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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러브>는 너무도 투명해서 감춰진 이면이 없는 표면이 전부인 영화처럼 보인다. 더구나 실화를 소재로 한다는 사실은 영화를 더욱 투명한 것으로 보이게끔 하는 착시현상을 낳는다. 하지만 실화 소재의 영화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실화 자체가 아니라 그에 생기를 불어넣는 허구의 차원이다. 대체로 너무 투명한 영화들은 비평적 관심을 끌기 힘들지만, <글러브>는 한없이 투명하게 보이는 허구의 차원이 이전의 영화적 흐름들로부터 연속과 단절의 궤적을 그린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 물론 그것이 단절일지 더 이전의 것의 회귀일지 아직은 선명하지 않다. 오류의 가능성을 무릅쓴(혹은 오류이기를 바라는) 한국영화에 대한 전망.
강우석의 영화 연출은 투명함과 투박함의 경계에 위치하곤 한다. 그의 영화에서 투명성(또는 투박함)은 인물의 자기주장(그것은 주로 강우석의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의 표명이기도 하다)을 담아내는 방식, 또는 그러한 인물과 관객의 관계를 설정
[전영객잔] 성장, 퇴행을 위한 알리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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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에는 영화의 결말에 대한 묘사가 담겨 있습니다.
“그게 빛이든 안개든, 필름에 담긴 이미지는 우리가 죽음에 대해 거둔 유일한 승리다. 영화는 삶의 연장이다. 영화에서 삶은 죽음보다 훨씬 더 지배적이다. 우리는 우리의 유령들과 함께 영원히 살아간다.”(장 클로드 카리에르)
수많은 영화들이 마음의 궤적과 파장을 스크린에 담아내기 위해 애쓴다. 새로 찾아온 감정이 삶의 행로 자체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전까지 누적된 기나긴 시간 전체와 겨뤄서 이겨야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영화들은 순간이 세월을 삼키는 모습을 너무나 쉽게 가정하고 그냥 넘어간다. 하지만 루카 구아다니노의 <아이 엠 러브>는 그 순간의 에너지와 방향성을 창의적이고도 폭발적인 방식으로 제시하고 묘사함으로써 관객을 납득시킨다. 이 영화의 숏과 신은 종종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 고전적이고 우아하면서 야단스러울 정도로 감각적인 영화를 보면서 무시로 일렁거렸던 내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이 글을
[영화읽기] 행복합니다, 살아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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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리라는 여성의 인생 곡절을 담은 이 영화의 원제는 ‘피파 리의 은밀한 삶’(private lives)이다. 피파 리(로빈 라이트 펜)의 삶은 평범한 여자의 일생과 거리가 있다. 영화는 출판계 거물인 허브(앨런 아킨)와 피파 리 부부가 코네티컷의 한적한 주택가로 이사 온 첫날 저녁 식탁에서 시작된다. 지인 커플을 초대해 저녁 식사를 대접하는 피파 리는 아름답고 지적이며 정숙한 현모양처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어지는 과거 회상을 통해 관객은 그런 겉모습만이 그녀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눈치챌 수 있다. 남편 허브를 만나기 전까지 피파 리는 혼돈과 방황으로 점철된 성장기를 보낸다. 언제나 에너지가 넘쳤던 엄마가 약물중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16살의 피파 리는 엄마와 갈등 끝에 가출한다. 이후 피파 리는 닥치는 대로 약물을 복용하고 비슷한 또래와 어울려 시간을 허비하다 우연히 허브를 만나게 된다. 이미 출판업자로 명성을 얻은 중년의 허브는 피파 리의 교육자이자 보호자이길 자처하
