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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남성 학자의 미국 유학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매우 총명한 동료 여성 과학자 집에 초대받은 그는, 그녀 파트너의 빼어난 음식 솜씨와 손님 맞는 태도에 감탄한다. “그래, 저렇게 매력있는 여자랑 살려면 남자가 요리 정도는 해야지.” 책을 읽으면서 나는 약간 (분노로) 흥분했다. 요리, 설거지, 청소는 ‘매력적인 여자랑 사는 남자가 할 일’이 아니라 남녀 불문한 인간 생존의 전제인데 남성이 대단한 봉사를 하는 것처럼 묘사해서가, 아니다. 내 주변 경험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여성이 지적으로 뛰어나거나 경제적 능력이 있을수록 더욱 죄스러운 마음으로 남편 기죽지 않도록 가사에 충실해야 한다(<한겨레21> 임경선 칼럼, “일하는 아내들 ‘눈물의 부르스’” 참조).
고정희의 시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와 사는 일인가>는 ‘남자는 사나운 사자’라는 얘기가 아니다. 사자는 움직일 필요없이 가만있어도 된다는 뜻이다. 오로지 사자의 기분과 이익만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한국 남성과 여성부의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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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코끼리 세 마리가 나타나 친구를 납치해가는 꿈을 꿨다. 혹시 태몽이 아닌가 싶어 친구에게 물어보았지만 남편이 한달간 출장 중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며칠 전 서점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독일의 한 꼬마가 코끼리와 함께 찍은 화보집을 보았는데 아무래도 그때의 인상이 무의식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코끼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꿈을 자주, 그것도 스펙터클하게 꾸는 편이다. 납치는 물론이고 살인, 방화, 추적 등 온갖 스릴러영화의 소재들이 내 꿈에 자주 등장한다. 꿈은 게으름, 거드름, 담배처럼 마음만 먹으면 피울 수 있는 나의 일상이 되었다.
꿈은 내게 많은 영감을 준다. 예전엔 꿈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을 본 적이 있다. 노란 표지에,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두께의 그 책의 제목은 <모래시계>였다. 어쩐지 하루키와 어울리지 않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미지가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돌아다녔고 결국 모래시계가 내 소설의 한 페이지를 독점하게
[이창] 꿈을 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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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그곳 공원으로 산보를 갔더니 그야말로 참 해괴한 일이 많았다. 아는 남녀고 모르는 남녀고 모두 허리를 껴안고 무도를 한다. 키스를 한다. 별의별 야릇한 것을 다 한다. 처음 보는 나의 눈, 특히 동방예의지국 사람으로 자처하는 그때 나의 눈에는 그네들이 모두 광귀의 난무가 아니면 야만의 희극으로만 보였다. 그리하여 저것들도 소위 인류인가 하고 혼자 무한한 개탄을 하고 있었다.” 러시아를 둘러본 이광수가 <별건곤>(1930년 1월1일)에 쓴 글 중 일부다. 스물셋 나이에 타국에서 처음 맛본 달콤쌉싸름한 경이를 어찌 쉽게 떨칠 수 있으리오. 인간 말종들이라 치부하고 돌아섰으나 그날 이후 매일 그 공원을 찾았다는 이광수. 아내에게 “옆구리를 한번 꼬집힐” 각오하고 이렇게 털어놓는다. “춤을 출 줄 알았으면 나도 같이 한번 추고 싶은 생각이 나고 정을 준다면 연애도 한번 하고 싶었다”라고.
그로부터 20여년. 1950년대 한국의 인민들은 금단(禁斷)의 키스를 자유롭게
[한국영화 후면비사] 5초 입맞춤에 전국민이 ‘침 꼴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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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다. 하여 ‘시류에 편승하여 대세와 야합한다’라는 굳은 신조를 올 2007년에도 어김없이 유지해볼라구 하는 필자 역시 신년맞이 분위기에 편승, 몇 가지 소망들을 읊조려보고자 한다. 자, 그럼 지금부터 소망기원체로 문체를 전환하고자 하니,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다 함께 ‘오늘도 무사히’적인 자세로 임해주시길 부탁드려 마지않는 바이다.
