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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와 악녀. 할리우드 자선활동의 선구자이자 아버지와 의절한 당돌한 여자. 여섯 아이의 엄마와 한 커플을 파경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의심받는 팜므파탈. 이것이 바로 잘 알려진 안젤리나 졸리의 두 얼굴이다. 2008년 9월, 졸리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실종된 아이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 극한의 모성을 보여줬던 <체인질링>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었고, 그녀의 곁에는 갓 태어난 쌍둥이 두명이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잠옷 바람으로 가볍게 훑어본 시나리오 한편이 졸리의 눈을 사로잡았다. 러시아 스파이로 오인받는 여자 CIA 요원이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 고군분투한다. 그 여자는 12층 빌딩의 외벽을 기어오를 줄 알아야 하며, 다리에서 맨몸으로 뛰어내려야 하고, 20층 높이의 외길 위를 맨발로 걸어야 한다. 시나리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안젤리나 졸리는 당장 출연을 결정했다. <솔트>의 시나리오가 잠자고 있던 악녀의 아드레날린을 일깨우는 순간이었다.
[안젤리나 졸리] ‘유혹’의 그림자를 지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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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바로 거기서 선언의 중요성이 비롯된다. 나는 그 사람에게서 그의 감정의 공식적인 표현을 끝없이 빼앗으려 하며, 또 내 편에서도 그를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 지껄인다. (중략) 무언가가 알려지려면 말해져야 하고, 그리고 그것은 일단 말해진 이상 일시적이나마 진실이 되는 것이다.-롤랑 바르트
할걸~ 말할걸~.-밴드 백두산의 <말할걸>
지지난번 칼럼에서 ‘경제적, 물리적으로 솔직한 연출의도’를 얘기해보면 어떨까 하는 형이하학적인 제안을 한 뒤,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을 보았다. 내가 이리저리 우회하며 디민 이야기를 변학도 캐릭터는 더 압축담백하게 전하고 있었다. “저는 인생의 목표가 뚜렷해요, 아무래도 현감이면 그 고을 웬만한 여자들이랑은 다 잘 텐데….” 비슷한 소회를 나 역시 온라인에서 감상 가능한 콩트로 만들어 뿌린 적은 있지만 어쨌든 공무원 신분의 조상님이 더 솔직하셨다. 유 윈.
지난 칼럼에서는 이 원고의 유물론적인 용도에 관해서 재잘거렸었다
[윤성호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마법의 타자기가 생긴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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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표정을 고집하면 역설적으로 주목되는 게 심리다. 감정이 배제된 듯한 메마른 표면은 오히려 불안한 내면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우리의 가면 때문이다. 문학이론가 피터 브룩스에 따르면 이런 표면과 내면의 역설적 관계가 멜로드라마의 기제다. 발자크의 소설에서처럼 작가는 사물의 표면 기술에 자신의 풍부한 어휘력을 총동원하고 있지만, 사실 발자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찬란한 언어로 장식된 표면 아래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숨어 있는 그 무엇을 브룩스는 ‘모럴 오컬트’(moral occult)라고 정의했다. 마치 밀교적인 태도에서 볼 수 있는 윤리적 입장의 맹목적 지지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밖으로는 가치판단이 배제된 표피적인 사건을 풀어놓는 척하지만, 알고 보면 윤리적 테마를 강조하는 게 발자크 소설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모럴 오컬트’의 멜로드라마
미카엘 하네케의 <하얀 리본>은 모럴 오컬트의 멜로드라마다. 윤리적 테마를 숨기고, 그 테마를 내포하는 표면을 무심한 듯
[영화읽기] 아이들에 대한 시각이 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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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반복되는 대사 하나. “What’s the worst that could happen?” 영화에서는 그때그때 다르게 번역되었던 거 같은데, 내가 기억하는 번역은 영화의 엔딩 부분이다. 제약회사 사장이 엘사(사라 폴리)에게 계약에 대한 의중을 물었을 때, 드렌의 아이를 임신한 엘사는 이 대사로 답하는데, 자막에는 “갈 데까지 갔으니까요”라고 표현되었다. 난 이 번역이 참 좋았다. 왜냐하면 <스플라이스>는 이 자막 말마따나 더 나빠질 수 없을 때까지 가보는 영화니까 말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금기를 넘나드는 자극적인 설정이 난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스플라이스>는 선정적 장면의 전시나 자극적 설정에 매몰된 영화가 아니다. 그것이 다른 후속편을 암시하는 듯한 영화 엔딩을 보며 연작을 기다리는 입장에 서기로 결정한 이유이자 <스플라이스>에 대한 (다소 늦은) 평론을 쓰는 이유이다.
