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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사기를 하나 친 적이 있다. 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 집 근처 개량한복 가게에서 몇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다. 개량한복이란 꽤 비싼 물건이어서 가게 수입은 대부분 함께 팔던 자질구레한 소품과 언제 들여놓았는지 모를 허름한 티셔츠 등에서 나왔다. 저녁 타임 아르바이트였던 나의 임무는 그 물건들을 오다가다 들른 술 취한 고시생들에게 팔아치우는 것이었다.
어느 저녁, 얼굴이 발그레한 고시생 하나가 가게에 들어왔다. 나는 딱 한벌 남은 티셔츠를 팔고 싶었다. 때는 90년대 후반, 장소는 무채색만 넘실거리던 신림동 고시촌, 나는 연분홍 티셔츠를 들고 활짝 웃었다. 고시생은 곤란해했지만, 나는 그처럼 얼굴이 하얀 남자가 아니라면 이런 옷을 권할 수도 없다고, 요즘 분홍색이 유행이라고, 보라고, 딱 한벌 남지 않았느냐고(이건 사실이었지) 사기를 쳤다. 그리고 한동안 그 고시생이 가게 유리문 밖을 지나갈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리곤 했다. 칙칙한 고시촌 거리에서 연분홍 티셔츠를 입은 고시생은
[김정원의 피카추] 자신감 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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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밴드 시규어 로스가 5월19일 서울 올림픽경기장에서 콘서트를 가졌다. 시규어 로스의 실황은 스튜디오 앨범과 거의 차이가 없지만, 무대 연출과 영상이 어우러진 종합 예술로서의 독보적 호소력은 현장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천의무봉한 음악과,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을 인공조명으로 모방한 무대는 ‘제2의 자연’을 조성했다. 음악을 ‘반주’하는 영상이 내내 영사된 가로가 긴 띠 모양의 스크린은, 영화의 사운드트랙과 대구를 이루는 음악의 ‘이미지트랙’이라고 부를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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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모처럼 공책에 샤프펜슬로 글씨를 쓰기로 마음먹고 나니 책받침이 아쉬워졌다. 사무용품 위주로 물건을 갖춰 놓은 ‘문구센터’ 몇곳을 가보았지만 실패였다. 그래, 문구센터라서 없는 거야. 책받침 하면 문방구지. 집 근처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있어 어렵지 않게 찾겠거니 교문 주변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편의점뿐이었다.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생활과 멀어진 지 오래인 나는 미궁에 빠졌다. 요즘 학생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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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이 원만하지 못해 가급적 헤벌쭉 웃으며 나다니는 편인데, 어쩔 수 없이 얼굴을 굳혀야 하는 순간이 있다. 배달 계란, 배달 우유 등 판촉장 앞에서다. 저만치서부터 “고객님~” 부르는데 가능한 한 냉정한 자세로 최대한 그들을 ‘유령 취급’하며 쓱 지나가야 불필요한 감정노동을 하지 않는다(거절이 유독 힘든 나 같은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 판촉‘이세요’). 문제는 내 옆의 먹순이. “맛만 보고 가라잖아”며 입맛을 다시는 것도 모자라 뚫어져라 쳐다보니 도리가 없다. 애가 맛있게 먹기라도 하면(얜 돌멩이도 맛있게 먹을 애예요. 으흐흑) 숨돌릴 틈도 없이 홍보•설득 멘트를 날리시는데, 다 듣고 있자니 마음은 점점 돌덩이다.
일수 수완 좋은 판촉자는 다른 품목으로 같은 구역에서 만나게 되기도 한다. 종일 서 있어야 하고 쉴 새 없이 말해야 하며 무엇보다 실적 압박을 받는 그 노동의 총량을 어떻게 따질 수 있을까. 조금 벌더라도 다치면 보호받고 아플 때 병원갈 수 있으며 잘리더라도 새 일 구
[김소희의 오마이 이슈] 비공식노동 공식화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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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 쇼 중,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조련사 여인이 한 남자를 만나 육체적 감각을 되찾은 날. 그녀는 의족을 차고 어색한 걸음으로 사고 현장을 찾는다. 대형 수족관 앞에 선 그녀가 수족관 창을 손으로 두드리자, 마법처럼 어딘가에서 거대한 고래가 나타난다. 마치 고래를 쓰다듬듯 창을 쓰다듬던 여인이 손과 팔을 움직여 동작을 시작하자, 고래가 그에 따라 움직인다. 우리는 여인의 표정을 볼 수 없는 대신 고래의 표정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혹은 의족을 찬 다리로 어색하고 꼿꼿하게 서서 우아하고 능숙하게 팔을 움직이는 여인의 뒷모습이 그녀의 얼굴 표정 그 자체라고 느낀다. 둘 사이에 가로막힌 창. 이제는 서로 섞일 수 없는 두 세계. 그 창을 사이에 두고 고래와 여인은 서로를 만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창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이 창은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한계를 리듬으로 전환한다. 여인의 손짓에 고래는 어디론가 다시 사라져버리고 창 앞에 여인 홀로, 하지만 뭔가 달
[신 전영객잔] 내가 만질 수 없는 그러나 나를 만져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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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들개로 태어났다.” 웹툰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원류환(김수현)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면 들개는 무슨, 북파공작원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훈남 배우 세명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트레일러가 공개된 뒤 원작의 캐릭터들과 주연배우들의 높은 싱크로율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유독 원작과 자주 오버랩되는 것은 배우 이현우의 얼굴이다. 흠모하는 원류환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커다란 눈망울의 이현우는, 정말 웹툰 속의 리해진과 똑 닮았다.