우선 첫 번째 소망. 지난 한해는 급작스러운 국지성 호우로 침수 피해를 입은 등장인물들이 유난히도 많았사옵니다. <연리지> <도마뱀> <사랑따윈 필요없어> <그해 여름> <허브> 등등의 영화에서 우산도, 우의도, 방수점퍼도, 심지어는 비니루 봉다리 하나조차도 제공받지 못한 채 아무런 맥락도 없이 냅다 쏟아지던 국지성 호우를 온몸으로 맞으며 체온저하와 싸워야 했던 가엾은 배우들의 희생이 올해는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하여주시옵소서. 그들의 희생은 너무나도 무의미한 것이었나이다.
두 번째 소망.
[투덜군 투덜양] 비나이다 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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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이 고통스럽게 추구해온 목표로, 전제주의 사회에서 추구할 때 더더욱 비극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선왕조 500년, 안정을 이룬 조선이지만, 혼란하고 불안한 시국을 맞고 있다. 조선 역사상의 유명한 폭군이면서 희로의 변덕이 잦았던 연산군 시대에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하고 피폐하여 거리로 나서는 이들이 많았다.
<왕의 남자> 중 장생과 공길 두 사람은 조선 제10대 왕인 연산군 시기의 유랑하는 거리 광대패다. 그들은 현실에 대한 이해는커녕 오히려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다. 광대패 수장을 죽이고 한양으로 도망친 그들은 거리에서 한판 놀이를 벌이다 궁중으로 잡혀가게 되고, 나중에 왕의 남자가 된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그들은 서로 약속한다. 내생에서 다시 만나 한판 놀자고. 희망을 내세에 둔다는 건, 의심할 바 없이 지금 생에 대한 절망을 뜻한다. 자유를 갈망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남는 것은 없고 그저 한낱 허무한 꿈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중국 평론가 디에이가 본 <왕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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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투 동막골>
판타지? 메르헨(Mrchen, 독일어로 동화라는 뜻)? 동화와 같은 전쟁영화로 이름 붙이면 될까? 2년 전쯤 개봉한 한국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한국전쟁의 비극성과 심각성을 정면에서 그려내어 힘있는 감동을 끌어냈다면, 이 작품은 그런 슬픈 전쟁의 현실을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풍자 섞인 웃음으로 비극성과 심각성을 호소하는데, 이 부분 또한 훌륭하게 성공하고 있다.
이 마을의 한 일원으로 약간 머리가 모자란, 그래서 더욱 순수하고 순진무구한 소녀의 존재가 키워드가 되고 있는데, 병사들이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서 심각한 현실을 주장해도 소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왜 너희들은 사이좋게 지내지 않나” 하면서 예의 그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들에게 묻는다. 병사들은 서로 으르렁거리면서도 소녀나 마을 사람들에게 점차 감화되어가고 결국엔 일치단결하여 마을을 위한 결사적인 작전에 임하게 된다.
유교정신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한반도이기 때문에 배려와
일본 평론가 니시와키 히데오가 본 <웰컴 투 동막골> <너는 내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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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토머스/ <LA타임스>
곽경택이 연출한 강력하고 액션 넘치는 핵무기 스릴러 <태풍>은 정치적인 편의에 희생된 무구한 사람들이 처한 고난에 관해 격렬하게 항의하는 데까지 진화해가는 영화다. 곽경택은 또한 남한과 북한 사이에 낀 이들의 고통, 그리고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참사를 덮어두려 했던 소비에트연방의 태도에서 드러났던 것처럼 재앙을 덮어두려는 정부의 과거 회귀적인 경향에 관해서도 신랄한 코멘트를 던진다.
의도한 것처럼 분절돼 있는 오프닝 시퀀스 때문에 <태풍>은 처음에는 스토리를 쫓아가기가 어렵고, 몇몇 디테일과 배경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명의 주인공과 그들을 끌어안는 중심 플롯은 점점 제대로 정리되어간다. 도발적인 주제, 한국과 러시아와 타이 세트와 로케이션을 활용한 멋진 프로덕션디자인 모두에서 야심만만하고 인상적인 <태풍>은 먼 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관객에게도 충분한 보상
미국 평론가 케빈 토머스와 로라 컨이 본 <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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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낚싯바늘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좀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김기덕의 <섬>에서 자포자기한 도망자의 식도 안으로 밀어넣어진 한 움큼의 낚싯바늘이라고. 유럽 각지에서 수상을 하며 <섬>은 베니스에선 구토를, 뉴욕에선 졸도를 야기했다. 그 한순간 한국영화에 관한 오해가 생겨났고 폭력은 서구 관객의 마음속에서 단단하게 굳어졌다.