무섭지만 아름다운 이끌림
드렌(델핀 샤네크)을 더이상
[전영객잔] 금기를 깬 주체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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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라에나 외국인들이 먹기 힘들어 하는 음식이 있다. 필리핀에는 ‘발롯’이라는 게 있는데, 그놈의 정체는 부화하다가 만 반(半)병아리 상태의 달걀을 삶은 것이다. 어제 드디어 길바닥에서 놈을 먹어볼 기회를 가졌다. 먹는 법은 간단하다. 달걀 꼭대기를 깨서 구멍을 내고, 그리로 소금과 소스를 넣어 먼저 액즙을 마신 뒤, 이어서 껍질을 까서 나머지 고형물을 씹어 먹는 것. 먹다보면 씹기 힘든 딱딱한 부분과 마주치게 되는데, 내 생각에는 아마도 태반의 역할을 하는 부위인 것 같다. 맛은 사실 삶은 달걀과 거의 비슷하나, 씹는 느낌이 다르다.
현지인들은 발롯이 삶은 달갈보다 영양가가 더 높다고 말한다. 학교에서 질량 보존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배운터라 이 말이 썩 믿기지는 않으나, 누가 아는가? 실제로 그럴지. 질량과 에너지는 동일해도 장에서 소화되는 정도에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내가 먹었던 것은 부화 18일째 된 발롯이다. 초보자는 대개 이걸로 시작한다.
[진중권의 아이콘] 생성의 존재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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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LR의 밀레니엄을 맞이했던 과거에 어느 술자리에서 A씨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혹시 날개없는 선풍기를 본 적이 있나?” A씨의 대답은 간결했다. “예끼 이 사람! 정신 나갔나?” 2010년 오늘 이 시점에서 과거 A씨에게 던졌던 질문은 정신 없는 사람의 그것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사이클론 방식의 성능 좋은 청소기로 유명한 다이슨에서 날개가 없는 선풍기를 출시했기 때문. 정식 명칭은 에어 멀티플라이어(Air Multiplier).
아이들 손가락 다칠 걱정 뚝
에어 멀티플라이어는 ‘선풍기에 꼭 날개가 있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발상의 역전환이 거둔 혁신이라 할 수 있다. 동그란 원형 프레임(Airfoil) 아래로 원통 지지대를 가지고 있는 모습은 전혀 선풍기로 생각되지 않는다. 하물며 이곳에서 바람이 나온다니 실로 놀랍다. 이렇게 날개가 없는 선풍기도 놀랍지만 청소기를 만들던 회사에서 선풍기를 만들었다는 사실도 놀랍기는 마찬가지. 그러나 그리 생뚱맞지 않
[디지털] 들어는 봤니? 날개 없는 선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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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 노부히로 감독의 촉수는 늘 관계를 향해 있다. 부티크에서 일하는 여자와 매사가 잘 안 풀리는 남자의 동거생활을 통해 일상의 미묘한 균열을 포착했고(<M/Other>(1999)), 히로시마라는 도시와 감독의 내면의 관계가 충돌하면서 파생되는 감정을 다루기도 했다(<응시 혹은 2002년 히로시마>(2000), <H스토리>(2001)). <퍼펙트 커플> 이후 4년 만에 돌아온 <유키와 니나> 역시 ‘타인과의 관계’를 다룬 영화다. 어른들의 세계를 그린 전작과 달리 처음으로 아이들의 세계에 현미경을 들이댔다. 그리고 배우 이폴리트 지라르도와 함께 공동연출한 것도 차이라면 차이다. 영화는 부모가 이혼하면서 절친 니나(아리엘 무텔)와 헤어지게 된 유키(노에 삼피)의 심리를 섬세하게 따라간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 개막작인 <유키와 니나>는 일본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가 꼽은 ‘2009년 올해의 영화 베스트5’에 선
“리얼리티를, 인물과 사회의 관계를 다시 고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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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개봉관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해외에서도 그러한 추세는 다를 바 없다. 타이의 경우, 방콕 시내 한복판인 시암 광장에 3개의 대형 개봉관이 있었다. 스칼라, 리도, 그리고 시암극장이 그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과거 종로의 서울극장, 단성사, 피카디리극장이 몰려 있던 종로나 부영, 부산, 국도, 제일극장이 몰려 있던 부산의 남포동과 유사한 곳이다. 그런데, 지난 5월19일 유혈시위사태 도중에 시암극장이 불에 타 완전히 사라졌다. 많은 영화인들과 영화팬들이 이를 슬퍼하고 있다. 시암극장이 타이영화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800석 규모의 시암극장은 1966년에 개관했다. 리도는 1968년, 가장 규모가 큰 1천석 규모의 스칼라는 1969년에 개관했다.
