픽, 스타 등 기존 디즈니의 핵심 브랜드가 보유한 방대한 콘텐츠는 물론 디즈니+만의 독점 콘텐츠까지 OTT 서비스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디즈니+ 한국 출시를 앞두고, 김소연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DTC(Direct-to-Consumer) 사업부 총괄 상무를 만났다. 디즈니+만의 경쟁력과 디즈니+가 제작할 한국 콘텐츠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디즈니라는 브랜드에 대한 김소연 상무의 높은 자신감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김소연 상무는 2
"콘텐츠의 확장성이 강점, 한국 창작 생태계의 판 키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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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가 은퇴한 뒤 다음 캡틴은 누가 이어받을 것인가. 이건 단순히 다음 히어로로 누가 등장하느냐 이상의 의미가 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캡틴 아메리카는 자신의 방패를 샘 윌슨/팔콘(앤서니 매키)에게 물려주었지만 캡틴의 자리는 좀더 특별하다. 캡틴 아메리카를 캡틴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슈퍼 솔저로서의 그의 능력이나 비브라늄 방패가 아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내내 캡틴 아메리카가 스스로 증명한 불굴의 투지와 정신력, 올바름에 대한 신념과 그가 거쳐왔던 크고 작은 시련이야말로 캡틴을 캡틴으로 만들어주는 힘이다. 다시 말해 캡틴은 하나의 히어로 이상의 상징적 존재이고, 그 왕좌를 이어받기 위해선 부단한 담금질 과정이 필요하다. <팔콘과 윈터 솔져>는 캡틴 아메리카가 남긴 유산을 둘러싼 크고 작은 사건들을 따라간다.
미 공군 파라레스큐 출신인 샘 윌슨은 레드윙 슈츠를 착용하고 히어로 팔콘으로 활약 중이다. 샘은 스티브 로
캡틴의 자격, 히어로의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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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톰 히들스턴)는 매번 죽었다. 정확히는 죽은 척해왔다. 이 사랑스러운 거짓말쟁이는 매번 죽음을 위장하여 퇴장한 뒤 커튼 뒤에서 음모를 꾸미다 들키면 천연덕스럽게 돌아왔다. 하지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에게 목을 졸려 살해됐을 때 사람들은 충격 속에서도 더이상 장난의 신을 만날 수 없으리라는 잔혹한 진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타노스는 선언한다. “이번엔 못 살아날 거다.” 그렇게 우리는 가슴 아픈 이별과 함께 로키를 떠나보냈다. 그런 줄 알았더니 장난의 신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면서 또 한번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 앞에 돌아왔다. 바로 시간 여행을 통해서 말이다. 이제 무슨 억지냐고 따지고 싶다가도 바로 그 ‘로키’라면 납득이 간다. 총괄 제작자 스티븐 브루사드는 “타노스로 인한 죽음과 희생을 무효화하고 싶지 않았다. ‘농담이야, 없던 일로 해’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찾아낸 우회로가 바로 ‘TVA’(Time Variance Auth
로키 네버 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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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에서 제일 강한 존재는 누구일까. 유치하지만 다들 궁금해할, 누구나 한번쯤은 순위를 매겨봤을 질문. 심지어 설정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줄 세워보고 싶은 마음은 슈퍼히어로영화에 허락된 즐거움이자 어쩌면 본질이기도 하다.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 중 타노스와의 마지막 결투, 단독으로 타노스를 압도하고 제압 직전까지 갔던 완다 막시모프(엘리자베스 올슨)의 존재감은 독보적이었다. 마블 스튜디오 사장 케빈 파이기가 공식적으로 밝히기를 완다는 인피니티 건틀렛 없는 타노스보다 강한 존재, 어쩌면 MCU에서 가장 강력한 히어로다. 하지만 원작 코믹스에서 ‘스칼렛 위치’라는 히어로 네임으로 ‘현실 조작’이라는 절대적인 능력을 선보였던 완다의 힘은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는 다소 하향 조정됐던 것이 사실이다. <완다비전>은 원작의 스칼렛 위치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최상의 선물이 될 시리즈다. 완다가 어떻게 스칼렛 위
스칼렛 위치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