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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프리드 히치콕의 <새>(1963)에서 멜라니가 전화 부스에 갇혀 갈매기들의 습격을 받는 장면의 압도적 공포를 기억하는가. 수백 마리의 새가 등장하는 장면은 기술적으로 해결하기가 어려운 문제였고, 실제 새들과 시각효과들이 스크린 위에서 제대로 합쳐진 성취는 당시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이었다. 전작 <싸이코>의 흥행으로 모든 관심이 <새>에 몰려 있었던 때였고, 히치콕의 도전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실험이었다. 모든 스탭을 불안에 떨게 만든, 이 까다로운 장면의 한가운데 히치콕의 파트너로 알려진 프로덕션 디자이너 로버트 F. 보일이 함께하고 있었다.
로버트 F. 보일은 ‘히치콕의 리얼리즘’을 구현해내는 데 없어서는 안될 일원이었다. 그는 히치콕의 작품 중 <새>를 비롯하여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마니>(1964) 등에 참여했는데, 첫 인연은 <파괴 공작원>(1942)이었다. <파괴 공
히치콕의 조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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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1977)에서 오비완 캐노비를 찾아 황량한 모래행성에 떨어진 로봇 C-3PO와 R2-D2를 기억하는가. 영화 속 C-3PO는 “우릴 공장에 보내 고철로 만들 거야”라며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하지만,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7)에 나온 마리아의 형태를 기반으로 한 황금색 로봇 C-3PO와 동그란 깡통로봇 R2-D2는 SF영화사의 기록을 새로 쓰던 기념비적인 비주얼의 탄생을 뜻하는 사건이었다. 모래행성에 앞선 우주선 장면에서 위용을 드러낸 다스베이더와 함께, 이들은 이후 <스타워즈> 시리즈를 대표하는 마스코트가 된다. 그리고 그 돌풍의 핵에 컨셉 아티스트 랠프 매쿼리가 있었다.
캐릭터부터 테마파크의 놀이기구 디자인까지
<스타워즈> 시리즈의 아버지는 조지 루카스였지만, 랠프 매쿼리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 모양새는 지금과 상당히 달라졌을지 모른다. <스타워즈>를 착안할 당시 조지 루카스는 <청춘낙서>(
다스베이더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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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 황금대탐험>(1963)의 일곱 해골 병사를 기억하는가. 땅에서 솟아나온 해골병사들이 칼과 방패를 들고 스톱모션으로 공격해올 때, 실제 배우들은 허공에 칼을 휘두르며 이미 자신들의 운명이 다했음을 직감했다. 자연스런 움직임뿐만 아니라 한숏 내에서 실제 배우와 해골병사의 칼과 칼이 부딪치고, 방패로 칼을 가로막고 발로 걷어차며, 해골병사의 목이 뎅강 날아갔다. 그저 괴물이 등장하고 그걸 사람들이 우러러보며 도망다니는 수준이 아니라, 진짜 한숏 내에서 함께 움직이며 부대꼈다. <반지의 제왕>(2001)의 골룸의 선조라 부를 만한 진짜 ‘디지털 액터’는 그렇게 태어났다. <쥬라기 공원>(1993)과 <반지의 제왕>의 원조가 바로 거기 있다. 곧 개봉할 기예르모 델 토로의 <퍼시픽 림>의 거대한 괴물도 레이 해리하우젠이 작업한 <심해에서 온 괴물>(1953)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핵실험을 통해 태어난 괴물을 보고 이
경이의 피조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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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특수효과의 아버지 레이 해리하우젠이 지난 5월7일 93살로 세상을 떴다. <심해에서 온 괴물>(1953), <아르고 황금대탐험>(1963), <신밧드의 대모험>(1974)등을 통해 선보인 스톱모션 기술은 ‘꿈의 공장’의 시작을 알렸다. 단언컨대 그가 없었다면 <스타워즈>(1977)도 <쥬라기 공원>(1993)도 <반지의 제왕>(2001)도 없었다. 이제 실사영화의 거의 모든 라이브 액션 장면도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지는 시대, 레이 해리하우젠의 죽음은 오랜 세계 영화사에 있어 ‘수공업의 종말’을 알리는 거대한 상징과도 같다. 그렇게 우리 시대의 위대한 장인들이 하나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에일리언과 터미네이터의 창조주이자 아이언맨 슈트를 제작한 스탠 윈스턴은 지난 2008년 세상을 떴고, ‘히치콕의 프로덕션 디자이너’로 유명한 로버트 F. 보일은 지난 2010년 100살로 세상을 떴으며, <스타
꿈의 공장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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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몸 구석구석이 저려오고 누군가에게 맞은 듯한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드센 선생님과 학창 시절을 보낸 독자분들이라면 체벌을 생각하실 수도 있겠으나 저의 경우엔 육체적 고통이 가르침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프로레슬러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엄격한 사제지간의 불문법이 존재하는 곳이지요.
