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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루이 다게르가 최초의 사진인 <다게로타이프>를 대중에게 공개한다. 그 이듬해에 또 다른 선구자인 이폴리트 바야르는 익사한 사내의 시체를 찍은 사진을 발표한다. 그 사내는 바야르 자신이었다. 바야르는 다게르와 비슷한 시기에, 하지만 다게르와 다른 방식으로 사진을 발명했다. 하지만 학술원 회원인 아라고로부터 발표를 늦춰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것을 들어주었다가 다게르에게 선수를 빼앗겨버렸다. 아라고는 다게르와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바야르는 자신을 익사한 시체로 연출한 사진을 찍은 뒤 그 뒷면에 이렇게 적었다.
“당신이 여기서 보는 시체는 무슈 바야르, 즉 당신이 보는 사진을 발명한 이의 시체입니다. 내가 아는 한 이 불굴의 실험자는 약 3년 동안 발견에 몰두해왔습니다. 정부는 오직 다게르에게만 너무 관대했고 바야르를 위해서는 해줄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이 불쌍한 사람은 스스로 물에 몸을 던졌지요. 오, 인간 삶의 알 수 없
[진중권의 미학에세이] 익사한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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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들이 있다. 혈혈단신으로 버려진 한 사람이 거친 세상을 뚫고 나가는 이야기만 읽으면, 나는 울컥한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가족 누군가를 찾으러 떠났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신나게 노는 이야기를 읽으면, 흐뭇해진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버리고 정의를 위해 뭉치는 이야기를 읽으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런 이야기들을 읽고 나면 묵직한 무언가가 나를 내리누르는 걸 느낀다. 아,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구나. 이것이 인간들의 이야기구나. 이를테면 이야기를 통해 중력을 느끼는 것이다. 이야기가 있어서 저기 하늘 위보다 이 땅이 좋은 것이다. 저 세상에도 이야기가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일까.
이야기만 그런 게 아니라 유독 마음을 움직이는 소리도 있다. 이상하게 첼로 소리만 들으면 마음이 바닥에 찰싹 달라붙는다. 생각이 공상의 날개를 달고 하늘을 떠다니다가도, 다른 차원이나 우주에 가 있다가도, 첼로 소리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 존재의 중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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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간 영화와 관련된 글을 써왔다. 영화비평을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건 영화 분야 전문가들의 몫이다. 더구나 나 자신도 분야는 다르지만 창작을 하는 입장에서 비평을 할 이유가 없다. 다만 직업적인 이유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건축물이나 장소에 대해서 조금 더 유심히 살펴보고 그들이 영화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내용을 이야기하듯 풀어 써온 것뿐이다.
그러나 나의 글쓰기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영화인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게다가 나 스스로도 남의 분야를 기웃거린 지 좀 오래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글이 내가 영화와 관련해서 쓰는 마지막 글이고, 그래서 이 순간을 위해 아껴둔 어떤 영화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것은 <러브 액츄얼리>다.
