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르투갈의 거장 페드로 코스타가 또 다른 거장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의 회고전을 기념해 한국을 찾았다. 전자는 형식 이전에 실존 그 자체의 힘을 믿으며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현실을 포착해낸 반면 후자는 욕망의 아름다움을 다채로운 방법으로 쓰다듬은 이미지의 연금술사였다. 많은 것을 뭉뚱그리고 생략함에도 불구하고 거장이란 표현 안에서 그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발 디딘 새로운 영역에의 도전 혹은 고집 때문이다. 비록 두 사람의 영화세계는 전혀 다르지만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를 기억하는 페드로 코스타의 언어는 결국 두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거장들의 흔적을 통해 현재 우리가 어디쯤에 서 있는지를 발견한다. 현실을 기만하지 않고 눈앞의 존재를 직시하며 진짜 세계를 필름에 담아내는 페드로 코스타는 오늘도 여전히 사라진 것들에 시선을 돌리고 과거를 재배열하며 ‘지금’을 발견해나가는 중이다. 문득 페드로 코스타가 상상하는 내일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페드로 코스타] “아무도 나쁜 것을 그대로 보려 하지 않는다”
-
드라마 <나인>의 최종회가 끝난 직후부터 새벽 3시가 다 되도록 지인과 카카오톡으로 “이럴 수는 없다, 이게 말이 되는가” 하는 요지의 대화를 나누었다. 향을 태우면 30년 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나인>에서 과거에 갇힌 주인공은 살았나 죽었나? 마지막의 선우는 성장한 선우인가, 안 죽은 선우인가, 미래에서 온 선우인가? 설정을 이리저리 맞추다 지친 나머지, 하나를 맞추면 다른 하나가 어그러지는 퍼즐을 퍼즐이라고 불러도 무방한가, 작가를 잡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론은 이랬다. <여름으로 가는 문>처럼 말끔히 정리되는 게 아니면 곤란하다고. 그래서 다시 읽었다.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여름으로 가는 문>은 코니 윌리스의 <개는 말할 것도 없고>와 더불어 ‘끝내주는’ 시간여행물이자 러브 스토리다. 주인공 댄은 천재 엔지니어다. 그는 가사도우미 로봇을 만들어 성공을 거두지만 자신의 약혼녀 벨과 동업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우리, 미래인간
-
어느 블로그에서 싸움이 붙은 일이 있었다.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극존칭에 대한 투덜거림이 시작이었다. 이 책에도 그런 대목이 있다. 요즘 화두가 된 이슈다. 바로 갑님의 횡포에 대한 것. “손님, 카푸치노 나오십니다”라는 괴이한 문장이 왜 횡행하는가. 각 장의 제목을 이어붙이면 요즘 밥벌어먹는다는 일의 어려움이 드러난다. 게임의 규칙은 당신 편이 아니고, 이익은 위로 위험은 아래로 쏠린다. 무엇보다, 당신을 위한 멋진 신세계는 없다.
[도서] 밥 벌어먹는 어려움
-
시인 마종기의 산문집. 어린 나이 피난을 갔던 마산에서의 추억에서부터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던 추억, 일상의 나날들, 그리고 가족을 비롯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자신이 쓴 시를 옮겨적고 그에 관련한 심상을 펼쳐 보이는 일도 있으니, 그의 시에 대한 코멘터리를 듣는 기분으로 읽어갈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의사로 살았던 시간에 대한 기록도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달라지는 세상에 대한 나이든 현자의 생각을 읽어가는 기분.
[도서] 마종기 산문집
-
-
우리는 답을 찾지 못한 질문으로 가득한 생을 산다. 조앤 치티스터 수녀가 쓴 <무엇을 위해 아침에 일어나는가>는 ‘힌두교―지혜’, ‘불교―깨달음’, ‘유대교―공동체’, ‘그리스도교―사랑’, ‘이슬람교―복종’이라는 5가지 영적 전통별 대표 키워드와 그 주제에 해당하는 삶의 보편적인 질문들에 답한다. 왜 나는 바뀔 수 없는가? 어떻게 내가 할 일을 알까? 무엇이 정말로 중요한가? 정답지가 아니라, 어떻게 질문을 마주하는가를 배울 수 있는 지혜의 책.
