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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는 끝났다. 좋은 날들은 이미 지나갔고 왕년의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현역에서 은퇴한 지 오래인 닥(크리스토퍼 워컨)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술병과 권총 대신 혈압약과 붓을 쥔 그는 남은 삶을 조용히 보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하지만 이 한물간 갱스터의 여생은 단짝친구 발(알 파치노)이 28년 만에 출소하면서 요동치기 시작한다. 세수하는 발의 등 뒤에서 몰래 총을 겨눈 채로 그는 거듭 망설인다. 귓가에는 며칠 전 수화기 너머로 들었던 보스의 목소리가 쟁쟁하다. “그 자식을 죽여. 그놈은 내 아들을 죽였어. 너를 유일하게 살려둔 이유도 그놈을 죽이기 위해서였어.” 기력이 떨어진 닥에게 유일한 친구를 죽이라는 명령은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몇 곱절 더 버겁게 만든다. 남은 시간은 단 하루. 닥과 발은 요양원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친구 허쉬(앨런 아킨)를 구출해낸 뒤, 인생의 마지막 드라이브를 시작한다.
현명한 노인처럼, <멋진 녀석들>은
넉넉한 여유와 연륜 <멋진 녀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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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천하영웅의 시대>(이하 <전국>)는 <손자병법>의 저자로 잘 알려진 병법가 손빈의 생애를 주축으로 멜로드라마적인 요소와 액션을 가미한 전형적인 대중용 팩션이다. 백가쟁명의 춘추전국시대, 한 스승 밑에서 수학한 손빈(쑨홍레이)과 방연(오진우)은 각기 제나라와 위나라의 군대를 이끌게 된다. 피할 수 없게 된 두 친구의 대결에 더불어 제나라의 아리따운 여장수 진석(경첨)과 위왕의 애첩이 된 방연의 누이 완(김희선)의 이야기가 겹쳐지면서 전투 신과 궁중암투가 번갈아가며 제법 빠르게 진행된다.
중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권의 여러 국가들이 참여한 프로젝트 <전국>은 2011년 중국 개봉 당시 단 6일 만에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다. 여세를 몰아 미국 전역에서도 제법 큰 규모로 상영됐지만 영미권 비평가들의 평가는 엇갈렸다. 리뷰에는 하나같이 “중국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가 힘들다”는 단서조항이 달려 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 있
전란의 시대 <전국: 천하영웅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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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영(김규리)은 자신의 이름 한번 제대로 불러주지 않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에 지쳐간다. 무료한 생활을 견디지 못한 희영은 안락한 삶을 위해 떠나보내야 했던 첫사랑을 떠올리며 무작정 부산으로 떠난다. 한편 돈 때문에 야구선수의 꿈을 포기한 택시기사 준호(유건)는 꿈도 희망도 없이 팍팍한 일상을 그저 버텨낸다. 우연히 부산에 내려온 희영을 태우게 된 준호는 어딘지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가 신경 쓰이고 급기야 첫사랑을 찾기 위한 그녀의 여정에 동참한다. 뜻하지 않는 동행 속에서 상대방의 상처를 감지한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서로 위안이 되어준다. 하지만 즐거운 시간도 잠시, 짧은 여행의 끝은 다가온다.
낯선 곳에서 만난 두 사람이 상대에게서 자신의 숨겨진 모습을 발견하고 또 다른 의미를 배워간다. <어디로 갈까요?>는 유사한 소재의 영화들에서 보여준 기본 공식을 충실히 따르는 영화다. 돈을 위해 사랑을 버린 희영과 돈 때문에 꿈을 버린 준호는 절로 끌릴 수밖에 없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여행 <어디로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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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즈 패밀리는 동굴인(Caveman)이다. 아빠 그루그(니콜라스 케이지)는 자연의 온갖 위협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동굴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항상 두려워하라고 가르치고 호기심 많은 큰딸 이프(에마 스톤)는 그런 아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느 날 동굴 근처에서 불을 다루는 신석기 원시인 가이(라이언 레이놀즈)를 만나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된 이프. 얼마 지나지 않아 대규모 지각변동으로 보금자리 동굴이 무너지고 크루즈 패밀리는 가이를 길잡이 삼아 새로운 쉼터를 찾아 미지의 세상으로 모험을 떠난다.
