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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냉장고였다. 내 냉장고는 전에 살던 사람이 쓰던 걸 싸게 물려받은 중고품으로, 겉이 깔끔해서 오래 쓸 줄 알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작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수리기사님을 불러서 물어보니 사람이 노쇠한 것과 같다며 고쳐도 완전히 건강해지기는 힘들다고 했다. 내 손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된지라 젊은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굉장히 오래 일해오셨던 것. 이번에 고쳐도 언제 다시 멈출지 모르니 수리비 쓰지 말고 새것을 사는 게 좋지 않겠냐고 기사님이 조심스레 권하셨지만 난 완강히 거부했다. ‘고치면 더 쓸 수 있는데 새것을 왜 사는가!’ 하는 강직한 마음이 날 환히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말이다.
기사님의 예언은 정확했고, 몇 개월 뒤 냉장고는 결국 다시 멈췄다. 이럴 때마다 계속 모터를 교체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어쩔 수 없이 냉장고 구입을 위한 인터넷 창을 열었다. 난 혼자 사는 서민이니까 적당한 크기의 서민 냉장고를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검색을 시작하자마자 웬
[오지은의 '요즘 가끔 머리속에 드는 생각인데 말야'] 모든 것은 몰이해에서 오는 것일지도<최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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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 <출애굽기>에는 광야에 살던 모세가 신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야훼는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해방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신의 목소리를 들은 모세는 자신이 언변이 변변치 못하여 말로 파라오를 설득할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야훼는 모세에게 언변이 좋은 형 아론을 데려가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야훼가 모세를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호명’하고, 아론을 통해 말주변이 없던 모세에게 ‘언변’의 능력을 부여한다는 모티브다.
신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모세만이 아니다. 가령 소년 사무엘은 어느 날 자다가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소년은 랍비가 부른 줄 알고 옆방의 스승에게 달려가나, 랍비는 소년을 부른 적 없다고 대꾸한다. 같은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비로소 랍비는 소년을 부르는 목소리가 야훼임을 깨닫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소년과 함께 기도를 올린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모두 신의 부르심을
[진중권의 아이콘] 신의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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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는 내가 딱 한번 만난 적이 있지. 그날 밤 그 링 위에 올라가지 말았어야 했어. 그는 내 영웅이었단다. 그리고 그 라스베이거스 경기는 내가 본 가장 슬픈 광경이었지."
_<라이츠 아웃> 시즌1 에피소드9, 에드 로미오
복싱을 다룬 영화 중에는 명작이 많다. 최근작인 <파이터>부터 <분노의 주먹> <알리> <신데렐라 맨> <밀리언 달러 베이비>, 그리고 <록키>에서 시작해서 <록키 발보아>로 이어진 연작까지. 복싱만큼 영화에서 빈번하게 다뤄진 스포츠인 풋볼과 야구가 팀워크로 승리를 이뤄가는 데 반해 복싱은 링 위에 선 한 사람이 전신, 아니 정신을 다해 승리를 쟁취하는 ‘인간승리’의 스포츠다. 그렇기에 감동도 더하고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도 많으리라. 하지만 사정없이 글러브를 날리는 상대에 밀려 링의 한쪽 코너에 몰린 복서의 모습을 볼 때면, 저기가 아니라면 대체 어디가 사지(死地)란 말
