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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질 그만해라.”
한 선배는 만날 때마다 충고한다. 정부부처에서 기자를 상대하는 이다. “신문기자라는 직업은 말이야, 더이상 매력이 없어.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적당한 때에 얼른 집어치우란다. 술이 더 들어가면, 홍보 파트의 별정직 공무원 자리를 알아봐주겠다며 큰소리를 친다. 나이 들면 ‘안정’이 최고란다. 맞는 말이다. 내가 부양하는 4인 가족의 미래를 생각하면 그렇다. 위태로운 외줄 위의 삶이다.
어느 존경받는 원로 언론인은 “요즘 기자들이 월급쟁이처럼 되고 있다”며 개탄한다. 상투적인 훈계로 들려 마땅치 않다. 나는 월급쟁이 기자다. 기자들이 본래 월급쟁이인 걸 어쩌란 말이냐. 기자가 특종에 대한 욕심과 비판정신만을 이슬처럼 먹고 산다는 건 만화 같은 이야기다.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노후가 있다. 월급과 연봉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건 당연하다. 더 중요한 건, 월급쟁이 기자가 아니라면 이 사회에서 기자로 행세하기 힘들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박근혜가 박정희의 후광없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비정규 기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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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점에 갔다가 1973년에 발행된 폴린 카엘의 비평집 <Deeper Into Movies>를 샀다. 지난 2001년 작고한 폴린 카엘은 1968년부터 91년까지 <뉴요커>를 주무대로 비평을 기고했던 평론가로, 예리한 직관과 아이러니에 개인적인 감상을 팍팍 친 신랄한 독설로 유명했던 저널리즘 비평의 큰언니다. 그녀의 글은 아주 명쾌하다. <뉴요커>를 읽을 만한 수준의 독자를 위한 글이기도 하지만, 그들을 지휘하려는 욕심이 배어나는 글이기도 하고, 종종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어디 한번 반박해보시지”라며 도전하는 글이기도 하다. 독자와 지적인 유희와 논쟁을 벌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글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폴린 카엘의 독설은 삼키기가 매우 난감하고, 바로 그 때문에 카엘은 귀찮은 논쟁에 자주 휩싸였다. 지난 1965년, 카엘은 <사운드 오브 뮤직>을 “사람들이 먹고 싶어하도록 당의(糖衣)를 씌워놓은 거
[오픈칼럼] 평론과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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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내 인생의 영화’라는 칼럼명이 유감이다. ‘내 인생’과 ‘영화’ 사이에서 아우성치는 수식어들, 예를 들면 내 인생 ‘최고의’ 영화, 내 인생을 ‘바꾼’ 영화, 내 인생 ‘언제나’ 이 영화와 함께… 등등 때문에 이 칼럼은 클래식 영화 선집이 되기 십상이다. 게다가 감히 인생을 걸고 영화를 이야기하고 나면, 누가 영화를 두고 내 인생을 판단하더라도 할 말이 없다.
일찍이 <죽은 시인의 사회> 단체 관람을 주선했던 선생님께서는 굵은 대자로 30분 동안 내 머리를 때렸다. 조금 전까지 ‘내 인생의 여성주의 영화’를 이야기하던 선배는 육아휴직을 쓰겠다는 말을 꺼내자 금방 눈이 똥그래졌다. 그들을 원망하는 게 아니라, 도서목록이나 영화목록 따위로 그 사람을 말할 수 있다고 믿었던 아둔한 시절을 탓해야 한다. 영화는 누구 인생에도 지표 같은 건 되지 못한다. 특별히 내 인생을 망치거나 말아먹은 영화가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저 스크린을 자기 동일시와 투사의 대
[내 인생의 영화] 예비 신부 매혹시킨 위험한 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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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애드거 앨런 포의 <황금벌레>를 읽고, 한동안 암호문 만드는 재미에 빠져 살았다. 그래봤자 그냥 한글 자모를 숫자로 바꿔놓은 것이었다. 그 뒤 거의 30년이 지나서, 독일 유학 중 포를 읽던 시절의 내 나이 또래의 어린 소녀에게서 암호문을 선물로 받았다. 서양 알파벳을 루나문자 비슷한 문양으로 바꿔놓은 것인데, 아무리 뒤져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다.
