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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다락방에 산다. 마당에 있는 누군가를 훔쳐보면서 태어난다. 사랑은 가지를 뻗는다. 그 팔은 반드시 불륜에 걸린다. 시기는 그 모든 것들의 밑바닥에 있다. 지하실을 뒤져도 나오지 않는다면, 종유석이 숲을 이룬 동굴에 숨어 있으리라. 일본 소녀 만화의 1970년대는 그야말로 굉장했던 때다. 비극적 연애, 처절한 도전, 혁명에의 동경과 같은 극단의 감정에 뒤섞여 있던 시절을 통과한 그 시대 만화가들의 미래 역시 결코 평탄치는 않았다. 신흥 종교의 교주가 된 어떤 만화가만큼은 아니지만, 만화가의 펜을 꺾고 뒤늦게 성악가로 살아가고 있는 이케다 리요코의 모습은 <베르사이유의 장미> 혹은 <오르페우스의 창>의 주인공들과 겹쳐서 볼 수밖에 없다.이케다의 팬들은 그녀가 영원히 만화가의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가정은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이케다 단편집>(대원씨아이 펴냄)이 뒤늦게 국내에서 발간되어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있는데, 대작에서는 찾을
순정만화의 원형을 만나다, 이케다 리요코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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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슈렉>은 <미녀와 야수> 내러티브의 유쾌한 뒤집기였다. 결국은 ‘미녀-왕자’의 커플이 아니라 ‘야수-살찐 여자’ 커플이 탄생했던 것이다. 나는 이 뒤집기를 일종의 안티-다이어트 애티튜드로 바라본 적이 있다. 디즈니의 만화 이데올로기에 대한 ‘얼터너티브’를 표방한 드림웍스사의 작품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어쩌면 당연한 테마설정이었다.
두 번째 <슈렉> 역시 이러한 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 외모지상주의, 명품만능주의, 속물적 물질주의를 상징하는 베벌리힐스의 삶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장면들을 통해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 대한) 흥미로운 비판의식을 보여준다. 칸이 <슈렉2>를 평가해준 부분도 아마 이런 것과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슈렉2> 역시 호화로운 돈잔치의 일부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사상 최대의 개봉관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고 펩시 등의 회사와 제휴하여 부수입도 짭짤하게 올렸
‘삐딱한’ 얼터너티브 록, <슈렉2>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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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익힌 말 가운데 기특하게 쓸모 많은 것이 ‘동급 최강’이다. 급의 차이 즉 범주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평가는 각각의 범주 내부에서 내리겠다는 화법이다. 이것을 영화에 적용하면 특정 부류 자체를 옹호하거나 배척하는 대신 그 부류들 안에서 잘 만들어진 혹은 소홀한 영화들을 분별하고 평가하는 태도가 자리잡게 될 것이다. 문화 다양성이란 동급 최강이 많다는 뜻일 터.나는 여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취향이 선명한 편인데, 내가 좋아하는 범주 안에서 어지간히 잘 만들어진 영화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부류의 동급 최강이 주는 기쁨의 총량이 얼추 비슷하지 싶다. 물론 좋아하는 부류의 동급 최강을 만나면 몽롱하게 취한 기분이 2주일쯤 간다. 취향에 따른 관대함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직업적인 이유로 시사회를 다니다 보면 참 못 만들었다 싶은 영화에도 어쩌다 걸리게 되는데, 그럴 때는 내 얼굴 아는 사람 없다면 10분 만에 일어서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만든 이에 대한 예의와 관련자
