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고 행하라. 김윤석이 김범신 신부를 연기하는 동안 속에 품었던 단 하나의 말이다. <검은 사제들>의 김 신부는 그야말로 곧은 성직자, 모든 고난을 묵묵히 감내하고 신의 길을 가는 남자다.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김 신부는 이미 오롯하게 완성돼 있다.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두에게 등 돌렸으며, 모든 것을 신께 바칠 준비가 된 사람이다. 그 완고한 태도가 범인들로 하여금 종종 그를 향한 오해와 불신을 불러일으키게도 하지만 정작 김 신부 본인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거기다 악령을 쫓는 신부라니. 누구라도 쉬이 선택할 수 없었을 역할이다. 김윤석이 김 신부에게 깃들게 된 것은 일종의 “목마름” 때문이었다. “악역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아니, 악역이라 더 개성 있다고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 캐릭터와 서사에 밀도를 채워넣고 싶은 욕망이 내게 있었다. 자기가 맡은 일에 목숨을 걸고 스스로 파멸하는 자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김 신부가 도중에 최 부제에게 그러잖나. ‘아무도 몰
[김윤석] 집행자의 운명
-
김윤석과 강동원이 <전우치> 이후 6년 만에 검은 사제복을 입고 만났다. 이 세상의 어둠을 겪을 대로 겪은 김 신부(김윤석)와 그의 눈엔 아직 새파랗게 어린 핏덩이일 뿐인 신학생 최 부제(강동원)는, 소녀의 몸에 꼭꼭 숨어 있는 악(惡)과 대면한다. 파멸을 각오하고서 악령과 대결하는 <검은 사제들>의 두 인물은 집요하고 대담하게 구마예식에 매달리는데, 그 모습이 캐릭터를 마주한 두 배우의 태도와 꽤 닮아 보인다.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집요하고 대담한 김윤석과 강동원. 두 배우의 카리스마는 <검은 사제들>을 더욱 밀도 있는 영화로 완성시켰다.
[김윤석, 강동원] 집요하고 대담하게 캐릭터와 마주하다
-
감독이라고 폼 잡고서 모니터 앞에서 다리 꼬고 앉아 있던 어느 현장이었다. 꽤나 친한 조명감독에게 선문답처럼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조명감독이여. 그대는 영화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내심 그 조명감독이 “영화의 본질은 빛입니다”라고 대답하기라도 하면, “이런 후카시 같으니라고!”라고 마구 놀려댈 요량으로 던진 농담이었지만, 그의 대답은 농담치고는 너무나 현명했다. 그 대답은 “영화의 본질은 스케줄입니다”였기 때문이었다. 난 꼬았던 다리를 푼다. 그래. 영화의 본질은 스케줄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한날한시에 모여야 만들어지는 게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감독 혼자서 만드는 게 아니다. 영화는 스탭들이 만드는 것이다. 꿈과 환영처럼 펼쳐지는 저 스크린 뒤, 거기엔 카메라와 붐대를 들고 버티고 있는, 무전기와 연장을 들고 뛰어다니고 있는 스탭들이 있다.
프리 프로덕션, 현장, 포스트 프로덕션에 모두 참여하는 연출부와 제작부
[곡사의 아수라장] 감독은 대명사다
-
<더티 그랜파> Dirty Grandpa
감독 댄 마저 / 출연 로버트 드니로, 잭 에프런, 조이 도이치
제이슨(잭 에프런)은 결혼을 앞두고 플로리다행 봄 휴가를 계획한다. 파티광인 여자와의 결혼이 못마땅한 할아버지 딕(로버트 드니로)은 손자를 속이고 기어코 플로리다로 함께 여행을 떠난다. 퇴역 장교인 딕의 거친 입담과 기행으로 제이슨의 여정은 점점 분탕해진다. <못말리는 알리>(2002),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2006) 등 사샤 바론 코언 주연작들의 각본과 제작을 겸한 댄 마저가 감독한 새로운 코미디다. 내년 1월22일 북미 개봉예정.
[WHAT'S UP] 로버트 드니로, 잭 에프런 주연 코미디영화 <더티 그랜파> Dirty Grandpa
-
-
‘사이다’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거 아닐까. 최근의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들을 들으며 설명하기 힘든 묘한 답답함을 느껴왔는데 올리버 헬덴스의 이 곡을 듣고 그 응어리가 시원하게 풀렸다. 속이 다 후련하다. 가슴이 뻥 뚫린다.
요즘 계속 느껴오던 그 답답함이란 바로 ‘에너지의 부족’이었다. 최근의 일렉트로닉 댄스 경향은 ‘탈EDM’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간단히 말해 자극적인 에너지만 키우는 것을 넘어 오래 들을 수 있는 작품성 있는 예술을 하자는 것이었다. 유독 보컬 콜라보와 멜로디를 강조한 디스클로저와 아비치의 행보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 시도도 반복되다 보니 이젠 클럽 특유의 강력한 베이스 사운드와 정신 못 차릴 화려한 그루브가 그리워진다. 그냥 댄스 팝 앨범을 듣는 것 같았던 아비치의 이번 앨범을 듣고는 그런 배고픔이 더 커진 상태였다.