저에게는 여섯명의 스승이 계십니다. 김일, 타이거 도구치, 조지 다카노, 최태산, 이왕표, 역발산. 이분들의 성함을 키보드로 입력하는 것만으로도 제 몸이 살짝 떨릴 정도입니다. 어마어마한 포스를 갖춘 분들이죠.
김일 선생님은 자타공인 탈아시아급의 육체와 스트렝스(힘)를 가지고 일세를 풍미했던 분입니다. 저에게는 구름 위의 성층권 너머에 존재하는 분이라서 직접 링에서 지도를 받는 영광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젊은 시절의 혹독한 시합으로 인해 말년에 휠체어를 써야 하는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꼭 제자들의 경기를 보러 오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링 가까이에서 관전을
[김남훈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맞는 게 이기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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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 이십대 중후반과 삼십대 초중반을 꼬박 바쳤던 회사를 불시에 그만두고 나자 한동안 밤샘 마감이 없어도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졌다. 내 인생 최고의 시간들은 이미 끝나버린 것 같은데 늘어난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앞으로 살날이 50년은 더 남았고, 최소한 그 절반 정도는 일을 해야 할 텐데, 도대체 뭐 해먹고 살 것인가. 돈도 돈이지만, 스스로 가장 신나게 살았던 시기를 떠나보내고 남은 것은 고단하게 펼쳐지는 일상과 현실적인 문제뿐이라는 게 마음을 자꾸 가라앉게 만들었다. 인생에 뭐 하나 정리된 것도 없는데 애매하게 나이만 먹고 고민거리는 늘고 체력은 달리고, 어떡하지 나?
그러던 중 QTV <20세기 미소년>을 만났다. 사실 90년대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H.O.T의 문희준과 토니안, 젝스키스의 은지원, god의 데니안, NRG의 천명훈이 한 프로그램에 출연하다니, 토니안 말대로 “90년대였으면 출연료가 감당 안돼서” 모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천명
[최지은의 TVIEW] 오빠들, 안 죽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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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인 우디 앨런은 말했다. “일흔넷 먹은 영감이 여자한테 수작 거는 걸 누가 보고 싶겠는가(그래서 60대에 수작 걸어 양녀하고 살림 차렸나). 노인들이 나오는 영화는 나한테도 지루해서 만들고 싶지 않다.” 아니,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최소한 한국에서는. 노인들이 나오는 영화는 노인들이 보고 싶어 한다. 손에 손을 잡고 극장으로 놀러가서 마음껏 자식 욕도 하고 늙으면 서럽다며 한탄도 한다.
인적이 드물어야 마땅한 평일 오후 강북의 어느 극장, 로비를 메운 노인들은 설레는 표정으로 <송포유> 팸플릿을 들고 있었다. 불길했다. 설마 저분들이 몽땅 <송포유>를 보러 온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이언맨3>도 하고 있잖아? <송포유>는 광고도 안 한다고. 그러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지. 자그마한 상영관으로 밀려 들어온 노인들은 좌석 번호 따위 필요없다며 극장을 휩쓸더니 마치 단체 관람객처럼 나란히 뒷줄부터 점령하고 앉기 시작했다.
