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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베스터 스탤론은 자신의 출세작 <록키>(1976) 이후 꼭 30년 만에, 시리즈 마지막 편인 <록키5>(1990)로부터는 무려 16년이 지나서 <록키 발보아>로 돌아왔다. <록키>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그의 귀환을 바라보는 심정이 복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록키 발보아>는 정확히 <록키>에 대응되는 후일담이다. 그래서 시리즈 2편부터 5편까지를 몰라도 아무 문제가 없지만 1편에 대한 추억이 없다면 내러티브의 여백을 메우기 어렵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간직한 시선과 단지 늙어버린 현재의 모습만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전세계 헤비급 챔피언 록키 발보아(실베스터 스탤론)는 아직도 필라델피아인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있는 영웅이다. 은퇴 뒤 아내 이름을 딴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가게를 찾는 손님들에게 현역 시절 자신의 무용담을 들려주면서 살아가고 있다. 일년 전 암으로 사망한
실베스터 스탤론 노익장 과시용 <록키 발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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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비도 없지만 ‘가오’ 때문에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필제(임창정). 철거 전문 깡패인 그는 어수룩한 똘마니를 데리고 재개발 대상지인 청송마을에 도착한다. 필제는 보스에게 사흘 안에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호언하지만 처음부터 뜻대로, 맘대로 되는 일이 하나없다. 약 오르고, 독 오른 마을 사람들이 덤벼드는 통에 필제는 외려 도망다니기 바쁘다. 어찌 하다보니 임무는 뒷전. 필제는 지구를 수호하겠다는 엉뚱한 꼬맹이들에게 시달리게 되고, 게다가 사내인지 계집인지 모를 복서 명란(하지원)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등 원치 않게 마을 반장 노릇을 하게 된다.
예상하듯이, <1번가의 기적>은 진흙탕 세상에 휩쓸려 살아온 한 남자가 오지나 다름없는 마을에 발을 딛게 되면서 순한 양으로 교화한다는 줄거리다. 굳이 표현하자면 필제는 철거촌으로 떠난 <선생 김봉두>라고 해야 할까. 아이들을 전학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쓰지만 결국 참선생 칭찬을 들었던 봉두처럼, 청송마을에 당도
성선설에 기초한 교훈 코미디극 <1번가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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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치병이라는 소재는 마음 놓고 엉엉 울 수 있는 기회를 관객에게 제공하지만 대개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소재의 진부함을 사려깊게 요리해 보편적인 삶의 문제로 승화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작품이 자주 찾아오는 건 아니다. <태양의 노래>가 선택한 불치병은 색소성건피증(XP)이라는 특이한 병이다. 태양빛을 쬐면 치명적인 신경질환을 앓게 되는 16살의 카오루(유이)는 또래 학생들이 재잘재잘 떠들며 학교를 향할 때 커튼을 닫고 잠을 청한다. 소꿉친구 미사키와 부모의 극진한 배려로 외로움은 덜하지만, 식구들과 둘러앉은 저녁 식탁에서 혼자 아침 식사로 하루를 시작하는 카오루에겐 타인과 함께하는 순간조차도 묘하게 고립감을 자아낸다. 그녀가 애타게 바깥을 갈망하는 순간은 매일 새벽 서핑보드를 들고 집 앞을 지나가는 이름 모를 소년을 훔쳐볼 때다. 밤이 깊어지면 쓸쓸한 거리에 나와 직접 쓴 곡으로 혼자만의 거리 콘서트를 계속하던 어느 날, 그녀의 노래가 짝사랑하는 코지(쓰카모토 다카
인기 가수 유이를 내세운 청춘영화 <태양의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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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민병훈 감독의 말에 따르면, “<벌이 날다> <괜찮아, 울지마>에서 이어진 ‘두려움에 관한 3부작’을 종결하는 작품”이다. 신과 옛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던 신학생 수현은 자신의 고통을 비추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더욱 깊은 두려움에 직면한다. 전작 이후 신작을 내놓기까지 4년이란 시간 동안 민병훈 감독 역시 겹겹의 두려움과 마주해야만 했다. 타지키스탄으로 날아가 일반인을 배우로 기용하여 만들었던 데뷔작 <벌이 날다>는 국내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지만, 그것은 곧 민병훈 감독을 영화제용 영화만 만드는 사람으로 각인시켰다. “정말 속상했다. 나는 절대 영화제를 위해서 영화를 만들려고 한 적이 없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느 감독이 그러겠나. 보편성을 획득하고 싶었고, 때문에 그곳에서 생겨난 아이디어는 그곳에서 찍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개봉을 앞둔 현재의 그는 각고의 시간을 거쳐 삶의 또 다른 의미
