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은 세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그녀(들)의 이름은 ‘지나’다. 지나는 미국에서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동양인 여자다. 20대의 지나는 갱단으로부터 도망쳐 로스앤젤레스를 유랑하고(첫 번째 에피소드), 30대의 지나는 꿈을 잃고 라스베이거스의 밤거리를 헤매며(두 번째 에피소드), 40대의 지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알래스카의 혹독하게 추운 벌판에 뛰어든다(세 번째 에피소드). 이처럼 세개의 에피소드는 동일한 이름과 동일한 일로 삶을 버티는 세 여자를 다루고 있지만, 각각의 에피소드는 겹치지 않는다. 이것은 낯선 땅에서 동양인 여자가 매매춘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세대별 이야기일 수도 있고, 한 여자의 일생에 대한 내면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다. <허스>는 그녀(들)의 삶을 성, 인종, 계급적으로 분석하는 대신, 그녀들을 관통하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세 에피소드를 이어주는 끈은 이 여자들의 비루한 삶을 지탱해주는 동시에 그 삶에
세 여자에 대한 이야기 <허스>
-
여자 하나에 남자 둘이 벌이는 삼각관계라면 무엇이 상상될까? 당연히 두 남자 사이의 승강이가 연상되겠지만 한 남자가 게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색다른 삼각형이 등장하는 <영원한 여름>은 퀴어영화이기도 하지만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이르는 동안 우정과 사랑 사이를 고통스럽게 넘나드는 미묘한 관계가 세 남녀 사이에서 펼쳐진다.
감독은 전반부에서 대만의 권위주의적 정치 분위기를 연애 관계에 숨겨진 비극적 씨앗과 결부한다.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은 반장인 캉쩡씽(장예가)에게 문제 학생인 위쇼우헝(장효전)의 ‘특별수호천사’가 되어 바른길로 인도하라고 제안한다. 두 남학생 사이의 관계는 “선생님이 정해준 것”이다. 고등학생 캉쩡싱과 여학생 훼이지아(양기)가 가까워지게 된 계기 또한 경직된 학교 처벌 문화이다.
줄거리는 캉쩡씽이 친구 위쇼우형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아픔에 못 이겨 피폐해지는 과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가 재수생의 처지로 입시
카메라에 함축된 ‘게이적 시선’ <영원한 여름>
-
심형래 감독의 7년 만의 신작 <디워>는 <용가리>(1999)로부터, 혹은 더 멀리 영구아트의 창립작이기도 한 <영구와 공룡 쮸쮸>(1993)로부터 이어지는 심형래식 한국형 SF의 현재형이다. 그것은 또한 <용가리>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심형래가 직접 ‘영구’로 출연한 이전 영화들은 특수효과와 더불어 그 특유의 개그가 반반씩 섞인 구조였다면, 말 그대로 ‘영구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용가리>와 <디워>는 할리우드의 뒤를 좇겠다는 야심찬 목표 아래 블록버스터급 특수효과 영화를 지향하고 있다.
LA에서 벌어진 대형 참사를 취재하던 이든(제이슨 베어)은 정체불명의 비늘을 보고 회상에 잠긴다. 어렸을 적 잭(로버트 포스터)에게 옛 한국의 전설을 들었던 그는 그것이 이무기의 것임을 직감한다. 이무기가 용으로 승천하기 위해서는 여의주를 지닌 처녀를 제물로 삼아야 하는데, 과거 승천에 실패했던 이무기가 다시 LA에
서늘한 구성상의 빈약함 <디 워>
-
