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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아파트 계단을 오르는 한 남자(윤제문)의 느리고 초연한 보폭으로부터 시작한다. 홀로 지내고 있는 남자는 외로움이 이미 관성이 되어버린 사람처럼 보인다.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가 괜히 위장이나 버렸다는 핀잔도 그에게는 별 타격이 없다. 곧 떠날 사람처럼 삶의 흔적을 정리하던 그에게 대학 친구 철수의 부고 문자가 도착한다. 남자는 홀린 듯이 철수의 죽음 주변을 배회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철수의 장례식장에 동행할 사람을 찾는 남자의 동선을 따라간다. 우여곡절 끝에 세 사람이 모였다. 남자와 남자를 형이라 부르며 따르는 후배(김태훈), 그리고 남자의 전 연인 은주(김지성)가 함께 차를 타고 광양으로 향하는 로드 무비가 영화의 남은 절반을 차지한다. 이들의 여정은 도착을 지연하려는 것처럼 매끄러운 고속도로를 자꾸만 이탈한다.
이 영화에서 죽음을 언급하는 말들은 가장 시답잖은 농담처럼 가볍게 스쳐 지나간다. 그게 그 말의 무게를 견디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듯이. 또한 이 영화에
[리뷰] '우수', 표류하는 도착, 정처 없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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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을 하던 석우(곽민규)는 고향인 경남 진해로 돌아와 버스 기사로 일한다. 어느 날 그는 터미널에서 낯익은 뒷모습의 누군가가 흘린 MP3 플레이어를 발견하고 유실물 센터에 맡긴다. 유실물 담당자 영애(한선화)는 MP3 플레이어에 관심을 두는 석우에게 주인이 찾으러 올 때까지 보관하게끔 호의를 베푼다. 주인이 잃어버린 것이다, 버린 것이다, 라고 주장하던 석우와 영애는 고장 난 MP3 플레이어를 수리하러 퇴근길마다 뜻하지 않은 동행을 한다. 한편 다른 기사들이 휴게 시간에 탁구를 즐겨도 선뜻 나서지 않았던 석우와 영애는 모종의 계기로 지역 생활체육 탁구 대회에 동반 출전하기로 결심한다.
버렸으면서 잃어버린 척하는 것이라는 영화 속 대사가 알려주듯 작품은 유기와 유실이라는 개념을 전용해 인물간 만남과 이별의 관계를 그린다. 아직껏 이별이 없는 만남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어느 소설 속 문구처럼 인물들은 누군가를 짐짓 분실한 체하거나 의도와 상관없이 잃어버린다. 아버지와
[리뷰] '창밖은 겨울', 이별이 없는 만남을 다시금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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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고등학교 영화과 교사 유빈(박성훈)은 부유한 집안의 여자 친구 선애(김소은)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유빈의 친구 상범(송진우)은 선애가 출장 간 틈을 타 유빈에게 클럽에 가자고 제안한다. 유빈은 선애 몰래 유흥을 즐기던 중 클럽에서 만난 다은(임나영)을 자신의 집에 들인다. 다음날 유빈은 어젯밤의 기억이 없고 휴대폰은 사라진 데다 다은의 흔적이 남은 집에 갑자기 찾아온 선애로 인해 초조하기만 하다. 그러던 중 유빈에게 의문의 전화가 걸려온다. 현금 3300만원을 주지 않으면 어젯밤 유빈의 은밀한 영상을 포함한 유빈의 취미들을 유포하겠다는 것. 유빈은 상범과 함께 자신의 영상을 두고 협박하는 이의 정체를 추적하던 중 7년 전 동일 건에 대해 동일 금액을 위자료로 요구했던 전 여자 친구 가영(정수지)을 떠올린다.
