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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랜만에 촉촉하게 내렸다. 비가 내리는 한강철교를 차를 타고 건너노라면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는 강물의 위용 앞에 숙연해진다. 딱히 비가 내리지 않는 날에도 잠수교 교각을 들이밀며 달려드는 한강의 물결 앞에서는 어딘가 왜소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는데 비라도 퍼부으면 그 혼연함에 정신마저 아득해오곤 한다.그렇게 도도한 강물이 흘러가는 강변에서 <불새>의 세훈(이서진)은 장인에게 아내 지은(이은주)을 포기하라는 위압적인 권고를 받는다. 아니, 장인의 권고는 위압에서 그치지 않고 세훈을 모욕적으로 몰아붙였다. 외관상 유사한 개와 늑대가 분명하게 구분되는 점은 인간에게 복종하여 따뜻한 밥과 안락한 환경을 마련하느냐, 인간을 거부하고 황량한 숲속을 헤매며 굶주리느냐라는 것이라면서. 자신만의 원칙과 자존심이 강한 세훈에게는 오직 늑대와 같이 굶주리는 일만이 남아 있는데 그런 그에게 딸을 맡길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황량하고 도도한 현실의 파고 속에 딸을 던지고 싶지 않은 아버지
사랑한다면 혹은 사랑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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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위의 물건들은 최소한 두 가지 상이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세계에 개입하는 도구로서의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세계를 읽는 텍스트로서의 기능이다. 예를 들어 우산은 비가 내리는 세상을 비에 젖지 않고 건너갈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인 동시에, 우산 디자이너의 생각과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존재조건을 읽을 수 있도록 해주는 텍스트인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책으로서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읽을 수 있는 수많은 정보를 담은 창고라 할 수 있다.사물의 도구로서의 기능이 인간에게 부과되는 외부세계의 조건과 한계를 넘어서 세계를 우리의 의지대로 변형시키는 현실적인 목적에 종사한다면, 그것의 텍스트로서의 기능은 이렇게 조건지어진 우리의 존재양상을 돌이켜보는 사유에 종사한다. 전자가 ‘어떻게’라는 질문의 결과라면, 후자는 ‘왜’ 또는 ‘무엇을 위하여‘라는 질문의 원인이다. 후자의 질문은 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왜 우리
우산 없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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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범죄의 재구성>의 유쾌한 열정을 질투하다한국은행이라는 난공불락의 성채를 상큼하게 찜쪄먹는 사기극, <범죄의 재구성>. 완전범죄를 위해 동원되는 현란한 미장센, ‘꾼’들이 서로에게 ‘접시를 돌리는’ 치밀한 두뇌게임은 차라리 부차적이다. 옴팡 털려버린 건 한국은행이 아니라 ‘나는 사기의 무풍지대에 살고 있다’는 소시민적 착각이다. 고만고만한 일터와 닭장 같은 집을 오락가락하며 애벌레처럼 옹송그리고 살면 피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스펙터클한 사기의 세계. 돌이켜보면 배신과 상처를 밥먹듯 주고받는 생의 장소 곳곳에 살떨리는 사기행각들이 오롯이 놓여 있다. 그러나 이상하다. 허접하고 꿀꿀하기 짝이 없는 인물들에게서 배어나오는 투명한 열정에, 기분 좋은 질투가 끓어오른다.감동은커녕 가냘픈 휴머니즘조차도 자극하지 않는 등장인물들, 그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관객에게 사기치지 않는다. 그들은 애초에 고상한 생의 목표가 없기에 행위 자체에 몰입하는 순수한 열정을 내뿜
사기의 카니발, <범죄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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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영화제에 신설된 DVD부문의 후보작들이 발표되었다. 지난해 6월부터 올 6월까지 출시될 타이틀 중에서 관련업계의 추천을 받아 후보작들은 선출되었는데 그랑프리는 5월16일 발표예정이다. 지난해에는 서플먼트로 중무장한 베르트랑 타베르니에의 <캡틴 코난>과 M. 나이트 샤말란의 <식스 섹스>가 크리에이션부문을, 폴 모리세이의 뉴욕 언더그라운드 삼부작 DVD가 문화의 유산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하였다.<나는 쿠바> 미하일 칼라토조프 <당나귀 가죽> 컬렉터스 에디션 자크 드미<데칼로그>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루카스 벨보의 삼부작> 루카스 벨보<마태복음>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모리스 피알라 컬렉션(볼륨 1)> 모리스 피알라<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 확장판 피터 잭슨 <백색공포> 제리 샤츠버그<석양의 무법자> 확장판 세르지오 레오네 <소림
DVD부문 칸의 영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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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에 안 속는 동료들 때문에 답답했던 셀린느, 그 영화에서 절대 말해선 안 될 비밀을 결국 털어놓고야 만다. “들어봐, 앨리스. 거긴 정말 원더랜드라니깐!” 이키! 앨리스조차 신기해할 곳이라니! 자크 리베트의 <셀린느와 줄리 배를 타다>와 구로사와 기요시의 <간다가와 음란전쟁>은 정말로 ‘이상한 나라’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리고 동화와 미스터리와 비극이 조합된 미로의 끝에서 나쁜 어른들을 저 세상으로 떠내려보내거나 시궁창에 내던져버린다.