[도서] 지혜의 책
-
2008년 은퇴한 피아니스트 알프레트 브렌델이 쓴 음악 에세이. 한평생 피아니스트로 살았던 브렌델의 <피아노를 듣는 시간>에서 음악은 관념이나 느낌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에게 음악은 백건과 흑건으로 이루어진 피아노와 악보에 그려진 무수한 음표와 기호들이 상징하는 가능성과 때로는 지금은 많이 연주되지 않는 고음악 악기들이 갖는 여린 선율 속에서 더 잘 숨쉴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은 20세기의 작곡가(라벨, 드뷔시, 메시앙, 리게티 등)들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브렌델 자신이 어디까지나 칸타빌레에 근거한 시대의 곡들을 주요 레퍼토리로 삼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문학을 나의 두 번째 업이라 여기는 까닭에 최대한 간단하게 표현하되, 그렇다고 너무 단순하게는 쓰지 않도록 스스로를 부추겼답니다. 완전함을 추구하지 않으며 내가 좋아하는 함축, 불완전을 고스란히 드러내기도 했지요.” 브렌델에게는 연주만큼이나 글을 쓴다는 행위가 음악적인 일인 듯 보인다. 피아노치듯
[도서] 음악의 헌정
-
좋은 영화가 끝나면, 영화관의 관객은 다소간 공통된 감흥에 젖어들게 된다. <춤추는 숲>의 상영을 마친 5월15일 CGV대학로의 무비꼴라쥬관도 마찬가지였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성미산 마을을 마냥 부러워했을 관객은, 그 아름다운 풍경 아래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투쟁의 기록을 목격하고 놀라는 눈치였다. “한 집단이 각성하거나 변화하는 계기에는 물론 내적인 동력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외적인 충격과 자극을 받아 결집하게 된다. 성미산 마을도 두 차례의 외압을 겪으면서 점점 더 공고한 공동체가 됐다.” 시네마톡 행사에 참여한 강석필 감독은 성미산 마을 사람으로서, 또 영화의 감독으로서 현장에서 겪은 내밀한 이야기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강석필 감독은 이 영화를 “성미산 마을 주민들이 모두 함께 찍은 영화”라고 소개했다. 다소 의례적이고 판에 박힌 말 같지만 이어진 감독의 설명을 들으니 수긍이 갔다. “나 혼자서는 절대 찍지 못했을 영화다. 무슨 일이 터지면, 현장에 달
[시네마톡] 좀 부럽다가, 화들짝 놀라다
-
“<투모로우>(2004)를 능가할 것.” <해운대>(2009)의 후반작업 때 윤제균(오른쪽) 감독은 <투모로우>를 레퍼런스 영화로 꼽으며 적지 않은 부담감을 드러냈다. 두 영화 모두 쓰나미가 도시를 덮친다는 설정인 까닭에 윤제균 감독 입장에서는 5년 앞서 개봉한 <투모로우>가 신경쓰였을 것이다. 결과는? 알다시피 ‘윤제균표 쓰나미’는 해운대를 제대로 집어삼켰다. <투모로우>를 비롯한 <인디펜던스 데이>(1996), <2012>(2009) 등 할리우드 재난 블록버스터를 주로 만들어온 롤랜드 에머리히(왼쪽) 감독이 신작 <화이트 하우스 다운>(6월 개봉)의 홍보차 내한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연스럽게 윤제균 감독을 떠올렸다. 그래서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과 윤제균 감독의 만남을 어렵게 주선했다. 바쁜 홍보 일정을 쪼개 윤제균_감독과의 만남에 응한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과 신작 <국제시장>(출연
[flash on] 친숙한 공간을 위기에 몰아넣을 때 관객이 호응한다
-
애니메이션계의 <아바타> 혹은 3D애니메이션의 끝판왕. 모두 <크루즈 패밀리>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드림웍스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크루즈 패밀리>는 애니메이션으로는 <토이 스토리>(1996) 이후 처음으로 제6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 후보작에 오르고, 개봉하자마자 북미와 영국 박스오피스를 휩쓸었다. 드림웍스가 지난번 <가디언즈>로 쓴물을 삼킨 이후 절치부심한 결과다. <크루즈 패밀리>의 배경인 가상의 선사시대, 크루데시우스로 관객을 초대한 이는 전용덕 촬영감독이다. 2003년 8월 드림웍스에 입사한 뒤 그는 <쿵푸팬더>와 <슈렉 포에버>에 참여했다. 그간의 작업이 <크루즈 패밀리>엔 어떤 보탬이 됐는지, <크루즈 패밀리>를 하면서 어떤 고민들이 생겨났는지 궁금했다.
-드림웍스에는 어떻게 입사하게 됐나.
=2003년 드림웍스에 레이아웃 아티스트로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이
[flash on] 도입부 사냥 장면 2년 공들였다
-
씨씨와 데이지의 만남은 흥미로운 우연이다. 1주 차이로 개봉하는 스티브 매퀸의 <셰임>과 바즈 루어만의 <위대한 개츠비>는 여러모로 다른 영화다. 전자가 섹스에 중독된 어느 현대인의 삶을 해부한 소규모 작가영화라면 후자는 1920년대 뉴욕 배경의 고전소설 위에 차려낸 할리우드식 진수성찬이다. 하지만 그 물리적 간격에도 전자의 씨씨와 후자의 데이지는 어딘지 닮았다. 섹스 중독자 오빠의 집에 얹혀살며 오빠의 직장 상사와 섹스를 나누는 애정결핍환자 씨씨. 부호 톰 뷰캐넌과 결혼했지만 성공해서 돌아온 제이 개츠비의 구애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유부녀 데이지. 극히 이기적인 저 사랑 중독자들을, 데뷔부터 사랑의 열병에 길들여져온 여배우 캐리 멀리건이 연기한다. 이제 그녀는 사랑이란 단어의 심장에 더 깊이 칼을 꽂아넣을 줄 알게 된 듯하다.