범죄와 놀이
미궁에 빠진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라 그런지 <조디악>은 여러모로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킨다. 한국에서 대본을 가져다가 미국에서 리메이크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 최종적 결과가 DNA 검사로 가려지고, 유력한 용의자가 범인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그럼에도 그자가 범인이라는 강한 심증을 남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두 사건에서 범인이 보이는 행태에는 큰 차이가 있다.
화성 연쇄살인의 희생자는 모두 여성들. 이는 범행의 성적 동기를 강하게 시사한다. 반
[진중권의 이매진] 살인 놀이의 기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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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나서 타던 통학버스는 Y역 언저리를 지났다. 버스가 그 앞 신호등에 멈춰 설 때면 홍등가의 불빛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곤 했다. 칸칸이 나누어진 작은 공간들을 기억한다. 불그죽죽한 정육점식 조명등 아래, 백화점 폐점시간 이후의 마네킹처럼 피곤한 표정을 한 여자들이 서 있었다. 나중엔, 정말 내 눈으로 목격한 건지 아니면 혹시 1980년대 드라마에서 본 장면과 착각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질 만큼 전형적인 풍경이었다.
그 뒤로 문학이나 영화에서 수없이 변주되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보아왔다. 나는 언제나 조금쯤 심드렁한 자세였던 것 같다. 그녀들은 그녀들대로의 삶을 살고 있었을 뿐, 내 삶의 크고 작고 번잡하고 우울하고 기쁘고 괴로운 일상들과는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허스>에는 세명의 ‘그녀들’이 나온다. 서로 같고 또 다른 세명의 그 여자들. 유사점이라면 직업이고, 다른 점이라면 나이다. 각각 20대, 30
[냉정과 열정사이] 그녀들의 은밀하고 외로운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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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8월 21일 화요일 오후 2시
장소 대한극장
이 영화
대졸 백수 구창(봉태규)은 학교에서 순진하고 귀여운 여자 후배 아니(정려원)를 보고 한 눈에 반한다. 옛 남자친구를 못 잊는 듯한 아니 곁에서 구창은 점점 그녀와 뭔가 잘 되어가는 듯 느끼지만, 알고 보니 아니는 다중인격자다. 술만 마시면 아니와 정반대로 괴팍하고 사나운 성격의 하니(정려원)가 튀어나와 구창을 못살게 군다. 구창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두 여자를 모두 상대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한다.
말말말
“여배우들의 무대 인사를 보면서 나는 언제 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 꿈을 이룬 것 같다.”- 정려원
“<엽기적인 그녀>와 우리 영화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엽기적인 그녀>는 후반부에 가서 남녀의 애틋한 감정이 나오지만 우리 영화는 처음부터 남녀 커플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관객이 보고 나면 두 영화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될 거다.”- 봉태규
100자평
이 영화가
봉태규, 정려원 매력 발산하는 <두 얼굴의 여친>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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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8월20일 오후2시
장소 필름포럼
이 영화
엄마와 단 둘이 한국에서 건너온 에이미(김지선)의 하루하루는, 말하자면 경계의 날들이다. <방황의 날들>의 원제는 ’In Between Days’. 말이 통하지 않는 학교에서 에이미는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존재이며, 친구 하나 없는 그녀는 어른도 아이도 아닌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데, 그녀가 유일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친구도 애인도 아닌 한국 교포 소년 트란(강태구)이다. 지독하지만 흔한, 혹은 흔해서 지독한 소외의 나날이 계속되고, 트란을 향한 에이미의 서툰 구애는 한발짝 내딛기도 힘들어보인다. 한국과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토론토 한인타운의 서늘한 겨울풍경 속을 헤매는 에이미. 이제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새로운 관계를 향해 어떤 식으로든 나아가야 할 때다. 장편데뷔작인 <방황의 날들>이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베를린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상, 부에노스아이레스국제독립영화제 대상 등을 수상한 김