5년을 뛰어넘어보자. 박찬욱의 <올드보이>는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지만, 그 영화가 뒤늦게 미국에서 개봉하던 저녁, 미국 평론가들은 그리 깊은 감명을 받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뉴욕타임스>의 마놀라 다지스는 “파산 상태의, 위축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징후”라고 강도 높게 공격했다. 반면 <뉴욕 옵서버>의 앤드루 새리스는 좀더 저열한 지점에서 시작했다. “생마늘과 썩을 때까지 파묻어둔 배추를 혼합하여 질그릇에 담아 공항에서 기념품이라고 파는, 김치를 먹는 나라에 도대체
영국 평론가 그레이디 핸드릭스가 본 한국영화 속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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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지 않아>를 만든 이송희일의 전작을 만난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의 ‘작가를 만나다’프로그램이 1월에 준비한 작가는 이송희일 감독이다. 이번 상영회는 이송희일 감독의 중·단편 영화 다섯편을 상영하고 이송희일 감독과 관객들의 대화 시간도 주어진다.
옴니버스 프로젝트 <동백꽃>의 세번째 에피소드 <동백아가씨>가 포문을 연다. 죽은 남편의 옛 애인을 찾아가는 한 여자의 발걸음을 포착한 <동백꽃>에는 <가족의 탄생>을 연출한 김태용 감독이 출연해 화제가 됐다. <나랑 자고 싶다고 말해봐>는 사냥을 떠난 부부가 다툼을 벌이고 겪는 치정살인을 다룬다. 원조교제를 소재로 한 <굿로맨스>는 <후회하지 않아>로 유명해진 이영훈이 18살 원규로 출연한다. 실화에 기초한 <Sugar Hill>은 결혼의 압박을 받는 동성애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그려낸다. <언제나 일요일 같
<후회하지 않아> 이송희일 감독의 중단편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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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 6674만 3766명. CGV 영화산업 결산자료에 따르면 2006년의 서울 관객은 5093만 6700명이었고 전국 관객은 1억 6천만명을 넘긴 것으로 나타났다. 1년동안 동원한 전국 관객 1억 6천만명이라는 수치는 한국영화사상 역대 3위에 해당한다. 한국영화의 황금기였던 1968년과 1969년에만 연간 관객 1억 7천만명을 넘겼다. 현재 4813만명으로 추산되는 국내인구를 감안하면, 연간 1인당 관람회수는 3.5회. 최근 7년 동안 평균 1인당 5회의 관람회수를 기록한 미국과 비교할만한 수치다. 국내관객은 1996년 이후 10년 연속으로 증가하고 있다. 2000년에 들어서도 2005년의 7.7%를 제외하면 매년 증가율은 두자리 수 이상이었고 올해의 관객 증가율 또한 14.6%였다. 이러한 활황의 중심에는 한국영화가 있다. 600만을 넘긴 흥행작 네 편은 모조리 한국영화(<괴물>, <왕의 남자>, <타짜>, <투사부일체>)였으며, 전국
한국영화 연간 관객, 1억 6천만 시대 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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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 축제일, 미 남부 뉴올리언스 부두에서 대형 선박 폭파 사건이 일어난다. 민간인 사상자 수가 엄청난 가운데 원인 조사를 나온 수사관 더그 칼린(덴젤 워싱턴)은 해안으로 떠밀려온 시신 하나가 폭파 테러 이전에 죽은 것임을 알아낸다. 피살자를 테러 희생자로 위장시키려는 범인의 계획이 아닐까 짐작하고 칼린은 증거물 확보에 나선다. 테러 사건 공동 조사에 나선 FBI 요원 프리즈와라(발 킬머)는 칼린의 명민함을 믿고 극비 감시실로 데려간다. 그곳은 시간의 직선 축을 접어 사람이 나흘 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 있는 곳이다.