익숙하지만 신선하다. <크루즈 패밀리>는 이 모순된 수사를 완성시키며 애니메이션 명가 드림웍스의 이름값을 다시 한번 증명한 수작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살던 원시인 가족이 삶의 터전을 잃고 강제적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설정 자체는 별달리 새로울 것도 없지만 그 과정은 눈이 돌아갈 만큼 새롭고 짜릿하다. 곰과 올빼미가 섞인 곰빼미, 앵무새의 무늬를
완벽한 테마파크 <크루즈 패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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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유괴범에게 납치당해 잃은 하경(엄정화)은 범인을 잡기 위해 15년 동안 고군분투해왔다. 담당형사인 청호(김상경)는 하경을 찾아가 공소시효가 며칠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리고 하경은 오열한다. 마지막으로 사건 현장을 다시 찾은 청호는 꽃 한 송이가 현장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CCTV와 타이어 자국, 블랙박스를 단 차량 조회 등을 총동원해 공소시효 마감일에 결국 범인의 차량을 발견한다. 하지만 청호는 추격전 끝에 눈앞에서 범인을 놓친다. 그 뒤 한철(송영창)은 손녀를 집 앞에서 유괴범에게 납치당한다.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은 범행수법이 15년 전 그 사건과 거의 똑같음을 발견하고 청호를 찾아간다. 청호는 동일범의 소행임을 확신하고 범인을 잡기 위해 다시 뛰어든다.
<몽타주>는 시나리오가 탄탄한 영화다. 영화는 범죄를 다룬 다른 영화들과 달리 공소시효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공소시효라는 정해진 시간은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을 좀더 흥미진진하게 보게 만들고
정의라는 탈을 쓴 또 다른 폭력 <몽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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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발매된 이노무라 고로쿠의 라이트 노블 <어느 비공사에 대한 추억>이 원작인 <어느 비행사에 대한 추억>은 가상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용병 비행사와 황녀의 모험과 교감을 그린 작품이다. TV에서 <X>와 <더 파이팅> 시리즈 등을 연출했던 시시도 준의 영화 데뷔작이며,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등에서 캐릭터를 디자인했던 마쓰바라 히데노리가 캐릭터 디자인을 맡아 개봉 전부터 주목을 받았다.
영화 속에 그려진 세계는 두 나라가 거대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끝없는 전쟁을 벌이는 곳이다. 이들은 하늘을 나는 거대 전함과 프로펠러 전투기로 싸움을 벌이고, 인간 취급도 못 받는 용병들은 오늘도 돈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 아마쓰카미국은 승리를 위해 레밤 황국의 예비 황녀인 파나를 붙잡으려 하고, 이에 레밤 황국은 비밀리에 파나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 한다. 이 작전을 위해 불려온 최고의 용병 샤를르는 적의 공격을 피해 1200
파일럿들의 화려한 공중전 <어느 비행사에 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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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폴 브래니건)는 잇따른 술과 마약, 폭행 사건으로 피곤한 인생을 살고 있다. 여자친구가 임신을 하고 나서야 제대로 살 마음을 먹지만 주변 사람들이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그 와중에 로비는 우연히 자신이 뛰어난 후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위스키의 세계에 빠져든다. 그리고 팍팍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통에 100만파운드가 넘는 위스키를 훔칠 대담한 계획을 세우지만 이 계획에 동참한 친구들은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르며 로비를 곤경에 빠트린다.
