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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지는 아이들의 삶과 에너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아무도 모른다>의 기자회견은 열띤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특히 주연인 5명의 아역배우들에게 집중적으로 사진세례가 쏟아지기도 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도 전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름을 소개하자 박수가 터져나왔던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일본 기자들이 절반 가까이 기자회견 장소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우들이 즉흥적이고 자발적으로 연기를 해낸 것 같다. 비전문 배우들과의 작업이 어려웠는가.
보람있고 훌륭한 시간들이었다. 시나리오는 준비되어 있었지만 로케이션 장소에 도착해서 연기해야 할 상황을 글로써가 아니라 말을 통해 설명해주었다. 그 상황을 여러 번 반복시키는 과정에서 배우들의 자발성이 나오게 되었다. 사실 아이들에게는 현실과 픽션이 잘 구별되지 않는 경우들도 있었다. 시게루(작은아들)가 집에서 도망가는 장면을 찍고 난 뒤 둘은 정말로 화가 났다. 히에이(작은아들 역)는 유야(큰아들 역)와 차를 같이 타지도
[칸 2004] <아무도 모른다>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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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했던 장르적 세공력을 뽐내다
송일곤 감독의 <거미숲>이 칸에서 처음 공개됐다. 개막 이틀째인 5월13일 열린 마켓 시사는 미처 자리를 못 잡은 바이어들로 다소 어수선한 와중에 시작됐다. 보통 초반 20분 안에 구매 가능성을 판단하는 마켓 시사의 관례에 비추어보면, 2시간 가까운 상영 동안 중간에 자리를 뜬 바이어가 서너명에 불과했다는 것이 <거미숲>의 흡입력을 방증해주었다. 데뷔작 <꽃섬>으로 예술영화에 대한 자의식을 강하게 드러냈던 송일곤 감독은 미스터리드라마 <거미숲>에서 예상치 못했던 장르적 세공력을 뽐냈다.
짙은 어둠이 드리운 숲속, 덩그러니 놓인 별장으로 민(감우성)이 다가간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끔찍한 광경이 펼쳐진다. 중년의 남자가 반라 상태로 난자당해 숨져 있고 젊은 여인이 피를 흘리며 가쁘게 숨을 내쉰다. “무서워!…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저기 거미가….” 이해할 수 없는 짧은 말을 끝으로 그녀는 숨을 거둔다
[칸 2004] 마켓에서 첫 상영된 <거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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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르 쿠스투리차는 제목 그대로 삶이 기적이기를 바라는 판타지를 예의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풀어간다. 신나게 쿵짝거리는 음악에도 불구하고 따분함이 느껴진다면 그건 소재나 캐릭터가 익숙하게 재연되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움은 보스니아를 배경으로 에로틱한 장면을 가미한 로미오와 줄리엣을 펼친다는 점이다. 그 비극을 과감한 해피엔딩으로 돌려놓은 자신감이 놀랍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를 넘나드는 철도를 연결하는 것이 꿈인 루카. 신경질적인 뮤지컬 배우 아내와 축구선수가 꿈인 장성한 아들과 함께 사는 철로변의 아름다운 집에 갑작스럽게 전쟁이 다가온다. 떠나버린 아내와 징집된 아들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그에게 이슬람 간호사가 잡혀오고 운명처럼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위기는 아내가 돌아오면서 다시 시작된다.
영화 속의 정치학에 대해서 묻고 싶다. <언더그라운드>는 논란이 됐던 영화인데….
누가 논란이 된 영화라고 말했나?
어떤 평론가들이.
아하. 어떤(비웃듯이) 평론가들이? 영화는
[칸 2004] <삶은 기적이다>의 에미르 쿠스투리차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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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5월이면 칸의 리비에라 해안과 크로와젯 거리는 더할 나위 없이 밝고 강렬한 햇살로 반짝거리게 마련이다. 올해로 57회를 맞는 칸영화제는 짙은 먹구름과 함께 시작됐다. 개막 일주일 전부터 파리의 하늘은 차갑게 뿌려대는 빗줄기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개막날인 5월12일, 그 겨울빛 먹구름은 칸으로 이어졌고, 거꾸로 파리는 화창하게 갰다. 칸에 드리운 그림자는 날씨뿐이 아니었다. 개막 전날 <리베라시옹> 1면 톱 제목은 ‘비정규직, 기수를 칸으로’, 소제목은 ‘칸영화제, 황색 신호등 켜지다’였다. 지난해 아비뇽연극제 개최를 무산시켰고, 지난 4월에는 몰리에르시상식을 무산시켰던 공연예술 분야 비정규직 노조가 일찌감치 칸을 겨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칸영화제 점령위원회 창립 선언문’까지 내놨다.