미국의 스티븐 호킹이라 불리는 컬럼비아대 브라이언 그린 박사에 따르면 <데자뷰>의 설정은 언젠가 실현 가능해질지도 모르는 이야기다. 토니 스콧 감독의 말을 빌려 <데자뷰>는 거창한 “사이언스픽션(SF)은 아니고 사이언스팩트(Science Fact)” 정도에 불과한 가벼운 미래 예측에 관한 것이지만, 영화의 비주얼만큼은 그 SF적인 설
눈길을 사로잡는 비주얼 테크닉 <데자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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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드래곤이 자유롭게 살아가던 알레게이지아는 갈바토릭스(존 말코비치)의 등장과 함께 암흑천지가 된다. 난세에는 영웅이 등장하는 것이 중간계의 보이지 않는 헌법. <에라곤>의 영웅은 삼촌 가족과 살던 십대 소년 에라곤(에드 스펠리어스)이다. 그는 야밤에 사냥을 나갔다가 엘프족 아리아(시에나 길로리)가 순간이동으로 날려보낸 드래곤의 알을 발견하게 되고, 깨어난 드래곤 사피라(레이첼 바이스)는 에라곤을 자신의 라이더(Rider)로 지목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영웅이 되어버린 에라곤은 갈바토릭스의 측근인 마법사 더자(로버트 칼라일)의 추격을 받는 한편, 떠돌이 전사 브롬(제레미 아이언스)의 도움을 받으며 반란군의 도시에 도달해야만 한다.
<에라곤>은 (당시 나이로) 15살 미국 소년 크리스토퍼 파울리니의 동명 원작을 각색한 영화다. ‘북미에서만 2500만권이 팔려나간 베스트셀러’라는 광고 문구에 짓눌릴 필요는 없다. <스타워즈>와 <반지의
젊은 장르-오타쿠가 쓴 팬픽션의 영화 <에라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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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노트 라스트네임>은 2006년 11월 국내 개봉한 <데스노트>의 말미를 잇는 후속편이다. 불과 2달 간격으로 잇따라 극장가를 찾은 <데스노트> 시리즈는 기획 단계부터 연속 개봉을 목표로 해 전편과 후편이 분할 제작되었다. ‘데스노트’란 이름을 적어넣는 것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신의 노트. 이를 이용해 범죄자를 처단하는 ‘키라’ 라이토(후지와라 다쓰야)와 그를 추적하는 탐정 L(마쓰야마 겐이치)의 숨바꼭질이 계속되는 가운데, 새로운 데스노트가 등장한다. 2번째 데스노트의 주인이 된 것은 키라의 열렬한 숭배자인 미사(도다 에리카). 그는 방송을 통해 ‘제2의 키라’를 자처하고 나서며 또 다른 살인을 시작한다.
TV드라마처럼 전편의 하이라이트 장면과 데스노트의 룰을 하나둘 복습시키는 오프닝의 품새가 일러주듯 <데스노트 라스트네임>은 애당초 대단한 영화적 야심을 품지 않았다. 2천만부의 판매고를 올리며 두터운 팬층을 확보한 원작 만
원작을 영리하게 비튼 결말 <데스노트 라스트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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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관련 단체에서 방송, 영화에 대해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장애인 심승보씨가 <씨네21> 앞으로 메일 한통을 보내왔다. 정신지체아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허브>의 감독, 배우와 대담을 해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허인무 감독과 주연배우 강혜정은 조심스럽게 참석 의사를 비쳐왔고, 하반신 장애로 휠체어를 타고 있는 심승보씨는 2006년의 마지막 날 일반 시사를 통해 영화를 관람했다. 장애와 비장애, 편견과 차별. 너무나 오랜 시간 닫혀 있었던 대화의 벽이 두 시간의 대담으로 허물어지진 않았겠지만, 질문과 답변, 공감과 아쉬움이 오갔던 자리엔 어느새 은은한 허브향이 감돌고 있었다. 완전하지 않아서 더욱 의미있었던 대화, 그 소통의 순간을 여기에 전한다.
심승보: 지난 12월31일 드림시네마에서 일반 시사로 영화를 봤어요. 일반 관객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별 네개 반 정도? 관객의 반응이 굉장히 좋더라고요. 여기 오기 전에 인터넷에 올라온 시사회 반응들을 살펴봤는데
장애우와 <허브>의 감독·배우와의 대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