날카로운 비판 정신으로 어두운 현실과 맞서 물러서지 않던 켄 로치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켄 로치식 강탈극인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를 보고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고가의 위스키를 두고 벌이는 소동을 유머러스하게 그린 이 영화는 주인공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고민하기보다는 이들이 벌이는 유쾌한 소동에 집중한다. 켄 로치의 전작들에서 이미 변화가 보이긴 했지만 이번만큼 ‘가벼운’ 영화가 있었나
위스키를 훔치다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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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한예리)과 혁근(이희준)은 연인 사이다. 차경은 한없이 사랑스러우며 귀지를 파주는 차경의 품에 안긴 혁근의 표정은 행복하고 편안해 보인다. 그러던 중 차경은 절친한 친구인 기옥(이영진)의 생일 선물을 갖다주기 위해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한다. 선물을 전달한 차경은 기옥의 자전거를 빌려 혁근에게 오다가 브레이크가 고장나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1년 뒤, 혁근은 불면증에 시달리고 차경의 환청을 들으며 환상을 본다. 기옥도 자신의 자전거 때문에 차경이 죽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차경의 환상을 본다. 기옥은 혁근을 찾아가 차경의 기일에 무덤에 같이 가자고 한다. 그리고 차경의 무덤에 다녀온 그날 기옥과 혁근은 술에 취해 잠자리를 같이한다. 혁근의 불면증과 환상은 점점 더 심해지고 혁근은 귀에서 피가 나도록 귀를 판다. 기옥도 죄책감을 떨치기 위해 브레이크를 자르고 자전거를 탄다.
<환상속의 그대>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뒤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절
기억과 망각 <환상속의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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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가닥 미나(최강희)는 경기도청의 말단 공무원이다. 고향 마을에서는 나름대로 출세한 사람으로 통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도 않다. 홧김에 사고를 하나 쳐서 2개월 정직을 당하게 되고 그 일을 계기로 고향에 잠시 돌아온다. 하지만 미나의 이 귀향은 목적이 뚜렷하다. 미나는 최근 병석에 누운 아버지(주진모) 대신 아버지가 운영해오던 마을 문방구를 잠시 맡게 되는데 실은 이 문방구를 싫어한다. 그 문방구가 어서 빨리 팔려 목돈이 생기기를 학수고대하는 중이다. 하지만 팔아 치우기 위해서는 성업 중이라는 것 또한 알려야 하는 상황이라 문을 닫을 수도 없다. 그래서 미나는 오늘도 울며 겨자 먹기로 문방구의 단골손님인 초등학생들을 맞이한다. 하지만 기대치 않았던 아이들과의 정은 점점 더 깊어지고 때마침 미나의 어린 시절 첫사랑 강호(봉태규)까지 문방구 앞 학교의 선생님으로 부임한다.
<미나문방구>는 근래에 한국 극장가에 유행하는, 흥행 감동 코드를 전략적으로 챙기려 한 감이 역력하다
어린 시절의 향수 <미나문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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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데이> Everyday
감독 마이클 윈터보텀 / 출연 셜리 헨더슨, 존 심, 숀 커크, 로버트 커크 / 수입, 배급 (주)영화사 진진 / 개봉예정 6월
여기 곤경에 빠진 가족이 있다. 가장 이안(존 심)이 마약 밀수 혐의로 5년간의 감옥살이를 시작하자, 아내 카렌(셜리 헨더슨)은 아직 까마득히 어린 4남매를 데리고 꼬박꼬박 면회를 다니며 생활을 이어나간다. 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방법으로 생의 고독을 견뎌내는 동안, 계절은 돌고 또 돈다. 그 시간이 인물들의 얼굴에 입혀지는 과정을 중요하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일까. 마이클 윈터보텀 감독은 두 성인배우와 실제 남매지간인 아역배우들을 데리고 5년간 촬영하는 수고를 들였다고 한다. 윈터보텀이라면, 종종 인물을 중심에 두고 다큐와 픽션의 경계 위에서 정치적 이슈들을 다루어온 작가다. 그러니 <에브리데이> 또한 그가 기록/연출한 어느 가족의 하루하루가 모여 강을 이룬 드라마라 해도 좋겠다.
