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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와인을 마신다. 좋아하지 않아서다. 그래야 좀 적게 마시니까. 나날이 알코올 민감도가 높아지는 내 몸이 나는 나쁘지 않다. 살살 달래며 잘 살고 있다. 만성두드러기를 달래려 항히스타민제를 주기적으로 복용하거나 발톱무좀을 잡으려고 수개월간 새 발톱 만들어내는 약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럴 나이가 된 것이다. 필요한 만큼 벌고 버는(주는) 만큼 일하는 ‘노동권’이 대단히 행운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나이이기도 하다.
<시사IN>의 19대 국회의원 전수조사 결과 민주통합당 기대주로 첫손에 꼽힌 은수미 의원의 ‘노동 민감도’ 발언(“노동권에 대한 민감도가 높은 사회, 내 권리만이 아니라 타인과 전체의 권리에 대해서도…”)을 보면서, 이런 이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선 ‘시대’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사노맹 활동가로, 고문 피해/수감자로, 국책기관 연구자로, 정치인들의 ‘과외 선생’으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자리가 바뀌었지만 스무살 이후 은 언니의 화두는 ‘노동’이었다.
[김소희의 오마이이슈] 시대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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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와 21세기의 차이는, 뜬금없지만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극단적으로 ‘청년 시절’의 범위가 달라진 데 있지 않을까. 적어도 20세기 말엔 스무살만 넘으면 어른 대접을 받았고 서른살이 넘으면 ‘늙은이’ 취급을 당했다. 그런데 21세기에 20대는 10대의 연장처럼 보이고 외려 서른은 넘어야 ‘어른’ 인증을 받는다. 영화든 드라마든 로맨스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삼십대로 바뀌었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이게 좋고 나쁜 건 아닐 것이다. 그 이유가 좀 궁금할 뿐이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오래 살게 되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도 뭔가 잘 안 풀리는 건 마찬가지잖아?
<내가 고백을 하면…>의 남녀 주인공들이 집을 바꾸는 설정은 <로맨틱 홀리데이>와 비슷하지만(이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맥락이나 과정은 전혀 다르다. 삼십대의 연애를 다룬 이 영화에 깔리는 정서는 (내가 볼 땐) 불안이다. 대충 서른이 넘었지만 일도, 삶도 제대로 굴러가는 느낌이 없다는
[차우진의 귀를 기울이면] 혼자보다 둘이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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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가을, <뉴욕타임스>는 새로 시작하는 TV시리즈들을 일괄적으로 훑는 지면에 ‘버자이너의 시즌’(Season of Vagina)이라고 표제를 달았다. <뉴걸>의 리즈 메리웨더, <업 올 나이트>의 에밀리 스파이비, <서버가토리>의 에밀리 카프넥, <두 여자의 위험한 동거>의 나나치카 칸, <휘트니>와 <투 브로크 걸스>의 휘트니 커밍스까지 새 TV시리즈의 크리에이터 중 여성의 비율이 현저히 높다는 걸 그렇게 표현한 거다. 이 다섯편의 공통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는데, 다섯편 모두 시트콤이며 20~30대 젊은 여성 관객층을 겨냥한다는 것까지 같았다. 게다가 언급된 모든 시리즈가 2012년에 시즌2로 돌아오면서 2011년은 미국 TV에 신세대 여성파워를 알리는 분수령이 되었다. 이중 유일하게 자신의 쇼에서 타이틀롤까지 책임지는 휘트니 커밍스는 티나 페이, 에이미 폴러의 뒤를 잇는 코미디언 출신의 여성 크
[안현진의 미드 크리에이터 열전] 웃긴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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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로 드라마를 읽어보자. 10% 미만의 낮은 시청률에서 점점 치고 올라가 20% 중반을 넘긴 경우는 대개 극본이 탄탄한 복수극이 입소문을 탄 경우다. 시청률이 낮아도 구매력있는 시청층이 확보된 경우는 그들을 겨냥한 광고들이 쏠쏠하게 붙기도 한다. 대박을 친 주말극의 후속 작품은 관성으로 채널을 고정하던 시청층의 덕을 보기도 하고, 처음 시청률에서 반 토막이 난 경우는 드라마가 산으로 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30%, 드물게 40% 고지가 눈앞인 드라마는 분당 시청률이 높거나 화제가 된 장면이 반복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추국을 받는 한가인, 인두가 코앞에 놓인 한가인, 곤장을 맞는 한가인, 오랏줄에 묶인 한가인… 등등. 그리고 시청률이 검증된 공식들은 이후 드라마들에 영향을 끼치며 짧은 주기의 트렌드를 만든다. 시청률 외에 제작비나 PPL, 해외 판권 수익 등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제작환경의 규모 역시 드라마에 영향을 끼치는 강력한 변수다.
