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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연히 삶 안에 있는데도 특정한 계기 없이는 잘 감지되지 않는 삶의 진리들이 있으니 그것을 들여다보자고 이창재 감독은 다큐멘터리로 자주 청한다. <사이에서>(2006)는 삶이 껴안고 있는 무속을, <길 위에서>(2012)는 비구니들의 삶으로서의 수행을 그렸다. 그리고 <목숨>에서는 삶의 끝을 만진다. <목숨>은 죽음에 임박한 이들이 생의 마지막 나날을 보내는 곳, 호스피스 병동, 그곳의 사람들을 기록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고 들었다.
=시작은 8년쯤 전이었다. 무속인을 주인공으로 <사이에서>를 찍고 있을 때였다. 무속인에게 30대쯤 되어 보이는 손님이 찾아왔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무속인이 점괘는 설명을 제대로 안 해주고 이상한 이야기만 해주더라. “무조건 즐겁고 신나게 생활하라”고 말이다. 손님이 떠난 뒤 물었더니 이렇게 답해주더라. “저 사람은 지금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사실은 이미 명이 끝나 있는 운세다. 몇 개
[이창재] 생의 마지막을 기록하는 일은 기어이 풀어야 할 숙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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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의 변방에서, 고독하지만 꿋꿋하게, 누구보다 아름다운 방식으로 반도네온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 여전사. 반도네온 연주자 고상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정재형, 김동률 등 음악에 관해서라면 절대 타협하지 않는 유명 뮤지션들의 음반에 세션으로 참여해왔던 그녀에게 올해는 특별한 한해였다. 아홉곡의 자작곡이 수록된 첫 정규 앨범 ≪Maycgre 1.0≫을 발매했고, 10월엔 첫 단독 콘서트를 열었으며, 오는 12월4일부터 ‘일본의 아스토르 피아졸라’라는 평가를 받는 유명 반도네온 연주자 료타 고마쓰의 일본 투어에 그녀는 한국 출신 반도네온 연주자로서 처음으로 참여한다. 수많은 ‘처음’으로 점철된 한해였지만, 고상지에겐 순간의 기쁨을 곱씹는 것보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음악에 대한 몰입이 더 중요해 보였다. 애니메이션과 롤플레잉 게임의 열렬한 팬이며, 호전적이고 똑 부러지는 애니메이션 여주인공들을 사랑한다는 고상지의 취향과 그녀의 음악은 서로 닮아 있었다.
-일본 투어를 준비 중이
[trans × cross] 로봇 합체 장면을 보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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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는 100%다. 태도도, 외모도, 자기 일에 대한 열정도. 이 말에 딴죽을 걸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언제 어디서나 흐트러짐 없는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이정재는 100%의 남자다. <빅매치>는 그런 이정재를 만날 수 있는 영화다. <빅매치>에 오락영화, 액션영화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도 있지만 굳이 ‘이정재의’ <빅매치>라고 표현하고 싶은 이유도 액션과 코미디를 완벽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버린 이정재의 놀라운 연기 때문이다. 이정재는 <도둑들> <신세계> <관상>에서 연이어 호연을 펼쳤고, 세 영화 모두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면서 그는 데뷔 20주년이었던2013년을 화려하게 보냈다. 지난해 영상자료원에선 이정재 특별전이 열렸고, 올해는 뉴욕아시안영화제에서 이정재 특별전이 열렸다. “운 좋게 계속해서 영화를 찍다보니 그런 의미 있는 행사를 마련해준 것 같은데 막상 연
[이정재] 완성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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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뜻 이별을 통해 사랑을 증거함
속뜻 이별을 통해 사랑을 쟁취함
주석 연인에게 건넬 수 있는 최고의 ‘개드립’은 단연 이 말일 것이다. “사랑하니까, 우리 헤어져.” 이 말보다 더한 말은 있을 수가 없다. 그땐 이미 헤어진 다음일 테니까. “사랑하는데 왜 헤어져?”라고 반문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이게 다 널 사랑해서야”라는 동어반복밖에 들을 게 없을 것이다. 부모들이 하는 훈계하고 비슷하지 않은가? 이게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하면 나는 좋지 않은데(=잘되지 않는데), 부모님은 왜 내가 잘되는 일이라고 우기는 걸까?
