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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글을 쓸 때 특정한 버릇이 있다. 습관이라고 부를 수 있겠고, 원칙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들이라 불리는 이들의 버릇을 흔히 스타일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글을 빼어나게 잘 쓰는 한 선배에게 글을 쓸 때 버릇이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 선배가 찬찬히 읊어준 자기만의 버릇들은 ‘작가 수업’ 몇장 몇절에 고스란히 옮겨 실어도 좋을 법한, 세심하고 명료한 주문이었다. 듣다 보니 일일이 번호를 매겨 외우고 싶단 생각까지 들었다. 듣고 나선 녹음이라도 해 둘걸 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그 선배의 글쓰기 버릇은 내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내 글쓰기 버릇은 강박에 가깝다. 습관에도 원칙에도 스타일에도 강박 기제가 작동한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강박에는 어쨌거나 이유가 있다. 잠에서 깨자마자 한 시간씩 글을 쓰는 이가 있다 치자. 세수도 하지 않고, 눈곱도 떼지 않고 글을 쓰는 이에겐 그러한 행동의 근거와 효용이 있을 것이다. 남들을 설득할 수 있느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
[에디토리얼] 몹쓸 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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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즈 다이어리] <월드워Z> 으아아아아~
[헌즈 다이어리] <월드워Z> 으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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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괴한 영화를 만드는 데 통달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이지만 <코스모폴리스>는 더 해괴하다. 끔찍하거나 으스스한 폭력도 없고 피가 난무하지도 않으며 때론 무료하고 고요하기까지 한데 그렇다. 무엇이 이 영화에 그런 괴이함을 자아내는 것일까. 크로넨버그는 <코스모폴리스>로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것은 거대 자본주의의 어떤 지옥도일까? 김효선 평론가의 친절한 해석에 귀기울여보자.
영화 <코스모폴리스>(2012)는 이탈리아계 미국 작가 돈 드릴로가 쓴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돈 드릴로는 미국 문화에 잠재된 불안과 모순을 재현하며 서구문명의 현재와 미래를 탐구해온 작가다. 물론 이같은 설명은 <코스모폴리스>를 연출한 캐나다 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비디오드롬>(1983)과 같은 초/중기 SF 호러 걸작들로부터 <폭력의 역사>(2005)나 <이스턴 프라미스
지금 여기는 지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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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우 감독
<트로피컬 마닐라>에서 문제가 된 장면은 다 성기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김선 감독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은 첫번째 판정 땐 주제 면에서, 두 번째 판정 땐 폭력 면에서 지적받았다.
김경묵 감독
<줄탁동시>에서는 화장실에서 오럴섹스를 하는 장면이 문제가 되었다.
제한상영가 하면 떠오르는 감독들이 있다. 그들의 영화는 선정적이고 과격하다는 오해를 사기도 하고 세상을 삐딱하게 본다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영화를 만들라’며 불편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불편함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가야말로 이 사회의 건강함을 판단하는 척도가 아닐까. 아무도 원하지 않는 불편한 자리에서 기꺼이 한국영화 표현의 영역을 넓히는 데 동참해온 <자가당착>의 김선 감독, <트로피컬 마닐라>의 이상우 감독, <줄탁동시>의 김경묵 감독과 함께 우리 사회에 필요한 불건전함에
더러운 영화만 만든 거야? 우리 그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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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 영화를 상영하거나 유통시키기 위해서는 정부기관의 사전심의를 받아야 한다.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자극하고, 유통속도가 빠른 영화의 특성상 사후조치만으로는 국민의 정신건강 등에 미칠 수 있는 악영향을 적절히 제어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정부에 의한 사전심의제도는 집권자에게 불리한 내용의 영화를 사전에 억제함으로써 지배자에게 무해한 여론만이 허용되는 결과를 초래할 염려가 있는 등 예술활동의 독창성과 창의성 등을 침해하고, 국민의 정신생활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 그래서 현재 헌법은 사전심의 중 가장 폐해가 큰 사전검열만을 금지하고 있다. 여기서 ‘사전검열’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상영이 금지된 상태에서 1)상영허가를 받기 위한 영상물의 제출의무, 2)행정권이 주체가 된 사전심사절차, 3)허가를 받지 아니한 영화의 상영금지 및 4) 심사절차를 관철할 수 있는 강제수단 등의 요건을 갖춘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정부에 의한 사전심의라고 하더라도 허가를 받지
정부 통제 여지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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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을 많이 먹어서) 오래 살 것 같다.” 감독조합이 영등위 위원장에게 책임론을 물은 다음날, 박선이 위원장을 만났다. 박 위원장은 제한상영가 등급에 대한 개인적 의견은 밝히지 않았다. 대신 제한상영가 등급의 폐지나 제한상영관 설치 문제는 영등위의 소관이 아니라고 했다. 등급 제도와 심의는 어디까지나 시대적 산물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그러면서 박 위원장은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결국 우스꽝스러워지고 마는 <어린왕자>의 가로등지기 얘기를 꺼냈다. 심의 제도가 가로등지기의 운명과 비슷하다는 거다. 그렇다면 현재 영등위는 세상의 속도에 발맞추고 있는 걸까.
