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탓에 불온서적에 관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는 학교 앞 서점이 온통 사회과학서적으로 가득했고 사상을 선전하고 혁명을 선동하는 책자에 탐닉하는 대학생이 적지 않았다. 국가보안법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라 가방에 넣고 다니다 검문에 걸릴까 가슴이 두근대기도 했다. 시위에 나섰다 경찰에 연행되기라도 하면 운동권 동료들은 재빨리 연행된 친구의 집에 가서 방을 정리했다. 혹시 경찰이 불온서적을 빌미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할까 싶어 문제가 될 만한 책을 모두 치우는 것이다. 나도 한번 연행된 적이 있는데 친구들이 찾아와 책을 치웠고 경찰서에서 돌아왔을 때 그 책들은 모조리 재가 되어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염려한 할머니가 뒷산에 가져가 그 많은 책을 태워버린 것이다. 왜 태웠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느꼈을 붉은색에 대한 공포는 능히 짐작할 만했다.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책이 아닌데 그때는 사는 것만으로 스릴이 있었고 읽는 것이 일
[편집장이 독자에게] 불온 부추기는 시대
-
햇살은 도도하고 바다로부터 오는 바람은 의기양양했다. 버릇대로 찌푸려 있을 고현정의 미간이 절로 그려졌다. 그녀가 출연하는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제)의 오늘 첫 촬영지는 북제주군 한림읍 귀덕리에 자리한 강요배 화백의 작업실이다. 지도를 보니 조금만 더 해안을 따라가면 드라마 <봄날>의 촬영지였던 비양도도 멀지 않다. 애월항과 곽지해수욕장이 오른쪽 어깨 뒤로 스쳐가더니, 소복한 언덕의 품에 치대듯 안긴 작업실이 내려다보인다. 그늘진 평상은 예의 아침 집필 중인 홍상수 감독을 기다리는 스탭들 차지였다. 고현정은 키 작은 나무 밑에 앉아 <해변의 여인>에 이어 공연하는 동갑내기 김태우와 독설로 똑딱똑딱 탁구를 치고 있었다.“넌 왜 내가 하는 영화만 쫓아다니니?” “그녀에게 전해줘. 상대역이 너라고 연기 그만두진 말라고.” 2004년 말 모래시계를 뒤집고 배우로 돌아온 지 3년 반. 이제는 그녀의 나긋한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호통과 재담이 놀랍지 않다
[김혜리가 만난 사람] 배우 고현정
-
김혜준을 영화진흥위원회 전 사무국장이라고만 소개하는 건 충분하지 않다. 1990년대 스크린쿼터감시단, 한국영화연구소 등을 거쳐 최근까지 영화진흥위원회에 몸담았던 그는 ‘한국영화’라는 브랜드를 되살린 주인공 중 한명이다. 다만 그늘에서, 뒤편에서 묵묵히 정책 연구를 담당했기 때문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을 뿐이다. 지난 10년 동안 나왔던 수많은 한국영화 정책 중 그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이 있기나 할까. ‘잃어버린 10년’을 운운하며 “특정 세력의 영화인들이 모두 해쳐먹었다”는 황당한 주장을 펴는 이들이 그를 ‘공공의 적’으로 지목하는 것 또한 무리는 아니다. 영진위 사무국장직을 그만둘 때 그의 아내는 귀농을 권했지만, “아직은…”이라고 망설였던 김혜준은 현재 창조산업연구원이라는 또 다른 둥지를 만들어 한국영화에 정책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아직 미련이 많은가보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할 몫이 이곳에 여전히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한국영화제작가협회, 국회의원 최문순 의
[김혜준] “한파를 견디겠다는 각오는 충분하다”
-
“<울 학교 이티>는 애드리브로 완성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김수로의 얼굴을 보라. 근육이 굉장히 발달돼 있지 않은가. 그 다양한 표정으로 매 장면 애드리브를 시도하고 웃긴 상황을 연출했다. 배우고 스탭이고 그걸 보고 또 웃고. 한번은 백성현과 김수로가 체육관에서 스파링하는 장면을 촬영하는데, 원래 예정된 장면은 체육선생 김수로가 ‘덤벼봐, 덤벼봐’하고 약을 올리다가 제자의 일격에 다운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백성현의 펀치를 맞은 김수로가 쓰러져서 일어나질 않는 거다. 선배 코를 진짜로 때린 줄 알고 백성현이 하얗게 질려 있는데, 김수로가 나중에 슬쩍 일어나더라. 거의 매 장면 이런 식으로 촬영했다고 보면 된다. (웃음)”
[숨은 스틸 찾기] <울 학교 이티> 애드리브의 달인
-
-