<방황의 날들> 기자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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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워>에 관한 말은 이미 넘칠 만큼 많이 쏟아졌다. 네티즌의 댓글은 홍수를 이루었다. <디 워>의 흥행 질주가 가시화됐고 그전에 이미 이른바 ‘심빠’라 불리는 추종자들이 생겨났으며 저널은 그 현상을 퍼나르고 분석하느라 부산하다. 그런데 <디 워> 현상을 일으킨 몇 가지 논점과 그에 반박하는 논리들을 보면서 거기서 정작 <디 워>의 실체가 빠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디 워> 논란에 수정과 비판을 가하는 시도들을 접하면서 무언가 다른 해석법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나는 점점 굳히게 됐다. <디 워> 현상을 말할 때 영화의 내용물만 말하는 건 순진하고 불가능한 접속이 되겠지만, 지금의 양상처럼 전적으로 영화 바깥의 현상에만 매달리는 건 더 이상한 일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디 워>는 어떤 영화인가? 그렇게 묻는 대신 ‘심형래’의 <디 워>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라고 원론적으로 묻
[영화읽기] 블록버스터 괴물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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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 “<심슨가족, 더 무비>는 평균치 <심슨 가족> 에피소드를 4배로 늘려놓은 인상이에요”
이동진 “욕심 부리지 않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걸 해냈다는 느낌이에요”
내 이름은 김심순님(김혜리 vermeer@cine21.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써머 탑님(이동진 lifeisntcool@naver.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써머 탑님(이하 써머)의 말: 요즘 진짜 덥네요. 더위도 절정이고, 오늘 이야기할 영화 <관타나모로 가는 길>의 마이클 윈터보텀(winterbottom, 겨울의 밑바닥) 감독에 대한 오마주도 담아 대화명을 지었습니다. 아이돌 그룹 이름 같지 않수? ^^
내 이름은 김심순님(이하 심순)의 말: 네. 해설없이는 절대로 알아차릴 수 없다는 면에서…. -..- <심슨 가족, 더 무비> 이야기는 간단한 퀴즈로 시작할까요? 먼저 난이도 하. <심슨네 가족들> 속 인물들의 손가락 수는?
써머: 엥
[메신저토크] “전 세계 시트콤 작가의 교본이 될 법한 작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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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분들, 이쪽으로 와주세요.” 세종사이버대학교 아트홀 혼에 마련된 <은하해방전선> 촬영장에 들어서자 예상치 못한 환대가 기다리고 있다. “기무라 레이가 걸어오면 자연스럽게 따라서 이동해주시면 됩니다.” 이유없는 환대는 없다고, 이날 기자들에겐 영화에 등장하는 일본의 아이돌 스타 기무라 레이(유형근)를 따라잡는 역할이 맡겨졌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귀엽게 느껴지는 현장 공개 일정. 이날 촬영은 영화감독 영재(임지규)가 캐스팅하고 싶었으나 캐스팅하지 못한 배우 기무라 레이를 DIFF영화제 파티에서 보고 괴로워하는 장면이다. 물론 그 괴로움에는 잘 진행되지 않는 영화와 헤어진 여자친구에 대한 답답한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
단편영화 <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 <졸업영화> 등을 만들었던 윤성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은하해방전선>은 영화를 준비하던 감독 영재가 영화와 사랑에 대한 스트레스로 실어증에 걸린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영재의 여
기자들도 엑스트라로, 알뜰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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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영화를 가지고 노는 타란티노의 빛나는 재능에 대해서 누가 감히 뭐라고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그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타고난 끼를 주체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여전히 정신없는 입담과 예측불허의 전개, 허름한 동네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그 느낌을 고스란히 살려낸 영화적 마술, 그리고 박력 넘치는 카체이스와 엉뚱한 결말이 선사하는 쾌감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단지 로드리게즈의 <플래닛 테러>와 동시상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아아~ 타란티노에게 경배를!
