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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는 첫 문장부터 건조하면서도 섬세한 필치로 임진왜란의 굴곡진 음영을 더듬는다.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 사이에서 마지막까지 고민했다는 김훈 작가의 후일담은 역사의 재현이 얼마나 고되고 어려운 작업인지를 증명한다. 김훈 작가는 ‘꽃은 피었다’로 썼을 때 ‘전쟁 한복판에서도 꽃은 핀다’는 식으로 다소 감성적으로 읽힐까 싶어 최후의 순간 끝내 ‘꽃이 피었다’로 바꾸었다. 고작 한 문장. 아니 한 음절. 하지만 때론 단어 하나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역사를 이야기로 다시 되살리는 자가 숙고해야 할 무게란 그런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한국인이라면 모두 알고 존경해 마지않는 성웅(聖雄) 이순신 장군이라면 그 부담과 책임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순신 장군을 다룬 영화와 드라마는 적지 않지만 그를 다시 해석하는 일은 실로 고된 작업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모두 이순신 장군을 알지만 동시에 여전히,
용의 노래, 마침내 당도하다 '한산: 용의 출현'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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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의 레드 / 무륵의 블루
조상경 의상감독은 이안(김태리) 의상의 모티브를 해인사의 요선철릭 유물에서 가져왔다. “메인 컬러를 레드로 잡고 이안이 남사당패에서 자란 전사라는 점을 고려해 깃 부분에 조각보 방식으로 수를 놓았다. 저고리는 아랫부분이 치마처럼 주름이 퍼지는 액주름포를 활용했는데, 액주름포는 옆선에만 주름이 들어가서 서 있을 때와 움직일 때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반면 무륵(류준열)의 의상은 훨씬 얇고 가벼운 인상이다. “모시, 옥사, 명주 등의 천연색 천을 사용했고 홑겹으로 만들어진 옷을 여러 벌 입어 걸을 때 자락이 더 퍼지게끔 디자인했다. 오방색을 그대로 쓰기보다 간색(두개의 오방색을 섞어 만든 색.-편집자)을 배색해 비색, 청록색, 취람색 등을 만들어 사용했다.”(조상경 의상감독)
정체를 숨긴 가드의 코트, 자장 법사의 가면
가드(김우빈)는 그레이 톤의 잘 재단된 코트를 입고 등장한다. “불필요한 장식 없이 미니멀하게 가는 것이 컨셉이었다. 오랜 시
'외계+인' 유니버스는 이렇게 창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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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7월20일) <외계+인>이 개봉했다. <암살> 이후 7년 만의 개봉이고, 5년 동안 준비한 프로젝트다.
= 사실 이 순간을 기다리며 영화를 만드는 거니까 떨리고, 긴장되고, 극장 개봉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쁘다. 오랜만에 개봉을 준비하면서 홍보를 어떻게 하는지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웃음) 요즘은 인스타그램이나 쇼케이스를 통한 온라인 마케팅이 활발한 것 같다. 굉장히 빠르게 콘텐츠에 반응하는 젊은 친구들이 신기하다. 개봉 전부터 영화에 나오는 도술 아이템이나 캐릭터를 분석하는 분들도 있다.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관객은 이를 ‘세계관’이라고 표현하며 관심을 보였다. 관객이 영화를 보며 느끼는 즐거움이 예전보다 다양해진 것 같다.