<셀린느와 줄리 배를 타다>는 매번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 시작한다. 소녀에겐 엄마가 없다. 아빠와 그를 사랑하는 이모와 유모, 그중 누군가의 정염(아니면 도대체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소녀는 살해의 위험에 빠져 있다. 셀린느와 줄리는 소녀를 구해야만 한다. 둘은 ‘기억의 사탕’에 의존해 이야기를 맞추고, 이상한 집에 들어갔다 나오는 모험을 반복한다. <간다가와 음란전쟁>은 매번 ‘그리고 다
[DVD vs DVD] <셀린느와 줄리 배를 타다> vs <간다가와 음란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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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시간> The Desperate Hours1955년감독 윌리엄 와일러상영시간 112분화면포맷 1.78:1 아나모픽음성포맷 영어 모노출시사 파라마운트<벤허>와 <로마의 휴일>로 잘 알려진 윌리엄 와일러는 한국에서는 그다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저 우리는 <벤허>를 만들고 “하느님, 진정 제가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까?”라고 말했다는 것만을 기억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영화들이 모두 스타 중심의 스펙터클한 작품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앙드레 바쟁은 <지저벨>과 <우리 생애 최고의 해>를 분석하면서 윌리엄 와일러가 ‘연출의 장세니스트’라는 평가를 했다. 이제 우리는 윌리엄 와일러 영화들을 모두 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번에 출시되는 <광란의 시간>은 55년에 제작되었는데 90년에 만들어진 마이클 치미노 영화의 오리지널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영화
스타일이 없는 스타일을 구사하는 연출의 힘, <광란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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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안> Le clan des Siciliens/The Sicilian Clan1969년감독 앙리 베르누이상영시간 118분화면포맷 2.35:1 아나모픽음성포맷 DD 5.1 프랑스어, DD 5.1 이탈리아어, DD 2.0 독일어 모노출시사 폭스-파테(프랑스 지역코드 2, PAL)지금은 그 이름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지만, 한국사회의 팝컬처 신에서 한때 ‘알랭 들롱’이란 이름 넉자가 갖는 문화적 의미는 각별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넉넉한 중년의 아줌마가 돼 있을 단발머리 여고생들의 절대적 지지, 특히 우수에 젖은 파란 눈에 대한 문화적 동경은 오늘날의 반짝 유행으로 지나가는 이르바 ‘얼짱’ 신드롬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고, 그 알랭 들롱이란 문화적 아우라의 정점에 바로 이번에 소개하는 타이틀 <시실리안>이란 작품이 서 있다. <리피피> <현금에 손대지 마라> 등의 50∼60년대 프랑스 범죄영화의 유구한 전통 속에서 스토리라인의 재치 넘치
알랭 들롱의 아우라와 만난 완벽한 범죄극, <시실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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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이 마모루가 자신을 개에 비유하듯, 미야자키 하야오에게도 돼지는 단순한 가금 이상의 의미였다. 그의 작품 속에서 돼지는 태초에 신이었으며(<원령공주>의 옷코토누시) 부모이기도 하였으니(<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그런 신과 부모를 둔 인간이 돼지로 변하는 게 미야자키에겐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었을 게다. 하늘을 사랑하는 붉은 돼지 마르코는 비행기 제작과 영화를 보며 자란 감독 자신에 다름 아니다. 전쟁과 파시즘에 환멸을 느낀 마르코는 스스로 돼지가 되길 선택했다. 