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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혁은 자신이 연기한 <의뢰인>의 ‘한철민’에 관하여 “정황 증거로 몰린 용의자”라고 설명한다. “정적인 역할인데도 불구하고 풍성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상황이어서 그 점에 매료됐다”고도 한다. 변호사(하정우)와 검사(박희순)로 각각 출연하는 나머지 두 주연배우들이 “법정에서 서로 논리적인 공방을 펼치는 가운데에서도 나는 조용히 감정선을 유지해야만 했다”고 밝힌다. 결국 “이 새로운 캐릭터를 잘 소화해내면 또 다른 영역을 넓힐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이 영화를 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이 말들을 모아보니 <의뢰인>의 한철민을 연기한 장혁은, 정황 증거로 몰려 용의자가 된 이 정적인 캐릭터의 풍성하지만 숨겨진 감정선에 도전하여 배우로서 새로운 장으로 진입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의뢰인>의 오프닝 시퀀스를 여는 것은 장혁이다. 차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들어오는 데까지 동네는 어수선하다. 경찰들이 가득하고 사람들은 소란스럽다. 그 소란이 자기의
[장혁] 변화구를 꿈꾸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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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점을 보이는 순간 상대가 파고든다. 손영성 감독의 <의뢰인>에서 심문을 하는 남자(박희순)나 변호를 하는 남자(하정우)나 증언을 하는 남자(장혁) 모두 이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법정이라는 공간 안에서 이들이 믿을 건 오로지 자신의 판단뿐. 다음 장부터 박희순, 장혁, 하정우 세 남자의 치열했던 법정 공방기가 펼쳐진다.
[장혁, 하정우, 박희순] 세 남자가 법정으로 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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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잘 보고, 읽고 나선 꼭 손도 씻도록 해.” 맷 데이먼은 스티븐 소더버그가 시나리오를 건네며 한 말을 잊지 않았다. 말대로 그는 손을 자주 씻게 됐고, 자신뿐 아니라 아이들의 위생관념까지 돌아보게 됐다. <컨테이젼>에 출연한 로렌스 피시번이나 기네스 팰트로 역시 데이먼과 마찬가지 상황을 연출했다. <컨테이젼>은 이른바 21세기형 질병이라 불리는 접촉성 전염병에 대한 본격 해부다. 조류독감과 신종인플루엔자 등 최근 급속도로 증가하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대한 경각심이 날로 고조되는 상황, 전세계 1일 생활권의 도입으로 재난은 미처 손을 쓸 사이도 없이 나의 현실이 된다. 성별, 나이, 직업, 지위를 막론한 무차별적 공격, 바로 <컨테이젼>의 공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재난의 실체는 21세기형 최첨단이지만 소더버그가 이 재난을 그리는 것은 사뭇 고전적인 카운트 방식으로 진행된다. 영화의 시작은 D-2. 즉, 재난의 둘쨋날이다. 홍콩국제공항,
21세기의 관객을 향한 소더버그식 공포스릴러 <컨테이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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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 엘리트>의 주인공 대니(제이슨 스타뎀)는 가공할 위력을 지닌 킬러였는데 은퇴했다. 한 아이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죽인 죄책감이 계기가 되어 그 일을 그만두었고 호주의 초원에 새 터전을 잡은 뒤 이제는 아름다운 연인과 새 인생을 열어가려던 찰나다. 그때 소식이 날아든다. 아버지처럼 혹은 스승처럼 여기던 옛 동료 헌터(로버트 드 니로)가 납치됐다. 아프리카 오만의 한 족장이 헌터를 감금해놓고, 헌터가 했어야 할 일을 대니가 대신 하지 못하면 헌터를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과거 전쟁 중에 자신의 자식들을 죽인 영국의 전직 SAS 요원들을 죽이고 그 증거물을 녹화해오되, 사고사로 위장하라는 살인청부다. 대니는 헌터를 살리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족장의 사주에 응하지만 스파이크(클라이브 오언)라는 뜻밖의 강력한 적수를 만나 고전한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점은 화려한 출연진에 관한 것이다. “제이슨 스타뎀, 로버트 드 니로, 클라이브 오언과 같이 대작을 만들었
죽도록 싸우는 제이슨 스타뎀표 남성 격투물 <킬러 엘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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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악마를 보았다. 하지만 악마는 충분히 처벌받지 않았다. 심지어 그 기억이 불과 채 10년도 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때 더욱 참담해진다. 법원은 썩었고 종교는 글렀으며 학원은 미쳤다. 우리는 여전히 저개발의 기억 속을 걷고 있다. 지난해 <부당거래> 이후 이처럼 관객으로 하여금 직접적인 감정이입으로 내모는 영화가 있었던가.