나에게 이 영화는 궁극적인 동네 이야기로 다가온다. ‘동네’라는 말은 ‘골짜기’라는 의미의 한자인 ‘동’(洞)자에 우리말인 ‘네’가 붙은 것이다. 산꼭대기에도 마을이 있는 서구와 달리 3부
[architecture+] 궁극적인 동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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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이란 무섭다. 언제부터 그녀를 멜로의 여왕으로 생각하게 된 걸까. 하얗게 빛나는 피부, 긴 생머리, 사슴 같은 눈망울을 마주하는 순간 으레 그럴 거라고 짐작해버린 건지도 모른다. 청초함에 관한 한 한효주의 외모는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녀의 경력을 찬찬히 훑어보면 의외로, 아니 당연히 폭넓은 스펙트럼을 발견할 수 있다. “친근한 이미지 덕분이 아닐까 싶다. 다가가기 쉽고 편안한 매력? 뚜렷하게 예쁘다기보다는 자연스러우니까”라는 그녀의 겸손이 괜한 소리로 들리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똑같은 로맨틱코미디라도 한번도 똑같은 캐릭터를 반복한적 없는 그녀에게 연기 변신은 의도나 강박이 아닌 그저 자연스런 호흡이며 거스르지 않고 자신에게 솔직했던 결과다. “이렇게 해야지 하고 일부러 선택하는 건 아니다. ‘연기 변신을 할 거야!’라기보다는 그때그때 마음 가는 역할을 하는 편이다. 그러다보면 달라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거고. 그래도 이제까지 연기했던 역할들이 한번도 비슷하다고
[한효주] 자체발광 청순발랄 순수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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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만 콕콕 찍어 말하는 모범생. 고수가 딱 그랬다. 그의 얘기엔 틀린 말이 하나 없었다. 진실되지 않다는 인상을 주진 않았다. 오히려 그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엔 한참 뜸을 들인 뒤 “죄송하지만 거기에 대해선 생각을 못해봤습니다”라고 정중하게 그러나 정직하게 대답을 피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을까 싶은 반듯함은 애써 만들어낸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의 연기에도 억지스러운 면이 없다. 고수는 파격적인 변신을 섣불리 시도한 적이 별로 없는 배우다. <썸>으로 시작해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 <초능력자> <고지전>을 거치면서 고수는 조금씩 전진해왔다. 그것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과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이룬 결과다.
<반창꼬>의 강일이란 인물도 그렇게 만났다. “지금까지 장르적 성향이 짙은 작품들을 했는데 일상의 모습들을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를 하고 싶었어요. <반창꼬>를 찍으면
[고수] 꾸밈없는 반듯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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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남선녀가 나란히 마주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저녁밥 먹는 시간이 애매해 스튜디오에서 사진촬영 전 도시락으로 끼니를 해결한 거다. <반창꼬>의 강일(고수)과 미수(한효주) 커플이었다면 이렇게 조용히 밥만 먹진 않았을 텐데. 영화에서도 두 사람이 함께 밥을 먹는 장면이 있다. 미수는 강일에게 점수를 따볼 심산으로 정성껏 싸온 도시락을 자신만만하게 내민다. 강일은 꿈쩍도 않고 식판에 담긴 자신의 밥을 입안에 떠넣는다. 끈질기게 미수가 도시락을 내밀자 강일은 도시락을 쓰레기통으로 골인시켜버린다. 강일과 미수의 성격을 정확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반창꼬>는 사별의 아픔을 간직한 남자와 그 남자의 도움이 절실한 여자의 이야기다. 한편으론 까칠한 것도 고수이기에 용서가 되고, 물불 안 가리고 막 들이대는 것도 한효주니까 용서가 되는 영화다. 그만큼 <반창꼬>에선 두 배우의 매력이 돋보인다. <반창꼬>를 통해 일상의 연기에 도전한 고수와 궁극의 상큼함을
[반창꼬] 멜로드라마의 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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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디추운 날들, 해지는 먼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른 사람이 있다. 아름다웠던 아나운서 정은임. 헤아려보니 그녀가 뜻밖의 교통사고로 지상을 떠난 지 8년이 지났다. 한번 만나본 적도 없는 정은임 아나운서를 나는 왜 이렇게 살갑고도 애틋하게 기억하는가. 그 새벽의 목소리 때문이다.
2003년 10월의 어느 새벽. 신문과 방송을 통틀어 소위 ‘메이저 언론’에서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은 한 노동자의 죽음. 129일간의 크레인 고공농성 중 목숨을 끊은 김주익 한진중공업 전 노조위원장에 대해 그녀는 자신이 맡고 있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오프닝에서 이렇게 전했다. “새벽 세시, 고공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일을 고공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고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
[김선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제 목소리 들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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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영원하다는데 요즘은 인스턴트뿐이다. (관객으로서) 내가 보고 싶은 영화 중 영원한 사랑을 믿는 남자를 기다리는 여성의 이야기가 있었으면 싶었다.” 12월11일 현재 682만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 확장판 포함한 관객수)을 동원하면서 700만 관객 돌파를 앞둔 <늑대소년>은 제작사 비단길 김수진 대표의 ‘사심’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그래서일까. 인터뷰 내내 영화를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는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창립작인 <음란서생> 이후 <추격자> <작전>으로 승승장구하다 지난해 <혈투>가 흥행 실패한 뒤 곧바로 <늑대소년>으로 흥행에 성공한 김수진 대표를 만났다. 영하 13도라는 유독 추웠던 날씨도 직구 스타일인 그의 화법을 막진 못했다.