-김곡, 김선 감독이 영등위를 상대로 낸 제한상영가등급분류 결정취소 소송에서 승소했다.
=제한상영가 제도에 관한 얘기는 환영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영화 한편 한편에 대해 얘기하는 건 조심스럽다.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도 아직 심의 절차가 진행 중이니 이 부분 양해해달라.
-감독조합이 ‘
이 또한 시대적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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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4일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가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에 대해 제한상영가 등급을 내림에 따라 다시 한번 예술표현의 자유와 기관의 검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영상의 내용 및 표현기법, 주제와 폭력성, 공포, 모방위험 부분에 있어 청소년에게 유해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게 영등위의 등급 판결 내용이었지만 구체적으로는 “직계간 성관계를 묘사하는 등 비윤리적, 반사회적인 표현”이 직접적인 문제였다고 적시했다. 이에 대해 김기덕 감독쪽은 “영화의 전체 드라마를 보면 그 의미가 확실히 다르고 그것이 이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중요한 장치이며 연출자로서는 불가피한 표현”이라고 항변했다. 이미 올해 칸국제영화제 마켓에서 각국에 선판매를 순조롭게 마친 뒤 내려진 판정이라 더욱 답답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칸에서 박선이 영등위 위원장에게 “제가 무엇이 부족해서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장면을 묘사했겠냐”는 편지까지 보내며 하소연했을까. 영화의 특정 장면이 청소년에게
철폐하라! 철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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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영화가 있다. 권위있는 국제 영화제의 마켓에서 각국 마케터들의 호평 속에 선판매된 이 영화는 국내에 들어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국내 영화상영등급을 결정하는 기관에서 몇몇 장면을 문제 삼아 개봉이 곤란한 처지에 놓인 것이다. 영화감독들은 관객이 영화를 볼 권리를 박탈해서는 안된다며 등급 결정 기관을 성토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렵게 잡은 메이저 배급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그 영화는 문제된 장면을 자진 삭제해서 다시 심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기시감이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공공연하게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던 군사독재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다. 타이처럼 사전검열로 악명 높은 일부 동남아시아 국가의 사례도 아니다. 이 모든 게 2 01 3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버젓이 상영될 한국영화를 국내 관객만 정상적으로 만날 수 없는 웃기고도 슬픈 사연,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를 통해 드러난 국내 제한상영가 제도의 위선
2013년 대한민국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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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인디포럼영화제에 출품된 독립영화는 800여편. 역대 가장 많은 작품 수다. 다큐멘터리를 제외한다면 극영화가 700여편이다. 일단 상업영화를 셈에서 빼면 이 작은 땅덩어리에서 한해 동안 700편 안팎의 극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시대상을 기민하게 반영하는 독립영화답게 요즘의 화두는 단연 탈북, 조선족, 왕따, 편의점이다. 어떤 이는 왕따문제를 다룬 <파수꾼>과 탈북자영화 <무산일기>의 성취에서 비롯된 모방 열풍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미 그 사안들이 언론의 단골 메뉴가 된 지 꽤 오래됐다.
오히려 공통된 어떤 지반을 찾으라 한다면 바로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다. 뜬금없는가? 아니다, 현재 한국 독립 극영화들이 줄기차게 영향을 받고 모방하는 영화적 아이콘은 다르덴 형제다. 10여년 전 국내에 다르덴 형제의 <아들>이 소개된 이후, 독립-예술영화 연출자들은 카메라를 들기 시작했다. 다르덴이 로제타의 뒷모습을 원테이크로 쫓아가듯, 현재 독립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지루한 모방, 위험한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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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람회와 넥스트, 패닉의 팬이었다.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거침없이 무대를 장악하던 신해철이나, 대학만 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선배처럼 수수하면서도 섬세해 보이던 서동욱에 비해 동글동글한 사촌오빠를 닮은 이적을 더 좋아한 건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발매된 패닉의 2집은 특별히 거금을 들여 CD로 샀다. 괴기스런 일러스트와 ‘냄새’, ‘혀’,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 등 끔찍한 환상소설 같은 가사로 빼곡한 부클릿을 뜻도 모른 채 수없이 읽노라면 가슴이 뛰었다. 열일곱살이 느끼기에도 병들어 썩어 있던 세상, 아니 열일곱살이어서 더 추악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던 세상을 향한 이 강렬하고도 문학적인 은유라니, 그야말로 멋이 폭발했다!