과학, 종교, 예술 분야에서 새로움과 화려함이 난만했던 17세기를 뿌연 안개와 질척대는 진흙탕 속에 놓인 혼돈으로 보여주는 영화 <리버틴>은, 자유롭고 방탕했던 시인이자 극작가인 백작 존 윌모트(조니 뎁)의 영락을 따라간다. 도처에 존재하는 타락과 방탕을 둘러싼 먼지 같은 뿌연 기운들은, 결국 파멸에 이를 주인공들의 인생에 대한 암시가 된다. 존(재미있게도 그의 애칭은 배역을 맡은 배우의 이름과 같은 ‘조니’인데)은 셰익스피어가 될 수 있는 영광의 길을 등지고 가차없이 자유로운 난봉꾼(libertine)의 삶을 택한다. 예술가적인 마에스터가 재능있는 여제자를 가르치는 플롯, 그 여제자가 다시금 뮤즈가 되어 예술가의 상상력을 폭주시키는 플롯, 결국에는 여자가 권력 앞에서 사랑과 예술을 배신하는 플롯 등 익숙한 이야기 선들은 다소 식상하지만, 17세기 궁정과 런던의 뒷골목을 앤티크 스웨이드, 제이드그린빛의 희뿌연 푸름으로 연출한 영상 연출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질감의 인상적인
예술가 영화의 익숙한 클리셰 <리버틴>
-
-
괴담이 아니라 기담이다. 혹은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라, 이상한 이야기다. 1942년 경성에 위치한 신식병원을 무대로 하는 세 가지의 기이한 이야기를 엮어낸 <기담>의 제목은 일종의 선언이다. 무리한 공포를 기대하지 말라는, 무섭지 않은 것을 무섭다고 우기지 않겠다는. 세개의 이야기, 세명의 주인공, 세 가지의 비극을 (옴니버스가 아닌) 단일한 시공간 속 하나의 플롯으로 풀어낸 영화의 구조 역시 그 제목과 묘하게 어울린다. 서로 다른 목소리의 내레이션이 각각의 이야기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어줄 뿐 별다른 소제목이나 단락 구분없이 이어지는 영화 <기담>이 가장 세심하게 신경쓴 것은 이야기의 맛이기 때문이다. 학교나 병원 같은 공적 공간에 깃든 이야기들, 여름밤을 하얗게 밝도록 두런두런 이어지던 이야기들, 잠자리에서 더욱 또렷해지던 신기한 이야기들.
“제국주의가 극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안생병원 안에선 태풍의 눈처럼 고요했다.” 얼굴도 보지 못한 정혼자와 결혼을 앞둔
한국형 공포영화의 가능성 <기담>
-
<디 워>를 둘러싸고 말이 많다. 순수하게 영화적 성과를 논하는 것부터 심형래 감독의 학력 위조에 관한 입장까지. 한편의 오락영화일 뿐이니 재미있냐 없냐만 말하면 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디 워>는 이미 하나의 사회현상이 된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이지만 인터넷을 뒤져보니 <디 워>와 심형래 감독을 둘러싼 다양한 입장을 접할 수 있었다. 간략하게 쟁점들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영화에 관한 평가는 ‘뛰어난 컴퓨터그래픽과 다소 허술한 이야기’라는 말로 축약되는 분위기지만 긍정적인 입장과 부정적인 입장 사이의 거리는 멀다. “이무기가 도심에서 벌이는 파괴 행위와 여의주를 둘러싸고 두 마리 이무기가 벌이는 박진감 넘치는 배틀은, 그 어떤 거대괴수영화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장관”이라고 말하는 호평이 있는 반면 “이야기의 구성에 아무런 개연성과 매력이 없다보니 이무기가 떼로 몰려와서 LA를 파괴하는 장면도 게임 신작 오프닝을 보는 정도로만 재미
[편집장이 독자에게] <디 워> 논란
-
“여행을 정말 좋아해요.” “저는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 두 마디 뒤에 그는 “여행을 가면 꼭 친구를 만들어요. 그래서 전세계에 친구가 있죠”라고 이었다. 마치 그게 날마다 꾸는 꿈인 것처럼. 몽상가의 기질을 가진 윤진서는 아니나 다를까,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을 너무나 좋아한다며, 그 영화와 사랑에 빠져서 그걸 몇번이나 봤다고 했다. “그 주인공들이 꼭 저 같았어요! 저도 걔네들 사이에 끼어서 같이 루브르박물관을 막 뛰어다니고 싶었어요!” 소녀처럼 주먹을 꼭 쥔다. 윤진서는 강경옥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공포물 <두사람이다>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소년의 ‘옆집 내 첫사랑’ 같은 이미지로 시작해서 엉뚱하거나 깍쟁이 같은 여자들을 거치고 최근에는 바람 피우는 유부녀를 능청스레 연기해낸 윤진서는 <올드보이> 이후 4년 동안 느리다면 느리게 자기 길을 걸어왔다. <두사람이다>에 나온 것과 동시에 장률 감독의 신작 <이