김종철/ 익스트림무비(extmovie.com) 편집장
[전문가 100자평] <데쓰 프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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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스>는 <링> <그루지> <다크 워터> 등 일본산 호러영화에 지속적으로 러브콜을 보내온 할리우드가 구로사와 기요시의 2001년작 <회로>를 모태로 탄생시킨 또 하나의 리메이크다. 최근 아시아영화 수입·배급전문 레이블 ‘드래곤 다이너스티’를 런칭하고 2600억 상당의 아시아영화 펀드를 조성하는 등 적극적으로 아시아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웨인스타인 형제가 장르영화 제작사 디멘션 필름스를 통해 일찌감치 판권을 구매해놓은 작품이기도 하다. 본래 웨스 크레이븐 연출에 커스틴 던스트 주연으로 2002년 제작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마침 <링>의 리메이크가 개봉하면서 아류작의 혐의를 피하기 위해 제작이 취소됐고, 3년 뒤에야 재개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 사이 감독은 광고계 출신인 짐 손제로로 대체되었고, 주인공 자리는 TV시리즈 <베로니카 마스>와 <로스트>로 주목받기 시작한 신예 크리스틴 벨과
할리우드로 간 일본 호러 <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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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박물관에서 야간경비원으로 일하는 마르티노(조르지오 파소티)는 가족이나 친구 없이 오로지 영화를 벗삼아 혼자 지내는 남자다. 업무시간이 되면 그는 박물관을 닫고 자기가 좋아하는 버스터 키튼의 영화를 틀어놓은 채 밤을 지샌다. 마르티노가 일하는 박물관 근처에는 햄버거 가게가 있고, 여기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아만다(프란체스카 이나우디)는 상습 차량절도범인 엔젤(파비오 트로이아노)과 사귄다. 무성의한 남자친구에게 늘 서운한 마음이던 아만다는 우연한 계기에 마르티노와 인연이 닿게 된다. 엔젤과 달리 어리숙하지만 다정한 마르티노에게 아만다는 호감을 느끼고, 애인의 변심을 눈치챈 엔젤은 그때부터 여자친구의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애쓴다. 선택의 문제가 엮인 골치 아픈 삼각관계를 테마로 삼은 <애프터 미드나잇>은 극중 스토리와 전혀 무관한 제3자의 내레이션으로 극을 이끌어간다. 이를 통해 상황의 심각성보다는 예측 불가능한 크고 작은 요소들이 어떻게 인생의 한 단락을 바꿀 수 있는지를
옛 영화들에 대한 러브레터 <애프터 미드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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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료 공장에서 일하다 약지 끝 살점을 조금 잃는 사고를 당한 이리스(올가 큐리렌코)는 공장을 그만두고 조그마한 항구 도시로 향한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발길을 옮기던 그녀가 도착한 곳은 어느 숲속의 표본실. 그곳에는 쓰디쓰거나 애처러운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어떤 물건을 표본으로 만듦으로써 그와 얽힌 기억과 감정을 봉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사연으로 가득하다. 버리기에는 너무도 소중하지만, 간직하기에는 고통스러운 기억에 시달려본 사람들이라면, 기억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기억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영원한 망각을 위한 이 표본실에서 단 한 사람, 이리스만은 누군가의 영원한 기억이 되기를 바란다. 표본실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게 된 이리스는 원장(마크 베르베)으로부터 빨간 구두를 선물받는다. 원장은 이리스에게 자신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구두를 벗지 말 것을 요구하고, 이리스는 자신의 발이 구두에
중독된 관계, 혹은 영원한 사랑 <약지의 표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