이현우는 드라마 <공부의 신>과 <아름다운 그대에게>로 시청자의 사랑을 받기 전까지 <대왕세종> <선덕여왕> <계백> 등에서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 역할을 맡아왔다. 선량하기 그지없는 이현우의 앳된 얼굴은 확실히 그를 아역배우로서 돋보이게 하는 강점이었다. 덕분에 꽤 오랫동안 ‘순백색’으로 머물렀던 이현우는 지난해 방영된 <적도의 남자>를 통해서 비로
[이현우] 소년에서 성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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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캐스팅으로 연기에 발을 들인 배우 박기웅은 길을 외우는 취미가 있다고 했다. “새로운 곳에 가면 그 동네를 많이 걸어다닌다. 처음 간 장소에서 느껴지는 설렘이 너무 좋아서.” 그 설렘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나면,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두발로 직접 작성한 동네의 지도가 완성됐다. 이 소박한 취미는, 그의 연기 경력에 대한 비유도 된다. 2005년 영화 <괴담>으로 데뷔한 이래 매 작품 새로운 얼굴로 관객의 인지력과 기억력을 시험해온 그는, 새로 이사 온 동네를 산책하듯 30여편의 영화와 드라마를 통과해왔다. <동갑내기 과외하기 레슨2> 같은 코미디영화부터 한/중/일 합작 드라마 <풀하우스 테이크2>까지 목록도 다양하다. “어느 작품을 들어가든 첫 촬영 때의 그 간들간들한 기분을 정말 좋아한다. 그렇게 새 캐릭터를 몸에 익히는 게 그전 캐릭터에서 빠져나오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더라.” 그 간들간들함에 이끌려 그는 쉼 없이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확
[박기웅] 늘 처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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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헝헝~. 푸하핫~. 왕의 위용은 온데간데없이 김수현은 인터뷰 내내 참으로 다양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김수현에게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동구의 모습이 아직도 몸에 배어 있는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제가 바보 같다는 말인 거죠?”라며 또 웃었다. 달동네 바보 동구로 위장해 살아가는 남파간첩 원류환. 김수현이 스스로 선택한 임무였다. 얘기를 나눌수록 김수현은 엘리트 간첩으로 살았던 때보다 동네 바보로 살았던 시간에 더 머물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된 액션연습과 혹독한 한겨울의 촬영이 김수현을 거세게 몰아붙여서였을까. 오기와 끈기로 스스로를 다잡아야 했던 시간들을 김수현은 웃음에 실어 날려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 문득 김수현에게 속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드라마 <드림하이> <해를 품은 달>, 영화 <도둑들> 이후 인기에 취해 있는 대신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데 몰두했던 김수현을 만나 은밀하게 물었다. 당신의 진짜 정체
[김수현] 위대한 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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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남한의 달동네에 잠입했던 세명의 간첩들이 5월24일 공덕동 스튜디오에서 접선했다. 김수현, 박기웅, 이현우는 원류환, 리해랑, 리해진이 영화에서 나누었던 진한 동료애를 스크린 밖에서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었다. 철근이라도 씹어먹을 것만 같은 젊음! 그 젊음의 에너지로 스튜디오를 후끈 달구어놓았던 세 배우들이 은밀하고 위대한 속사정에 대해 털어놓았다.
[은밀하게 위대하게] 그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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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즈 다이어리] <스타트렉 다크니스> 멀미할 것 같아요!