특별한 삶을 구경하는 흥미로움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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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에서는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의 김석윤 감독으로 통하지만 방송계에서 그는 김석윤 프로듀서다.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KBS 방송국 주변을 잠시 거닐 때 지나는 사람마다 그를 향해 반갑게 인사하는 걸 보니 그는 확실히 이 분야의 오래된 사람이다. 그는 각종 쇼 프로그램과 드라마 등을 연출해왔다. 영화인이면서 방송인, 그러니까 이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그가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건 자신이 연출한 시트콤 드라마 <올드미스 다이어리>가 큰 인연이 됐다. 같은 연출자가 드라마를 만들고 나서 동명의 제목으로 내처 극장판까지 만들었는데, 국내에서 그런 시도 자체가 전무후무했을 뿐만 아니라 개봉 당시 이 영화는 흥행성적과 무관하게 무시하지 못할 소수의 골수팬을 낳았다. 때문에 언젠가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가 돌아온다면 ‘올미다’와 같은 종류의 것으로 올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그는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자
[김석윤] 방송에서 영화까지 신명나는 오락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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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뉴욕의 재팬 소사이어티는 사부 감독의 초기 코미디 다섯편을 상영한다. 1990년대 후반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이 일본 감독의 포복절도할 코미디영화들을 상영했고, 그 영화들을 보려고 들뜬 마음으로 기다렸던 것을 기억한다. 돌아보면 1990년대 후반은 베를린영화제의 황금기였다. 그때 베를린은 이와이 순지 감독의 초기영화들, 예를 들어 로맨스영화 <언두>와 로드무비 <피크닉>을 연이어 상영했었다. 또 곤 사토시 감독의 <퍼펙트 블루>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도 상영했었다.
베를린영화제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소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영화제가 한국영화의 국제적 소개에 기여한 것은 그것만은 아니다. 한국영화의 국제적 비상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에너지에 넘친 한국영화를 소개한 베를린영화제에 빚진 바 있으며, 베를린영화제는 한국영화 발견의 장소로 여겨졌다. 그렇게 베를린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영화들이 여균동 감독의 <세상 밖으로>, 이민용
[외신기자클럽] 게으르고 나태한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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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 <귀주 이야기> 같은 공리의 초기작은 그녀의 이미지를 오랫동안 규정해왔다. <붉은 수수밭>의 추알은 돈 많은 영감에게 팔려가듯 시집가면서도, 가마 끄는 젊은 남자의 섹시한 등판을 흘끗흘끗 쳐다본다. <국두>의 국두는 늙은 남편의 염색공장에서 남편의 조카와 사랑을 나눈다. <홍등>의 송련은 돈 많은 남자의 넷째 첩이 되는데, 가풍이라며 반복되는 봉건적 관습에 미쳐버린다. <귀주 이야기>의 귀주는 정의란 무엇인가, 몸소 보여준다. 공리는 단 한번도 가녀린 소녀의 이미지를 어필한 적이 없다. <게이샤의 추억> 이후 공리는 <마이애미 바이스> <한니발 라이징> 등에 출연하며 할리우드에 안착한다(물론 그전부터 공리는 세계적인 배우였다). <상하이>에선 존 쿠색, 주윤발, 와타나베 겐과 호흡을 맞춘다. 삼합회 보스 앤소니(주윤발)의
[now & then] 공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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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상남 선수. 어렵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 불거진 폭력사태에 대해서….
=니미 뽕이다. 자꾸 그런 불편한 얘기 꺼내지 마라. 형이 돈이 없다고 해서 패고, 말 안 듣는다고 해서 패고, 어떤 쉐키는 얼굴이 기분이 나빠서 패고, 그렇게 형한테 맞은 애들이 4열 종대 앉아 번호로 연병장 2바퀴다. 오늘 형이 좀 피곤하거든. 좋은 얘기만 하고 가자. 알겠냐.
-아, 네 알겠습니다. 암튼 김상남 선수는 경기장 밖에서도 많은 구설수에 휘말렸지만 경기장 내에서도 문제가 많았죠. 1루에 주자가 있는데 3루로 견제구를 던질 때도 있고, 판정이 마음에 안 들면 심판을 향해 던질 때도 있었고요, 또 허리 굽히는 게 싫다고 상대 선수가 번트를 치면 그냥 1루로 가게 놔두고 그러셨거든요.