진서는 한사람이다
-
10대의 성장을 여리지만 아프게 그린 영화 <영원한 여름>은 좋아한단 감정을 마음에 숨기고 청춘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 어릴 적 단짝 친구로 지낸 위샤우헝(장효전)과 강정싱(장예가)이 그리는 우정과 사랑 사이의 애화(哀話)가 성장의 눈물을 자극한다. 남자와 남자의 사정, 속내를 숨긴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떤 사람들일까. <영원한 여름>의 국내 개봉을 맞아 방한한 장효전과 장예가를 만났다. 영화 속 관계에서 비롯된 소문 때문인지 실제로 사귀는 게 아니냐는 말도 많았지만, 이 둘은 좀더 성숙한 우정으로 시끄러운 소문에 답했다. 운동도 함께하고, 영화도 함께 보는 친구 사이. 감독의 주문에 따라 촬영 1달 전부터 ‘사이좋게 지내기’에 돌입한 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있었고, 위쇼우헝을 짝사랑하는 역할의 장예가는 ‘나는 저 남자를 좋아한다’는 주문으로 자신의 감정을 길들였다. 대만에선 하이틴 스타로 인기를 얻고 있는 85년생의 장예가와 좀
대만 청춘들의 여름은 뜨거웠다
-
40살까지 못해본 남자가 세상을 바꾼다? <브루스 올마이티>의 에반 박스터 스티브 카렐이 주연한 영화 <에반 올마이티>는 <브루스 올마이티>의 속편이라기보다 에반 박스터의 스핀오프에 가깝다. 브루스 놀만(짐 캐리)에게 경쟁심을 갖고,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 캐릭터 에반은 2편에서 ‘전능한 권력’을 받고 “세상을 바꾸자”고 외친다. 생방송 뉴스 도중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게 되는 사고(<브루스 올마이티>)에서 보이는 허점도 그대로 이어진다. 방주를 지으라는 어이없는 신의 명령과 동물들에게 둘러싸인 ‘에반 올마이티’는 반듯하고 정확하지만, 동시에 빈틈이 가득한 남자다. 혹은 40살까지 못해봤을 것 같은 어떤 소심함. 성욕에 무심한 남자 앤디(<40살까지 못해본 남자>)의 캐릭터는 가정과 일 사이에서 고전하는 아빠의 무력함으로 고개를 내민다. 아이 둘 딸린 남자에게 무슨 동정이 있겠냐마는 에반 박스터의 결벽증과 이를 배반하는 그의 수많은
슬로우~ 슬로우~ 퀵 퀵!
-
<단박 인터뷰> KBS1/화∼목요일 밤 10시45분/15분
“내복도 빨간색 입습니다.”(홍준표) “하나님에게 등 떠밀려 나온 거지요.”(김홍업) “우리 대통령님은 참 매력있는 분이에요.”(유시민) ‘말말말’류의 코너에 한자리 차지할 법한 말들이 톡톡 튀어나온다. “질문 하나만 더 할게요.” 항변하는 밀고 당김의 긴장, 알싸한 질문의 공격에 드러나는 맨 얼굴의 신선과 충격이 이곳에 있다. 15분, 이슈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인물들에게 달려가 거침없이 질문을 던지는 <단박 인터뷰>는 그 이름 그대로 단박에, 격식을 걷어낸 정공법을 구사한다. 하지만 날을 세우는 뾰족함만이 장기는 아니다. 인터뷰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출연자들의 애창곡 한 가락.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는 어느새 훗훗한 미소로 풀어진다. 프로그램의 얼굴이자, 직접 “들이대는” 역할을 맡은 것은 인터뷰어인 김영선 PD이지만, 카메라 뒤에서 인터뷰의 날실과 씨실을 직조하는 손길은 바로 <낭독의 발견>
[시사교양 PD 3인] 짧고, 굵고, 독하게 묻는다
-
<다큐멘터리 3일> KBS1/목요일 밤 10시/45분