하지만 붉은 돼지, 마르코가 보여주는 행동은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적이다. 엔딩에서 마르코가 피오의 키스로 환인되었다고 보는 분들도 있지만 과연 그랬을까? 배부른 인간이기보다 배고픈 돼지이기를 바랐던 마르코는 오히려 세상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돼지가 되길 바랐을 듯하다(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엔딩 크레딧의 삽화들에 있다). 약간의 티끌이 보이는 것 이외에는 최근작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깔끔한
배부른 인간이기보다 배고픈 돼지이기를, <붉은 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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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의 감독들이 살고 싶은 곳이 아닌 떠나고 싶은 곳으로서의 뉴욕을 그린다. 하지만 그들은 뉴욕을 떠나지 못한다. 70년대부터 뉴욕의 ‘비열한 거리’를 배회하는 갱들과 택시기사, 구급요원을 그려왔던 스코시즈. 때론 다른 곳으로 이사가기도 했지만 <순수의 시대>와 <갱스 어브 뉴욕>에선 19세기의 뉴욕을 그리며 자신이 이탈리안이 아닌 뉴요커임을 보여주었다. 라이오널(닉 놀테)은 그림으로 성공했지만 사랑에는 언제나 실패한다. 그런 그가 뉴욕을 떠날 수 없는 것은 이곳이 언제나 또 다른 사랑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슈퍼마켓 계산대에선 절대 유대인 할머니 뒤에 서지 말 것을 <미국의 광채>가 가르쳐주었건만, 그 여인이 어머니라면 어찌해야 하나? 셀던(우디 앨런)의 무의식 속엔 참견이 심한 어머니를 죽이고픈 욕망이 담겨 있다. 마술쇼 도중 사라진 어머니는 뉴욕의 마천루 너머에 자리잡고 참견을 강화한다. 하지만 결국 그는 어머니와 닮은 여자를 선택한 자신을 발견
거장들의 뉴욕 사랑, <뉴욕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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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브롱베르제는 배우에서 제작자로 변신하면서 프랑스영화의 어떤 현장을 만들어나간 인물이다. <그들의 첫 번째 영화>에 포함된 대부분의 작품은 그와 프랑스 작가들이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함께했던 순간의 결과물이며, 거의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들이라 가치가 크다. <네 멋대로 해라>의 한 장면이 연상되는 장 뤽 고다르의 <샤를로트와 그의 쥴>, 구조주의자로서의 알랭 레네를 보는 듯한 <스티렌의 노래>, 비극적 상황의 희극적 전환이 돋보이는 프랑수아 트뤼포와 고다르의 <물 이야기>, 그리고 자크 리베트의 <양치기 전법>이 먼저 눈에 띈다. 결핍과 상실에 대한 기억을 다룬 모리스 피알라의 <사랑은 존재한다>와 파트리스 르콩트의 <불안의 실험실>은 알싸한 아픔을 주는 작품이다. 특히 장 피에르 멜빌의 1946년작 <광대의 24시간>과 <카이에 뒤 시네마>의 설립자인 자크 도
프랑스영화를 제대로 즐기는 법, <그들의 첫 번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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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유력 일간 르몽드가 칸영화제 개막에 맞춰 한국영화와 홍상수 감독을 대대적으로 소개했다. 르몽드는 13일자에서 칸영화제 공식 경쟁부문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홍상수 감독) <올드보이>(박찬욱 감독) 등 2편의 작품이 초청된 한국 영화와 홍감독의 작품 세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한국 영화 두 편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한꺼번에 초청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권위있는 영화전문지인 '까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ema)가 최근 홍 감독을 소개하는 등 현지 언론들이 한국 영화를 주목하고 있다.
