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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머릿속에서 리처드 링클레이터라는 이름과 가장 가까이 붙어다니는 몇개의 단어들이 있다. 이를테면 사랑, 시간, 성장 그리고 변화(혹은 이 단어들을 조합한 변주들). 축을 달리해보면 끝없이 이어지는 수다스러운 대사들, 엔딩 크레딧을 빼곡하게 채운 음악들, 그리고 영화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배우들도 떠오른다. 그의 최근작 <보이후드>를 보고 있으면 실제로 링클레이터와 함께 머릿속을 떠다니는 저 ‘아이템’들이 그를 읽어내는 ‘만능열쇠’란 생각을 굳히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잠깐만, 1991년 <슬래커>로 시작한 링클레이터의 필모그래피 속엔 이 만능열쇠가 잘 맞지 않는, 그래서 슬쩍 뒤로 밀쳐놓고 싶은 영화들이 있다. 이 ‘당혹스러움’의 가장 끝에 놓인 것이 바로 몇편의 코미디영화들이다. ‘내 인생의 링클레이터’란 이름으로 이야기하긴 머쓱하지만, ‘조심스러운 추천작’ 정도로는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들이랄까?
시간 순서 말고 당혹스러움의 순서대로 보자면
웃픈 남자들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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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해도 아이들 앞에선 내색 한번 하지 않는 엄마, 알코올에 중독돼 항상 폭언과 폭력을 휘두르는 새 남편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는 엄마. <보이후드>의 주인공 메이슨(엘라 콜트레인)과 그의 누나 사만다(로렐라이 링클레이터)가 별 탈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것도 그들 옆에 항상 씩씩한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올리비아를 연기한 패트리샤 아퀘트의 주름은 아이들이 성장한 만큼 늘었다. <보이후드>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과 처음 작업한 패트리샤 아퀘트를 지난 2월, 베를린 시내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12년 전 아이들과의 첫 만남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이들은 훌륭했다. ‘이 아이들이 내 아이들이라면 정말 신날 거야’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웃음)”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12년 전이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앞으로 12년 동안 뭘 할 거냐고 물었다. 계속 일을 구하지 않을까라고 대답했다. 그가 12년 동안 매
“성장한 두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울음이 나올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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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리브는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연기 연출을 둘러싼 반복되는 오해 중 하나였다. 그의 영화 속 모든 장면들은 일상의 한순간을 솜씨 좋게 베어낸 듯 감쪽같았기에 어디까지가 연출이고 실제인지 관객은 궁금했다. 그러나 링클레이터로 말하자면, “나쁜 연기는 나쁜 시나리오의 다른 말”이라고 믿는 감독이다. “느슨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꼼꼼하게 구축되어 있을 뿐이다. 임기응변을 통해 정확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법을 나는 모른다”는 그의 촘촘한 영화 설계도에 애드리브를 위한 자리는 없다. 느슨함을 연출하는 치밀한 구성의 레시피를 완성하는 것은 “첫째는 시나리오고 둘째는 리허설”.
배우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대사를 완성함으로써 캐릭터를 넘어 영화 전체의 주인이 되도록 독려하는 것은 <슬래커>부터 이어진 그의 연기 연출법이고, ‘비포’ 시리즈를 거치면서 이는 그의 영화론으로 발전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어떻게 셀린느를 기차에서 내리게 할 것인가 등을 두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
그들 모두가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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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여름, 텍사스를 포위한 산불이 모든 걸 집어삼켰다. 1천여채가 넘는 주택이 전소한 가운데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집도 화마를 피해갈 수 없었다. 수많은 시나리오와 제작노트들이 한줌 재가 되어 사라졌지만 무엇보다 <보이후드>에 대한 몇몇 기록들과 앞으로의 진행에 대한 아이디어가 날아간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을 것이다. 6살 소년이 18살 성인이 될 때까지 12년의 이야기를 매년 15분씩 카메라에 담기로 했던 무모한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우려했던 대로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친 것처럼 보였다. 일정 부분 방향 수정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냐는 주변의 질문에 그러나 그는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이런 게 인생이지.”