캐리 멀리건은 화려한 미모나 압도적인 아우라를 자랑하는 배우는 아니다. 영국에서 호텔리어 부모님의 평범한 양육 방식 아래 성장한
[캐리 멀리건] 불안하게 흔들리는 사랑처럼
-
지난해 황금종려상을 가져간 미하엘 하네케의 <아무르>(‘사랑’이라는 뜻)가 영감이라도 제공한 걸까. 5월15일 개막한 제66회 칸영화제는 핑크빛 무드로 가득하다. 시각적으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랑의 이미지는 영화제가 열리는 팔레 드 페스티벌 외벽을 둘러싼 공식 포스터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입을 맞추는 포스터 속 두 남녀는 칸이 사랑한 미국인 배우 부부, 폴 뉴먼과 조앤 우드워드다. <뉴 카인드 오브 러브>(1963)의 현장 사진을 기반으로 한 이 포스터가 우연히 만들어진 것 같지는 않다. 올해 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인 스티븐 스필버그를 비롯해 수많은 미국 감독들이 프랑스의 작은 소도시 칸의 품에 안길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작가주의 감독의 귀환
66회 영화제 개막에 앞서 칸을 뜨겁게 달군 이슈는 미국 작가주의 감독들의 화려한 귀환이었다. 코언 형제, 스티븐 소더버그, 제임스 그레이, 알렉산더 페인, 짐 자무시 등 다섯 미국 감독들의 신작이 올해
[현지보고] 익숙함 속에서 빛나는 영화 길어올리기
-
지금이야 타이핑 대회를 한다고 하면 시대착오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때는 바야흐로 1958년, 타이피스트는 선망하는 직종 중 하나였다. 시골 출신 로즈(데보라 프랑수아)는 보험회사 비서 면접에 응시한다. 집에서는 빨리 약혼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로즈는 더 넓은 세상에 나가 자신의 재능을 펼치는 것이 꿈이다. 독수리타법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즈는 비서로 채용된다. 사장 루이(로망 뒤리스)는 로즈가 타이핑에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첫 번째 인물이다. 스포츠광인 사장은 로즈에게 타이핑 대회에 출전할 것을 권유하고 맹훈련을 시키지만 첫 대회에서 안타깝게도 고배를 마신다. 목표한 바를 끝까지 이루려는 사장은 로즈에게 자신의 집에 머물며 특별훈련을 하자고 제안한다. 로즈는 사장의 말을 불순한 의도로 받아들이고 화를 내지만 그의 진심을 알게 되자 제안에 응한다. 특별훈련이란 피아노 레슨과 체력단련이다. 피아노 레슨은 양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
타이핑 챔피언이 되기 위해 <사랑은 타이핑 중!>
-
카메라를 매단 자전거가 아이들을 따라 골목 구석구석을 누빈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서로의 별명을 부르며 안부를 묻는다. 갑작스러운 마을 행사 초대부터 느닷없는 낮술 고백까지 주고받는 안부도 제각각이다. 앞집, 옆집, 뒷집 등 이웃에 누가 사는지 모르거나 관심조차 없는 서울. 이 거대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마을에는 아직도 이웃사촌이라는 단어가 존재한다. 서울시 마포구에 있는 성미산 마을이다. 어느 날 평화로운 성미산 마을에 위기의 순간이 닥친다. 홍익재단이 성미산 남사면을 깎아 홍익 초/중/고등학교를 신설하기로 한 것이다. 산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마을 사람들은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약 3년 동안 성미산 개발에 맞서 싸운다. 싸움이 계속되던 중, 마을 주민인 짱가(유창복)는 성미산 100인 합창단을 기획한다. 합창단에 합류한 마을 사람들은 “좋은 말로 할 때 마을을 내버려두라”라는 내용의 <냅둬유>를 한마음, 한뜻으로 부른다.
강석필 감독과 홍형숙 PD가
평화로운 성미산 마을 <춤추는 숲>
-
2034년 테러범들이 잇따라 자살하는 기묘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을 조사하던 공안9과는 대규모 유괴사건이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그 배후에 ‘꼭두각시 조정자’가 있음을 눈치챈다. 사건이 점점 미궁으로 빠질 때쯤, 독립적으로 사건을 조사하던 쿠사나기 소령이 솔리드 스테이트를 조심하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사라지자 나머지 요원들은 그녀가 꼭두각시 조정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빠진다.
1989년 시로 마사무네가 발표한 짧은 만화로 시작한 <공각기동대> 시리즈는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1995)부터 개봉예정인 <공각기동대 ARISE>까지 4편의 극장판과 2개의 TV시리즈로 만들어졌다. <공각기동대 S.A.C Solid State Society 3D>(이하 <공각기동대 SSS>)는 가미야마 겐지 감독이 2006년에 만든 세 번째 극장판으로 2011년에 3D로 다시 개봉했다.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g
무의식 속 어둠의 존재 <공각기동대 S.A.C Solid State Society 3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