=술 먹고 야구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래. 그런 게 또 야구의 재미잖아. 사람들이 유머가 없어요 유머가. 그리고 너 계속 신경 긁는 얘기만 하는데, 너 옷이 그게 뭐야. 요즘에
[주성철의 가상인터뷰] 물의를 일으켜 죄송… 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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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새로운 카메라가 나왔다. NX10만 해도 삼성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어 많은 이들을 감탄케 했다. 특히 팬케이크 렌즈라 불렸던 30mm렌즈와의 궁합은 성능이나 휴대성 측면에서도 놀라운 수준. 이후 NX100에 이르러 새로운 방식의 i-Funtion 기능을 도입해 혁신적인 면모를 보여주었고 삼성 카메라의 미러리스들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물론 취향에 따른 호불호가 있지만 NX100의 미러리스답지 않은 디자인만큼은 도저히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런 점에서 NX11은 긍정적인 제품이다. 장점에 장점을 더한 제품이 살아남는 것은 당연하다. 좀더 정통적인 디자인으로 회귀하며 성능은 그대로 두는 것. NX11은 바로 그런 제품이다.
NX11은 APS-C규격의 1460만 화소 대형 CMOS 이미지 센서를 채용한 제품.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 12cm·두께 3.4cm·무게 353g의 비교적 작은 크기다. 앞서 언급했듯이 NX11은 i-Function 렌즈를 지원하는 제품이기도 하다.
[디지털] 소리와 함께 풍경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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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PC시장은 전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특하다. 그것은 조립PC에 기반하고 있는 데스크톱 시장과 조립PC 정도는 거뜬하게 조립할 수 있는 사용자의 높은 수준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완성PC 업체에서 이런 조립PC 시장과 경쟁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부품 하나하나의 가격이 인터넷으로 검색만 하면 최저가로 뜨는 상황에서 제조원가가 드러나는 브랜드PC 사업은 분명한 레드오션인 것이다. 덕분에 PC의 주사용층인 20∼30대의 젊은층에 대기업의 브랜드PC는 외면받는 상황이며 결국 브랜드PC는 조건 충족이 되는 공기관이나 기업, 학교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험난한 시장에 대만의 유력 PC제조사인 에이서에서 진입을 시도했다. 에이서에서 총 3종의 데스크톱을 출시했는데 오늘 살펴볼 제품은 바로 게이밍용, 에이서 아스파이어 프레데터(Predetor) G7750이다.
사양은 인텔의 쿼드코어 코어i7 960 프로세서와 엔비디아 GTX480 그래픽카드, 6GB DDR3 메모리
[디지털] 로봇이야? PC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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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기회라니?
더글러스 애덤스, 마크 카워다인 지음 / 홍시 펴냄
리처드 도킨스의 애정어린 서문이 인상적인 <마지막 기회라니?>의 20주년 개정판.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저자 더글러스 애덤스와 새똥에 특히 열광하는 세계적인 동물학자 마크 카워다인이 멸종 위기의 동물을 찾아 떠났다. 유머러스한 기행문으로도 손색이 없는데, 20년 사이에 멸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양쯔강 돌고래에 대한 언급을 읽고 있자면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올드독의 일러스트는 유쾌함을 더한다.
무엇이 정의인가?