72시간. 뽀얀 흙먼지 속에 말들이 달려나가고, 출산을 앞둔 산모가 생명의 탄생을 숨죽여 기다리며, 시원한 한방을 갈망하는 야구장의 열기가 부글거린다. <다큐멘터리 3일>은 3일이라는 제한된 시간 동안 하나의 공간을 관찰하고 탐색한다는, 특이한 전제 위에 세워진 다큐멘터리다. 매주 한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기 12차례. 바다 위의 병원선부터 노숙인 재활 쉼터까지, 공간이라는 창을 통해 들여다본 <다큐멘터리 3일>에는 시간이라는 칼로 예리하게 잘라낸 한국사회의 단면이 존재한다. 소속된 PD만 7명. 5~6명의 VJ가 한몸이 되어 움직이는 제작현장의 끝에 서 있는 것은 바로 지휘자 역할을 하는 CP(Chief Producer)인 김재연 PD다. “요새 다큐들이 사변적이 됐고, 현장을 떠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스턴트 식품이 아닌 마치 활어처럼 싱싱한, 가공되지 않은 현장의 모습을 그
[시사교양 PD 3인] 72시간동안 떠낸 한국사회의 단면
-
<시대의 초상> EBS/화요일 밤 10시50분/50분
<지식채널e> EBS/월∼금요일 밤 10시40분/5분
다큐멘터리가 말하지 않는다. 아니, 좀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말하는 것은 단 한 사람이다. 당사자의 육성을 타고 진행되는 인물다큐멘터리 <시대의 초상>에는 내레이션이 없다. 흔히 시작부터 끝까지, 화면을 해석하고 흐름을 주도하며 관객의 귓가를 장악하는 목소리가 사라졌다. 빈자리에 들어선 것은 상징적이고 때로는 시(詩)적인 문자들, 간결한 스케치로 이루어진 애니메이션, 그리고 무엇보다 지독히도 은유적인 영상 구성들이다. 첨예한 갈등의 양상이 바둑판의 대국으로, 지워지지 못할 상흔은 살갗 위 촘촘히 모인 성냥의 점화로 드러나는 식이다. 이문열, 권인숙, 김부선, 이용수, 한비야, 신철 등 문학, 예술,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좌와 우, 이념의 스펙트럼을 포괄하는 수많은 얼굴들이 <시대의 초상>에 목소리를 빌려주었다. 총 8명의 PD
[시사교양 PD 3인] 시적으로 그려낸 이 시대의 초상들
-
진지한 고민과 틀을 깨는 형식으로 주목받는 TV 시사교양 프로그램 3편의 PD들
사실,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눈을 즐겁게 해주는 출연진과 달콤한 휴식을 선사하는 오락 프로그램, 드라마들이 쉴새없이 손을 흔드는 와중에 시사교양 프로그램은 타이틀부터 졸음이 올 듯 지루한 인상을 주게 마련이다. 혀에 착 감기는 쌈박함은 없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진한 맛이 우러나는 시사교양 프로그램들, 그중에서도 기존의 틀을 벗고 도약하고자 하는 창작자들의 의지가 읽히는 프로그램 3편을 꼽아봤다. 72시간 동안 하나의 공간을 탐구하는 독특한 형식의 <다큐멘터리 3일>, 내레이션없는 다큐로 해석의 공간을 확장하는 <시대의 초상>, 화제의 인물을 15분이라는 압축적 시간 속에 진솔하게 담아내는 <단박 인터뷰>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프로그램 뒤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창조의 손길, PD 3인을 만났다. 늘 자그마한 크레딧으로만 스쳐지나가야 했던 브라운관의 작가들, 지금
[시사교양 PD 3인] TV가 던지는 이 시대의 화두
-
“<천하장사 마돈나>의 씨름 연습 장면은 부산의 한 폐교에서 찍었다. 이른 봄이라 다들 파카를 껴입고 있었다. 씨름해야 하는 (류)덕환이와 덩치 셋만 빼고 말이다. 언제나 웃통을 벗고서 추위와 싸워야 했던 이들의 필수품은 담요. 담요가 없으면 샅바를 시합용이 아니라 보온용으로 사용했다. 그런 상황을 모르면 씨름판에서 웬 패션쇼 그럴 것이다. 덩치들에겐 모래찜질 장면(아래)만큼 뜨듯한 촬영이 있었을까. 보면 알겠지만, 모래 덮어주는 이해준 감독이나 모래에 눌린 덩치 셋이나 다들 편안한 표정들이다.”
[숨은 스틸 찾기] <천하장사 마돈나> 천하장사 패션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