<유포자들>의 서스펜스는 유빈의 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해오는 존재의 정체를 유빈이 직접 추리해나가는 데서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유빈의 숨통을 조여오는 네
[리뷰] '유포자들', 이 시대에 이런 서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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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를 이용한 거짓과 선동, 혐오와 마녀사냥은 서구나 몇몇 선진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필리핀 안티케 지역의 한 가톨릭 고등학교에 다니는 존 덴버(쟌센 막프사오)는 친구들과 축제 때 보여줄 댄스 준비에 한창이다. 연습이 끝나고 하교하려는 존을 붙잡고 미코이는 훔쳐간 아이패드를 내놓으라며 시비를 건다. 억울했던 존은 미코이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다른 친구가 이 장면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존이 아이패드를 훔쳤을 뿐 아니라 친구를 다치게 했다는 내용의 게시글과 함께 페이스북에 올린다. 이 사건은 학생들 사이를 넘어 학부모, 교사, 경찰 등 어른들의 커뮤니티로까지 번지면서 더 큰 오해를 낳고, 존은 심리적 궁지에 몰린다.
영화는 곤경에 빠진 프로타고니스트의 사정에 관한 이야기 구조의 전형을 충실히 따른다. 들불처럼 번지는 SNS의 특질에 기대어 가짜뉴스를 퍼트려 혐오와 증오를 일으키는 사태의 해악을 다룬 것도 새로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는 저인망으로 사람을 훑듯 하는 SNS
[리뷰] '존 덴버 죽이기', 우리 모두 잠재적 피해자이자 가해자, 스스로를 죽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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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뉴욕 퀸스의 공립학교에 다니며 아티스트를 꿈꾸는 6학년 폴 그라프(뱅크스 레페타)는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백인 남자아이다. 하지 말란 소리를 항시 듣는 말썽꾸러기의 일기장에 자주 등장할 법한 인물로는 해결사 어머니(앤 해서웨이)와 엄격한 아버지(제레미 스트롱)와 내 편인 할아버지(앤서니 홉킨스) 그리고 흑인 친구 죠니(제일린 웹)가 있다. 개학 첫날 선생에게 혼나다 안면을 튼 폴과 죠니는 취향을 공유하고 미래를 계획하며 단짝이 되지만 마약을 같이하다 걸린 뒤 폴의 가족이 그를 사립학교에 보내기로 하면서 둘의 우정은 미지근해진다.
<아마겟돈 타임>은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인디와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듯 “상상력을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기억에 의존한” 극히 자전적인 영화다. 자신의 과거에서 예술적·정신적 근간을 찾는 작업이지만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도사리고 불평등이 심화되던 1980년 미국 사회를 분명하게 짚어낸다. 자기 연
[리뷰] '아마겟돈 타임', 상실의 계절과 표정에 드러난 감정을 풍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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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진(서현우)은 태어난 지 21일이 채 안 된 아기의 아빠다. 민간신앙을 유달리 믿는 아내(심은우)는 아기가 있는 집 안을 성역으로 만들고, 위생을 지키듯 부정 타는 것을 철저히 기피한다. 그런 아내가 장례식장에 가겠다는 우진을 말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진은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우진의 전 연인인 세영(류아벨)의 장례식이라는 사실조차 숨긴 채 장례식장의 문턱을 넘는다. 놀랍게도 장례식장에서 우진이 마주한 것은 세영과 얼굴이 똑같은, 그녀의 쌍둥이 언니 예영(류아벨)의 얼굴이다. 이중의 금기를 어긴 우진에게 예정된 것처럼 시련이 닥친다. 아기는 점점 아프고, 예영과 죽은 세영이 겹치는 우진의 환시는 점점 강해진다.
금기를 깬 주인공이 고초를 겪는다는 설정은 공포영화의 클리셰다. 하지만 <세이레>는 저주의 파괴력보다는 우진의 내적 혼돈을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인다. 우진의 예견된 하강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현실과 환상을 뒤섞는 투명한 패치워킹 기술이다.
[리뷰] '세이레', 데이비드 린치의 ‘이레이저 헤드’에서 본 듯한 강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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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윤수(김권후)는 은근히 바쁘다. 노트북 앞에 종일 앉아 있는 것 같으면서도 치매인 어머니를 돌보고 과외 아르바이트도 나가야 한다. 안 풀리는 소설,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어머니, 학습 의욕이 없는 과외 학생과 심기 불편한 학부모에 서서히 짓눌리면서 그는 이명에 시달린다. 치매 환자 가족 모임에서 만난 주희(구자은)와의 한담이 특효약 역할을 하지만 효과는 그때뿐 증상은 갈수록 심해진다. 반면 장례지도사 치원(박종환)은 한가하다. 그러나 몸은 편해도 누가 자신을 조종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마음은 영 불편하다. 일에 금세 적응한 신입 은경(이태경) 역시 세상과 자신이 불화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 종종 멍해진다.
