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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첫 직장은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제작팀이었다. 보도연맹, 인혁당 사건 등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그늘을 하나하나 들춰낸 이 프로그램의 취재가 이루어지던 지난한 시간들을, 당시 막내작가였던 나는 가끔 떠올린다. 옆자리 작가 언니는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과 관련된 의혹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30년 전 조선호텔 근무자와 운전사 등 이름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이들의 연락처를 추적했고, 또 다른 언니는 80년대 운동권 학생 조직에서 별명으로만 불리던 누군가를 찾아내려 애썼으며, 과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라 명명되었던 사건을 맡은 나는 육사 졸업생 연락망을 샅샅이 뒤져 조금이라도 입을 열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옛 장성들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제주 4.3 희생자 가족, 삼청교육대 피해자, 늙고 병든 북파 공작원 등 취재원 대부분은 가난하고 불행했으며 ‘과거사’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그들의 고통은 현재형이었지만 방송은 오래된 상처를 헤집을 뿐 보상도 치유도 해줄 수 없었다. 그리
[최지은의 TVIEW] ‘17 대 1’의 카타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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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들판을 걷던 네명의 사내가 갑자기 불어온 한줄기 돌풍에 고개를 숙이고, 그중 한 사내가 들고 있던 서류철에서 문서들이 바람에 날려 하늘로 흩어져 오른다. 제프 월의 <갑작스런 바람>(1993)은 언뜻 보기에는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하는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 것처럼 보이나, 실은 배우들을 데려다 연출하여 찍은 사진들을 포토숍으로 합성한 것이다. 원작은 일본의 판화가 호쿠사이의 작품으로, 작가는 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일본의 목판화를 사진적 수단으로 재연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제프 월, 카메라를 든 화가
흥미로운 것은 한갓 ‘상상의 산물’인 회화가 ‘현실의 기록’인 사진의 외양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점이다. 사실 제프 월은 오래전부터 작품에 명작 회화의 구성을 차용한 바 있다. 가령 <파괴된 방>(1979)은 들라크루아의 <사르디나팔의 죽음>(1872)을, <여성들을 위한 그림>(1979)은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사진은 회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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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톤스의 신보 ≪Open Run≫의 재킷을 한참 들여다본 뒤에야 그 이미지가 비행운이라는 걸 알았다. 컴퓨터그래픽인지 실제 사진과 배경을 합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둠 속의 비행운을 한참 동안 보고 있자니 현실에서 그런 장면을 보고 싶었다. (불가능하겠지만) 완벽한 어둠 속에 누워서 뭉게뭉게 피어나는 하얀 비행운을 한번쯤 보고 싶었다. 앨범 속 노래처럼 <검은 우주>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겠지. 마음에 꼭 드는 앨범 재킷이다. 소설가 김애란의 소설집 <비행운>의 표지였어도 무척 좋았겠다.
예전에는 (돈이 무척 많았는지) 앨범 재킷만 보고 CD를 고른 적도 많았다. 재킷의 이미지와 폰트를 선택하는 감각만 봐도 어떤 종류의 음악을 하고 얼마나 음악을 잘하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자주 성공했지만 가끔 실패한 CD들이 지금 음반장 한구석에 방치돼 있다. 요즘은 그러지 않는다. 그렇게 무모하지 않다.