르몽드는 한국에서 "할리우드 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43%인데 반해 자국 영화 점유율은 53%"라며 "한국 영화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말했다.
르몽드는 "한해 최고 영화 10편 중 8편이 한국영화"라며 "10여년전부터 영화계에 진출해 위험을 감수하고 과감한 작품을 제작해온 젊은 제작자들에 힘입어 한국영화는 크게 부상했다"고 분
르몽드, 한국영화-홍상수 감독 크게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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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씨, "검사 고정관념 벗어나도록 노력"
영화배우 안성기씨와 김은혜 MBC 앵커가 13일 명예검사로 위촉돼 하루 동안 검사체험을 했다. 안씨 등은 이날 오전 대검찰청 15층 대회의실에서 위촉식을 갖고 송광수 검찰총장으로부터 위촉패와 검사 법복을 받은 뒤 오후 2시께부터 서울중앙지검에서 검사 실무를 직접 경험해 눈길을 모았다.
안씨 등은 서울중앙지검에서 서영제 검사장 등 간부들과 담소를 나누고 민원전담관실과 종합민원실을 돌며 민원인 상대 업무처리 요강을 설명받은 뒤 직접 민원인으로부터 서류를 접수받았다.
이어 안씨 등은 청소년 범죄를 전담하는 서울중앙지검 소년부에서 황인정 부장검사로부터 청소년범죄의 추세, 경향 등을 설명받고 소년부 검사실에서 직접 피의자와 만나 상담하는 시간을 가졌다.
안씨는 취재진이 자리를 떠난 상태에서 오토바이를 절도한 혐의로 소환조사를 받고 있는 청소년 피의자를 만나 `인생선배'로서 조언을 해주고 배석한 학부모를 위로하기도 했다.
안씨는 이날 명예검
안성기, 김은혜 앵커 명예검사 일일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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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상영관 등록을 마친 대구의 레드시네마(해바라기극장서 개명)와 동성아트홀이 14일 처음으로 문을 연다. 개관작은 지난 10일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은 카트린 브레야 감독의 <로망스>. 지난 2000년 10월 6분 가량을 잘라낸 필름으로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아 개봉됐다가 이번에 원본 그대로 선보인다. 2002년 1월 영화진흥법 개정 이후 제한상영가 등급의 영화가 상영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제한상영관 체인 듀크시네마는 지난 6일 현재 서울의 매직시네마를 비롯해 16개 극장과 상영 계약을 체결했으나 제한상영관 설립 등록과정에서 하자가 발견되거나 등록 신청이 지연돼 우선 두 곳만 먼저 개관하기로 했다.조영수 듀크시네마 이사는 "등록을 마치는 대로 다른 극장들도 순차적으로 개봉할 예정이며 전국 30여개로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제한상영관은 학교환경위생정화구역, 청소년전용활동지역, 주거지역, 청소년수련시설 200m 이내 등에서는 설치가 제한
14일 대구 두 곳서 제한상영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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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장까지 맡다니‥“꿈을 이룬 내게 깐느는 천국”
작품을 만든 감독이나 영화제를 취재하려는 기자나 깐느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서류상의 형식적인 절차는 말할 것도 없고, 극장에 들어가기도 까다로운 권위적인 깐느에서 주눅들지 않는 사람은 딱 한명인 것 같다. 두번째 영화 <펄프 픽션>으로 황금종려상을 ‘가볍게’ 거머쥐고 정확히 10년만에 심사위원장으로 깐느로 돌아온 쿠엔틴 타란티노(41)다. 손짓까지 섞어가며 수다스러운 말투로 심사위원단 기자회견에서 시종 웃음을 터뜨리게 만든 그는 “<킬 빌 2>가 경쟁부문에 진출해 상을 타는 것이 심사위원장을 하는 것보다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에 “노! 노! 노!”라고 세번이나 크게 외치고는 “나는 지금 천국에 와있는 기분”이라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깐느는 천국 같은 곳이다. 첫 영화를 만들 때 나의 꿈은 깐느에 진출하는 것이었고, <저수지의 개들>로 ‘주목할 만한 시선
[칸 2004] 쿠엔틴 타란티노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