동급 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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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5일 이후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를 접었다. 그동안 ‘논객’으로서 그 당에 공개적 지지를 표명했던 것은, 이 땅에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진보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진보정당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것은 보수와 중도까지도 동의하는 시민적 합의. 하지만 민주노동당이 의회에 진출한 이상 나의 공적 지지도 시효가 다 한 셈이다. 그리고 오늘, 한명의 유권자로서 그 당에 대한 사적 지지마저 ‘당분간’ 접는다. 사실 민주노동당을 나온 것은 2년 전의 일. 그때 ‘탈당’이라는 수단으로 내가 우려했던 일이 결국 벌어지고 만 것이다.민주노동당의 당직 선거 결과는 한마디로 충격이다. 이른바 ‘NL’이라는 세력이 주요 당직을 모조리 독점한 것이다. 당원의 대다수는 NL이 아니고, 그들에 대해 커다란 불신을 갖고 있는데도, 선거 결과가 이렇게 나온 것이다. 이것이 21세기형 민주주의인가? 평당원들은 원자처럼 분산되고, 이른바 좌파들은 이리저리 분열되고, 그 틈을 타서 당내에서 늘
민주노동당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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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을 탔다. 누군가 내 옆자리로 엉덩이를 비집고 끼어 앉는 것을 느꼈다. 육십대 초반을 넘어섰을까? 할머니는 청재킷에 꽃무늬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주렁주렁 몇 봉투의 검정 플라스틱 백들과 빛바랜 하늘색 가방을 함께 들고 있었다. 그 속에서 갑자기 거울을 꺼내든 그녀가 정성스레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본다. 그리고는 빗을 꺼내들었다.열심히 빗질을 하는 그녀에게 그제야 난 주의를 돌린다. 빈 국어공책, 외국모델이 표지로 실린 꼬부랑글씨의 잡지, 아침에 지하철역 앞에서 돌리는 무크지 등등을 그녀는 소중하게 한장한장 넘겼다. 거꾸로 들린 경우가 있는 것을 보면 딱히 읽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저 흉내만… 이내 그것들을 다시 넣고 빼기를 반복한다. 간간이 백 속에서 구슬주머니를 꺼낸다. 망사주머니에는 오색의 유리구슬이 수십개 들어 있었다. 그 천진한 색채의 현란함이라니….그녀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거울과 유리구슬을 두고 고민한다. 어느 날 혼자 남겨졌을 때 필요한 것을 하나의
거울과 유리구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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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집 우동 속에는 홍합조개와 오징어가 같이 들어 있다. 이런 조합은 해물스파게티나 매운탕 같은 음식에도 늘 있는 것이니 특별할 것은 없다. 이들은 같은 바닷물 속에서 태어났고 지금 이 우동국물 속에서 우연히도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들 부류가 살아온 방식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하나는 집을 갖고 한곳에 붙박이로 눌러앉아 살았던 반면, 다른 하나는 집없는 물고기들처럼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떠돌이로 살아왔다.조개가 자신의 몸을 돌처럼 단단한 껍질로 감싸는 데 열중하는 동안, 오징어는 자신의 몸을 유선형의 부드러운 주머니로 만드는 데 집중한다. 적대적이고 위협적인 환경 속에서 자신을 보전하기 위해 한쪽은 위험을 막아낼 성벽을 쌓는 일에 몰두하고, 다른 하나는 위험으로부터 재빨리 달아나는 방법을 선택한다. 한쪽은 공간에, 다른 한쪽은 속도에 목숨을 건다. 둘 다 살아가기 위해 나름대로 고심한 결과이다. 유전자의 절대명령인 생존의 욕구, 약탈자의 먹이가 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이
조개와 오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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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트로이>와 <칼의 노래>에서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사랑을 보다영화 <트로이>에는 ‘아’와 ‘적’을 가르는 경계가 철조망이나 전선에 있지 않음을 읽어내는, 뜻밖의 삐딱한 시선이 있다. 멀리서 경계를 응시하면 경계는 이음새 하나 없이 정교하다. 그러나 경계를 껴안고 뒹구는 이에게는 경계 표면의 하찮은 ‘기스’ 하나도 불현듯 커다랗게 도드라진다. DMZ의 군인들에게 삼팔선은 굳건한 경계가 아니라 가끔은 구멍 숭숭 뚫린 소통의 출구로 보이듯. <공동경비구역 JSA>가 경계의 자그마한 틈새가 파열하여 절규하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감정의 구멍을 보여주는 것처럼. <트로이>의 인물들은 국가를 위한 전쟁에 몸바치기보다, 저마다 ‘나의 전쟁들’을 하나씩 품은 채 창과 방패를 벼린다. <트로이>에서 근육질의 수컷들이 펼치는 무용담의 매혹은 크지 않다. 오히려 거대한 서사의 틈바구니에서 분출하는 하찮은 에피소드들이, 삭막한