비정규직 노조와 함께 개막식을 열다
개막식에서 공연예술분야 비정규직 대표들이 등에 ‘협상’이라는 글자를 붙이고 시위입장하고 있다.
“문화, 건강, 교육 등 공적 재산을 축소
[칸 2004 ] 아버지를 거부하는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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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향을 성공적으로 활용한 애니메이션 <벨빌의 자매들>
이른바 “외국영화”라는 것이 “자막의 한계”라는 저주를 벗어날 수 있을까? 마임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소리를 통해서는 가능하지 않을까? 이러한 “미키마우스적”, 혹은 “자크 타티적” 정신이 프랑스-벨기에-캐나다 공동제작 애니메이션 <벨빌의 자매들>(Belleville Rendez-vous)과 헝가리 특산 애니메이션 <허키>를 통해 되살아나고 있다. 눈부시도록 독특한 데뷔 장편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작품은 모두 풍성한 음향적 표현을 통해 대사를 배제한 채 성공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니모를 찾아서>나 <루니 툰: 백 인 액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해의 가장 독창적이고 탁월한 장편애니메이션은 실벵 쇼메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그는 한때 만화작가였다) 영광스러운 복고풍의 애니메이션 <벨빌의 자매들>이 아닌가 한다. 할리우드산 애니메이션 중에서
자막의 한계를 넘은 ‘소리의 예술’, <벨빌의 자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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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무라 쇼헤이의 새로운 화두
이마무라 쇼헤이는 오즈 야스지로가 지은 천상의 정신세계를 등지고 떠나와, 마다할 수 없는 육신의 늪에 뛰어들면서 거장이 된 감독이다. 그의 날인이 되어 장애와 억압을 거침없이 뚫어버리는 리비도의 분출은 그 욕망의 태동을 피와 살의 섞임으로 갈파하면서 또는 성교와 살인과 복수로 점철하면서 좌충우돌 한 세기를 건너왔다. 하지만, 요상한 것은 오즈를 떠나온 이마무라 역시 세계가 웅크리고 있는 집이 다를 뿐, 오즈만큼이나 강박적으로 같은 이야기에 집착해왔다는 사실이다. 2001년 제작되었으나, 국내에서는 최근 개봉된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도 그 반복의 연장선상에서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그의 영화세계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여성 욕망을 유쾌하게 그려낸 작품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이다(이 점에 국한된 내용은 450호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프리뷰에 썼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지나가는
이마무라 쇼헤이, 불쾌의 미학에서 치유의 화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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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한국 문화산업의 성장률은 연평균 21.1%로 평균 경제성장률 6.1%에 비해 3.5배의 고도성장을 나타냈다. 같은 시기 세계 문화산업의 연평균 성장률 7.2%에 비해도 그 속도가 두드러진다. 2003년 한국 문화산업의 시장규모는 39조2천억원인데, 출판과 방송의 비중이 가장 크고 광고, 게임, 캐릭터, 영화가 그뒤를 따른다. 영화는 1조2천억원의 시장으로 5조원의 경제효과를 발생시켜 규모에 비해 윈도효과가 탁월하다. 참고로 세계 문화시장의 규모는 1150조원 수준.
[그래픽뉴스] 한국 산업의 미래는 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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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벤디 유니버설과 NBC가 지난 5월12일 장기간 끌어온 합병 절차를 마무리했다. 2003년 10월 합의된 조건에 따라 NBC의 모회사 제너럴 일렉트릭(이하 GE)은 비벤디 유니버설에 현금 34억달러를 지급하고 비벤디의 부채 17억달러도 떠맡았다. 합작 그룹 지분의 20%는 비벤디가 나머지는 GE가 소유한다. 이번 합병으로 비벤디는 유니버설 인수 이후 시달려온 부채 부담을 덜고, 메이저 방송사 중 유일하게 제작사를 거느린 미디어 그룹 멤버가 아니었던 NBC는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얻었다.