“너 잘되라고”는 일종의 명령문이다. ‘내가 명하는 대로 하면 너는 잘될 것이다’의 준말이다. ‘잘되다’의 주어가 사실은 자식이 아니라 부모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랑하니까 헤어져”는 ‘내가 사랑하니까 우리 헤어져’의 준말인데, 이번에는 주어가 아니라 목적어가 빠져 있다. 저 말을 온전한 문장으로 적으면 이렇게 된다. ‘다른 사람을
[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사랑하니까 헤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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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배우인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는 이탈리아어를 잘하지 못했다. 그녀는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서 시칠리아 출신 부모 아래 태어나 그곳에서 10대까지 자랐다. 당시 튀니지는 프랑스의 지배 아래 있었다. 카르디날레는 튀니지의 프랑스 학교에 다녔다. 프랑스어로 교육받고, 튀니지 친구들과는 아랍어로 사귀고, 그리고 집에서는 이탈리아어, 정확히 말해 시칠리아 지역어를 썼다. 말하자면 어릴 때부터 말 그대로 ‘다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지역주의에서 벗어난 개방성이 카르디날레의 개성이 됐는데, 이런 특성은 훗날 역시 개방적인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를 만나, 활짝 꽃핀다. 북아프리카에 숨겨져 있던, 시칠리아 말도 겨우하던 이탈리아 소녀는 비스콘티의 <레오파드>(1963)를 통해 세계의 스타로 성장하는 것이다.
튀니지의 프랑스 문화권에서 성장
카르디날레가 배우의 정체성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피에트로 제르미의 <형사>(1959)에 출연하면서부터다. 이전까지는 10
[한창호의 오! 마돈나] 북아프리카의 이탈리아 ‘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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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건맨> The Gunman
감독 피에르 모렐 / 출연 숀 펜, 하비에르 바르뎀, 이드리스 엘바
숀 펜과 하비에르 바르뎀이 앙상블을 이룬 액션 스릴러다. 숀 펜이 비밀조직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조직원을, 하비에르 바르뎀이 숀펜을 뒤쫓는 악역을 맡았다. 유럽을 무대로 도주극이 펼쳐지며 원작은 장 패트릭 망셰트의 소설이다. <13구역>과 <테이큰>의 뒤를 이을 피에르 모렐 감독의 신작으로 내년 2월20일 북미 개봉예정.
[WHAT'S UP] <더 건맨> The Gun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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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패션왕> 브랜드 시대, 보세왕국
[정훈이 만화] <패션왕> 브랜드 시대, 보세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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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이후드>를 보고 나서 깊은 감동에 빠졌다가 곧바로 두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어째서 <보이후드>는 남자아이가 성에 눈뜨는 과정을 철저하게 배제했는가?’ 그리고 ‘어째서 12년이라는 세월 동안 메이슨 주변에서는 한명도 죽는 사람이 없는가?’ 두 가지 의문은 하나로 통합될 수 있을 것이다. 섹스란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키는 과정인 동시에 죽음과 아주 가깝게 붙어 있는, 죽음의 반대말이라 생각한다면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섹스’와 ‘죽음’의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빼버린 이유가 짐작이 된다. 특정 스포츠 심사위원들이 최고점과 최저점을 뺀 점수를 평균 내서 등수를 정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 가장 흔하지만, 또한 가장 극단적이기도 한 섹스와 죽음이 <보이후드>에는 빠져 있다.
영화의 초반에는 기대감이 컸다. 어린 메이슨이 마당 구석에서 브래지어 팸플릿을 보면서 이상한 웃음을 지을 때, 나는 ‘소년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다. 동네 형들과
[김중혁의 바디무비] 소년에게 섹스와 죽음이 없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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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에 대한 만화책 두권이 나란히 출간되었다. 호즈미의 <안녕, 소르시에>와 바바라 스톡의 <반 고흐>. 표지에서부터 느껴지는 확연히 다른 그림체만큼이나 다른 전개다. 일단 공통점부터. 반 고흐에 대한 신화는 그가 생활고와 싸우고 다른 화가들과 다투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사후에 인정받고 유명해질 그림들을 그려냈다는 가정을 한다. 호즈미와 바바라 스톡은 그가 홀로 마지막 시간들을 견딘 것은 아니라고, 그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후원자이자 지지자가 그 시간을 함께 버텨주었다고 가정한다. 바로 그의 동생 테오다. 화랑에서 일하던 테오는 형이 인정받을 수 있도록,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도록 그를 격려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반 고흐>는 반 고흐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색채의 향연이다. 태양이 샛노랗게 달아오르고 밤의 별빛은 영롱히 빛나는, 이발소 벽화에서나 화장실 문 앞에서나 상투적으로 등장하곤 하지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형제는 위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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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란 어디에서 출발하여 지금 어디에 와 있고, 그 변화를 이끄는 힘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오늘날 박물관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를 들려준다. 박물관의 역할 변화,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박물관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도. 프랑스 파리1대학 팡테옹-소르본에서 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저명한 역사학자로도 활동하고 있는 저자 도미니크 풀로는 18세기 박물관의 기원부터 21세기 오늘날, 그리고 이후까지의 박물관에 대한 이야기를 엮었다.