- 최동훈 감독이 처음 <외계+인>에 대한 아이디어를 들려줬을 때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 2017년 <도청>을 준비하다가 작업이 중단됐을 때였다. 원작 없
'외계+인' 제작 안수현 케이퍼필름 대표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지만 새로운 구조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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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 행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죄수를 인간에게 주입하면 둘은 한몸으로 살아간다. 이때 외계인은 기억을 잃은 채 뇌 속에 잠들게 되고, 인간은 자기 몸속의 이물질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다시 남은 생을 영위한다. 보디 스내처 영화의 원조 격인 <신체 강탈자의 침입>(1956), 그리고 <인베이젼>(2007)을 떠올리게 하는 SF적 설정은 <외계+인>의 2022년 현재 파트를 수렴하는 구심력이다. 인간의 몸을 뚫고 촉수를 뻗친 다음 도심 한복판에 핏빛 공기를 터뜨리는 약간은 호러적이기까지 한 존재가 최동훈 영화에 착지한 것이다. 할리우드에 버금가는 한국영화의 야심찬 성취 혹은 지평의 확대라는 산업적 의미는 이 글에서 잠시 차치하기로 한다. <외계+인>에 구현된 공상과학적 상상력이 SF 장르의 계보 아래에서 얼마나 독창적인가 하는 문제 역시 취향과 인상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우선 배제하기로 한다. 질문하고 싶은 것은 최동훈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처음
'범죄의 재구성'과 '외계+인'을 잇는 최동훈 감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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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0일 여름 성수기 시장에 안착한 <외계+인> 1부는 전에 본 적 없던 한국영화의 돌연변이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개체수는 아직 단 하나뿐.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부터 최동훈 감독의 필모그래피 전반을 되짚고 제작자인 안수현 케이퍼필름 대표의 말을 빌려 이 야심찬 프로젝트의 DNA를 엿봤다. 김태경 촬영감독, 류성희·이하준 미술감독, 조상경 의상감독, 유상섭·류성철 무술감독, 제갈승 VFX 슈퍼바이저를 통해 고려 시대와 외계를 잇는 독특한 혼종의 실체를 해부한 제작기도 함께 전한다.
'외계+인'이라는 혼종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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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이 삭감된 임금의 원상 회복을 주장하며 파업을 시작한 지 두달이 다 되어간다. 하청노동자들은 대형 원유 운반선 안에서 농성 중이다. 유최안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배 밑바닥에 0.3평 철제 구조물을 용접하고 그 안에 자신을 가둔 지도 한달이 지났다.
2016년에 조선업에 불황이 왔다. 불황에 대응하기 위해 하청노동자 7만명이 해고되었다. 일자리를 지킨 노동자들도 임금이 30% 삭감되었다. 기간산업인 조선업을 유지하기 위해 수조원이 투입되었다. 개별 노동자들도 실직, 급여삭감, 중노동으로 고통을 분담했다. 그 결과, 대우조선해양은 수주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조선업은 수주한 다음 선박을 준공하고 인도한 다음에 그 성과가 경영실적에 반영되기 때문에 수주가 실적이 되기까지 적어도 1년 이상이 걸린다. 따라서 대우조선해양은 수주 실적으로는 이미 고비를 넘었다.
하청노동자들은 이 모든 변화를 거치는 6년간, 계속 삭감된 임금을 받았다. 20년 숙련공이 최저임금
[정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파업을 지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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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끔해 보이지만 어딘가 수상해 보이는 눈매. 이현욱이라는 이름을 시청자에게 각인한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와 <마인>은 ‘냉미남’으로 불리는 이현욱의 서늘한 매력을 장르적으로 한껏 부각시킨 작품이다. 중학생 때부터 배우를 꿈꾸며 숱한 오디션을 치른 이현욱은 자신의 페르소나를 분명하게 파악했다.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순하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가진 분위기가 일상 드라마보다 장르물에 잘 어울린다고 여긴다. 나 역시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의외성을 가진 장르적 캐릭터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기회만 주어지면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누군가는 그저 빌런으로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이현욱은 나름대로 변신을 거듭해왔다. “연기 변신이란 극과 극의 성격을 오가는 게 아니라 캐릭터의 개성을 디테일하게 풀어나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악역으로 통칭할 수 있는 배역들도 그때마다 목소리나 시선에 미묘한 변화를 주어 캐릭터만의 색깔을 만들려고 했다.”