디즈니와 바이어콤의 합병과 유사한 이번 합작으로 탄생한 시장 5위 규모의 미디어 그룹 안에는, 유니버설 영화 및 TV 스튜디오, NBC, 텔레문도 네트워크와 CNBC, USA 네트워크, Sci Fi 채널, 브라보, 유니버설 테마파크의 일부 지분이 포함된다. 그룹의 CEO로 NBC 회장이자 GE의 부사장인 로버트 라이트가 임명된 가운데, 비벤디 출신의 유일한 간부인 유니버설 스튜디오 사장 론 메이어는
비벤디 유니버설과 NBC, 지난 12일 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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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태권도대회에서 자국 선수를 편든 미국쪽 농간으로 부당하게 승리를 강탈당한 승현(이동준)은 아내마저 잃는 비운을 겪는다. 7년 뒤, 사랑하는 딸 사랑(은서우)과 알콩달콩 살며 형사가 된 승현. 하지만 주먹이 앞서는 성격 탓에 직장마저 잃고 불법격투도박사 황종철의 싸움개로 전락한다. 그 와중에 사랑과 친해진 여검사 민서(김혜리)는 승현과의 엇갈린 과거를 확인하던 차, 황종철은 챔피언 잭 밀러(스티브 시걸)와 승현을 대결시키고자 사랑을 납치한다. 어쩔 수 없이 승현은 미국행을 택하고, 민서도 뒤따른다.
오노 사건 때처럼 승리를 내줬다가 되찾는 구조의 <클레멘타인>은 시작과 끝을 국위선양 및 민족자존심 회복에 맞춘 근래 보기 드문 영화다. 그 안쪽엔 비정한 조직과 불같은 경찰에 강인한 여검찰이 제법 그럴싸하게 포진하고 있다. 그리고 한가운데는 엉뚱하게도 더없는 부성(父性)과 비밀스런 가족사가 애절하게 자리한다. 3분의 1은 액션, 3분의 1은 조폭·형사, 3분의 1은 멜로
구닥다리 드라마와 신파조의 고함, <클레멘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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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키우기에는 도시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한 여피 부부, 쿠퍼와 리아는 시골로 이사온다. 19세기 소설에서 막 튀어나온 듯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콜드 크릭 저택은 꿈에 그리던 스위트 홈을 실현시켜줄 것 같았다. 하지만 저택의 전 소유주인 매시 일가에 관한 어두운 흔적들이 저택 이곳저곳에서 출현하고, 다큐멘터리 감독인 쿠퍼는 직업적 호기심으로 저택의 내력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 막 출옥하여 저택으로 돌아온 매시 일가의 아들, 데일이 등장하는 순간 그는 치명적인 위협의 존재로 다가온다. 이제 ‘누구보다 이 집을 잘 알고 있는’ 데일과 ‘뉴욕에서 시골까지 내려온 낯선 이방인’ 쿠퍼 사이의 전쟁이 시작된다.
줄거리만 듣더라도 <콜드 크릭>은 유명한 레퍼런스 목록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케이프 피어>(줄리엣 루이스가 이번에는 ‘범죄자’의 애인 역이다)부터 <패닉 룸>(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다시 한번 위협당하는 소녀로 등장한다), 혹은
호러와 스릴러 사이의 어정쩡한 범작, <콜드 크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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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기대를 배신한다. 최선을 다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이 있고 아무리 거스르려 해도 휩쓸리게 되는 파도가 있다. 그러다 어디로 가는 건지 둘러볼 때는 이미 늦었다.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벌써 지났다. <하류인생>의 주인공 태웅은 자존심 센 건달이지만 배고픔 앞에선 무릎 꿇지 않을 수 없었다. 의리를 믿고 살았지만 대신 감옥에 간다고 영웅이 되는 건 아니었다. 정치를 몰랐지만 그런다고 정치가 그를 피해갈 리 만무했다. 적당히 더러워지고 은근슬쩍 타협하면서 오욕의 세월을 살아낸 남자, 그는 결국 정보부 요원들에게 쫓겨 전경과 시위대가 대치한 한복판에 떨어진다. 10여년 전 폭력조직간의 싸움에서 그랬듯 태웅은 간신히 몸을 숨겨 어쩔 수 없이 다시 살아갈 내일을 맞는다.