[안현진의 미드앤더시티] 아드레날린 드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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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예전에는 한껏 움츠러들었어요. 지금은 새로운 역할에 도전하는 게 즐거워요. 마흔에 가까운 지금, 오히려 용기가 더 생겨요. 인생 거꾸로 가는 것 같습니다. 이제 연기 시작이죠."배우 전미선(39)은 최근 서울 명동에서 영화 '수상한 이웃들'의 개봉을 앞두고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전미선은 '수상한 이웃들'에서 주부이자 초등학교 교사인 미라 역을 맡았다. 남편을 구박하는 목소리 큰 여성이지만 나름 상처도 잘 받는 복잡한 속내의 인물이다."제가 그동안 여린 역을 좀 했어요. 이번에는 기존에 해왔던 역할이랑 조금 달라요. 우리나라 여성들은 표현을 잘 안 하잖아요. 그런 분들이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도록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소리도 지르고요. 저 집에서도 신랑에게 잔소리하거든요."(웃음)영화는 5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 지방지 '봉계신문'을 주축으로, 신문기자들과 이웃들 간에 벌어지는 '이
<전미선 "마흔에 가까우니 용기 더 생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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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천의 얼굴'로 요즘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중견 배우 김갑수(54)가 "한때 나도 '발 연기'했다"고 고백했다.12일 KBS 2TV '김승우의 승승장구' 제작진에 따르면 김갑수는 이날 밤 11시15분 방송되는 이 프로그램의 최근 녹화에서 "연극 극단 생활을 하면서 연기를 시작했는데 그 시절 기인으로 통했었다"며 "나는 스스로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선배들에게는 항상 '연기가 그게 뭐냐'며 꾸중을 들었다"고 말했다.김갑수는 "요즘 말로 치면 그때 당시 '발 연기'를 했다. 연기가 잘 안 될 때마다 머리를 삭발했다. 그래서 그때 당시 머리를 기른 적이 별로 없었다"며 "지금 그때처럼 연기하라고 해도 못 한다"며 웃었다.그는 또 에로 영화 '뽕' 시리즈에 출연할 뻔했던 일화를 들려줬다.1995년 영화 '금홍아 금홍아', 1996년 '지독한 사랑'에서 진한 베드신
김갑수 "한때 나도 '발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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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이탈리아의 명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70) 감독이 칸영화제 집행위원회로부터 명예 황금종려상을 받는다고 영화제 사무국이 11일(현지시간) 밝혔다.명예 황금종려상은 영화제 그랑프리인 황금종려상을 받지 못했지만, 영화계에 큰 업적을 끼친 거장 감독들에게 주는 특별상이다. 스웨덴 거장 잉마르 베리만 감독이 1997년 첫 수상한 이래로 2002년 미국의 우디 앨런 감독, 2009년 미국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시상 오는 5월 11일 개최되는 영화제 개막식에서 이뤄진다.좌파성향의 피에르 파울로 파졸리니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베르톨루치 감독은 '죽음의 신'(1962)으로 데뷔, 좌파 지식인들의 패배를 다룬 '혁명전야'(1964)로 칸영화제에 진출했다.외설 논란을 빚었던 '파리에서 마지막 탱고'(1972), 20세기 초 격변하는 이탈리아의 정세를 포착한 서사극 '1900년'(1976) 등의 작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46살에 만든
베르톨루치 감독, 칸 명예황금종려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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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혁은 말을 길게 하는 편이 아니다. 툭툭 던지듯, 가끔 깜짝 놀랄 정도로 솔직한 답변이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오곤 했다. “입으로만 얘기하는 거 싫어한다. 공식 인터뷰라고 해서 입에 발린 홍보만 하면, 요즘 관객은 다 똑똑해서 어차피 곧 알게 되니까.” 그는 “진심을 담아서 안 하면 불편하다”고도 했다. 그런 면에서 <적과의 동침>을 함께 만든 배우들과 박건용 감독 등 제작진에 대해서 그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2010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힘들게, 공들여 찍은 <적과의 동침>을 아직 보지 못한 그 역시 빨리 영화가 보고 싶다고 했다.