이들 세 극장은 멀티플렉스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영화팬들의 성지와도 같았다. 각기 성격도 달랐다. 스칼라는 주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시암은 타이영화를 개봉했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자 아핏차퐁
[김지석의 시네마나우] 굿바이, 시네마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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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를 처음 밟았던 20년쯤 전 어느 날의 감상은 딱 한마디로 요약 가능했다. “한국 같지 않다.” 공항을 벗어나면서 불어오던 후텁지근한 남쪽 바닷바람, 비현실적으로 우뚝 솟아 있던 야자수. 하지만 제주 곳곳을 잇는 도로들에는 한국적인, 극히 한국 현대사적인 사연들이 묻혀 있곤 했다. 제주가 겪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복기해보면, 독립을 외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다.
그리고 올레가 떴다. 최근 몇년간 부쩍 많은 사람들이 제주로 휴가를 떠난 건 해외여행이 불가할 만큼 경기가 안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제주에 올레가 있기 때문이었다. 걷고 싶다고, 다리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육체적 고단함을 느끼고 그 안에서 살아 있고 싶다고, 많이들 떠났다. 사람이 너무 많을 때를 제외하고는 올레길에 대한 불평 한마디 듣지 못했다. 서론이 길었는데, 그런 이유로, 지난해에는 산티아고 책 붐이었다면 올해는 제주도 책 붐이다. 제주도에서 누구는 걷고, 누구는 자장면을 먹고, 누구는 수영을 한다. 원하는 모든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제주 여행 3색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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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의 나일강>에는 작가 플로베르가 엄마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돼 있다. 이 위대한 <보바리 부인>의 작가는 무려 미라의 밀수에 대해서 고민을 털어놓는다. “프랑스로 미라를 가져가는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그게 어려울 것 같아요. 이제 미라를 외국으로 가져가는 것이 금지되었거든요, 카이로까지 밀수품으로 빼내서 알렉산드리아에서 선적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요.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이 드는 일이 될 테니까요.” 플로베르의 제국주의적 마음에 분노하기 전에 이게 1850년에 쓴 편지라는 걸 기억하자. <뒤마의 볼가강> <모파상의 시칠리아> <폴 아당의 리우데자네이로> <라울 파방의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 등으로 구성된 ‘작가가 사랑한 도시’는 지금은 잊혀진 시대에 이국으로의 모험을 감행한 작가들의 여행기를 모아놓은 시리즈다.
가장 재미있는 책을 하나만 고르라면 <라울 파방의 1896년 제1회
[도서] 그 도시를 사랑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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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는 멜로디와 가사다. 재지한 감성을 담은 <마성의 여인>이나 산뜻한 보사노바 팝 <사랑은 한 잔의 소주>, 감상적인 멜로디가 잔잔한 <잘 지내> 등은 윤종신이나 김동률, 루시드 폴의 음악(이른바 ‘고급 가요’)을 연상시킬 만큼 명징하다. 여기에 “니가 어떻든 난 내가 소중해”라든가 “답 없는 인생, 어차피 모두 같은 점수, 오늘 하루 행복이 숙제”라든가 “아무 대답 없어도 오늘밤 우린 연인이어라”라든가 “그 시절은 덧없이 갔고 난 어느새 이 나이”라든가 “철없는 남자의 순정이 아깝다, 솔직히 네게 준 선물도 아까웠어”라든가 “인사도 없이 떠나가버린 널 난 이미 세번 용서했으니” 같은 가사도 예사롭지 않다. 요컨대 이것은 어른의 일기장이다.