-비단길 최고의 흥행작이다. 예상은 했나.
=못했지. 잘될거라는 확신은 있었다.
-확신이라면.
=여성 관객이 많이 좋아할 것 같은 이야기였고. 이런 소재는 처
[김수진] “나의 로망과 사심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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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건 몰라도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LG의 자존심은 대단하다. 특히 모니터와 TV 분야에서는 유독 강한 자신감을 피력해왔다. LG가 세계 최초로 발매한 21:9 비율의 ‘파노라마 모니터’는 그런 자존심의 증명이다. 이제까지 발매됐던 모니터들은 전부 16:9 비율만 고집해왔다. 덕분에 영화를 감상할 때 항상 아래위가 조금씩 잘린 영상을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파노라마 모니터는 일반 영화관 스크린과 같은 21:9의 화면 비율로 영상 감상에 제격이다. 그러나 진짜 무기는 멀티태스킹이다. 마치 모니터 2개를 하나로 연결해놓은 듯 가로가 긴 모양이다 보니 화면을 최대 4개로 분할해 멀티태스킹 작업을 할 수 있다. 인터넷 동영상 강의를 수강하는 동시에 참고자료를 볼 수 있고, 영화를 보며 문서를 작성할 수도 있다. 여러 자료를 동시에 띄워놓고 비교, 대조할 때도 유용하다. 요즘처럼 검색창을 수십개 띄워놓고 사는 시대에 아주 적절한 모니터라고 할 수 있다. 2개의 스피커를 갖췄고, 스마트폰과
[gadget] 내 마지막 자존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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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
600×595×1960(W×D×h)mm
특징
1. 세탁소에 드라이클리닝 맡기는 것보다 간편하고 쉽다.
2. 물입자 1/1600 크기의 미세 스팀, 분당 최대 220회 진동으로 구김 제거.
3. 생활구김은 제거하고 필요한 주름은 지켜준다. ‘바지 전용 구김관리기’ 탑재.
4.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의 패턴이 적용된 외관.
2년 전쯤, 장동건과 고소영의 결혼이 알려진 뒤 처음 동반 출연했던 CF가 바로 이 스타일러였다. 두 스타의 CF 동반 출연도 화제였지만, 스타일러라 불렸던 제품 자체도 많은 관심을 불러모았다. 1인용 냉장고같이 생긴 주제에, ‘의류 관리기’라는 희한한 명칭을 가지고 나왔던 제품. 옷걸이에 걸어놓는 것만으로도 구김을 펴주고, 냄새까지 빼준다니. 쉽게 믿을 수 없었지만, 간증은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왔다. ‘믿습니까?’ 물었더니 ‘믿어도 됩니다’ 하는 답변들이 많이도 들려왔다. 있으면 그만큼 유용한 제품이라는 말이었고, 그러더니 급기야 ‘신
[gadget] 갖고 싶은 너,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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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과 ‘그 사람’과의 인연은 무려 17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MBC 드라마 <제4공화국>(1995)에서 장광은 노신영 역할을 맡았다. 노신영은 한때 ‘그 사람’의 후계자로까지 지명됐던 인물이다. “당시 전두환씨 역할을 했던 배우(박용식)하고 마주 앉은 장면을 찍다가 고(석만) PD가 갑자기 ‘그만, 스톱!’ 그랬다. 번갈아 찍는데 누가 전두환인지 헷갈린다면서 나보고 실내장면이지만 모자를 쓰라고 하더라.” 3년이 흐른 뒤, 이번엔 ‘그 사람’의 후계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직접 장광을 찾았다. SBS 드라마 <삼김시대>(1998)에서 ‘그 사람’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사람’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 저조한 시청률에 드라마는 조기 종영됐고, 이후 ‘그 사람’은 그를 다시 찾지 않을 듯했다. MBC 드라마 <제5공화국>(2005)에서 ‘그 사람’은 그가 아니라 이덕화의 몫이었다. 만약, <26년>이 제때 만들어졌다면