장세경 감독의 <픽션들>은 불안이라는 단일한 관심 주제에 최대한 가닿고자 노력하는 영화다. 특정 사건으로 생긴 한시적 불안이 아닌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 자체를 탐구하려는 뚝심이 돋보인다. 소설가(윤수)가 사는 현실과 소설 속 인물들(치원과 은경)이
[리뷰] '픽션들', 이야기끼리의 균형과 리듬이 맞지 않아 어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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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고 뛰어난 침술 실력을 지닌 경수(류준열)는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으로, 어의 이형익(최무성)의 도움을 받아 입궁하게 된다. 무엇이 됐든 보지도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말아야 하는 궁궐에서 맹인은 비밀이 많은 이들을 안심시키는 존재다.
하지만 경수 또한 남모를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주맹증’이라는 사실. 어두운 곳에서 물체를 인식하기 어려운 야맹증과 달리 주맹증은 빛이 밝게 비출 때 앞을 볼 수 없다. 한마디로 밝은 빛이 내리쬐는 낮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던 경수는 어두운 밤이 되면 앞을 볼 수 있게 된다. 모든 게 무탈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밤, 경수는 소현세자(김성철)가 독살당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아무것도 못 보는 줄로만 알았던 맹인이 유일한 목격자가 된 상황. 문제가 조금씩 악화되면서 용의자로 지목된 경수는 억울한 누명을 벗고 진범을 밝혀내고자 눈이 보이는 밤 사이 혼자만의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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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올빼미', 우직한 상상력이 추동한 뒷심 좋은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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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미즈 신지 프로듀서는 1977년 도에이 애니메이션에 입사한 뒤 <푸른 전설의 슛 극장판>(1994), <은하철도 999>(1999), <김전일 소년의 사건부> 등을 기획한 베테랑 프로듀서다. 1999년부터 <원피스> TV애니메이션과 극장판의 기획을 전담해온 그는 <원피스>의 항해를 책임진 듬직한 조타수라 할 만하다. “우리는 지금 <원피스>라는, 세계 만화 역사상 보기 드문 대하 만화, 대하 애니메이션을 매주 체험하고 있다. <원피스>라는 전설이 만들어지고 있는 시대를 실시간으로 살고 있다고 해도 좋겠다. <원피스>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우리의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원피스>를 향한 모험에 동참해주기 바란다.”
-<원피스 필름 레드>의 흥행을 축하한다. 이 정도 반응을 예상했는지.
=솔직히 이 정도로 열광적일 줄은 몰랐다. 젊은 사람들, 특히
[인터뷰] ‘원피스 필름 레드’ 시미즈 신지 프로듀서, “계속 함께 항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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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구치 고로 감독은 0기 극장판으로 불리는 <원피스>의 첫 OVA <원피스: 쓰러뜨려라! 해적 간자크>(1998)의 연출자다. 이후 <플라네테스> <코드기아스> <밀림의 왕 레오> <리비전즈> <순결의 마리아> 등 원작과 오리지널을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해온 그는 24년 만에 <원피스> 극장판 연출자로 돌아와 <원피스> 극장판 최고의 흥행작을 만들어냈다.
-8월6일 일본에서 개봉한 이후 이틀 만에 흥행수입 22억5천만엔을 돌파했고, 올해 박스오피스 1위는 물론 역대 <원피스> 극장판 중에서도 최고 흥행작에 등극했다.