충청남도 석정리에서 벌어진 실화. 한국전쟁 당시 석정리의 한 마을에 입성한 인민군을 마을 사람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인민군들 역시 마을 사람을 형, 누나처럼 따르며 정을 쌓았다고 한다. 연합군이 개입하면서 상황이 급변해 결국 북으로 후퇴해야만 했을 때, 어린 인민군들은 “이곳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김주혁] 감성, 이상, 직관 연기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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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전 이 지면에서 중편 <남매의 집>을 평하며 조성희의 첫 장편영화 <짐승의 끝>에 대한 기대를 비친 적이 있다. 마침내 개봉한 <짐승의 끝>은 <남매의 집>의 확장형 버전이라 할 만하다. 어떤 환유로도 묶이지 않는 묵시록인데, 이건 <남매의 집>에서도 이미 맛봤던 조성희의 성향이다. 하나의 세트로 제한된 <남매의 집>의 배경에 비해 <짐승의 끝>은 시골이라는 특정공간으로 다소 넓어졌으며 대부분의 사건이 야외에서 벌어진다는 점을 감안해도 장편영화에 맞는 에너지가 기대만큼 못 미친다. 처음부터 끝까지 폐소공포증을 느끼게 했던 <남매의 집>의 템포감이 이 영화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하나의 기이한 이야기가 종잡을 수 없는 형태로 늘어지고 있다는 인상만을 준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지나치리만큼 솔직하게 쓴 조성희의 제작후기가 <발칙한 카메라의 이면>이라는 책에 실려 있다. 편집에서 가다
[김영진의 인디라마] 네 스타일을 죽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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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으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 <불량공주 모모코>부터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과 <파코와 마법 동화책>을 거쳐 <고백>에 이르기까지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의 영화에는 공통적으로 흐르는 양식적 특징과 화두들이 있다. 먼저 감독은 인과관계의 고리에 맞춰서 사건을 순차적으로 전개시키거나 순행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는다. 항상 결과가 먼저 제시되거나 사건이 터지고 난 뒤 시간을 거슬러 역추적해나가거나 앞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따라서 언급한 모든 영화들엔 등장인물들의 내레이션이 존재한다. <고백>에선 마나미의 살해사건이 일어난 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과정들을 여러 시점에서 보여주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도 마츠코가 죽고 난 뒤 조카가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는 것을 계기로 마츠코의 일생이 드러난다. <파코와 마법 동화책>도 동화책의 형식을 통해 오누키와 파코의 이야기가 들려지며
[영화읽기] 주제와 표현 사이 조율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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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모든 서부영화는 ‘상실이라고 믿는 결핍’의 장르다. 개척정신의 신화, 남성 영웅과 공동체의 가치, 대립구도로 이뤄진 세계를 전면화하는 정통 웨스턴은 ‘신화’라는 말 그대로 그것이 환상임을 스스로 지칭하고 있다. 변형된 웨스턴이 고전기 세계의 영웅적 대결, 정의, 풍경의 몰락을 보여줄 때, 그건 앞선 환상에 대한 스스로의 인정이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장르적 변주가 일어나고 있다고 해도, 그리고 그 변형이 ‘돌아갈 수 없고, 되찾을 수 없음’의 정조로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실은 돌아갈 곳, 되찾을 것의 실체가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한때 소유했던 것에 대한 상실의 애조가 아니라, 상실했다고 믿는, 그러나 애초 텅 빈 것과의 대결. 모든 서부극은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불가능성으로 지탱되는 장르다. 고전기 웨스턴에서 수정주의 웨스턴으로의 변화가 영화사적으로 어떤 반성적인 쟁점을 불러일으켰는지의 문제는 물론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구분보다 거의 모든 서부영화들이 공유하