[WHO ARE YOU] '블랙의 신부' 배우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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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로로의 새로운 모험 이야기가 3년 만에 극장을 찾는다. <뽀로로 극장판 드래곤캐슬 대모험>은 2013년 개봉한 <뽀로로 극장판 슈퍼썰매 대모험> 이래 여섯 번째로 제작된 극장판 작품이다. 전작에서 눈요정 마을과 게임 속 세상, 공룡섬과 보물섬 등을 넘나들던 뽀로로가 이번에는 드래곤캐슬로 여행을 떠난다.
드래곤 왕자 아서(엄상현)는 해머드래곤 볼트(이장원)와 함께 악당들을 물리친 후 왕으로 등극했지만, 왕이 된 후 자신과 함께 드래곤캐슬을 지켜낸 친구들을 성 밖으로 쫓아낸다. 이에 수호신은 아서에게 벌을 내린다. 커다란 덩치를 자랑한 아서를 작은 아기 용으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아서의 강력한 힘을 드래곤 하트에 가두고 만 것이다. 아서는 친구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 때 마법이 풀릴 것이라는 수호신의 전언을 잊은 채 드래곤 하트의 봉인을 풀고자 애쓰지만 녹록지 않다. 게다가 아서의 왕좌와 드래곤 하트를 호시탐탐 노리던 마법사 게드(김혜성)의 등
[리뷰] 친구는 소중하게, 모험은 경쾌하게 '뽀로로 극장판 드래곤캐슬 대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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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없는 이들의 집’이라고도 불리는 명문 크라이니크 학교의 교사 에미(카디아 파스칼리우)는 남편과 찍은 섹스 비디오가 인터넷상에 유출되며 직장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남편이 컴퓨터 수리를 맡긴 뒤에 벌어진,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던 에미는 학부모 회의에 출석하게 된다. 하지만 그를 향한 학부모들의 무자비한 경멸과 모욕은 이 자리가 실은 마녀재판에 다름 아니며, 그것은 혐오와 배제에 기반한 사회가 끊임없이 희생자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루마니아 뉴웨이브의 주역인 감독 라두 주데는 루마니아 사회의 이러한 희생자들, 집시(<아페림>), 유태인(<상처 입은 마음> <나는 야만의 역사로 거슬러가도 상관하지 않는다> <열차의 출구>), 독재정권에 저항한 학생(<대문자>)을 다룬 전작들에 이어 <배드 럭 뱅잉>에서는 한 여성을 또 다른 희생자로 호명한다. 그러나 에미에게
[리뷰]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배드 럭 뱅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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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13일, 왜군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기습적인 공격으로 순식간에 한양의 도성을 잃고 선조는 평양으로 거처를 옮긴다. 왜군들은 조선을 정복하고 나아가 중국, 인도까지 손에 쥐려는 계획을 세우는데, 이들의 행보를 막아선 이가 바로 이순신 장군(박해일)이다. 왜군들이 북진하려면 해상로를 확보해 물자를 보급받아야 하는데 이순신이 이끄는 해군이 이 창구를 완전히 차단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선은 여전히 수세에 몰려 있고, 위기를 돌파할 요량으로 이순신은 새로운 전략을 세운다.
<한산: 용의 출현>은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삼부작 중 <명량>에 이은 두 번째 작품으로 명량해전보다 5년 앞선 한산대첩을 다룬다. 영화는 한산대첩이 벌어지기 전, 왜군과 조선군 양측이 서로 첩자를 보내 적군의 상황을 파악하고 전술을 바꿔 대처하는 시점부터 충실히 묘사한다. 이순신 장군, 왜군 장수 와키자카(변요한)를 비롯한 군사들의 캐릭터 및 관계를 그리며 관객이
[리뷰] 적의 시점으로 바라본 한산대첩. 승리의 쾌감은 배가된다 '한산: 용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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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족의 삶에 예기치 못한 죽음의 잔영이 드리운다. 영화는 이 죽음을 가족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이 세계에서 밤은 언제나 초록으로 빛나고 자신의 초록을 유일한 진실처럼 내보일 뿐이다. 아파트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는 아버지(이태훈)는 지쳐 있고 무력하다. 장애인 활동 보조인으로 일하는 아들 원형(강길우)은 오래된 연인이 있지만 생활고 탓에 결혼하지 못하고 부모 집에 얹혀살고 있다. 집안의 실질적인 뒤치다꺼리를 도맡는 사람은 어머니(김민경)다. 그녀는 쉴 새 없이 움직이지만, 그건 활력이라기보다는 더이상 몸과 떼어낼 수 없게 된 가사노동의 인장과도 같다. <초록밤>에서는 이 세 사람이 오래된 아파트에 함께 살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헐겁게 묶인다. 발걸음이 유독 느리고 무거운 사람들.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밤은 알고 있다.