그런데 만약 이 모든 숫자들을 장악
[유선주의 TVIEW] 낚여줄게 파닥파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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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소쿠로프의 <파우스트>를 보았다. 리뷰 때문에 스크리너로 미리 보았지만 영상을 스크린으로 확인하고 싶어 극장으로 향했다. 스크린으로 대하면서 ‘소쿠로프가 대결의 대상으로 삼은 인물은 요한 볼프강 괴테가 아닌 F. W. 무르나우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소쿠로프의 <파우스트>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면 무르나우의 <파우스트>를 꼭 찾아볼 일이다. 80여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두 완벽주의자가 창조한 두편의 <파우스트>는 용과 호랑이의 묵직한 싸움을 연상시킨다. 소쿠로프의 <파우스트>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시선으로 시작해 거꾸로 지상에서 하늘로 멀어지는 시선으로 끝난다. 앞의 시선이 메피스토의 것이라면 뒤는 신의 것이리라. 이 장면은 무르나우 버전에서 파우스트가 메피스토의 망토에 올라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비행하며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과 연결해 읽을 만하다. 소쿠로프의 <파우스트>는 현실을 빚어
[이용철의 아주 사적인 클래식] 무르나우의 <파우스트>도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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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포맷, 예리한 윤곽, 강렬한 색채로 현실보다 더 강력한 현실을 제시하는 구르스키의 사진은 우리를 당혹시킨다. 너무나 사실적(=사진적)이면서 동시에 너무나 허구적(=회화적)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도 엇갈린다. “이것은 진짜 세계다. 내 모든 사진에서 이 점이 내게 중요하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말하기를, “결국 우리는 그림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게 뭘 보여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요점은 그것이 그림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구르스키의 말은 모순되는 게 아니다. 돌이켜보건대 사진은 등장 초기부터 ‘예술이냐, 기술이냐’의 정체성 혼란에 빠져 있었다. 사진을 처음 본 사람들은 이 새로운 이미지를 자신들에게 익숙한 매체, 즉 회화의 문법으로 파악하려 했다. 그 결과 초창기 사진은 고전회화를 모방하여 인위적으로 세팅된 배경에서 모델이 연출하는 약속된 포즈를 담곤 했다. 이를 ‘픽토리얼리즘’(pictorealism)이라 부른다.
하지만 사진은 곧 자신의 매체성을 의식하게 된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컴퓨터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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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 시간은 언제쯤 찾아오는 것일까? 하던 일을 재빨리 마무리 짓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된다. 아, 생각보다 간단하군요. 그럼요, 간단하고 말고요. 참, 말이 쉽다. 한가한 시간은 쉽게 찾아오는 법이 없다. 하던 일이 끝날 때쯤이면 숨어 있던 일이 모습을 드러낸다. 두더지들처럼, 아무리 뿅망치를 내리쳐도 끊임없이 올라온다.