[장광] ‘그 사람’ 대신 나라도 사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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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키우는 이들이라면 아마 공감할 거다. 어느 날 책장을 돌아보니 고양이 서적이 차곡차곡 들어서고 있다는 걸. 책이 모이는 이유는 다양하다. 고양이 집사로서의 무지를 탓하며 사거나, 남의 집 고양이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사거나, 때로는 그냥 예쁜 사진이 들어 있어서라도 산다. 그런데 주위를 돌아보면 유독 개 집사보다 고양이 집사들이 이렇게 책을 모은다(확인되지 않은 짐작이므로 애견 책을 열심히 읽는 독자들에겐 죄송하다). 어쩌면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의 높은 열독률은 도무지 그 속을 종잡을 수 없는 고양이들의 아리송한 습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모호함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지식이라도 쌓을 겸 책을 모으고 있는 고양이 애호가라면 <그림 속의 고양이>는 더없이 도움이 되는 책이다. 고대,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 등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고양이를 어떤 존재로 생각해왔으며 그 모습이 미술사에 어떻게 각인되어왔
[도서] <최후의 만찬> 속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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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2013년 1월20일까지
장소: 아트선재센터
문의: www.artsonje.org
수집과 정리를 잘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싶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이 되면 특히 그렇다. 헝클어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기억을 한번쯤은 쭉 어떤 질서로든 눈앞에 데려다가 정면으로 응시하고 싶다. 연말이 되면 앨범이나 스크랩북의 구매가 늘어나지 않을까. 2013년 새 달력을 사기엔 벌어진 사건사고들이 넘치는 12월이다. 아트선재센터에서 개인전을 연 신로 오타케는 수집과 정리를 넘어 제 식대로 주변의 상태를 ‘편집’하는 일본 작가다. 그는 극단적으로 자기화된 수집과 정리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혼돈의 상태를 정면 돌파하는 콜라주랄까. 그의 이번 전시를 설명할 때 “모으고, 편집하고, 조합하는”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는데, 이 세 단어 사이에 놓인 쉼표를 ‘음표’로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행하는 일련의 행동을 통해 전혀 상관없는 수집된-요소들은 한데 묶였다가 흩어진다. 이 변화와 축적
[전시] 서울의 풍경을 편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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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선/ 음악웹진 ‘보다’ 편집장 ★★★★
귀 기울여 들으면 굉장히 슬픈 동요들이 있다. 노랫말부터 곡, 그리고 노래가 갖고 있는 정서 모두가 그렇다. 9와 숫자들의 새 노래들은 마치 그런 슬픈 동요들처럼 들린다. 동요 <과수원 길>의 일부가 ‘아카시아꽃’에 더없이 잘 어울리게 삽입된 것은 그 연장선에 있다. 전작에 남아 있던 신스 팝의 기운을 쏙 빼고, 그리움과 아련함으로 만들어낸 눈물과 위로의 숲.
이민희/ 음악웹진 ‘백비트’ 편집인 ★★★★
한번 들었을 땐 지난 앨범에 못 미친다는 생각만 했다. 근데 두번 들으니까 “연체된 마음, 유예된 꿈” 같은 시적인 가사가 달리 들렸고, 그와 상반된 흔한 연애와 일과의 기록에 피식 웃음이 났다. 더 많이 듣자 더 많은 호의가 생겼다. 너도나도 청춘 사운드를 표방하는 가운데, 그들은 청춘을 주장하기 전에 그걸 느끼게 만든다. 그리 아름답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세월을. 그 별것 아닌 이야기에 왜 취하는 걸까. 평범한 척하는 비범한
[MUSIC] 청춘에 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