영화는 세 인물의 수심 가득한 얼굴을 빌려 알 수 없는 삶의 중량에 짓눌려 사는 침침한 현대인의 초상을 그려낸다. “삶을 애도
[리뷰] 익숙한 슬픔을 우회하는 초록의 방식 '초록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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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박진영에겐 ‘첫사랑 기억조작남’ 내지는 ‘남자 수지’ 같은 별명이 있었다. 마치 저렇게 생긴 첫사랑이 있었던 것만 같은, 겪어본 적 없는 노스탤지어마저 조작하는 말간 얼굴은 바쁜 가수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찌감치 배우로 각인될 수 있는 경쟁력이 됐다. 어느덧 소년은 훌쩍 자라 회사원이 됐다. 앳된 얼굴에 굵은 선이 여럿 더해지면서 그의 얼굴엔 풋풋함부터 피로한 직장인까지 다양한 이미지가 스친다.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유미의 세포들2>의 유바비는 세상에 없는 완벽한 ‘남친’이었다가 현실적인 감정 변화를 드러내며 인류 보편의 연애사를 탁월하게 보여준다.
- 웹툰 <유미의 세포들>이 연재될 때 유바비는 논란의 중심에 선 캐릭터였다. 유미(김고은)와 연애 중이면서 다은(신예은)에게 흔들리는 모습이 나올 때 욕을 많이 먹을 거라 예감했을 것이다. (웃음)
= 친누나에게 연락이 왔었다. 너 정말 괜찮겠냐고. (웃음) 하지만 제대로 연기해낸다면 정말 입체
‘유미의 세포들2’ 배우 박진영, “연기로, 음악으로 지금의 나를 채워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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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퍼 무비라는 장르 하나로 전작을 통틀어 4천만명이 넘는 관객의 마음을 훔친 최동훈 감독의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 촬영 현장. 실제 사기꾼들을 취재해서 건져올린 실감나는 대사와 배우들의 근사한 연기 덕에 지금 다시 봐도 재밌는 영화다. 개인적으론 n차 관람의 즐거움을 알게 해준 영화라 기억에 남는다.
[ARCHIVE] 새로운 장르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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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를 쓴 일본의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는 노후에 접어들며 ‘싱글의 노후’ 시리즈를 펴낸 바 있다. <싱글, 행복하면 그만이다> <여자가 말하는 남자 혼자 사는 법>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으로 일본에서는 누적 판매 부수 130만부를 달성했다. “그러나 아직 죽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본의 노인 인구 구분법에 따르면 65살 이상이 전기 고령자, 75살 이상이 후기 고령자인데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건강하게 살다 가장 편안하게 죽는 법>은 후기 고령자가 되기 3년 전에 쓴 책이다. 세대간의 가구 분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아, 부모 세대가 배우자와 사별한 뒤에도 자녀와 합가하기보다는 혼자 사는 비중이 늘고 있다. 고령자와 관련한 풍부한 데이터가 존재하는 일본의 사례를 바탕으로, 고령자의 생활 만족도를 말한다. 노인의 경우 1인 가정의 만족도가 가장 높고 2인 가정의 만족도가 가장 낮은데, 미디어에서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건강하게 살다 가장 편안하게 죽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