<매드 디텍티브>는 정말 걸작이다. <신탐>(神探)이라는 한자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무미신탐>(無味神探, 1995)으로부터 10년 뒤 두기봉은 같은 배우 유청운을 데리고 마치 그 후일담처럼 보이는 형사 이야기를 압도적인 분위기로 완성했다.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를 무한 변형시키면서 다중인격으로 만드는 이 영화는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치열한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역시 그 중심에는 유청운이 있다. 두기봉 스스로 자신의 전환점이라고 말해온 <무미신탐>에서 유청운은 ‘더티 캅’의 전형을 연기했다. 그냥 무표정하게 있어도 험상궂은데 내내 인상을 찡그리고 있으니, 선과 악의 경계가 없다는 관습적인 표현은 그냥 그 얼굴 자체다(<매드 디텍티브>에서 자신의 귀를 도려내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라). 슬레이트 지붕이 여기저기서 흘러내리는 가운데 범죄자와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은 언제나 기가 막힌 명장면을 만들어내는 두기봉의 솜씨를 확인시켜주고
[울트라 마니아] 두기봉이 시가를 피우도록 허락한 배우
-
<판도와 리스>
1968년 감독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상영시간 97분 화면포맷 1.55:1 비아나모픽
음성포맷 DD 2.0 스페인어 자막 한글 출시사 액티버스
화질 ★★★ 음질 ★★★ 부록 없음
<죽음 만세!>
1970년 감독 페르난도 아라발 상영시간 86분 화면포맷 1.66:1 아나모픽
음성포맷 DD 2.0 프랑스어, 스페인어 자막 영어 출시사 컬트에픽스(미국)
화질 ★★★☆ 음질 ★★★ 부록 ★★★
1962년, 페르난도 아라발,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롤랑 토포르는 죽어가는 초현실주의를 극한까지 밀어붙인다는 마음으로 ‘무브망 파니크’를 펼치기 시작한다. 혼란과 무질서를 신봉했던 그들은 희화적인 행동과 초현실적인 예술을 비정형으로 결합하곤 했는데, 해프닝이라 할 그들의 퍼포먼스는 영화 및 기타 장르로 확장되기에 이른다(이런 퍼포먼스를 무브망 파니크라 부른다). 조도로프스키의 <판도와 리스>, 아라발의 <죽음 만세!>, (
순수와 대담성을 증명하는 기록
-
통찰력 있는 수사로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던 '번' 형사는 몇 년 전 ‘미친 형사’ 라는 오명을 안고 경찰직을 떠났다. 한편 숲에서 절도용의자를 쫓던 ‘왕’ 형사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의 동료 ‘치와이’ 만이 무사히 돌아온다. ‘왕’ 형사가 실종된 지 18개월, 도심에서는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더욱이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탄환이 실종된 ‘왕’ 형사의 것으로 밝혀지면서, 사건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사건을 맡게 된 ‘호’ 형사는 신참 시절 자신의 상사였던 ‘번’ 형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호’ 형사는 ‘번’ 형사와 짝을 이뤄 사건을 수사해가면서, 그에게 남다른 능력이 있음을 깨닫는다. 사람 내면의 숨겨진 또 다른 인격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번’ 형사. ‘번’ 형사는 ‘치와이’ 가 7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며, 그의 숨겨진 인격들이 이번 사건의 범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번’ 형사의 독특한 수사 방법에 회의를 느낀 ‘호’ 형사
[개봉작 NEW] <매드 디텍티브>
-
뻔한 것도 그것만 모아놓으면 그 자체가 전설이 된다. 만화 <꽃보다 남자>는 로맨틱멜로의 각종 클리세로만 이루어진 작품이다. 재벌가의 후계자와 가난한 집안의 딸의 만남. 안하무인 남자와 당찬 여성. 집안의 반대와 그에 굴하지 않는 사랑. 매 장면이 뻔뻔할 정도로 상투적이다. 전통적으로 ‘잘 그린’ 순정만화의 그림이 아니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빽빽하게 이루어진 클리셰에 소녀들이 열광했다. ‘캔디’의 당당한 귀환이라 할 가미오 요코의 <꽃보다 남자>(1992~2004년, <마가렛> 연재)는 총 37권의 단행본으로 14개국에 출간, 5800만부라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리며 순정만화계를 제패했다. 원작의 인기에 힘입어 대만판, 일본판 드라마를 거쳐 일본에서 400개 스크린 개봉, 개봉 9주차 530만 관객 동원을 하며 고공행진하고 있는 스크린판 <꽃보다 남자>의 매력 비교도.