=팬들이 이번 작품을 좋아해주셔서 정말 다행이다. 작품을 만든 사람으로서 그보다 기쁜 일은 없다. 총괄 프로듀서인 오다 에이치로를 비롯해 모든 스탭과 배우들, 광고와 홍보 및 모든 관계자들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움을 선사하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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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원피스 필름 레드’ 다니구치 고로 감독, “전통적이면서도 이전에 없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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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피스>는 캐릭터 퍼레이드로 불러도 좋을 만큼 수많은 캐릭터들이 다양한 개성과 능력을 자랑한다. 한편으론 25년의 시간이 쌓아온 모든 인물을 다룰 수 없기에 대부분 극장판에서는 아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도록 깨알 같은 팬 서비스를 선보이는 선에서 소화한다. 몰라도 영화를 즐기는 데는 전혀 지장 없지만 아는 만큼 더 즐거워지는, 밀짚모자 해적단 이모저모를 소개한다.
1 선장 · 몽키 D. 루피
밀짚모자 일당의 선장. 어릴 때 은인인 빨간 머리 샹크스에게 받은 밀짚모자가 트레이드마크. 악마의 열매 중 하나인 ‘고무고무 열매’를 먹고 온몸이 고무처럼 자라는 ‘고무인간’이 되어버렸다. 꿈은 해적왕이 되는 것.
2 검사 · 롤로노아 조로
‘해적 사냥의 조로’라는 별명을 가진 삼도류의 검사. 젊어서 목숨을 잃은 소꿉친구 쿠이나와의 약속을 완수하기 위해서 ‘세계 제일의 검호’를 목표로 한다. 항상 수행에 힘쓰고 싸움에서는 강자를 찾는다.
3 항해사 · 나미
해적
‘원피스 필름 레드’ 속 밀짚모자 해적단 동료들의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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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보물 말인가? 원한다면 주마. 어디 찾아봐라! 이 세상의 전부를 그곳에 두고 왔으니!” 처형을 앞둔 해적왕의 유언으로 막을 연 대해적 시대도 어느덧 25년이 넘었다. <드래곤볼> <슬램덩크> <포켓몬스터> <나루토> 등 일본 만화계의 전설로 불릴 만한 작품들은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지만 현재 진행형의 전설을 꼽는다면 그 제일 앞자리는 단연 <원피스>의 몫이다. 1997년 <주간 소년 점프>에서 연재를 개시한 <원피스>는 단행본 102권을 돌파했고 누적 발행부수 4억9천만부(2021년 기준)를 넘어섰다. 1999년부터 시작한 TV애니메이션 역시 1000화(2021년 11월 기준)가 넘게 제작되어 전세계의 사랑을 받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당연히 극장판 애니메이션도 14편이나 나왔는데 <원피스> 극장판은 팬들을 위한 떠들썩한 축제에 가깝다. 간혹 본편의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거나 정사로 자리 잡기
다시 꿈과 모험의 깃발을 올려라: 극장판의 재미를 최대로 끌어올린 ‘원피스 필름 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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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귀환이다. 동명의 인기 만화 <원피스>를 원작으로 한 15번째 극장판 애니메이션 <원피스 필름 레드>는 일본 현지 누적 관객수 1300만명을 돌파하며 <원피스> 극장판 시리즈 사상 역대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며 역사를 다시 쓰는 중이다. 원작가 오다 에이치로 작가가 6년 만에 총괄 프로듀서를 맡고, <원피스>의 첫 OVA(오리지널 비디오 애니메이션)를 연출한 다니구치 고로 감독이 연출한 이번 극장판은 기존 팬들을 만족시키는 건 물론 새로운 관객을 끌어모으며 <원피스> 세계관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일본 내의 선풍적인 인기는 물론 전세계적인 명성에 비해 <원피스> 극장판의 한국 반응은 다소 아쉬웠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신작 <원피스 필름 레드>는 <원피스>의 오랜 팬들과 함께 조금은 낯설게 느낄지도 모를 이들까지 기꺼이 대해적 시대의 피날레에 동참시킬 만한 작품이다.
우리의 항해는 끝나지 않았다: 극장판 역대 최대 흥행 ‘원피스 필름 레드’의 매력 대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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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넷플릭스는 바로 이런 비디오 가게에서 시작되었다. 오프라인 비디오 렌털 비즈니스가 기술 혁신으로 진화해 마침내 오늘날의 OTT 전성시대를 이루어낸 것. 넷플릭스 영화 <20세기 소녀>도 이 추억 돋는 비디오 가게에서 사랑이 시작된다.
[ARCHIVE] 비디오 가게를 기억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