링클레이터가 영화의 리얼리티에 대해 사유하는 방식
<보이후드>는 얼핏 인생의 불확정성을 담아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12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담아낸다는 건 감독의 야심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프로젝트가 될 수밖에 없다. 안정성을 담보로 해야 하는 상
당신도 <보이후드>의 일부가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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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역사의 한 페이지를 목격한다. 소년이 어른이 되기까지의 기록이자 그 시절에 대한 당신과 나의 기억이며 한 영화가 클래식의 반열에 오르는 순간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12년이란 시간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보이후드>는 단순히 걸작이란 말 안에 가두기 힘든 영화다. 그저 상찬하는 것만으로는 이 영화와 관객, 나와 시간 사이의 공명을 채 설명할 수 없다. 제작과정을 제외하곤 얼핏 여타 성장영화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나이 들어가는 경이로운 체험의 끝에서 시간과 기억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사유를 발견한다. 불가능해 보였던 프로젝트를 완성시킨 뚝심에 경의를 표하며, 전혀 다르게 체험되는 영화의 발견에 감사를 보내며,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에게 말을 걸어본다. 당신의 지금은 어디입니까. 이제 영화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언제나 지금 여기 우리 함께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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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LGBT영화제가 2015년을 맞아 그 이름과 기간, 장소를 바꿔 ‘서울프라이드영화제’로 새롭게 시작한다. 이제 LGBT라는 용어로 다 담아낼 수 없는 성소수자 그룹을 모두 포괄하는 단어인 프라이드를 전면에 내건 것. 올해의 개막작은 (영화제와 이름이 같은) <프라이드>. 1984년 영국 대처 총리 집권 당시, 광산 노동자의 파업을 지지하는 성소수자들의 연대를 보여준다. 노동자의 파업을 돕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배척당하는 성소수자들의 사연을 유쾌하게 풀어나간다. 10월31일 핼러윈 데이에 개막식을 여는 서울프라이드영화제는 22개국 35편의 영화를 일주일간 선보인다.
‘핫 핑크’ 섹션은 결혼평등 제도화가 기운을 넓히고 있는 추세에 맞춰 ‘결혼평등과 파트너십’을 고민하는 영화들을 모았다. <리미티드 파트너십>은 1975년 미국, 깨어 있는 공무원의 도움으로 세계 최초로 합법적인 동성결혼을 올린 리처드와 토니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결혼을 마쳤지만 미국 이민국이
[영화제] 결혼평등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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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도시계획 이론가 포레스터는 과학적 실험보다 ‘이야기’를 통해 더 많이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생활 경험은 주관적이며, 환경을 개발하거나 보전하는 일은 가치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상 건축에 관한 이야기는 해당 구성원들의 공동 가치를 내포한다. 이 점은 관객을 건축영화로 이끄는 동력이 된다. 10월28일부터 11월2일까지, 이화여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제7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주최 대한건축사협회)가 열린다. 14개국 19편의 장편영화들이 들려주는 건축 이야기가 관객을 기다린다.
