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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한 패를 쥐고도 연신 베팅하는 허세를 부리던 장태산(이준기)은 ‘한 끗발이 모자라서 졌다’며 자기 카드를 슬쩍 섞어 감추려다 결국 패를 들켜 비웃음을 산다. “바둑이(포커의 일종)판에서 바둑이 재롱 한두번 보시나” 너스레를 떨며 개평을 받아 챙기던 태산은 정비공으로 일하는 고아원 동생 집에 얹혀살며 ‘그렇게 살고 싶냐’고 핀잔을 들을 때도 “난 나사가 두개나 빠진 놈”이라며 한술 더 뜨는 자조로 받아친다. 조폭 출신 사업가 문일석(조민기) 대신 두번이나 감옥에 갔다왔지만 조직원들은 무기력하게 빌붙어사는 태산을 인간쓰레기 취급해왔다.
현실을 모르는 것보단 아는 게 낫고, 부정하는 편보다 인정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과오를 바로잡으려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알고 인정하려던 마음은 타인의 비난과 자신에 대한 실망 앞에서 자조나 자기 희화화의 방어벽을 치게 된다. MBC 드라마 <투윅스>의 장태산이 딱 그랬다. 그리고 갱생의 기회는 가장 비참한 순간에 찾아왔다. 나
[유선주의 TVIEW] 허세라는 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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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초기작 <거미의 계략>(1970)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를 각색한 작품이다. 30살의 베르톨루치는 여전히 고다르적인 청춘의 당돌함으로, 영화의 관습을 부수고자 하는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보르헤스의 단편 자체도 복잡하고 모호한데, 베르톨루치는 여기에 자기의 상상력을 덧칠하여 결과적으로 초현실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이야기는 아들이 반파시즘의 레지스탕스 영웅으로 찬양되는 아버지의 과거를 찾아가는 것인데, 종국에는 부끄럽게도 영웅이 아니라 배신자로서의 아버지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 배신자-영웅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여성으로 알리다 발리가 나온다. 베르톨루치가 특별한 이유 없이 그녀를 주연으로 캐스팅하진 않았을 것이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그녀
알리다 발리는 아마 <제3의 사나이>(1949)의 마지막 장면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비엔나의 고풍스런 길에서, 안톤 카라
[한창호의 오! 마돈나] 정치를 넘어 전설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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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는 최근 지상파와 SNS를 통해 무척 빠른 속도로 소비되고 있는 느낌이다. 이날 촬영장에도 몇몇 케이블TV 카메라가 쉬지 않고 그녀를 따라다녔다. 물론 그런 분위기는 스스로 더 많이 느끼는 듯했다. <클로젯>을 택한 이유도 “변화를 주고 싶었다”는 바람에서 시작됐다. 어쨌건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촬영보다는 한결 여유로워 좋다”고.
클라라의 망치질을 시연하고 있는 박가희 감독. 스릴러라는 장르 이전에 <클로젯>은 클라라와 오타니 료헤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개성이 충돌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구아바의 웹툰과 함께하는 ‘콜라보’ 작업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한정된 공간의 밀도’를 눈여겨봐달라는 감독의 주문.
낮에 통화했던 사진작가(오타니 료헤이)를 기다리며 서 있는 클라라. 창밖을 내다보는 표정이 서늘하다. 그러고는 커튼을 닫고 탁자를 끌어 문을 가로막는다. 겉으로는 평화로운 공방이지만, 그 속엔 뭔가가 있다.
<클로젯>은 한 여자(클
[씨네스코프] 그녀는 누구시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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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아줌마랑 쓰레기 버리러 갈래?” 묘하게 자신과 닮은 작은 어항 속 금붕어 한 마리와 대화를 시도해보지만 금붕어조차 그녀와의 대화를 거부하는 듯하다.
식구들 밥 챙겨주는 것도 잊은 채 최백호의 노래에 푹 빠져 있는 주인공 영애. 아들(윤용혁)은 “엄마, 밥 안 줘?”라고 퉁명스레 말하지만 엄마는 아들의 얼굴을 보자 금세 화색이 돈다. 그녀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를 닮았다.
정성껏 차려낸 밥상이건만 남편도 아들도 찌개가 식탁에 오르기도 전에 각자의 자리에 앉아 말없이 식사를 마치고 사라진다. 텅 비어버린 식탁. 그 쓸쓸한 공간에 홀로 앉아 영애는 밥에 물을 말아 입속으로 밀어넣는다.
“모니터로 보면 정말 못된 아빠 같아.” 모니터를 통해 배우들의 연기를 확인하고 있는 정현철(왼쪽) 감독과 정훈 프로듀서가 극중에서 아빠를 맡은 박준연 조감독의 연기를 칭찬한다.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8월23일,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씨네스코프] 낭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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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이 “좌파와의 역사 전쟁” 운운했을 때, 앗 고마우셔라, 할 뻔했다. 전쟁을 벌일 상대로라도 쳐주니까. 나야말로 ‘자학 사관’에 물든 거니? 일련의 ‘민주주의 실종’ 상황에서 국정원발 각종 ‘폭격’에 시달리다보니 어느새 가을 한복판이다. 속절없기도 하고 더디기도 하다. 시간은 거꾸로 가지 않는데, 어느 시대를 사는지 왜 이렇게 헷갈릴까. 막 쥬시후레쉬 씹으며 대한늬우스 들어야 할 것 같다.