1.원작의 충실도
95년 영화판을 제외하면 대만판 ‘꽃보다 남자’
[VS] <꽃보다 남자>계의 지존은 누구일까?
-
제5회 EBS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EIDF 2008, www.eidf.org)이 9월22일부터 28일까지 EBS 방송 채널을 통해 TV 앞의 관객을 맞이한다. ‘차이와 다양성을 넘어(Colors 360°)’를 주제로 총 21개국 43편의 다큐멘터리가 상영되는 이번 페스티벌은 EBS 방송 채널 상영과 EBS Space, 아트하우스 모모에서의 오프라인 상영이 함께 이루어진다.
총상금 2만5천달러가 걸려 있는 경쟁부문 ‘페스티벌 초이스’에서는 12개국 12작품을 만나볼 수 있으며, 아트하우스 모모에서의 상영 뒤 감독과의 대화도 마련되어 있다. ‘페스티벌 초이스’ 외에도 ‘아카데미 수상작 특별전’, ‘거장의 눈’, ‘다큐, 라틴을 열다’, ‘시선, 차이 혹은 다름’, ‘다시 보는 EIDF2007’ 등 총 6개 섹션으로 나뉘어 선보일 예정이다. 특히 제5회 EIDF의 개막작이기도 한 베르너 헤어초크의 <세상 끝과의 조우>를 비롯해 쌍방향 체험 다큐멘터리 <임메모리>
다큐멘터리의 명가에서 차린 진수성찬
-
카메라를 통한 영상이 그 물질적 토대를 넘어서서 정신적 차원으로 개방되는 지점이 있다. 주제와 내러티브와 스타일이 우리의 시각기관에 조화로운 이미지로 수용되도록 카메라를 조율하는 민감한 작업을 하는 촬영은 때때로 우리를 초월적 영역으로 이끈다. 빛의 기술자이자 구도의 예술가로서의 분명한 자의식을 지녔던 촬영감독 유영길이 바로 그러한 경우다. 그의 예술적 집요함에 대한 영화계의 존경과 애정은 실로 각별하다. 유작이 된 <8월의 크리스마스>(1996)의 개봉 직전 세상을 떠난 그의 빈소에는 젊은 영화인들의 추모의 물결이 끊이지 않았고 허진호는 자신의 첫 장편영화를 그의 영전에 바친다는 헌사로 시작했다.
유영길은 1968년 유현목 감독의 <나도 인간이 되련다>를 첫 작품으로 하여 이후 하길종 감독과의 만남을 통해 시대와 예술의 감각을 익혔다. 영화와 현실에 절망할 때엔 보도기자로 현장을 누비며 현대사의 비극적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1980년대 후반 젊고 새로운
‘빛’으로 한국영화를 빛낸 예술가
-
9월20일부터 10월2일까지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일본 다큐멘터리 특별전’이 열린다. 이 프로그램은 ‘아시아 독립영화 교류 상영 및 아시아 다큐멘터리 초정 상영’의 첫 번째 행사로 기획되었다. 총 19편이 상영되는 이번 기획전에는 일본의 거장 다큐멘터리 감독들의 작품이 아니라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젊은 감독들의 작품이 선정되었다. 극영화를 통해 알 수 있었던 동시대 일본과는 또 다른 모습을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상영작은 총 3개의 섹션으로 나뉘는데 각각의 주제는 ‘삶’, ‘예술’, ‘사회’로, 이들 작품 안에 현재의 일본이 거의 다 담겨 있다 할 수 있겠다. 일본 젊은이들의 고민, 당면한 사회문제, 예술가들의 발자취, 세계 속의 일본의 모습, 일본의 미래 전망, 과거사에 대한 성찰 등 다큐멘터리가 기록할 수 있는 무한한 영역을 탐사한 결과들이 모여 있다. ‘삶’을 다루는 첫 번째 섹션에 준비된 6편의 작품은 성장과 죽음, 가족 관계에
다큐로 보는 일본의 삶, 예술 그리고 사회
-