[김정원의 피카추] 브라보 실버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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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27일 일기에 <아이언맨3> 결말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셰임>, 그리고 이탈리아 화가 아고스티노 카라치의 <피에타>. 마이클 파스빈더가 벗은 몸을 시트로 감고 천장을 응시하는 <셰임>의 첫숏은 몇초 동안 정사진으로 착각할 지경이다. 시트도 마침 성모 마리아의 색인 푸른색이라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그린 서구 종교화가 즉각 떠오른다. 파스빈더는 예수라고 해도, 옆 십자가에 못박힌 죄인이라고 해도 납득이 되는 멋진 얼굴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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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플렉스 화장실에서 극장 직원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 이번 주말 흥행몰이가 예상되는 <아이언맨3> 개봉을 앞두고 두명의 스탭은 마치 지평선에서 다가오는 토네이도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심경인 듯했다. 한편 다른 한명은 매점에 오징어 굽는 기계가 들어올까봐 걱정스러워 했다. 오징어구이는 나 역시 반대라고 하마터면 끼어들 뻔했다. 누가 뭐래도 구운 건어물 냄새는 몰입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분해와 조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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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고를 헤아려 돈을 뽑으면서 CF모델의 춤을 멀뚱히 본다. 관공서도 기업도 대학도 심지어 은행 현금인출기까지 창조경제를 부르짖는다. 내용의 모호성을 떠나 이 표현은 굉장히 무성의하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내세웠던 창의경제보다 언어의 조탁 능력이 떨어지는 이가 만든 게 틀림없다. 그럼에도, 대통령의 반복된 강조에 너도나도 아는 척, 하는 척한다.
나도 먼 산을 바라보며 창조경제가 뭘까 생각한 적이 있다. 곳곳에 이쑤시개처럼 꽂힌 송전탑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저 송전탑만 없으면 경관이 정말 좋을 텐데…’ 싶었다. 유럽의 시골이 그 ‘뷰’만으로 창출하는 부가가치는 막대하다. 해외여행 자율화 세대는 공감할 것이다. 그 그림 같은 전원풍경의 1등 공신은 전봇대 없는 길이라는 걸. 지금 우리 산야는 송전탑이라는 거대 전봇대가 지배하고 있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기적과 부흥을 좇던 과거에는 주먹구구식으로 에너지 정책을 펴고 전력을 공급했다 하더라도, 원전으로 대표되는 대
[김소희의 오마이 이슈] 창조경제만 없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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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강우석의 영화는 늘 옛날 미국영화의 무구한 오락적 가치를 떠올리게 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공공의 적> 이후, <한반도>를 제외하곤 난 늘 그의 영화를 일관되게 지지해왔다. <전설의 주먹>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영화가 예상만큼 흥행하지 못한 것을 두고 놀랐다. 나는 이 영화의 건전한 오락적 가치가 충분히 대중적으로 통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편의 영화의 흥행 여부를 작품 자체의 가치만으로 판별할 수는 없다. 다른 대다수 영화에 비해 긴 상영시간,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한계라는 것도 이 영화의 흥행 스코어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웠던 언론의 호평에 비해 이 영화가 상대적으로 낡았다는 상당수의 비판적 시각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를 옹호하고 싶다. <전설의 주먹>이 다루고 있는 삶의 남루함이라는 소재에 외면할 수 없는 강우석의 윤리적 정직성이 스며들어 있고 그가 묘사
[신 전영객잔] 강우석 스타일을 지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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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은 남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적어도 엔터프라이즈호 안에서 남녀 차별이란 있을 수 없다.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서로의 등을 지켜줄 수 있는 존재, 엔터프라이즈호의 승무원이 된다는 건 그런 것이다. 하지만 임무와는 별개로 그녀들의 매력만은 감출 수 없다. 통신 장교 우후라는 모든 트레키(<스타트렉> 시리즈의 팬)의 로망 아닌가. 한층 성숙해져 돌아온 우후라는 물론 미모의 과학 장교 캐롤은 기나긴 우주 항해에 활력을 더해줄 것이다. 스팍의 연인 우후라와 커크와 미묘한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캐롤의 연애담도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재미다. 쉽지 않은 남자 친구들을 둔 그녀들의 속사정을 들어보자.