개막작은 현대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사로 꼽히는 고트프리트 뵘을 다룬 영화 <뵘 가문의 건축과 함께하는 삶>(2014)이다. 93살의 고트프리트 뵘 외에도 그의 가족들은 4대째 건축사로 활동 중이다. 영화는 노령의 건축사 뵘이 경험하는 현재의 공간과 더불어 같은 장소를 담은 과거 이미지들을 교차편집해 미묘한 시각차를 담은 공감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유명 건축물과 건축사
[영화제] 건축이라는 ‘이야기’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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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저메키스는 완전히 다른 두 얼굴을 지니고 있는 감독이다. 하나는 최신 기술의 구현에 대한 모험가, 다른 하나는 완벽히 조율된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다. <하늘을 걷는 남자>는 양쪽을 절묘하게 줄타기하며 걷는 저메키스의 내공을 증명하는 영화다. 어려서부터 줄타기에 매료된 필리프(조셉 고든 레빗)는 줄타기를 독학해 거리 공연을 전전한다. 아티스트로서 위대한 도전을 꿈꾸는 그는 건설 중인 월드트레이드센터 사이에 줄을 연결해 걷고 싶다는 꿈을 꾼다. 조력자들을 모으고 계획을 실현시켜나가는 필리프. 마침내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세기의 공연, 불법적인 예술 쿠데타가 펼쳐진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지만 그저 줄 타는 순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 이상 어떤 가치가 있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래비티>가 그러했듯 ‘사실적’인 재현이 때로는 사실을 뛰어넘을 수 있음을 실감케 한다. 아찔한 순간을 수사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허공을 걷
사실을 뛰어넘는 '사실'적 재현 <하늘을 걷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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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벤 포스터)은 기량을 끌어올리기 위해 에포라는 금지 약물을 복용한 뒤 고환암 판정을 받는다. 고환을 잘라내고 뇌로 전이된 부분을 도려내는 대대적인 수술 후 죽을 고비를 넘기지만, 선수로서의 재기는 불투명하기만 하다. 랜스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스포츠 닥터인 페라리(기욤 카네)를 찾아간다. 페라리는 약물로 랜스의 기량을 끌어올리고 주변 선수들이 뒷받침해주는 방식으로 그를 우승시키는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그의 성공은 사이클링계 역시 바라는 바다. 그의 재기는 이슈가 되기 충분하며 사이클링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랜스 암스트롱 영웅 만들기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한편 스포츠 기자 데이비드 월시(크리스 오다우드)는 랜스의 성공에 의문을 품고 그의 뒤를 캔다.
역경을 딛고 정상에 오르는 인물의 영웅담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와 같다. 우리 시대는 늘 영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챔피언 프로그램>은 영웅이 어
희대의 사기꾼이 된 스포츠 영웅 <챔피언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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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 건물 창문닦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는 청년 히로시(노다 요지로). 미대를 나왔지만 그림에 대한 꿈은 접은 지 오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위암으로 3개월 선고를 받게 된다. 갑작스럽게 닥친 죽음을 감당해야 하는 히로시와 달리 우연히 만난 고등학생 소녀 마이(스기사키 하나)는 치매 걸린 할머니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삶을 비관하며 살아간다. 감정의 유효기간에도 불구하고 히로시는 마이에게 끌리기 시작하고 마이 역시 히로시에게 첫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병에 걸리기 전 히로시는 목적 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이십대 청년에 불과했다. “계속 아르바이트만 하면서 살 거냐?”는 주변의 우려 섞인 질문에도 그는 이렇다 할 답변을 준비하지 못한다. 그러던 그가 삶의 의지를 피력하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인지하고 나서부터다. 병원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 소녀 마이를 통해 그는 처음으로 삶의 가치에 대해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히로시는 화장실 벽 전체에 꿈을 잃은 소녀 마이에게 희망을
삶을 향한 뜨거운 에너지 <화장실의 피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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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사랑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문학평론가 웬디(퍼트리샤 클락슨)는 일에서는 남부러울 것 없지만 사랑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최근 7년에 한번씩 크고 작은 외도로 속을 썩이곤 했던 남편 테드가 21년 만에 진지하게 별거를 요구해온다. 이 문제로 웬디와 테드의 언쟁은 인도 출신 시크교도 다르완(벤 킹슬리)이 모는 택시 안에서까지 이어진다. 며칠 뒤 타지에 살던 딸 타샤(그레이스 검머)가 웬디를 찾아온다. 그런데 한다는 소리가 운전이라도 배워보라는 훈수다. 딸의 충고에 웬디는 한층 더 우울해진다. 한편, 다르완은 웬디가 택시에 두고 내린 서류를 전해주기 위해 그녀의 집을 찾는다. 이를 계기로 다르완이 운전강습을 병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웬디는 운전을 배우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운전강습은 시작된다. 웬디는 끼어드는 차보다 더 위험한, 끼어드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지금에 집중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노년의 성장 드라마다. 성장은 젊은이에게나 해당하는 말이라 치부
노년의 성장 드라마 <인생면허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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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환경 속에서도 게임 디자이너라는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던 지은(신현빈)은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서 낯 모르는 남자들에게 붙잡혀 성폭행을 당한다. 하지만 경찰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생긴 언어장애로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지은의 모습에 제대로 수사를 하기는커녕 자작극이라며 그녀를 의심한다. 우연히 지은의 사건을 접하게 된 형사 자겸(윤소이)은 비슷한 장애를 가진 여동생을 떠올리며 지은을 돕기 시작하지만, 지은은 이 일을 스스로 해결하기로 결심한다.