기본적인 역사인식은 물론이고 사실관계며 하다못해 인용, 출처조차 왜곡•오류•부실투성이인 교과서의 주 저자를 불러다놓고 “‘좌파 척결’을 위해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는 강연에 열렬히 환호한 새누리당 의원들은 역사가 그들의 새로운 ‘블루칩’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친일이든 독재든 제국주의든 역사는 힘 있는 자들의 것이며 이긴 사람이 옳다는 ‘이념’ 혹은 ‘욕망’을 바탕으로 지지자들을 묶어세우고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한다. 이쯤되면 역사에 대한 모욕을 넘어 히스테리다.
[김소희의 오마이 이슈] 역사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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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희>에 대해 “이번에 미친 짓 중 하나는 노래를 통째로 넣는 것”이라는 홍상수 감독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특집 ‘홍상수의 첫 경험’, <씨네21> 921호). 영화 안의 음악으로 세번 나오는 <고향>은 이미 알려졌듯, 1941년에 발표된 가수 이난영의 노래를 최은진이 다시 부른 곡이다. 그의 어떤 직관이 이런 시도를 하게 만들었는지 우리가 알 길은 없으나, 그간 홍상수의 음악에 친숙한 우리에게도 이 곡은 어딘지 과도하게 들린다. 물론 일차적으로 그 느낌은 그의 영화에서 처음으로 한국의 근대가요가 흘러나오고, 그걸 부른 가수의 음색이 드라마틱하며, 무엇보다 이 노래에는 구체적인 가사가 있다는 점에 근거할 것이다. 애절하게 호소하는 가사를 더없이 애절하게 부르는 가수의 노래와 홍상수 세계의 조합에 대해 적어도 나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홍상수의 전작들에서 음악의 감흥은 음악 자체의 내용이나 개성이 아니라, 그 음악이 세
[신 전영객잔] 말(言)의 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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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해를 품은 달> <보고 싶다>로 여진구는 아역 배우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었다. 어설프게 어른 흉내를 내지도 않았고, 억지로 귀여움을 짜내지도 않았다. 여진구는 그저 연기에 빠진 소년이었다. 장준환 감독의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이하 <화이>)에선 더 큰 도전을 감행한다. 범죄자 집단에 의해 길러지는 소년 화이가 그가 맡은 몫. 여진구는 액션부터 감정까지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었던 이번 영화에서 아이와 어른, 선과 악의 경계에 선 소년을 믿음직스럽게 연기한다. 9월의 어느 일요일, 무시무시한 소년을 만났다.
1년 반 만에 다시 만난 여진구는 미세하게 변해 있었다. 키는 5cm쯤 더 자랐고, 목소리는 바리톤에서 베이스로 조금 더 깊어졌다. 니트 사이로 근육의 윤곽도 드러났다. 열심히 몸을 가꾼 결과인가 싶었는데 “조금만 움직여도 근육이 잘 붙는 체질”이라 따로 운동을 하진 않는다고 했다. 아역 배우라 부르기는 망설여지고
[여진구] 이젠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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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심야식당처럼 말이지. “마스터, 오늘 노래 한곡 부탁해요. 사표를 내고 왔거든.” 얼굴 길고 허리 길고 말수 적은 마스터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몇장의 음반을 눈앞에 늘어놓을 것이다. 아니지. “마스터, 바비빌의 <술박사> 들을 수 있어요?” 하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 말 없이 곡을 틀어준다, 그리고 내 앞에 맥주 한잔이 놓이는데…. 음식이 마음을 치유한다면 음악은 마음을 살게 한다. 그런 상상을 하게 만드는 책이 나왔다.
김중혁의 <모든 게 노래>는 그가 <씨네21>에 연재한 ‘김중혁의 No Music No Life’와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를 묶은 책이다. 매주 한 꼭지씩 초콜릿 상자를 탐하듯 야금야금 읽을 때와 사뭇 다른 맛을 내는 모둠이 되었다. 그의 칼럼을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이 책을 받자마자 내가 알던 글들과 뭐가 다른가 눈에 횃불을 켜고 들여다봤는데 묶은 순서 덕인지 처음 읽는 듯 맛깔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에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같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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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등단 26년째를 맞는 구효서의 여덟 번째 소설집. 표제작 <별명의 달인>의 화자는 학창 시절 자신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었던 친구를 찾아간다. 주위 사람들의 내•외면적 특징을 놀랄 만큼 잘 찾아내어 ‘별명의 달인’이라 여겨진 옛 친구. 그를 만나 지난날을 회상하던 화자는, 옛 친구에게 별명 짓기란 재미가 아닌 공포와 고통을 모면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음을 떠올린다. 이 소설을 비롯해 죽음에 대한 구효서의 사유를 만날 수 있는 단편집.