[Coming Soon] 고독 견뎌내기 <에브리데이> Every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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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에는 영화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포함돼 있습니다.
* 아래 글은 <씨네21> 904호 지면에 게재된 원고의 후반부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맞다. <테이크 쉘터>(Take Shelter, 2011)도 세상의 종말을 근심하는 영화다. 부쩍 이런 영화가 많아졌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작년에 먼저 개봉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Melancholia, 2011)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는 분들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혹시 이 훌륭한 영화가 <멜랑콜리아>와 비슷할 것이라 짐작해서 보지 않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그러실 필요 없다고 말씀드려야 하겠다. 서사의 뼈대가 유사해도 그것이 산출하는 정동(情動, affect)은 전혀 다를 수 있다. <멜랑콜리아>의 정동이 ‘우울’이라면, <테이크 쉘터>의 그것은 ‘불안’이다. 우울과 불안이 다른 정도만큼 두 영화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세상의 종말보다 더 끔찍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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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이었다. 라일락꽃이 한창인 봄밤이었다. 4월의 밤이었다.” 코끝에서 향이 느껴지려는 찰나,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는 이런 문장을 툭 이어붙인다. “그가 군인들에게 이유 없이 당했다는 5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공선옥의 장편소설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는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하지만 80년의 그날이 아닌, 그 전후의 사람들 이야기를 통해, 무엇이 어떻게 망가졌는지 선연히 그려낸다. 책 속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한국 현대사를 비추는 거울 앞에 서 있음을 문득 깨닫게 만드는 책을 쓴 소설가 공선옥을 만났다.
-얼마 전 개봉한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는 제주도 사람이 말하는 4.3 사건이고,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역시 그 땅의 사람이 말하는 5.18 민주화운동이다. 왜 지금 이 시점에 다시 그 사건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폭력이 돌아오고 있다는 신호, 일종의 비상경보가 아닐까 생각했
[trans x cross] 우리가 사는 시대에 대해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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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더의 게임> Ender’s Game
감독 개빈 후드 / 출연 아사 버터필드, 벤 킹슬리, 해리슨 포드
<엔더의 게임>의 트레일러가 공개됐다. 미국 SF 소설계의 거장 오슨 스콧 카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미래의 인류가 외계인에 대항하기 위해 양성해낸 군사 천재 엔더 위긴의 이야기를 다룬다. 공개된 2분가량의 영상에는 무중력 훈련실에서 벌어지는 모의전투와 미래지향적인 분위기의 프로덕션 디자인을 엿볼 수 있다.
[WHAT'S UP] <엔더의 게임> Ender’s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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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년 동안, 즉 3.11 대지진 이후 일본 영화계에 눈에 띄는 현상이 하나 생겼다. 이른바 ‘수사물’의 부상이다. 2012년 9월에는 인기 TV시리즈 <춤추는 대수사선>의 마지막 작품으로 개봉한 <춤추는 대수사선 더 파이널>이 누적수입 59.7억엔을 기록했고, 그해 1분기 드라마로 방송된 다케우치 유코 주연의 <스트로베리 나이트>의 극장판이 올해 1월에 개봉해 흥행에 성공했다(누적수입 21.9억엔). 지난 3월23일에 개봉한 <파트너 시리즈 X DAY>도 2002년 첫 방영 이후 계속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의 극장판이며, <도라에몽>이나 <드래곤볼Z>라는 강적들을 상대로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 극장가에서 선전한 이들 세 작품엔 공통점이 있다. 경찰 상층부를 비롯한 권력자들의 조직적인 부정과 은폐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거대 권력에 맞서는 형사들의 모습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데에는 다른
[오사카] 정부 비판하는 언론의 두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