삶은 고통이지만, 심각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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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들이 갖는 흔한 편견으로 ‘록은 간지나고 뽕짝은 촌스럽다’. 물론 진정한 음악은 장르에 상관없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복면달호>는 록가수를 최고로 알던 젊은이가 트로트 가수로 이름을 날리는 이야기 속에 저 같은 주제를 담고자 한다. 봉달호(차태현)는 지방 나이트클럽에서 3류 트로트 가수의 무대 반주를 하는 밴드 리더다. 서울의 음반기획사 사장(임채무)이 앨범을 내준다기에 무작정 상경. 좋아라 했는데 사장은 달호를 트로트 가수를 시키려고 한다. 달호는 “뽕 필(feel)”이 있단 이유로 ‘봉필’이란 예명까지 얻어 활동을 시작한다.
사실 <복면달호>는 <복수혈전>을 제작, 연출, 주연까지 겸했던 이경규가 15년 만에 만든 영화란 점 하나만으로 지저분한 취재 경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번에는 그가 제작자로만 역할했음에도, 편견을 쉽게 바꾸지 않는 대중의 속성상 <복면달호>가 제2의 <복수혈전>이 되진 않으려나 예의 주
좋은 노래 한곡이 영화를 살리다 <복면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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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균 감독이 만든 영화 맞아?” 윤제균 감독이 4년간의 공백을 깨고 선보인 <1번가의 기적>에 대한 첫 반응은 놀라움이다. <두사부일체> <색즉시공> <낭만자객> 등으로 한국 코미디영화의 새로운 전기를 열었고, 충무로에 순기능만큼이나 악영향도 있었던 그가 철거민들의 삶을 여유로운 시선으로 그려낸 까닭에 그 놀라움은 지당해 보인다. 강박적이라고까지 느껴졌던 윤제균 영화 특유의 개그와 유머가 많이 사라진 대신 삶에서 우러나오는 넉넉한 웃음과 세상에 대한 질량감있는 관찰이 덧붙여진 이 영화는 감독 자신의 변화 또한 느끼게 한다. 스스로 “이번 작품에서는 신인감독의 마음으로 작품에 임했다”고 말할 정도로 작지 않은 변화를 꾀한 윤제균 감독에게서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1번가의 기적>은 어떻게 떠올린 영화인가.
=철거민들 이야기는 <두사부일체>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 청계천 주변의 철거를 보면서 마음속에 들어왔다.
새 출발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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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뒹굴뒹굴 하면 뭐해요?” <해피선데이: 여걸 식스>에 이어, <뮤직뱅크> MC까지. 배우라는 본업을 잊은 건 아닐까 싶어 물었더니 곧바로 쏘아붙인다. “저 원래 가만있는 거 싫어해요. 뭐라도 끊임없이 해야지.” 기다리기 전에 저지르고 싶어하는 천성 때문만은 아니다. 이소연이 오락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게 된 데는 이유가 또 있다. “<신입사원> <결혼합시다> 등 4편의 드라마에서 연달아 얄미운 악역만 했잖아요. 다른 걸 해보고 싶은데 답답하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제 외모가 도도하고 싸늘해 보이나봐요. 실제로는 망가지고, 말도 못하고, 바보 같고 그런데. 백치미가 좀 있어요. 제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소옥처럼.” 대중에게 좀더 다른 모습으로 다가가고 싶어 선택했지만, 고충도 없지 않았다. “<…여걸 식스>는 같이 진행을 해야 하는데 반응밖에 할 수 없으니까 답답했죠. 존재감이 없으니까. 처음엔 안 맞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복면달호> 배우 이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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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월19일 오전 9시. 미 해병대는 2만2천명의 일본군이 주둔한 이오지마섬에 상륙한다. 5일이면 함락이 가능하다는 윗대가리들의 호언은 틀렸다. 3월26일에야 미군은 이오지마를 함락할 수 있었고, 2만여명이 부상당하고 6천여명이 전사했다. <아버지의 깃발>의 상륙 작전이 압도적인 스펙터클이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톰 스턴의 카메라가 ‘유황섬’(硫黃島)의 언덕으로부터 해변을 굽어보는 순간, ILM이 새겨넣은 수백척의 군함과 수만명의 군인은 신이 만든 디오라마처럼 역설적으로 아름답다. 하지만 잔혹한 스펙터클의 감흥이 영화를 지배하던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는 달리,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서둘러 스펙터클을 끝낸 뒤 한장의 사진 속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수리바치산 정상에 6명의 해병이 성조기를 꽂는 순간. 사진작가 조 로젠탈의 플래시가 작렬한다. 미 정부는 사진 속의 군인 중 전사하지 않은 3명을 본국으로 불러들여 전쟁기금 마련을 위한 홍보활동에 참여시킨다.