일의 진공 상태, 아무런 할 일이 없는 순간이 불현듯 찾아오면 다른 사람들은 뭘 하는지 모르겠다. 내 경우엔 자주 바뀌는데, 한때는 컴퓨터 게임을 했다. 장대한 서사가 있는 게임은 좋아하지 않았고, 야구나 축구나 테니스, 총격이나 격투기 게임처럼 짧은 시간 안에 승부가 결정나는 종류를 좋아했다. 대여섯 시간 동안 격렬하게 게임을 하고 나면 온몸이 녹초가 되고 눈알이 빠질 듯 아프고 어깨가 쑤셔온다. 한번은 닌텐도 <슈퍼마리오> 게임을 3일 동안 쉬지 않고 한 적이 있는데, 얻은 것은 게임의 완전공략과 손가락의 순발력과 허무함이요, 잃은 것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 노래가 만들고 싶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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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다이어트를 했다. 외국 거리패션 사진 속에서 20대 아가씨들이 입고 있는 데님 반바지, 길이를 너무 짧게 자른 나머지 주머니 안감이 바지 밑단으로 비어져 나와 있는 그 반바지가 죽을 만큼 입고 싶었거든. 타고나기를 ‘상박하후’ 체형인지라 살을 빼고 또 빼도 거리패션 사진에 나오는 아가씨들처럼 가시 다리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가시 다리만 다리더냐, 섹시하기로 치자면 밀라 쿠니스나 스칼렛 요한슨처럼 탄탄한 허벅지가 백배는 더 섹시하지, 혼자 생각했더랬다.
그래서 입었냐고? 못 입었다. 빼도 빼도 빠지지 않는 허벅지 살도 살이지만, 더 큰 이유는 나이였다. 어느 주말 오후, 나보다 서너살 많은 회사의 누군가가(편의상 그녀를 A라 부르기로 한다) 그 바지를 입고 온 걸 보는 순간, 세상에는 체형 때문이 아니라 나이 때문에라도 포기해야 하는 옷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나 할까.
몸에 딱 붙는 탱크톱에 힙 라인이 보일 듯 말 듯한 반바지를 입고 밀짚으로 엮은 모자까지 눌
[fashion+] 다이아몬드는 훔쳐도 나이는 안 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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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1985>는 이제까지 반기득권 편에서 나온 정치영화 가운데 가장 대중적이고 선동적인 영화다. 고 김근태 의원이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겪은 고문에 기초한 이 영화는 매우 명시적인 방식으로 소재를 다룬다. 간단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빼면 주인공 김종태(박원상)가 남영동 분실에서 고문당하는 과정이 영화의 내용 전부다. 명시적이며 동시에 미시적이다. 나는 이 단순한 구조의 영화가 내재한 드라마가 예상 밖으로 많은 겹을 갖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여느 보통 관객과 마찬가지로 100여분 동안 주인공이 고문당하는 스토리에 불편한 죄의식을 예감했던 나는 영화가 재미있었다. 이게 누군가에게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보일지라도 실제로 그랬다. 재미라는 표현이 부적절하다면 활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전작 <부러진 화살>에서 굳이 숏간의 짜임새에 신경을 쓰지 않은 듯했던 정지영 감독의 연출감은 이 영화, <남영동1985>에선 훨씬 정교하게 느껴진다. 이 활
[신 전영객잔] 공존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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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김아중)은 이미 사랑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도 세상에 이 남자뿐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혹은 좀더 애쓰면 다시 관계가 회복될 거라는 생각 때문인지 비장의 이벤트를 준비한다. 수화기 너머 남자친구에게 앙큼한 목소리와 발칙한 신음소리로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것. 하지만 전화기를 바꾼 지 얼마 안되어 실수로 그만 딴 남자에게 전화를 걸고 말았다. 영화는 이후 오랜 남자친구 승준(강경준)과 그날 이후 PS 파트너가 된 현승(지성) 사이를 오가는 윤정의 내면을 따라간다. 김아중에게 얼마나 감정이입을 하느냐, 바꿔 말해 김아중이 윤정을 얼마나 생생한 현실의 인간으로 만드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결이 달라지는 영화다.