그 뒤 십수년이 지난 뒤 대기업의 카드 광고 모델이 되어 “실용의 길을 배웁니다”라며 미소 짓는 이적은 내가 동경했던 그 사람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지만, 타인의 삶과 선택에 대해 함부로 해석하고 실망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일 거라는 생각이
[최지은의 TVIEW] 오빠와 아저씨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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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그리드 버그먼에게는 성녀의 이미지가 있다. <잔 다르크>(1949) 같은 영화의 역할 때문만은 아니다. 흥행작인 <카사블랑카>(1942) 혹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에서 보여준 청순한 이미지의 영향이 컸다. 상대방이 험프리 보가트 같은 터프가이이든 또는 게리 쿠퍼 같은 신사이든 영화 속 버그먼의 순결성은 절대 보호받아야 할 남성 판타지의 대상이다. 말하자면 남성들은 대개 보가트의 자리에서, 여성들은 버그먼의 자리에서 나르시시즘에 빠진다. 스타는 이 관계를 유지하는 허상이고, 그래서 배우들은 그런 허상을 만들려고 애쓴다. 그런데 버그먼은 신화의 자리, 곧 많은 배우들의 꿈인 나르시시즘의 초상이 됐을 때, 그 자리를 스스로 깬다. 바로 로베르토 로셀리니에게 보낸 연서(戀書)가 발단이다.
히치콕의 배우에서 로셀리니의 동반자로
“로셀리니씨, 당신의 영화 <무방비 도시>와 <전화의 저편>을 봤습니다. 대단한 작품이
[한창호의 오! 마돈나] 두개의 별 할리우드 그리고 네오리얼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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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11일치 일기에 <월드워Z>, 6월12일치에 <버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맨 오브 스틸>에는 켄트씨네 외동아들이 붉은 천을 망토처럼 두르고 강아지와 뛰어노는 회상장면이 있다. 아련해지는 대목이다. 동생과 나도 꼬마였을 때… 하고 추억에 젖다 어리둥절해진다. 가만, 우리는 슈퍼맨 흉내를 낸 건데 슈퍼맨이 아직 오지 않은 우주에 속하는 어린 클라크는 어디서 영감을 얻은 걸까? 모태 기억?
6/10
영화 상영 10분 전. 극장에 입장하기도 커피를 마시러 가기도 애매한 시간이다. 요행히 로비에 빈자리가 보여 걸터앉았다. 같은 처지로 추정되는 옆 커플은 벌써 팝콘을 절반 이상 동내고 있었다. 콜라 한 모금과 팝콘 한 움큼 사이의 짧은 침묵을 깨고 여자가 문득 말했다. “지난번에 이 극장에 혼자 왔었거든. 근데 영화 끝나고 앞줄에서 누가 일어나는데, 우리 엄마인 거야. 엄마도 영화를 혼자 보러 왔더라고. 나, 그날 아침에 엄마랑 싸우고 나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남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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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것이 왔다. 나와 딸이 한 남자를 두고 다투게 될 줄이야.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상대의 눈을 보면 생각을 읽는 능력자로 나오는 수하(이종석)를 본 뒤로 내 딸은 “몇살쯤 그 오빠와 사귈 수 있을까” 헤아리고, 나는 “내가 딱 열(댓)살만 젊었다면 쩜쩜쩜” 한다. ‘15살 시청가’를 엄격히 적용해 종석군과 딸의 만남을 방해할 작정이다.
드라마가 주는 재미의 으뜸은 인물이나 사연에 감정이입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초능력’이 등장해도 억지스럽지 않은 것은 이 드라마의 장점이지만, 문득 우리 사회가 초능력이 아니고는 더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는 지경에 이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선의나 집념만으로는 부당한 권력이나 고착된 체제에 저항할 방법이 없으니 범상한 능력만으로는 ‘이야기’ 만들어내기 참으로 어려울 것 같다. 초능력이라도 등장해야 방어도 되고 응징도 되고 정화도 되는, 그야말로 ‘퐝톼쥐스런’ 지경.
국정원 댓글공작으로 ‘국기문란’
[김소희의 오마이 이슈] 너의 목소리가 막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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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의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이하 <앤젤스 셰어>)를 본 뒤 남다은 평론가가 얼마 전 <씨네21> ‘신전영객잔’에 쓴, 최근 독립영화의 경향에 관한 편지 형식의 글이 생각났다. 나는 그 글이 명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글에 감동받아 필자가 가르치는 대학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프린트해 나눠주려다 말았다. 대신 몇몇 학생들과의 면담에서 그의 글을 언급하며 지적질을 했는데 효과가 있었다. <앤젤스 셰어>를 보고 다시 남다은의 그 글이 떠오른 것은 관객과의 대화 도중 영화청년으로 보이는 한 패기있는 젊은이와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그는 종래의 켄 로치 영화와는 결이 좀 다른 이 영화가 나름 재미있고 연륜을 증명해준다고 한 내 말을 반박하고 그저 능숙함만 보이는 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한국의 독립장편영화를 본 최근의 경험을 말하면서 남다은의 글을 인용했다. 역시 효과가 있었다.
무식하고 더럽고 게으른 쓰레기들…
[신 전영객잔] 이 루저들의 무심한 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