서동진, 이권우 외 지음 / 마티 펴냄
<무엇이 정의인가: 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는 정의에 열광하지만 정의없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살핀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열광하는 한국사회의 현상, 샌델이 말하는 정의에 대한 본격적인 이해와 비판. 특히 마이클 샌델의 책을 읽고 동영상 강의를 본 뒤에도 미심
[도서] <마지막 기회라니? >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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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실감난다. 겉보기엔 품위가 넘치나 속은 썩어 문드러진 대기업 가문도, 좌파도 우파도 꺼리는 폭로 전문 시사 월간지도. 비판적 잡지 <밀레니엄>의 정의파 기자 미카엘 블룸크비스트는 우연히 스웨덴 대표기업 방예르 가문의 미스터리를 추적하게 된다. 몇 십년 전 방예르 가문이 사는 섬이 예기치 못한 사고로 입구가 봉쇄된 날, 후계자로 지목될 영리한 소녀 하리에트가 실종되었던 것이다. 미카엘은 하리에트 사건을 추적하며 대기업 가문에 드리워진 그늘과 마주한다. 가문의 형제들이 차례로 나치 세력에 가담했던 것. 작가 자신이 미카엘처럼 비판적 저널리스트로서 평생 극우파에 맞서 살아간 전력 덕분인지 이야기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전개된다. 또 후반부는 미스터리를 한방에 풀며 화끈한 재미를 보장한다. 미카엘과 한팀을 이루는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가장 매혹적인 캐릭터다. 그녀는 비쩍 마른 몸을 문신과 피어싱으로 휘감은 펑크족 소녀로, 정신장애 판정을 받고 후견인에게 통장을
[도서] 어른들의 해리 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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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선 (웹진 ‘보다’ 편집장) ★★★☆
인지도가 떨어져 그렇지, 지난해 그들이 들려준 <다시 돌아와>와 <She’s Back>은 (아이돌 그룹뿐 아니라) 지난해에 나온 음반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원투펀치 가운데 하나였다. 이번에 나온 두 번째 EP 역시 마찬가지다. ‘복고’라는 열쇳말을 가지고 인피니트의 특징을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 모든 걸 떠나 일단 ‘좋은’ 노래를 부른다. 그것만으로 인피니트는 차별화된다.
차우진 대중음악평론가 ★★
한재호와 김승수의 타이틀곡 <BTD>는 지나치게 관습적이다. 팝의 근거가 관습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긴장마저 사라지면 곤란하다. 요컨대 지금 아이돌 그룹의 포화상태에서 인피니트에 변별력을 부여할 수 있는 건 관습보다 긴장이고, 그건 장르적 엄격함에서 가능할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앨범은 깔끔말끔시크하지만 더없이 밍밍한 ‘아는 남자’ 같다.
이민희 (음악웹진 ‘백비트’ 편집인) ★★☆
자극적인 후
[hot tracks] 다행이다, 다른 아이돌과 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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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옛날 사람(레전드)을 내가 닮았다고, 세상은 주장한다. 하지만 속상하게도, 그보다 앞서 미디어는 레전드의 놀라운 재림에 흥분했다. 이는 화이트 라이즈의 보컬리스트 해리 맥베이의 불만이다. 그를 피곤하게 만드는 레전드는 조이 디비전의 이안 커티스이며, 해리보다 일찍 레전드를 소환하고 명예를 얻은 자는 인터폴의 폴 뱅크스이다. 스쿨밴드로 출발해 앨범 두장을 발표한 런던발 젊은 삼인조 화이트 라이즈는 그러나 젊지 않은 음악을 들려준다. 보컬의 음침한 음색부터가 70년대 레전드를 환기하고, 큐어처럼 찰랑이는 기타, 티어스 포 피어스처럼 불안한 듯 아름다운 멜로디, 그리고 해피 먼데이스처럼 흥을 부르는 찬란한 건반이 사운드의 축이다. 그들은 어둠을 사랑하고, 어둠 속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지지한다. 그토록 부정하고 싶어 하는 레전드가 그랬던 것처럼.
[음반] 화이트 라이즈 ≪Ritu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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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7일까지 / 마이클 슐츠 갤러리 서울 / 02-546-7955
열린 결말로 끝나는 영화의 마무리는 관객의 몫이다. 왜곡되거나 흐릿하게 묘사된 부분을 담고 있는 그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위스 아티스트 앤디 덴즐러의 작품은 완성되지 않은 퍼즐 같다. 고장난 TV화면이나 인화에 실패한 사진처럼 일렁이는 캔버스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소실되거나 왜곡된 부분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난다. 회화를 그리지만 사진과 영화에도 관심이 많은 이 작가는 사진의 장시간 노출 기법이나 영화의 모션 블러 기법을 차용해 독창적인 작품을 만든다. 그 오묘한 정서를 체험하는 건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황홀하다. 덴즐러는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신예 작가지만, 이미 미국 백악관에 자신의 작품을 건 유망주다. 이번 전시는 한국 최초 개인전이다.
[전시] <앤디 덴즐러 개인전: Freeze Frame Paintin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