김아중은 무엇보다 윤정을 온전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두살 많은 남자 감독인 변성현과 친구처럼 부대끼며 많은 아이디어를 냈고, 이제껏 출연한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자면 애드리브도 서슴지 않았다. “이번 작품은 일단 가볍고 편안하고 밝게 가고 싶었다. 맨 처음
[김아중] 늘 당당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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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고 반듯하고 올곧다. 낮고 정갈한 목소리, 곧추세운 허리와 어깨, 당당한 눈빛에서 오는 신뢰가 그의 주변을 그런 공기로 채워나간다. 친구들과 골목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 언제나 정의의 편 역할만 도맡아 했을 것 같은 친구, 교과서에 실린 정답 같은 배우, 지성은 처음부터 바르고 성실한 캐릭터로 작품의 중심에 서 있었다. 아니, 그가 등장하는 순간 맡은 역할에 관계없이 바르고 성실한 인물이 되어버린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믿음직하고 사귀고 싶은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그간 영화보다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나에게 도움을 주신 분들께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었다. 그분들이 부르면 두말 않고 달려갔고 그러다보니 늘 스케줄이 미리 잡혀버려서 영화를 할 타이밍이 좀처럼 맞지 않았을 뿐”이라는 그의 대답을 듣노라면 진정 곁에 두고 오래 사귀고 싶은 사람이란 생각이 절로 인다. 자연인 지성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끄는 인덕
[지성] 오랜 친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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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서른이 된 여자는 ‘결혼과 타협할 것인가, 직장의 고독한 투사가 될 것인가’ 고민하고, 남자 역시 ‘결혼과 타협할 것인가, 뮤지션의 꿈을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인가’ 하루에도 몇번씩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렇게 어떤 식으로든 ‘변화’에 직면한 두 남녀가 각자의 고민을 전화로 토로하면서 만난다. 여자는 온갖 방법으로 식어버린 애정에 불을 지피려 하고, 남자는 전 여자친구에게 멋진 새 남자가 생겼다는 소식에 ‘열폭’한다. <나의 PS 파트너>는 지금 그 나이대의 남녀라면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법한 고민 속으로 인물들을 밀어넣는다. 지성과 김아중은 무척 생생하고 현실적이도록 그 캐릭터의 무게를 끌어안고 ‘밀당’한다. 그 누구도 평생 겪어보지 못할 것 같은 판타지로 시작된 PS 통화가 그렇게 현실로 안착한다. 지성과 김아중, 그들에게 이런 알록달록한 매력이 있었나, 가만히 시선이 머문다.
[나의 PS 파트너] 사랑하고 싶다면 이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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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 저녁을 먹다가 갑작스럽게 마주한 안철수 후보의 사퇴 기자회견을 보면서 감정이 참 복잡했다. ‘아… 이건 아닌데…’라는 느낌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심정이 동시에 밀려와 감정을 추스르기가 어려웠다. 아마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제 와 돌이켜보건대 안철수 후보는 마지막에 자신이 양보하는 것을 하나의 카드로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았다면 시기적으로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 ‘정치개혁’이란 이슈를 고집스럽게 고수하거나, 자신의 지지율이 월등히 높을 때 주도적으로 단일화를 추진하지 않았던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물론 세부적인 면에서 유불리를 따지고, 기싸움을 했던 면모에서 어떤 이들은 이 역시 전략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정도의 전략은 후보로 나선 이상 당연히 따져봐야 하는 것. 더구나 진짜로 후보를 사퇴하고 떠난 이상 모든 걸 오로지 전략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은 합리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
[김진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진정성있는 기능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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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의 음질 손실을 각오하더라도 사람들이 블루투스 헤드셋을 쓰는 건 역시 편리함 때문이다. 거추장스럽고 쉽게 꼬이는 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건 유선 전화기와 무선 전화기의 차이점처럼 명확한 장점이다. 소니가 새로 출시한 DR-BT150NC는 편리함과 원음의 소리를 함께 잡았다고 말하는 블루투스 3.0 기반 헤드셋이다. 장거리 출장이나 출퇴근 시 외부의 노이즈를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가지고 있어 기존 블루투스 기기들의 단점이었던 외부 소음 유입을 효과적으로 막아준다.
여기에 13.5mm의 대구경 드라이버를 탑재해 블루투스 기기의 단점이었던 ‘약한 소리’도 어느 정도 보완해준다. 작고 손에 쥐기 쉬운 원형 디자인이라 떨어뜨릴 위험이 적고 실리콘 이어버드 덕택에 착용감도 훌륭하다. 블랙과 화이트 컬러 두 가지만 있다는 것이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다. 12만9천원.
[gadget] 잡음은 줄이고 소리는 키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