[도서] 박물관의 기원부터 오늘날, 그 이후까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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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스의 산>의 기타무라 가오루가 “엘러리 퀸을 향한 경의가 확연하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실로 반가운 작품”이라고 평한 이상, 본격 미스터리 팬이라면 읽지 않을 수 없는 작품. 학교에서 한 학생이, 무대에서, 칼에 찔려 죽은 채 발견된다. 그리고 발견 당시까지 현장은 밀실이었다. 일본의 학원 미스터리물을 연상시키는 첫 장면부터, 귀여운 캐릭터들이 사건을 추리해가는 과정까지 술술 읽힌다. 아마도 몇년 내로 일본 드라마로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다.
[도서] 본격 미스터리 팬을 위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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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자신의 경험에서부터 소설쓰기를 짚고 되짚는 과정을 담았다. “스무살의 내가 역전 근방에서 매일 몇편씩, 때로는 몇 십편씩의 시를 노트에 쓸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를 비롯한 동네 가게 주인들의 세계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획기적으로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갑자기 나빠지지도 않는 세계 속에서, 어떤 희망이나 두려움도 없이, 마치 그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일하는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 독특한 사전을 보면 바로 구입한다든가 그렇게 건진 단어들을 소설에 썼다는 식의 노하우도 전수한다.
[도서] 소설쓰기를 짚고 되짚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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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의 순간>은 박찬욱, 봉준호, 류승완, 변영주, 임순례 등 한국 영화감독 17인의 데뷔기를 인터뷰해 묶은 책이다. 읽다보면, 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한국영화계가 하나의 흐름으로 꿰인다. 자기 영화가 아니라 주어진 시나리오로 데뷔를 한 것이 지금도 썩 내키지 않는다는 말(<동갑내기 과외하기> 김경형), 영화와 확실히 닮아 있는 거칠었던 학창 시절에 대한 입담(<똥파리> 양익준), 임권택 연출부-조감독 시절에 대한 회고담(<번지점프를 하다> 김대승), 김기덕 연출부-조감독 시절에 대한 증언(<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 장철수), 지금 보면 믿기지는 않지만 온통 공모전에서 떨어진 사연(<범죄의 재구성> 최동훈 감독) 등이 그득하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했다는 무용담이다. 자기 재능을 믿고 자신만만한 사연은 없다. 대체로 우연히 영화 언저리 혹은 관련자와 친분이 생겼고, 하다보니 관심이 깊어졌
[도서] 회상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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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찾아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디자이너 테조 레미의 <당신의 기억은 버릴 수 없어요>(1991). 버려진 서랍들을 모아 새로 틀을 끼우고 밴드로 묶어 서랍장을 만들었다. 이 아름다운 수납가구의 덤은 쉽게 쓰고 버리는 소비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레미는 손에 남은 물건들로 낙원을 건설한 표류자 로빈슨 크루소에게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혹시 <박스트롤>의 제작진도 레미의 작품을 본 적이 있을까? 영화 속 ‘상자요정’ 종족 역시 인간들의 고물을 수집해 재활용하고 발명하는 친환경적 재간둥이들인 데다가 유사시에는 오작교 짓듯 서로의 몸을 쌓아올려 근사한 구조물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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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줘>의 상영관 출구. “나쁜”, “사이코패스” 같은 단어가 웅성거림 속에서 불거져나온다. 그 말들은 어쩐지 에이미 던(로저먼드 파이크)에게 딱 들어맞지 않는 기분이다. 거기에는 에이미라는 캐릭터의 참담한 면모가 빠져 있다. 귀갓길에 에이미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애타게 에이미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