[전영객잔] 아름답고 아름다운 불가능한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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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 3년간 충무로 상업영화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두편의 영화를 꼽으라면 단연 나홍진의 <추격자>(2008)와 강형철의 <과속스캔들>(2008)이다. 누아르와 소시민 코미디, 그렇게 공통점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두편의 영화를 따라 수많은 영화들이 기획됐고 성공과 실패는 거듭됐다. <추격자> 이후 남성적 하드코어 무드의 이른바 ‘한국형 누아르’ 영화들은 나홍진이 <황해>(2010)를 통해 그 스스로 종결지은 느낌이라면, 그보다 너른 스펙트럼을 지닌 일련의 소시민 코미디영화들은 <과속스캔들>의 차태현이 출연한 <헬로우 고스트>(2010)를 비롯해 <사랑이 무서워>나 <위험한 상견례> 등 올해 초까지 집중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수상한 고객들>에 이르기까지 이들 영화는 공교롭게도 똑같이 여섯 글자 제목이라는 공통점도 있으며, <헬로우 고스트>를 제외하면 김수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는' 류승범과 <수상한 고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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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일기>의 주인공인 이 청년의 이름은 승철(박정범)이다. 순한 외모를 지녔고 착하고 성실한데 삶이 늘 힘들다. 아마도 그가 탈북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돈을 벌고 생계를 이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벽보와 플래카드를 붙이는 일이지만 그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사장은 일을 똑바로 하라며 막말을 하고 동네의 건달들은 승철이 눈에 띄기라도 하면 자기 구역 운운하면서 이곳에 벽보를 붙이지 말라고 걷어차며 협박한다. 그러나 승철은 아직 남한식의 독기를 익힌 것 같지 않다. 그는 때리면 맞고 더 맞을 것 같으면 도망가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승철의 친구는 딱 둘뿐이다. 승철을 돌봐주는 같은 탈북자 출신의 경철(진용욱)과 승철이 끔찍하게 아끼는 강아지 백구. 그런 승철에게도 사랑이 찾아온다. 숙영(강은진). 승철은 그녀가 다니는 교회도 다니고 그녀가 일하는 노래방에서 함께 일하며 가슴앓이를 하지만 선뜻 고백할 용기가 없다. 그의 사랑은 이루어질 것인가. 아니, 그러기는커녕
탈북자의 삶, 무엇이 그를 무능하게 만들었는가 <무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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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 1시간까지는 다소 심드렁하게 보게 된다. 도시 여자와 시골 청년, 생각 많고 상처 많은 사람과 아무 생각없이 사는 게 즐겁기만 한 사람 사이에서 과연 사랑이 싹틀 수 있을까를 두고 내기하는 건 시시하다. 어지간해선 니노미야 도모코의 만화 <그린>을 뛰어넘을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편견은 금물이다. ‘러브 스토리’에 초점을 맞춘 듯한 1시간이 넘어가면서부터 <울트라 미라클 러브 스토리>는 그야말로 ‘울트라 미라클’해진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청년 요진(마쓰야마 겐이치)은 아오모리의 시골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산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남긴 농사법에 따라 농사를 짓지만 수확은 늘 신통치 않다. 이 마을 유치원에 새로운 교사가 등장한다. 바람난 애인 카나메(아라타) 때문에 상심한 마치코(아소 구미코)가 도쿄를 떠나 아오모리까지 온 것이다. 요진은 마치코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지고, 그야말로 온몸을 던져 폭풍처럼 그녀에게 다가간다.
<울트라 미라클
"나는 마치코를 위해 죽어서도 살아 있어!" <울트라 미라클 러브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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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위해서라면 부모가 못할 짓은 없다는 게 <나는 아빠다>의 전제다. 영화가 가장 강조하는 부분 또한 그 못할 짓의 수위다. 말하자면 부모는 어디까지 나빠질 수 있을 것인가. 심장병으로 죽어가는 딸을 둔 강력반 형사 종식(김승우)은 딸을 살리기 위해 범죄집단과 손을 잡는다. 돈의 대가는 단순히 기밀정보를 누설하는 게 아니라 무고한 사람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고, 증거를 위해 사람을 죽이는 데에까지 이른다. 자신의 과오 때문에 엄마를 잃은 딸 민지(김새론)에게 어떻게든 아빠 노릇을 하고픈 종식은 앞뒤 재지 않고 돌진한 끝에 드디어 딸의 수술비를 마련한다. 하지만 이때 또 다른 아빠가 등장한다. 종식에게 누명을 쓰고 교도소 생활을 했던 상만(손병호)이다. 누명을 벗고 출소해보니 딸은 죽었고, 아내는 자살기도 뒤 식물인간이 됐다. 과거를 잊고 새 출발을 하려 했던 상만은 종식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김새론이 출연하고, 그녀를 지키려는 한 남자의 사투를 그린다는 점에서
난데없이 캐릭터가 모호해져버린 후반부가 아쉽다 <나는 아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