예의를 지키고 제대로 책임을 지는 것, 이를테면 자기가 싼 똥은 자신이 치우는 게 어른이다. <<미성년연애사>>는 연애 후일담이지만 그게 삶의 태도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인
[추천음반] <미성년 연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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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희 음악웹진 ‘백비트’ 편집인 ★★★★
레이디 가가나 케이티 페리 같은 거물급 신예의 등장에 현역 여가수들은 분명 불편한 긴장을 겪고 있을 것이다. 카일리 미노그는 흐름의 변화에 동요하지 않고 고차원의 명품급 클럽튠을 완성하는 일에만 정진하는 부동의 여신이다. 캘빈 해리스, 킨, 시저 시스터스 같은 이상적인 동업자가 부여한 강화된 비트와 선율, 도무지 마모될 줄 모르는 청명한 울림의 목소리로 댄스 플로어를 다시 점령한다.
차우진 음악평론가 ★★★
듣기 좋은 팝, 지독하게 관습적인 디스코다. 너무 뻔해서 쉽게 질린다는 불평도 있겠지만 애초에 주류 팝은 보수적이니 그걸로 비판하는 건 부당하다. 관건은 충실한 재현이다. 그 점에서 ≪Aphrodite≫는 만족스럽다. 더없이 카일리 미노그다운 앨범이다.
김학선 음악웹진 ‘보다’ 편집장 ★★★☆
앨범의 첫곡이자 첫 싱글인 < All The Lovers >를 듣는 순간 예감할 수 있었다. 카일리 Being 카
[hot tracks] 댄스 플로어 여신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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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는(?) 여름방학이다. 7월 말부터 8월까지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가 풍성하다. 티켓 가격도 물론 청소년의 높이에 맞췄다. 여기에 해설까지 곁들여 교육의 기능까지 더했다. 우리 아이들, 학원가랴 과외받으랴 시간도 마음도 쫓기지만 잠시 공연장에서 휴식을 즐겨보자.
국내 청소년 음악회의 선두주자인 예술의전당은 이 기간, 청소년 세상이 된다. 7월17일 <청소년 음악회>를 시작으로, <제1회 여름방학 팡팡 청소년 해설음악회>(7월24일), <교과서에 나오는 클래식음악 특별공연>(7월25일), <금난새 청소년 해설음악회>(7월28일), < JK앙상블과 함께하는 청소년을 위한 해설음악회 >(7월31일)가 이어진다. 8월 한달간은 매주 주말 <청소년을 위한 교향악축제 스페셜> 시리즈가 무대에 오른다(문의: 02-580-1300).
7월30일과 31일은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의 청소년 음악회 <서머 클래식>이 세종문화회
[공연] 여름방학엔 클래식으로 놀멍 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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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9일~9월19일/16번지 갤러리
02-722-3503
진기종은 1981년생 설치작가다. 이제 막 30대에 접어든 젊은 아티스트인 그가 주목받는 이유는 깊고 무거운 주제를 단순하고 재치있게 풀어내는 재능 때문이다. 그는 디오라마(배경 위에 모형을 설치해 하나의 장면을 만든 것)를 즐겨 만드는데, 모형의 작은 홈 하나까지 정밀하고 꼼꼼하게 제작하는 것이 진기종표 디오라마의 매력이다. 그의 개인전이 8월 중순부터 종로구 사간동의 16번지 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개인전에서 눈여겨볼 작품은 최근 대두되고 있는 환경문제를 다룬 디오라마다. 푸른 바다로 전면이 둘러싸인 황무지 위에는 할리우드 간판이 걸려 있다. 어쩐지 이 작품은 할리우드가 아니라, 한국에서 주목해야 할 것 같은데….
[전시] 진기종 개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