<도가니>는 자애학원을 둘러싼 아동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법정영화처럼 느껴지지만 핵심은 그것이 다뤄지는 방식과 과정에 있다. 그것은 벌어진 사건 그 자체보다 그것이 환기하는 현실과 연계된 사건들의 끊임없는 중첩이다. 말하자면 <도가니> 한편이 다루는 소재들을 모아서 <PD수첩> 수십회 분량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사립학원의 선생이 되기 위해 바치는 학교발전기금이란 뇌물, 학원 비리를 돈으로 눈감아주는 부패 경찰, 전직 판사 또는 검사가 변호사로 개업하여 처음 맡은 소송에 대해 유리한 판결을
우리는 여전히 미개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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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에 모인 엄청난 관중을 뒤로한 채 도망치려는 작가가 있다면? 짐작하건대 그가 엄청난 창작의 고뇌에 시달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속내는 다르다. 독일 문학의 총아인 이 젊은 작가는 사실 작가를 사칭한 웨이터에 불과했다. 사정은 이렇다. 웨이터 다비드(다니엘 브륄)는 좋아하는 여자 마리(한나 헤르츠스프룽)한테 말도 제대로 못 걸 정도로 소심한 남자다. 어느 날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협탁에서 원고 뭉치를 발견하면서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진다. 마리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그걸 자신이 쓴 소설이라고 거짓말을 했고, 마리가 그걸 출판사에 보냈고, 소설은 곧 베스트셀러가 됐다. 두 번째 소설을 내라는 압박, 그리고 자신의 거짓을 아는 남자가 출현하면서 다비드의 혼란은 시작된다.
<릴라, 릴라>는 스위스 작가의 동명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영화는 다비드가 자신이 진퇴양난에 빠지기까지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그 와중에 다비드의 연애도 진척된다. 물론 베스트셀러가 된 <
거짓말과 연애가 얽힌 가벼운 소동극 <릴라, 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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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노년을 보내고 있던 마사코(요시유키 가즈코)는 셋째 며느리 토모에(하라다 미에코)의 제안으로 아들네서 함께 살게 된다. 며느리는 음식 솜씨 좋고 바느질도 잘하는 시어머니가 집안일을 거들 것으로 내심 기대했지만 시어머니는 치매에 걸리고 만다. 이때부터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전쟁이 시작된다. 시어머니의 행동에 왜 그러냐며 다그치기만 하던 며느리는 치매 노인들을 돌보는 사찰 시설에 다녀온 뒤부터 달라졌다. “시어머니를 칭찬해준 적이 있는가?”라는 시설 관계자의 물음이 시작이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마음속 깊은 고민과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이윽고 둘은 한 이불에서 잠이 든다.
우선 손수건부터 준비하자. 간단한 시놉시스만으로도 <소중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필요로 하는 영화인지 말해준다. 그러나 <소중한 사람>은 관객의 눈물을 쥐어짜기 위해 기획된 영화가 아니다. 어쩌면 영화를 보는 동안 눈물을 흘리는 순간보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체험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눈물보다는 가슴 따뜻한 순간이 더 많은 <소중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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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남원에 살고 있는 소년 은철(박지빈)과 그의 여동생 은하(이슬기)는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고아 신세가 된다. 좋은 이웃의 도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남매는 둘이서 서로 의지하고 돌보며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느낀다. 그런데 시련은 아직 남아 있다. 은하는 시력을 잃어가는 병을 앓고 있다. 그런 은하가 어느 날인가부터 은철에게 고래를 보러 가자며 조르기 시작한다. 고민하던 은철은 결국 동생이 시력을 잃기 전에 고래를 보여주기로 마음먹고 은하를 자전거에 태워 고래를 찾아 먼 길을 나선다. 여기에 길동무가 한명 더 생긴다. 고래잡이였으나 지금은 살인 용의자로 쫓겨다니는 덕수(이문식)가 우연히 이들 남매와 동행하게 되고 세 사람의 우여곡절 여행기가 이어진다. 그들의 목적지는 울산에 있는 장생포다.
불행 앞에 선 아이들과 사연 많은 어른이 희망의 최종 목적지를 향해 함께 여행하는 이 영화는 일종의 로드무비다. 세상에 홀로 남은 남매를 주인공으로 한 슬픈 동화, 그러나 아이와 어
결과적으로는 평범하거나 그보다 조금 못한 동화 한편 <고래를 찾는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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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객괴담 <됴화만발>
일정: 9월25일까지
장소: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문의: 02-758-1250
‘검객괴담’이라는 부제가 붙은 <됴화만발>은 <가마> <남자충동> <미친키스> 등으로 한국 연극계를 뜨겁게 달궜던 조광화 연출이 10년 만에 선보이는 창작연극이다. 일본 전후 문학을 대표하는 사카구치 안고의 단편소설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에서>를 모티브로, 원작에 무협 요소를 가미하고 벚꽃을 무릉도원이 연상되는 복숭아꽃으로 치환했다. 고대 진시황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2천년이 넘는 세월을 홀로 견뎌온, 영생불사의 운명을 짊어진 검객 케이의 이야기가 두 시간가량 펼쳐진다. 말보다 움직임으로 관객과 소통해야 하는 케이 역에는 <사춘기>와 <39계
단>의 배우 박해수가 캐스팅됐다.