얼마나 펀치를 날렸을까. 주먹 쥔 손에는 아직도 굳은살이 박여 있다. “생긴 건 곱상하게 생겼어도 주먹 하나는 강남에서 최고”인 <울학교 이티>의 백정구를 연기하기 위해 백성현은 6개월 동안 복싱 연습을 했다. “액션스쿨에서 기초체력부터 다져가며 복싱을 배웠어요.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는데 3∼4개월 되니까 스파링하는 형들을 제가 치기 시작하는 거예요.” 때리며 쾌감을 즐기는 것은 잠시, 백성현은 마지막 한방을 위해 계속해서 맞아야만 했다. “무술감독님하고 멋있게 합을 짜서 감독님한테 보여줬더니 ‘너 지금 무술영화 찍냐’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엔 동선만 짜주고 진짜로 때리고 맞고 한 거죠. 시합장면에서 두 번째 다운은 정말로 제가 다운당한 거였어요. 맞는 순간 픽 쓰러졌죠.” 그렇게 고생하며 찍은 장면이지만 막상 스크린에 걸어놓고 보니 아마추어 복싱 티가 많이 나서 아쉬웠다고 한다. 스무살, 그의 연기 욕심은 대단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섯살에 데뷔해 연기 경력만 1
[백성현] 새로운 포트폴리오의 시작
-
-전하! 이렇게 옥체를 알현하게 되어 정말 영광이옵니다.
=그래, 그대가 일하고 있는 ‘영화전’에서 훈민정음으로 주간서책을 만들어 백성들의 교양과 학문을 살찌우고 있다지? 정말 기특하고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 모든 게 다 전하와 같은 성군을 둔 백성들의 홍복입니다. 그러하온데 전하! 여쭐 말씀이 있사옵니다.
=그래, 무엇인고? 허심탄회하게 말해보라.
-소인이 듣자하니 화약국에서 그 위력이 막강한 살상병기를 개발 중이라고 들었사옵니다. 천지를 진동시킬 듯한 폭음과 함께 15발의 화살이 동시에 발사되고 무려 5리가 넘게 날아가 적진을 초토화시키는 실로 귀신같은 무기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옵니까?
=신기전을 말하는 것이로구나. 그래, 내 오래전부터 그것을 완성시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느니. 얼마 전에는 설계도인 총통등록을 명나라 밀정들에게 뺏겨 식겁했느니.
-(식겁…?) 다행히 그 총통등록을 다시 찾아 얼마 전 드디어 신기전을 완성했다고 들었사온데, 전하께서는 인명을
[가상인터뷰] <신기전>의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 세종대왕
-
한국 영화사에서 이정국의 1996년작 <채널 식스나인>는 묻혀진 영화다. 많은 영화평론가들도 이에 대해 이견이 없는 듯하다. 사실 내가 아는 범위에서 이 영화를 본 또 다른 사람은 동료 외신기자클럽 칼럼니스트 스티븐 크레민뿐이다. 그 역시 나처럼 이 영화를 좋아한다. <채널 식스나인>에는 배우 신현준이 제하(전직 보도 기자였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쫓겨난 뒤 해커가 된 인물)로 출연한다. 제하는 검사의 요구로 위험한 신종 컴퓨터 바이러스를 만들어낸 라이벌 해커 석기(홍경인)를 쫓던 중 권력기관이 자신을 배신한 걸 알고는 갑작스레 마음을 바꾼다. 곧 제하와 석기는 평범치 않은 일군의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하게 된다. 섹시한 노출증 환자 조민희(최선미), 게이 프로그래머 양 박사와 임 박사, 그리고 석기의 애견 핸델이 그들이다. 뛰어난 지능에 할 일은 없는 이들은 곧 주요 방송사를 해킹해 9시 뉴스 대신 민희를 한국 최초의 PJ(포르노 자키)로 내세운 포르노 쇼 <
[외신기자클럽] 100분 동안 낄낄댈 전염성 높은 코미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