단적으로 물어보자. 이것은 비극인가? 자유당 정권 말기부터 유신시대까지 건달로, 영화제작자로, 군납업자로 살았던 사내의 인생에서 비참하고 서글픈 심정을 경험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박하사탕>의 영
한국 현대사의 격랑에 떠밀린 한 남자의 젊은 날, <하류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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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먼지가 트로이의 성벽만큼 쌓이기를 수십번, 버려진 무수한 주검에 목구멍이 메었던 강의 신 크산토스마저 전쟁을 잊었을 이 즈음에, 장려했던 도시의 낙일(落日)을 노래하는 거대한 영화가 다시 완성되었으니 위대한 것은 옛 시인의 영감이요, 생생한 것은 4년 전 서사극 <글래디에이터>의 영광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전쟁의 기원은 터무니없다. 기원전 1200년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 무력을 앞세워 그리스 세계 통합을 꾀하는 동안 동생인 스파르타 왕 메넬라우스는 트로이와 강화를 맺는다. 형 헥토르를 따라 트로이의 사절로 스파르타 궁을 방문한 왕자 파리스는 메넬라우스의 비(妃) 헬렌과 갑작스런 사랑에 빠지고 귀향하는 배에 그녀를 숨긴다. 고귀한 헥토르는 아우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나, 이미 불붙은 메넬라우스의 분노에 동생이 죽는 꼴을 차마 볼 수 없어 무모한 연인들을 데리고 귀국한다. 그렇지 않아도 트로이의 주권을 넘보다 핑계를 얻은 아가멤논은 그리스 연합군을 소집하고, 무적 장군
장려했던 도시의 낙일을 노래하다, <트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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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에게 필요한 것 하나, 데드라인
이 영화의 모티브로 인해 (특히 판타지로 전환된 개인의 기억이 주제라는 점에서) 왕가위의 예술가적 집착이 전보다 훨씬 강하게 드러나게 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지만, 완성 기한에 쫓기는 혼란스러운 작업 과정과 영화 속의 다른 부분들이 왕 감독에 대해서 우리에게 뭔가 또 다른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듯하다.
우선 캐스팅에 관한 것이다. 장이모 감독이 자신의 ‘서투른’ 아카데미 외국영화상 수상 시도작(?)인 <영웅>을 만들기 위해 <화양연화>의 두 주인공 양조위와 장만옥을 빌려(?)갔음은 공지의 사실이다. 물론 왕가위 감독은 그 캐스팅의 의도를 간파했을 것이고, 이에 〈2046>을 위해 장쯔이와 공리는 물론이고 덩지에(董潔)에 이르기까지 장이모 감독과 작업했던 모든 여성 스타들을 되빌려오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그는 이들 배우 모두로부터 장이모 감독이 이제까지 해낸 그 어떤 것보다 훨씬 훌륭한 연기를 이끌어냈다. 교
〈2046>은 아직도 작업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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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상영 직전까지 손질 멈추지 않는 왕가위, 그리고 〈2046>을 말한다
<화양연화> 이후 4년 이상을 끌어온 왕가위의 신작 〈2046>이 마침내 5월12일 개막되는 제57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선보인다. 그런데 칸의 라인업이 발표된 뒤에 들려오는 소식은 여전히 그가 〈2046>을 찍고 있다는 것이었다. 〈2046>을 칸에서 볼 수 있기는 한 것일까. <씨네21>은 그의 자막 작업을 해주고 있는 토니 레인즈에게 급히 팩스를 넣었다. 〈2046>에 대해, 그리고 왕가위의 지난했던 작업에 대해 글을 써줄 수 있느냐고. 정작 토니 레인즈는 전주영화제 등으로 국내에 들어와 있었고 출국을 하루 앞둔 5월5일, <씨네21> 사무실의 한 귀퉁이에서 왕가위에 대한 글을 써내려갔다. 영국 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현재 영국영화연구소(BFI)에서 발간하는 영화 월간지 <사이트 앤 사운드>에 고정필자이자 <씨네21>의 해
〈2046>은 아직도 작업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