[도서] 공포와 고통을 모면하기 위한 방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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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하게 산다>를 쓴 도미니크 로로가 생활을 단순하게 유지하는 법을 말한다. 한 페이지에 한 꼭지씩, 스펀지를 반으로 잘라 세제 세 방울만 써 절약을 몸에 익힌다든가, 쓰레기통에 휴지를 던질 게 아니라 휴지통까지 걸어가서 버리는 것만으로 일상의 건강을 유지한다든가 하는 작은 실천법들의 모둠이 바로 <지극히 적게>다. 물건뿐 아니라 지적 검소함을 실천하는 비법으로 침묵을 지키고 남의 의견에 휘둘리지 말 것을 권한다.
[도서] 생활을 단순하게 유지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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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이 출간된다. 1차로 출간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풀베개> <태풍> 네권을 시작으로 그의 모든 소설을 망라할 예정이다. 각 권 말미에 한국 문학가들의 ‘소세키 독후감’이 실려 읽는 재미를 더한다. 시인 장석주가 읽은 ‘고양이’의 고군분투, 소설가 백가흠이 말하는 우리 시대의 <도련님>, 문학평론가 황호덕이 꼽은 <풀베개>의 연민,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찾은 <태풍>의 문학론을 만날 수 있다.
[도서] ‘소세키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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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화가 야마자키 마리의 프로필. ‘1967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4살 때 만난 이탈리아 도예가의 손자(이탈리아인)와 결혼하여 중동,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지에 살다가 2011년 현재 남편의 부임지인 시카고에서 살고 있다. <테르마이 로마이>로 2010년 일본 만화대상, 제14회 데즈카오사무문화상 단편상을 받았다.’ 그리하여 일본제 우스터 소스를 좋아해 오코노미야키나 다코야키를 잔뜩 먹어치우는 남편과의 이야기나 이탈리아 유학 시절 이야기를 그리는 것만으로도 책 한권이 되는 (부러운) 작가다. 피자나 파스타를 파는 가게나 체인점이 동네 골목까지 들어와 있는 한국에서 이탈리아 요리라는 것은 본토보다 일본의 스타일을 따르는 경우가 많으니, <식사는 하셨어요?>와 공감의 폭이 깊다. 고대 로마의 목욕탕 설계기사가 현대 일본으로 타임슬립해 진보한 목욕문화를 만나는 이야기를 그린 <테르마이 로마이>(아베 히로시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를 쓰고 그린
[도서] 본격 배고파지는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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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앤 프랭크> 감독 제이크 슈레이어 / 출연 프랭크 란젤라, 피터 사스가드, 제임스 마스던, 리브 타일러, 수잔 서랜던
<로봇 G> 감독 야구치 시노부 / 출연 미키 커티스, 요시타카 유리코, 하마다 가쿠, 가와이 쇼고
말만 하면 뭐든 검색해주는 기적의 인공지능 서비스 ‘시리’(Siri). 아이폰 4S를 구입한 뒤, 시리의 기능에 탄복하며 시리에게 할 말, 못할 말 건네며 딱 하루, 즐거웠다. 처음엔 신기했는데 입만 열면 말할 상대가 넘쳐나는 마당에 굳이 디지털 기기까지 동원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이후엔 버튼이 잘못 눌려져(자주 그런다) 시리가 온 모드가 될 때마다, ‘이 쓸모없는 기능!’ 하고 신경질을 내는 게 시리와 하는 소통의 전부다.
<로봇 앤 프랭크>의 가사도우미 로봇 VGC-60L을 보면서, 제 몸도 갖지 못한 채 음성만으로 존재하는 시리를 향한 센티멘털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VGC-60L은 바쁜 아들이 치매 걸린 아버
[digital cable VOD] 우리 할배가 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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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이 참여하는 GV현장은 항상 만석이다. 9월11일 CGV대학로 무비꼴라쥬관에서 열린 <우리 선희>의 시네마톡도 마찬가지. 자리를 가득 채운 관객은 시네마톡이 진행되기 전에 상영된 영화를 통해 이미 홍 감독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진행을 맡은 이화정 기자는 “이 영화가 홍 감독의 작품 중 가장 대중친화적이다. 의외로 쉽고 재미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속에서 홍 감독이 숨겨놓은 의도를 찾아나가자”는 말로 대화의 장을 열었다.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이 영화를 촬영하며 홍상수 감독에게 심경의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라는 말을 제일 먼저 꺼냈다. 매일 아침 써내려간 쪽대본으로 영화를 찍는 감독답게 ‘그때 그렇게 느껴서 찍은 것 같다’라는 모호한 대답을 내놓기로 유명한 홍 감독이 이번 시네마톡에서는 작품에 대한 생각을 긴 호흡으로 풀어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선희>는 선희(정유미)와 그녀를 둘러싼 세 남자 사이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네마톡] 틀이 있어야 이야기가 모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