무모하던 시절에 페퍼톤스의 ≪Open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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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에 아버지를 잃은 뒤 진배(진구)는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다. 엄마는 땡전뉴스에 그 사람이 나오면 실성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래도 그가 희망을 잃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다 해태 타이거즈 덕분이었다. 홈경기가 있는 날이면, 그는 어김없이 무등경기장으로 향했다. 동전 한푼 없는 처지라 경기장 입장은 7회 이후에나 가능했다. 그때가 되면 관리 아저씨들이 퇴장객들을 위해 출입구의 문을 열어두었기 때문이다. 83년에 이어 올해에도 해태 타이거즈는 진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런데 오늘, 학교에서 바로 그 해태 때문에 반장 녀석과 심한 말다툼을 벌이고 말았다. 동네 만화방을 들락거리며 야구 만화를 섭렵한 그 녀석이 해태 타이거즈의 로고가 일본의 한신 타이거즈와 흡사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장훈 선수의 인기가 아직도 여전한 터라 일본 프로야구 무대에서 재일동포 주인공이 활약하는 내용의 만화들이 적지 않았다. 진배는 곧바로 따져 물었다. 그렇게 치면 롯데
[design+] 호랑이의 심장은 아직도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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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버스 안에서 <나는 꼼수다>를 들었다. ‘봉알단, 정우택 음모, 터널 디도스’라는 부제를 단 ‘봉주 22회’였다. 듣다보니 뭐랄까? 수업 중에 멍때리고 있다가 담임한테 분필로 마빡을 맞은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돋는다. 터널 디도스라니? 난 처음엔 또 무슨 새로 나온 악성코드 같은 건가 싶었다. 알고 보니 지난해 4.27 국회의원 재/보선 때 새누리당 김태호 후보쪽이 유시민에게 날린 1억원짜리 하이킥이었던 거다. 나 참, 이걸 이제야 주워듣다니. 오만상을 찌푸려가며 생각해보니, 가만 이거 참 절묘한 말이다. 디도스, 분산공격과 좀비 PC, 그리고 비정상적인 트래픽의 폭주로 인한 마비. 누가 지었는진 몰라도 천재다 천재. 낮에는 카니발로 고령의 유권자들을 실어나르고, 저녁에는 창원터널의 교통 체증을 유발해 젊은 유권자들이 제 시간에 투표장에 도착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 공작. 그래서 ‘터널 디도스’. 이 희한하고 뻔뻔한 사건에 대부분의 언론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사실
[SO WHAT] 장님이 눈먼 말을 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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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7월에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계기로 프랑스의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평자들 몇명이 모여 했던 발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트래블링 숏은 도덕의 문제다”라고 한 장 뤽 고다르의 발언이었다. 미학의 기술은 도덕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말이므로 경청해야겠지만, 적어도 레네의 영화에 관해서라면 나는 이 말의 유효기간이 훨씬 오래전에 지났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반문은 간단하다. 레네의 영화 <마음>과 <잡초>와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의 트래블링 숏은 전적으로 도덕의 문제인가.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 전쟁 이후의 사회정치적 양심과 모더니티의 도래를 읽어낸 고다르로서는 그 어떤 긴급함과 중요도라는 측면에서 그러한 선언적 발언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네에게 트래블링 숏은 혹은 그것을 포함한 레네의 미학은 도덕의 강령보다는 다른 것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같은 자리에
[신 전영객잔] 나와 레네와 백석의 눈(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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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의 과거와 미래가 만났다. 12월1일, <호빗: 뜻밖의 여정>(이하 <뜻밖의 여정>)의 일본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피터 잭슨 감독과 배우 마틴 프리먼, 앤디 서키스, 리처드 아미티지, 엘리야 우드는 중간계 호빗마을 샤이어에서 방금 툭 튀어나온 것 같은 소박함과 친절함으로 아시아 취재진을 맞았다. 일본 기자회견에서, 회견이 열리기 전 한국 매체와 가진 20분간의 인터뷰 자리에서 시리즈의 새 출발을 앞둔 그들이 전한 소회와 기대감을 중계한다.
큰 영화관에서만 볼 수 있는 스펙터클 만들었다
피터 잭슨 감독 인터뷰
-<반지의 제왕> 시리즈 이후에 <호빗> 시리즈를 또다시 연출하게 된 계기는.