<어떤 살인>은 전형적인 여성 복수극의 서사를 따라가지만, 복수를 해나가는 주인공 지은을 따라가는 대신 지은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인물, 자겸을 배치함으로써 이야기를 좀더 풍부하게 짜나간다. 실제로 영화는 지은의 복수보다 이를 지켜보는 자겸의 심리묘사에 더 공을 들인다. 형사인 자겸에게 지은의 복수는 막아야 할 것이지만, 지은에 대한 알 수 없는 유대감에 자겸은 지은의 복수 행각을 지켜보며 괴로워한다. 하지만
복수 앞에 선 두 여자 <어떤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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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톨이 소년 앙리(빅터 안드레 튀르종 트렐레)에겐 어두운 곳에서 빛을 찾아 밝히는 힘이 있다. 주변을 환히 빛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에도 앙리의 마음엔 어둠이 가시지 않는 구석도 존재한다. 사라진 아버지와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생겨난 그 어둠은 조금씩 앙리를 잠식한다. 시간이 흐르고 청년이 된 앙리는 재능을 잘 갈고닦아 조명가게에 취직해 여러 사람을 만난다. 동료 모리스는 대식구를 거느린 푸근한 사람이다. 괴팍한 노인 비노는 과거에 부유한 피클 상인이었다. 그리고 앙리가 한눈에 반한 아리따운 극장 매표원 헬렌은 남모르는 비밀을 갖고 있다. 앙리와 인물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신들의 삶을 더욱 밝게 만들어간다.
마르탱 탈보 감독의 장편 데뷔작 <앙리 앙리>는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 전작 단편들에서도 감독은 꾸준하게 ‘선량한 의지와 믿음의 승리’라는 주제를 견지해왔고, <앙리 앙리>는 이를 더욱 구체적인 미장센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트디렉터
앙리의 눈에 비친 밝은 빛의 세계 <앙리 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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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진심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전해질 수 있을까. 어린 딸과 단둘이 살아가는 바쁜 아빠 명환(지진희)은 형사다. 그는 딸과 시간을 더 보내고 싶지만 범인을 쫓느라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또한 배우 서정(성유리)과 10년째 같이 일해온 매니저 태영(김성균)은 서정의 제멋대로인 성격 때문에 곤란한 뒤처리를 도맡아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서정을 몰래 좋아하는 그의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한편 왕년의 권투 챔피언 강칠(김영철)은 병실에서 운명의 라이벌 종구(이계인)를 만난다. 안 그래도 불편한 사이였던 두 사람은 결국 자존심을 걸고 다시 승부를 벌이기로 한다. 그리고 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모두 상대에게 미처 못한 말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다.
<미인도>(2008) 등을 만들었던 전윤수 감독의 신작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는 ‘눈물’에 방점을 찍은 멜로드라마다. 즉, 영화에서 다루는 세 가지 이야기는 소재만 다를 뿐 모두 등장인물들의 슬픈
'눈물'에 방점을 찍은 멜로드라마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