이오지마 연작, 그 첫 번째 마스터피스 <아버지의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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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타임즈>는 세 가지 에피스드로 구성된 옴니버스영화다. ‘연애몽’, ‘자유몽’, ‘청춘몽’은 허우샤오시엔 자신의 이전 작품들인 <펑구이에서 온 소년> <해상화> <밀레니엄 맘보>와 각각 조응하며 발전된 것이기도 하지만, 전작들과 굳이 비교하지 않더라도 사랑에 대해 각 에피소드들이 내뿜는 자신만의 빛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작품이다. <쓰리 타임즈>는 ‘최호적시광’(最好的時光)이라는 또 다른 제목을 지니고 있는데, 이에 가장 근접해 있는 작품이 ‘연애몽’이다. 1966년 어느 날 군 입대를 위해 떠나는 날 첸(장첸)은 당구장에서 일하는 하루코에게 사랑의 편지를 건넨다. 그 편지를 받아든 하루코는 이내 그것을 봉인해버리고, 첸의 고백도 관객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 그 속에 가둬지고 만다. 허우샤오시엔은 첸의 고백을 편지 주인인 하루코가 아닌 그녀를 대신해 당구장에서 일하게 된 메이(서기)를 통해서 들려줌으로써 그 사랑의 진짜 임자가
사랑의 세가지 맛 <쓰리 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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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의 진동음이 음산하게 울리는 가운데, 아름다운 여성이 넋나간 얼굴을 하고 알 수 없는 노래를 읊조린다. “거기 털 많은 창녀야, 너랑 하도 심하게 해서 내 거시기가 너무 아파.” 노래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발 아래로 왈칵 양수가 쏟아진다. 헐떡이는 숨소리는 세탁기 소음에 묻히고, 곁에서 다림질을 하던 여자는 무심하게 다가와 바닥을 훔칠 뿐이다. <천국의 나날들>의 오프닝은 이 영화가 결코 제목에 부합하는 순간을 보여주지 않으리란 걸 예고한다. 헝가리영화인 <천국의 나날들>은 2002년 로카르노국제영화제 은표범상 수상을 비롯, 유럽의 각종 영화제의 이목을 끈 작품이다. 이 영화를 통해 서른살의 코냐 먼드루샤 감독은 동구권영화의 대표적인 기대주로 자리잡았다.