-우후라의 역할이 대폭 늘었다.
=조 살다나_감사하다. <스타트렉>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그 신선함은 화합과 희망의 상징이었다. 당시엔 미국인 함장, 스코틀랜드인 기술 장교, 동양인 항해사, 흑인 여성 통신 장
[조 살다나, 앨리스 이브] 우리의 행동이 <스타트렉>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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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없다면 건조하고 퍽퍽한 우주에서의 모험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스타트렉> 시리즈의 개그 페어로 다시 태어난 두 남자, 기술 장교 스코티와 의사 본즈가 바로 그들이다. 전편에 이어 엔터프라이즈호의 위기를 넘기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스코티는 냉소적인 말투로 자신의 신념과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할 줄 아는 남자다. 자나 깨나 커크의 무모함을 걱정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는 닥터 본즈 역시 스스로의 감정을 속이지 않는 솔직함으로 주위의 신뢰를 얻는다. 어쩌면 비상식적인 모험광들의 집단인 엔터프라이즈호에서 유일하게 상식적인 두 사람. 그들이 피곤할수록 우리는 즐겁다. 시종일관 투덜대며 문제를 지적하는 푸념 속에는 엔터프라이즈호를 향한 진한 신뢰와 애정이 묻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승무원 인기투표 1, 2위를 다투는, 볼수록 매력있는 남자들을 만나보자.
-스코티가 <스타트렉: 비기닝>에 이어 또 한번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사이먼 페그
[사이먼 페그, 칼 어번] 트레키도 대중도 만족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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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탐험하는 이 장대한 스페이스 오페라의 껍질을 벗기고 나면 아기자기한 멜로드라마가 보인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작품에서 가장 강력한 화학 반응은 다름 아닌 커크 선장과 그의 일등 항해사 스팍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닮은 구석이라곤 없는 두 남자는 종족은 물론 성별마저 넘어선 교감을 선보인다. 다혈질에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커크 선장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규칙과 논리를 따르는 스팍은 정반대의 캐릭터처럼 보이지만 둘은 언제나 서로를 필요로 하는 영혼의 반쪽이다. 때로는 자신의 진심을 이해해주지 않아 토라질 때도 있고 가끔은 서로의 연인을 향한 질투의 감정도 슬쩍 내비치지만 그래도 끝끝내 상대를 이해하는 진정한 로맨스의 끝. USS 엔터프라이즈호의 믿을 수 없는 모험은 커크와 스팍의 끈끈한 유대 속에서 피어난다.
-<스타트렉 다크니스>의 주요한 뼈대는 커크와 스팍의 우정이다. 화면 밖에서도 커크와 스팍처럼 호흡이 잘 맞는 편인가.
=크리스
[크리스 파인, 재커리 퀸토] 정반대라고? 우린 닮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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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렉>은 다시 태어났다. 공개된 <스타트렉 다크니스>(이하 <다크니스>)의 위용은 이 영화가 J. J. 에이브럼스의 새로운 시리즈가 될 것임을 확신하게 한다. <스타트렉: 더 비기닝>(2009, 이하 <비기닝>) 감독에 에이브럼스가 낙점되었을 때만 해도 그리 우호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방면에서 활약 중인 할리우드의 실세 감독의 손에 전통있는 시리즈의 아우라가 훼손되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비기닝> 이후 대중은 에이브럼스의 ‘스타트렉’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다크니스>는 어쩌면 에이브럼스의 <스타트렉>을 시리즈 최고의 자리에 밀어올릴지도 모른다. 놀람과 경탄으로 압축되는 반응들, 그만큼 만족스러운 결과물이다. 새로운 우주를 향한 개척자들, 여기 런던에서 만난 엔터프라이즈호 승무원들의 편지를 함께 부친다.
애초에 <스타트렉>은 그리 연속성이 단단한 시
[스타트렉 다크니스] USS 엔터프라이즈호에서 온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