경계에 핀 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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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의 무릎> Le Genou de Claire1970년감독 에릭 로메르상영시간 101분화면포맷 1.33:1 스탠더드음성포맷 DD 2.0 프랑스어자막 영어출시사 폭스 로버(미국)<오고, 가며> Vai~E~Vem2003년감독 조앙 세자르 몬테이로상영시간 168분화면포맷 1.66:1 아나모픽음성포맷 DD 2.0 포르투갈어자막 영어출시사 제미나이 비디오(프랑스)<라자> Raja2003년감독 자크 드와이옹상영시간 110분화면포맷 2.35:1 아나모픽음성포맷 PCM 2.0, DD 5.1 프랑스어자막 프랑스어출시사 워너(프랑스)이웃집 아저씨들은 나이 어린 여자를 사랑한다. 이웃 소녀의 무릎을 만지고 싶은 남자(<클레르의 무릎>)나 정원 손질하는 소녀에게 걸린 남자(<라자>)는 나은 편이다. 어떤 노인은 젊은 여자 가정부, 경찰, 간호사, 심지어 요정에게까지 스스럼없이 오입질 이야기를 늘어놓는다(<오고, 가며>). 고작 패를 드
늙은 그들의 어린 여자 오디세이 <클레르의 무릎> <오고, 가며> <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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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라이더> 30주년 기념 스페셜 에디션 Easy Rider1969년감독 데니스 호퍼상영시간 95분화면포맷 1.85:1 아나모픽음성포맷 DD 5.1자막 한글, 영어, 중국어출시사 콜럼비아(1장)1969년에 제작되었지만 1999년 한국에서 극장개봉을 했던 <이지 라이더>는 그 시간의 간극만큼 우리에게는 낯선 매혹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1960년대 미국 히피세대의 세계관을 간직하고 있는 이 영화는, 빌리와 와이어트라는 이름을 가진 두 젊은이가 말을 타는 대신 할리 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을 타고 로스앤젤리스에서 뉴올리언스까지 여행하는 과정을 뒤따라간다. 그 배경에는 수많은 록의 명곡들이 깔린다. 와일드하게 태어난(‘Born to be wild’) 그들은 단순한 마약을 파는 범죄자가 아니라 자유를 찾아 떠나는 아나키스트들이다. 적어도 그 시대에는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그렇지 않다면 이 영화의 경이적인 흥행 성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이 영화의 제작자이자 감
‘와일드하게 태어난’, <이지 라이더> 30주년 기념 스페셜 에디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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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초이야기/부초> 浮草物語 A Atory of Floating Weeds 1934년 / 浮草 Floating Weeds1959년감독 오즈 야스지로상영시간 205분 (2 디스크)화면포맷 1.33:1 풀스크린음성포맷 D 1.0 모노 일본어출시사 크라이테리언(미국)부록 도널드 리치와 로저 에버트의 음성해설, 도널드 소신의 새로운 스코어(부초이야기), 예고편크라이테리언은 고전영화의 명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차분하고 계획적으로 오즈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출시하고 있는데, 2000년에 이미 출시한 <안녕하세요>에 덧붙여 <동경이야기> <부초> 등을 출시하고 있고 곧 <초여름>을 출시할 계획을 잡고 있다.이번에 소개하는 <부초이야기>(1934)와 <부초>(1959)는 동일한 작품을 감독 자신이 리메이크할 정도로 애정을 지녔던 작품으로 전쟁 전의 발랄했던 오즈 초기의 작품 세계와 전후 관조의 세계로 접어든 후기의 작품 세계를
같은 이야기, 같은 감독, 다른 손길, <부초이야기/부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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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영국의 지독한 안개에서 비롯되었다. 추락하는 폭격기에서 낙하산도 없이 뛰어내린 카터를 저승사자는 안개 때문에 그만 놓쳐버렸던 것이다. 20시간 뒤 카터는 천국으로의 소환을 명받지만 추락 전 마지막 교신을 나눈 여인과 이미 사랑에 빠졌다며 천국을 상대로 재판을 요구한다. 전쟁 중의 프로파간다 성격이 강했던 전작들과 달리 논쟁적인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을 만든 뒤 파웰 & 프레스버거가 선택한 것은 로맨스판타지였다. 우리에겐 미국 개봉시의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파웰 감독이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한 영화였다(반면 프레스버거는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를 더 좋아했다). 비록 영미관계 개선을 위한 영국 정보부의 요청으로 제작되었으나 영화는 증오로 인한 죽음 대신 사랑으로 새 삶을 만들어내자는 순수한 메시지를 담았다.