방금 감옥에서 나온 피터(토마스 폴가)는 누이 마리카(카타 웨버)가 운영하는 세탁소를 찾는다. 그곳에서 피터는 막 아이를 낳으려는 마야(오르소냐 토스)를 발견한다. 마리카가 태어난 아기를 3천유로에
음울한 살풍경 <천국의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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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이 날다>(1997), <괜찮아, 울지마>(2001)를 만들었던 민병훈 감독은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이 아닌 한국에서 한국 배우들과 세 번째 영화를 완성했다. 수많은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던 첫 장편영화 <벌이 날다>가 명료한 알레고리와 주제의식을 표출하고 있다면, 세 번째 영화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잎 새 한장만 덧씌워져도 무거움을 느끼는 영혼들을 묘사한다. 주인공 수현(서장원)은 빌립보서를 통째로 외우는 모범적인 신학생이지만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한 자신의 선택이 옳은지 회의한다. 수현은 신학교 동기인 강우(이호영)도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짐작하지만 강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수현이 갈등하는 사이 학교를 떠난다. 강우는 자신이 수현에게 던진 “넌 가라면 갈 수 있고 멈추라면 멈출 수 있냐”라는 질문에 대해 행동으로 답을 보여준 것이다. 수현의 갈등 가운데는 수아(이민정)가 있고, 수현은 그녀에 대해서도 갈팡질팡하는
감사와 용서가 넘쳐나는 삶 <포도나무를 베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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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정의 귀여운 아이들을 정말로 위험에 빠뜨리는 자는 누구일까? 신상이 언론에 공개된 미성년 성범죄자일까? 아니면 그의 집 앞에서 밤마다 고성방가하는 전직 경찰일까 그도 아니면 그 ‘위험인물’이 공공장소에 나타나자마자 대피하듯이 아이들을 서둘러 안고 흩어지는 주부들일까? 토드 필드의 <리틀 칠드런>은 이러한 자성적인 질문을 통해 미국 백인 중산층들의 위선과 부조리를 파헤친 웰메이드 작품이다. 우아하고 차분한 미국 소도시의 밝은 풍경과 지적 톤의 내러티브가 조화를 이룬다. 애보기를 하루 일과로 하는 여성 주부와 남성(!) 주부 사이의 사랑 이야기가 기본 흐름이지만, 특유의 유머러스하고 로맨틱한 에피소드는 마을 주민들의 파시즘 분위기, 험악한 공격 성향과 매끄럽게 결합한다.
성범죄 전과자를 조심하라는 삼엄한 마을의 공기는 새라(케이트 윈슬럿)가 다른 주부들과 어울리는 소소한 일상 안에서 잘게 쪼개져서 재현된다. 공원에서 새라와 함께 아이를 돌보는 주부들은 삶의 딜레마를
보수적인 ‘불륜’ 로맨스 <리틀 칠드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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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명제에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동의한다. 그러면서도 한정된 영역들에는 여전히 특권적 지위를 부여해놓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정치적, 경제적 자유와 평등의 원칙들이 적용되지 않는 것을 용인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럽의 왕실, 그중에서 현재까지도 상대적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곳이 영국 왕실이다. <위험한 관계>에서 귀족사회의 추악한 욕망 게임을 파헤치고, <그리프터스>에서 거미줄처럼 엮인 범죄의 연결고리들을 포착했던 스티븐 프리어스는 신작 <더 퀸>을 통해 영국 왕실을 조망한다. 그는 현대인들이 왕실에 접근할 때 품게 되는 일종의 동화 같은 환상은 멀찌감치 치워두고, 지금 살아 숨쉬고 있는 영국 왕실의 ‘사람들’에 렌즈를 들이민다.
이 영화에서 ‘더 퀸’이 지시하는 대상은 1952년 즉위한 이래 50년이 넘도록 여왕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엘리자베스 2세(헬렌 미렌)다. 현재 영국은
소박한 여황의 일상 훔쳐보기 <더 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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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골든글로브 최다부문 수상작인 <드림걸즈>는 25년 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동명의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다. 빌 콘돈은 60년대를 풍미했던 여성 그룹 ‘슈프림스’의 활약상을 영화에 맞게 다시 각색했고 뮤지컬 음악을 맡았던 헨리 크리거는 기존의 곡들에 4개의 곡을 새로 추가했다. 여기에 삼인조 여성 그룹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스타, 비욘세 놀스와 <레이>에서 레이 찰스로 환생했던 제이미 폭스가 가세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드림걸즈>는 ‘뮤지컬영화’다. 그 말은 60년대 미국 쇼 비즈니스계의 명암을 그린 이 영화의 관건이 (아이러니하게도) 얼마나 화려한 쇼를 제공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시카고>의 감옥처럼 특정한 공간적 성격에 기대지 않고 자못 심각했던 당대의 사회적 배경을 자신의 무대로 열어둔다. <시카고>가 최고의 쇼를 보여주기 위한 한편의 쇼였다면, <드림걸즈>는 그 쇼의 어두운
쇼의 어두운면을 보여주는 쇼 <드림걸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