<됴화만발>은 제목에서 ‘복숭아꽃 활짝 핀 무릉도원의 정경’ 정도가 연상되지만 실상은 기존
[아트인서울] 이토록 스타일리시한 연극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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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선 / 음악웹진 ‘보다’ 편집장 ★★★★
음악 스타일이 바뀐 건가 싶었지만 크래비츠의 색깔은 여전하다. 2000년대의 레니 크래비츠는 실망스러웠지만 이 앨범의 그는 확실하게 다시 돌아왔다. <Come On Get It>에서의 육중한 그루브와 <Liquid Jesus>에서의 섹시한 보컬은 우리가 크래비츠에게 열광했고 기대했던 바로 그 소리들이다.
이민희 / 음악웹진 ‘백비트’ 편집인 ★★★☆
작품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우수하면 재미가 떨어지기도 한다. 너무 잘 만들어서 까인다는 건 좀 웃기지만 풋풋하고 어설픈 게 때때로 매력이 될 수도 있다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흠 없는 사운드보다 귀여운 커버에 더 눈길이 간다. 그런데 원래 탁월한 걸 어떡하나. 록에서부터 펑크(funk)와 솔까지 전 장르를 손바닥 안에 두고 있는 걸 어떡하나. 그냥 평소와 다름없이 느긋하게 ‘급’과 ‘격’을 유지하는 무난한 앨범.
최민우 / 음악웹진 ‘웨이브’ 편집장 ★★★★
레니
[hottracks] 기다렸던 바로 그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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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파퍼씨네 펭귄들> 남극 펭귄들이 한류 여행을 온 이유는…?
[정훈이 만화] <파퍼씨네 펭귄들> 남극 펭귄들이 한류 여행을 온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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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하늘에 있다면, 관측할 수 있다면 어떨까. 지구와는 멀리 떨어진 미래 행성 나니예의 신은 “늘 가까이에서 행성 주위를 공전하시지만 그 크기가 너무나 작아서… 감히 그 모습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고로 나니예의 수도사들은 거대 망원경으로 신을 관측하는 과학자들이다. 그 중 논문을 쓰는 수도사 나물은 복음서에서 전해지는 신의 궤도에 실제로 신이 없다며 신의 궤도를 새로 계산, 교계에서 이단으로 몰리게 된다. 소설의 한 축이 도발적 신학이라면 다른 한 축은 인간의 처연한 존재론. 가정사가 복잡해서 언제나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고 살던 조종사 김은경(배명훈 독자라면 익숙할 그 이름)은 15만년 동안 냉동된 상태로 우주여행을 하다 나니예에 도착한다. 나니예는 애초에 은경의 아버지가 설계한 곳이고, 심지어 죽은 지 오래된 옛 연인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행성을 돌아다니고 있다. 은경은 자신의 과거에 끈끈하게 들러붙은 이 행성을 고민한다. 그리고 신도. 은경에게 나니예의 신이란 우주로 나
[도서] 만들어진 신을 찾는 우주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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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물이라는 장르의 신기함은 읽거나 보는 동안 내가 갖지 못했던 십대의 추억을 되살린다는 데 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한국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일은 학원물 설정과는 영 달라서, 대단한 로맨스나 공포는 경험할 일이 없었다. 귀밑 3cm 머리(방학이 끝나면 날라리들은 기른 머리를 유지하려고 가발을 썼다가 죽도록 맞았고), 성적과 비례해 불어나는 체중(어느 순간부터는 그나마 체중만 상승세를 지켰다만서도), 죽도록 불안한 미래(그때는 서른살이 되면 모든 게 다 정해져서 죽도록 권태로울 줄 알았더니 이게 뭐람)가 전부였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동시에 어서 어른이 되고 싶어 미칠 것 같던, 교복 입은 51명의 아이들 중 하나일 뿐이었는데, 학원물을 읽다 보면 좋아하는 남자애를 보며 두근거리던 심정이나 화장실의 마지막 칸 닫힌 문을 보며 공포에 질리던 마음이 새삼 달아오른다. 그때 알았더라면, 경험했더라면 더 뜨겁게 풋풋했을 감정이지만 별볼일 없는 십대였던 나는 학원물을 보면서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연애에 찌든 당신의 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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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와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독특한 느낌을 풍긴다. 어딘가 속해 있는 듯한, 그래서 여유가 배어나오는 듯한. 장소는 사람을 품고 역으로 사람은 장소에 의미를 더한다. 고갱과 타히티, 도스토예프스키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윤선도와 보길도, 비트겐슈타인과 비엔나, 가우디와 바르셀로나, 마키아벨리와 피렌체… 그 리스트는 끝이 없다. 그러나 대도시가 늘어나고 인간의 삶이 급격히 노마드화하는 요즘, 장소와 인간과의 끈끈한 교우가 오래 지속되기를 기대하기란 힘들다. 요즘 인간들은 도대체 한 군데 머무르지 못한다.
점차 과거지사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이 특별한 관계 또 하나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두어달 전의 일이었다. 졸업전 심사로 찾아갔던 이화여대의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잉마르 베리만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2007년 세상을 떠난 그는 생애의 상당 부분을 발트해의 작은 섬 포로(Faro)에 칩거해 살았다고 했다. 촬영을 위해 처음 섬을 찾았을 때부터 계산하면 무
[architecture+] 장소와 맺은 특별한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