박스 세트로 발매된 ‘파웰 & 프레스버거 컬렉션’에는 <천국으로 가는 계단&
파웰 & 프레스버거의 생과 사 컬렉션, <천국으로 가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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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이트 스토리> The Straight Story1999년감독 데이비드 린치상영시간 112분화면포맷 2.35:1 아나모픽음성포맷 DD 5.1 영어자막 한글, 영어출시사 이지컴퍼니요란스럽던 세기말에 데이비드 린치가 발표한 작품은 차라리 소박한 것이었다. 힘없는 노인이 구만리 떨어진 곳의 형제를 찾아, 잔디깎이를 몰고 6주간의 길을 떠난다. 탈 것 많은 미국에서, 그리고 휴대폰이 널린 이 시대에 이게 무슨 소린가. ‘세상은 이상한 곳이야’라는 그간 데이비드 린치 영화의 주제와 달리 <스트레이트 스토리>엔 평범한 세상과 인물이 있을 뿐이다.<스트레이트 스토리>는 ‘순수영화’(Pure Cinema)이다. 그러나 히치콕 영화처럼 시각적 테크닉과 영상의 힘이 드러나는, 가장 영화적인 영화와 비교할 필요는 없다. 말하자면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데이비드 린치식 순수영화다. <스트레이트 스토리>의 가장 중요한 순간- 길을 떠나기로 결심하는
데이비드 린치식 순수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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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 비노쉬 >>
줄리엣 비노쉬의 다음 작품은 홀로코스트 드라마. 나치 점령하의 이탈리아를 무대로 하는 <나의 이탈리아 이야기>에서 그는 유대인 소년의 엄마 역을 맡는다. <레인맨>의 배리 레빈슨이 감독하는 이 작품은 미국과 유럽의 다국적 자본이 모이는 프로젝트가 될 예정이라고. 가을부터 로마와 시실리에서 촬영에 들어간다.
앤디 서키스 >>
<반지의 제왕>의 ‘골룸’ 앤디 서키스가 킹콩으로 돌아온다. 피터 잭슨은 차기작 <킹콩>에서도 모션 캡처한 앤디 서키스의 연기를 바탕으로 CG 킹콩을 창조해낼 예정이다. 이를 위해 앤디 서키스는 골룸에 이어 또다시 보이지 않는 명연을 준비 중이다. 다만 이번에는 ‘럼피’라는 요리사 역으로도 출연할 계획이라고.
존 쿠색 >>
넓은 연기 폭을 자랑하는 존 쿠색이 이번엔 외계인의 아버지가 된다. 약혼녀의 죽음으로 상심해 있다가 자신이 화성인이라고 믿는 6살짜리 소년을
[캐스팅 소식] <반지의 제왕>의 골룸, 킹콩 되다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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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6살로 세상을 떠난 캐서린 헵번의 유품들이 엄청난 고가에 판매되어 화제다. 뉴욕 소더비 경매장에서 695점의 유품들이 총 580만달러에 팔린 것이다. 헵번은 <작은 아씨들>(1933)로부터 94년작 <러브 어페어>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우아한 모습을 선보인 바 있다. 그가 1926년 결혼할 때 입었던 벨벳 드레스는 2만7천달러에, 그가 출연한 연극의 배우들 사인이 들어간 담뱃갑은 5만7천달러에 팔렸다.
캐서린 헵번, 그녀가 남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