=<호빗>을 영화화하는 것이 처음에는 확실하지 않았다. 영화의 저작권을 두 군데서 나눠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문제가 해결되면서 제작이 현실화됐다. 그리고 솔직히 얘기하면 다른 사람이 영화를 찍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반지의 제
[호빗: 뜻밖의 여정] <반지의 제왕>과 <호빗> 스토리는 달라도 스타일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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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마지막 금요일. 아침부터 진풍경을 목격했다. <호빗: 뜻밖의 여정> 일본 정킷에 참석할 40여명의 한국 기자들이 트렁크를 이끌고 공항이 아니라 롯데시네마에 모인 것이다. 보통의 영화 정킷이 출발하기 며칠 전 국내 모처에서 시사회를 열거나 정킷이 열리는 장소에서 영화를 상영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본으로 출발하는 당일 아침 진행된 이날의 시사회는 무척 이례적인 경우. “오늘 보신 영화는 저희 직원이 LA에서 받아와 새벽 5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한 따끈따끈한 작품”이라고 수입사 워너브러더스코리아의 남윤숙 이사가 덧붙였다. <호빗>의 후반작업이 워낙 촉박하게 끝났기 때문에 시사회도 늦을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었다. 아침부터 분주하긴 했지만, 한편으론 대규모 인원이 일사불란하게 트렁크를 끌며 극장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새 여정을 시작하는 <호빗> 시리즈의 정서와 맞닿아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누군가는 이 모습을 두고 “영락없는 ‘반지원정대’”라며
[호빗: 뜻밖의 여정] <반지의 제왕>에서 60년 전 전설이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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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눈만 뜨면 GV(Guest Visit, 관객과의 대화)를 하러 극장에 간다.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정도만 쉴 뿐, 개봉 이후 매일매일 GV와의 전쟁이다. 다음주엔 지방 GV 투어에 나서야 한다. 감독과 배우의 GV가 잡혀 있어야 그나마 관객이 들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다. 엊그제 서울독립영화제 조영각 집행위원장은 GV 순례에 나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이제 그런 시대가 됐다니까.”
‘그런 시대’란 어떤 시대를 말하는 걸까? 예술-독립영화가 극장에서 텍스트 자체로 소비되지 못하고, 감독과 배우들과 함께 하나의 이벤트로 묶여 소비되는 시대란 어떤 시대일까?
사실, GV 자체가 영화제 행사. 90년대만 해도 일반 극장에서 이런 형태의 행사를 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영화가 개봉되면 ‘무대인사’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2000년 들어, 해외 아트하우스영화들이 속속 수입되고, 국내에서도 장편독립영화 개봉이 현실화되면서 영화제용 행사였던 GV가 관례화하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의지 혹은 안간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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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1989 1집 ≪B.C.603≫으로 데뷔
1991 2집 ≪Always≫
1993 3집 ≪My Story≫
1994 더 클래식 제작
1995 4집 ≪Human≫
1997 5집 ≪Cycle≫
1999 6집 ≪The War in Life≫ 라이브앨범 ≪무적전설≫
2001 7집 ≪Egg≫
2003 한국 백혈병 어린이 재단 명예홍보대사
2004 8집 ≪Karma≫
2005 라이브앨범 ≪반란≫
2006 9집 ≪Hwantastic≫
2007 미니앨범 ≪말랑≫
2009 20주년 기념 앨범 ≪환타스틱 프렌즈≫ 발매
2010 10집 ≪Dreamizer≫
2012년 3월31일. 전날 밤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의 마지막 녹화와 뒤풀이를 마치고 느지막이 잠들었던 음악인 이승환(송파구 방이동)씨는 부은 눈꺼풀을 간신히 치켜들고 여느 때처럼 포털 연예기사를 훑다가 영화 <26년>이 제작 난항을 겪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의 마우스는 곧장 웹툰 <26년
[이승환] 무서웠고, 부끄러웠고, 그러자 오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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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프가 처음 등장했을 때,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지내던 연인들은 구원의 메시지를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 무렵에는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얼굴을 보며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격했겠지만, 사람 마음이 다 그렇듯이 언젠가부터는 통화의 ‘질’에 대한 욕심이 생겼을 것이다. 로지텍 TV 캠 HD는 이런 욕심쟁이들을 위한 신제품이다. HDMI 입력 단자가 있는 모든 HDTV와 호환하여, 좀더 편리하고 품질 좋은 영상 통화를 가능케 해준다는 이야기다. 이미 스카이프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소프트웨어나 컴퓨터가 필요하지 않으며, 리모컨으로 간편하게 조작할 수 있다. 물론 태블릿, 스마트폰, 컴퓨터, HDTV 등 다양한 플랫폼의 사용자와 상호 통화가 가능하다. 칼 자이즈와 광각렌즈와 4개의 마이크는 선명한 화질과 음질을 보장하는 요소. TV를 꺼두더라도 전화가 오면 내장 호출기가 작동하기 때문에 중요한 통화를 놓칠 염려는 없다. 가격은 32만9천원.