[헌즈 다이어리] <스타트렉 다크니스> 멀미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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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보는 영화’를 표방하는 무주산골영화제가 오는 6월13일부터 4박5일 동안 열린다. 보도자료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오래도록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일했던 김건 집행위원장과 조지훈 프로그래머라는 이름이었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는 큰 내홍을 겪었다. 6월 유운성 프로그래머가 해임된 이후 민병록 집행위원장과 김건 부집행위원장이 사퇴했고 11월에는 조지훈, 맹수진 프로그래머, 홍영주 사무처장도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고석만 신임 집행위원장 체제로 올해 14회 영화제를 무사히 치렀다. 일단 규모와 성격 등 확연하게 차별화되는 두 영화제 사이의 연결지점을 굳이 찾으려 했다기보다, 그의 근황과 더불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다양한 직함으로 무려 12년이나 일했던 그의 새로운 영화제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었다. 그는 전주의 ‘삼인삼색’과 ‘숏숏숏’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매니저이기도 했다. 그렇게 ‘잘 쉬고 싶었지만 어쩌다보니 또 영화제’라는 그는 인터뷰 내내 영화제 예찬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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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캠핑극장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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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을 다뤄온 다큐멘터리 제작자이자 텔아비브 대학에서 영화, 문학,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여성이고 어머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는 영화감독이다. 미할 아비아드 감독의 <보이지 않는>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보이지 않는-폭력의 관계구조’ 섹션의 쟁점에서 가장 호소력 짙은 영화 중 하나다. 영화는 연쇄강간범의 피해자였던 두 여성이 32년 뒤에 만나 과거를 복기하는 과정을 다루는데, 여주인공이 든 카메라는 증언을 기록할 뿐이다. 그 어두운 창 너머 암흑 속에 ‘보이지 않’게 잠복해 있는 폭력의 기원을 그녀와 함께 더듬어보았다.
-영화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들었다. 두 여주인공이 32년 전에 이른바 ‘예의바른 강간범’에게 피해를 입었는데, 이 모순적 별명의 유래는 무엇인가.
=영화는 두 여주인공에게 트라우마가 된 강간사건을 다루고 있다. 강간범은 저널에서 ‘예의바른 강간범’(polite rapist)이라 불렸다. 그는 여성을 강
[flash on] 상처란 보이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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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드는 밤>은 결혼 2년차 부부 현수와 주희의 일상과 고민을 담담하게 지켜본다. 현수와 주희는 곧 장건재 감독과 김우리 프로듀서 부부의 모습이기도 하다. 전작 <회오리 바람>처럼 감독 본인의 경험이 담겼는데 만듦새는 한층 꼼꼼하고 견고하다. 혼자만이 아닌 두 부부의 고민이 한데 녹아들어가서다. “사진을 인화하듯이” <잠 못 드는 밤>을 정성스럽게 건져올렸다는 장건재 감독은 요즘이야말로 진짜 ‘잠 못 드는 밤’의 연속이라고 털어놓았다.
-<회오리 바람>에 이어 다시 감독 본인의 이야기다.
=내가 제일 잘 아는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침 쓰던 시나리오가 진척이 더뎌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기 위한 가벼운 작업이 필요했고, 당시 결혼 3년차였던 우리 부부의 삶을 영화에 담아보기로 했다. 영화 일을 시작하고 난 뒤 겪은 가장 큰 변화가 결혼이다. 영화 하는 사람들의 상황이 대개 비슷하지 않나. 대부분
[flash on] 결혼 3년차 우리 부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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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로맨틱코미디영화 한편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로맨틱코미디의 명가 워킹 타이틀 제작이라고는 하지만 1년차 부부에게 찾아온 새로운 사랑이란 설정이 참신하다고는 말 못하겠다. 하지만 식상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영화 앞에 댄 메이저라는 이름을 더하는 순간 알 수 없는 기대가 몽글몽글 피어난다. 무려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의 작가 아닌가. 이토록 발칙하고 기발한 캐릭터를 만들어낸 인물의 영화가 밋밋하게 끝날 리 없다는 일종의 확신. 첫 연출작 <저스트 어 이어>를 들고 찾아온 감독 댄 메이저의 의외의 일면을 만나보자.
-첫 연출작을 로맨틱코미디영화로 고른 이유가 있나.
=나는 나의 결혼생활을 통해 드러나는 모순을 10년간 관찰해왔고, 이제 영화로 만들어서 풀지 않으면 안될 만큼 많은 소재가 생겼다. (웃음) 결혼식장에서 커플들을 볼 때마다 ‘저들은 얼마나 갈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하는데, 한번은 아내의 친척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신랑이 신
[flash on] 모니터 뒤에서 웃음 참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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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쇼핑을 보고 있으면, 내게 필요한(그런데 아직 사지 않은) 물건이 얼마나 많은지 놀라게 된다. 어떻게 저 물건이 없이 지금까지 살았을까? 물광 메이크업을 완성하는 쿠션 파운데이션, 장마철에 딱인 젤리 슈즈, 각얼음으로 쉽게 빙수를 만드는 빙수기에 아무 컵에나 랩을 대고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밀봉되는 매직랩, 와이어가 없는 속옷과 천연 아이스크림 제조기…. 그렇게 홈쇼핑의 ‘오늘 이 구성 마지막’에 현혹되어 내 생활을 개선시킨 결과는 60년대의 산아제한 구호와 같다. 무턱대고 사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이런 내게 천금 같은 한마디가 있었으니,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나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없어도 어떻게든 된다.” 정리 전문가인 곤도 마리에의 <버리면서 채우는 정리의 기적>은 베스트셀러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의 실천편이다.
곤도 마리에식 정리 기술의 핵심은 ‘설레지 않는 물건은 처분한다’는 것이다. 물건을 만져보고 설레면 두고 설레지 않으면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정리하면 복이 온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