[gadget] TV로 스카이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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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1. 단 1초간 귀밑을 터치하는 것만으로 체온 측정이 가능하다. 아이를 단잠에서 깨우지 않고도 목적을 달성하도록 해줄 제품.
2. 무엇보다 오차가 0.1도 안팎에 불과할 정도로 정확한 제품이다. 땀, 통풍, 주위 온도 등에 영향을 받는 이마 체온계와 비교할 때 확실한 우위.
3. 정상, 미열, 고열 상태를 녹색, 노란색, 빨간색으로 발광 화면에 보기 좋게 알려준다. 어둠 속에서 진가를 발휘할 만하다.
면역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아이들은 계절의 변화에 특히 민감하다. 약간의 기온 변화만으로도 작고 약한 몸은 힘겨운 상황을 겪곤 한다. 이렇다 보니 갑작스럽게 바람 끝이 매서워지면 부모들도 덩달아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말 못하는 아이가 병을 키우지 않도록, 이상 징후는 없는지 늘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유아의 몸 상태를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일단 체온을 점검해보면 된다. 한때는 빨간 수은이 담긴 유리 막대를 입에 무는 것 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었지만
[gadget] 내 귀밑에 체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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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 감독의 영화 <백야> 속 한 장면처럼 첫눈이 조용히 내리던 11월13일 저녁, CGV 무비꼴라쥬와 <씨네21>이 함께하는 <백야>의 시네마톡이 CGV대학로에서 열렸다. 이날 시네마톡에는 <씨네21> 이화정 기자, 이송희일 감독을 비롯해 <백야>의 두 주인공 배우 원태희, 이이경이 참석해 그 어느 때보다 열띤 관객의 환호를 받았다. <백야>는 <지난여름, 갑자기> <남쪽으로 간다>와 함께 개봉한 이송희일 감독의 퀴어 연작 시리즈 중 하나다. 영화는 원 나이트 스탠드를 위해 만난 두 남자 원규(원태희)와 태준(이이경)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고 해외로 떠났다가 2년 만에 한국 땅에 발을 내딛은 승무원 원규와 퀵서비스맨으로 일하는 태준은 함께 종로 일대 밤거리를 달리고 산책하며 예상치 못한 하룻밤을 보낸다. 과거의 상처로 인해 마음에 빗장을 건 원규와 원규의 마음의 빗장을
[시네마톡] 짝사랑의 경험이 녹아 있는 하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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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말에 부석사에 다녀왔다. 차 없이 대중교통만을 이용해, 새벽에 청량리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풍기역으로 가서 버스로 부석사에 가는 여정이었다. 기차에서도 버스에서도 내가 최연소 승객이었다. 부석사까지의 버스에서 본 밖의 풍경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그 차를 타고 있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고 있는 시골집들이었다. 이리저리 기울어 있는 집에서 허리가 잔뜩 굽은 할머니가 마당에 빨래를 넌다. 할머니의 옷가지뿐이다. 경기도 인근의 농가에서는 피부색 다른 며느리도 드물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날 그곳에는 온통 할머니, 할아버지뿐이었다. 폐가를 이웃해 사는 마지막 주거자들. 어떤 집도 처음부터 폐가는 아니었으리라. 마지막으로 집을 지키는 노인이 세상을 떠나면, 그 집은 그대로 죽어버린다. 그 명징한 사실이 삼십여분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붉게 물든 사과와 더불어 나를 잡아끌었다(한편으로는, 그 누구의 죽음으로도 집의 수명이 다하지 않는 도시의 주거문화도 생각해보게 된다. 도시의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노인과 집은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