그런데 올리버 헬덴스의 《MHATLP》는 두 대척점 사이 훌륭한 접점을 찾아냈다. 지겨울 정도로 오래 들어온 몬스터 EDM도
[마감인간의 music] 이 음악 사이다~
-
[정훈이 만화] <더 폰> 타임 전화기
[정훈이 만화] <더 폰> 타임 전화기
-
여섯 자리 숫자의 부채가 기록된 학생회 장부를 물려받은 3월이었다. 등록금이 싸서 학자금 대출이 흔치 않았고 그나마 대출받은 학생들 70%(대학신문 추정 수치)가 먹튀해도 귀찮아서 추심에 들어가지 않던 시절, 난생처음 빚더미에 앉은 학생들은 시름에 잠겼다. 이것은 아마도 태곳적부터 쌓여왔을 빚, 1, 2년으로 달성하기는 불가능한 위업이 아닐까. 그렇잖아, 7천원짜리 찌개를 네명이 한개 시켜서 그걸로 밥도 먹고 술도 먹었는데, 소주 그거 기껏해야 한병에 2천원, 우리 과는 30명밖에 안 되는데 그걸 얼마나 많이 마시면 외상값이 이 정도 나올 수가… 있구나. 아, 그런 거였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빚을 짊어지고 우리는 이 부채를 후손에게만은 대물림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갚자, 먹는장사를 하는 거야, 먹는장사가 남는 장사라잖아, 잔디밭에 천막 치고 술을 팔자고. 이렇게 추운데? 그럼 정종을 데워 팔면 되지. 정종은 비싸서 결국 팔지 못했지만, 그처럼 무모하게도 산바람 몰아치는 3월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이과 망했으면
-
※<마션> 그리고 <팀 버튼의 화성침공>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파이 브릿지>는 뉴욕의 어느 방에서 거울을 보며 자화상을 그리는 남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내 우리는 루돌프 아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마추어 화가(마크 라일런스)가 간첩 혐의로 미국 정보국에 쫓기고 있음을 알게 된다. 스필버그 감독이 선택한 첫 숏은, 그가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미국 일러스트레이터 노먼 록웰의 <삼중 자화상>을 즉각 연상시킨다. 그림에 포착된 찰나의 앞뒤까지 상상하게 만드는 스토리텔링 능력과 완벽한 구도로 유명했던 노먼 록웰과 감독 스필버그 사이의 유사성을 찾아내긴 어렵지 않다. 영화 내내 구체적 정보가 주어지지 않는, 미스터리에 가까운 인물이 그리는 본인의 초상으로 이야기를 연다는 착상도 적절하다.
10/12
뒷줄에 앉은 덕택에 극장 안 관객의 흔쾌한 몰입을 체감했다. <마션>은 바로 앞 <카운슬러> <엑소더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감자별
-
<울프 홀> 시리즈로 부커상을 두번이나 수상한 영국 역사소설의 스타 힐러리 맨틀의 책. 혁명가들이 남긴 편지와 일기, 프랑스혁명을 다룬 소설, 역사학자들의 책까지 가능한 모든 자료를 섭렵한 뒤 집필을 시작했고 소설 초고를 쓰기 시작해 완성하기까지 18년이 걸렸다.
[도서] 영국 역사소설의 스타 힐러리 맨틀의 책
-
류시화 시인이 해설을 곁들인 바쇼의 하이쿠 선집이다. 하이쿠를 소개한 앞선 두권의 책 <한 줄도 너무 길다>와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번에는 하이쿠의 성인이라 일컬어지는 마쓰오 바쇼의 작품만을 깊이 있게 다루었다.
[도서]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 선집
-
고가의 수입 문구들에 적힌 ‘헤밍웨이가 썼던 수첩’ 같은 문구에 혹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책. 영국의 오프라인 문구류 품평회 ‘런던 문구 클럽’의 창설자인 저자 제임스 워드는 문구들의 이야기를 찾아 나섰다. 발명부터 진화, 문화적 변용까지 문구의 시시콜콜한 역사가 펼쳐진다.
[도서] 문구의 역사
-
“벤딕스 부부는 서로에게 거침없는 애정을 표하며, 현대사회의 여덟 번째 불가사의인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루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이 문장은 로맨스 소설에 등장했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하필이면 미스터리 소설 <독 초콜릿 사건>의 도입부에 슬쩍 끼어든 이 문장은 곧 파국으로 이어진다. 벤딕스씨는 사교클럽에서 만난 지인으로부터 우연히 초콜릿 한 상자를 받게 된다. 그리고 집으로 가 아내와 나눠먹는데, 벤딕스씨는 쓰러지고 더 많은 초콜릿을 먹은 벤딕스 부인은 사망한다. 이 사건을 두고 범죄 연구회의 회원들이 각기 수사를 통해 진범을 추리하기로 한다. <독 초콜릿 사건>은 회원들의 추리를 하나씩 보여주며 진실을 향해 다가간다.
<독 초콜릿 사건>의 재미는 범죄 연구회의 회원들이 각기 최선을 다한 추리를 보여주며, 그때까지 밝혀진 바로는 진실에 가장 가까운 설명을 들려준다는 데 있다. 하지만 다음 회원은 그전의 의견이 왜 틀렸는지를 설명하고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진실은 하나다
-
<라이프>에서 제임스 딘은 <이유없는 반항>(1955)에 출연하고 싶어서 안달한다. 반면에 이미 주연으로 출연했던 <에덴의 동쪽>(1955)에 대해선 시큰둥한 반응이다. <에덴의 동쪽>은 개봉을 앞두고 있고, 영화사 워너브러더스는 여러 가지 홍보 작업을 전개하지만, 제임스 딘은 마지못해 그 일에 응한다. <에덴의 동쪽>에서 부친 역으로 출연했던 노배우 레이먼드 매시가 기자들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하고 있을 때, 그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채, 시간이 지겹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 있다. 아직 그는 <에덴의 동쪽>이 어떤 명예를 안겨줄지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엘리아 카잔의 제임스 딘
무명배우나 다름없던 제임스 딘을 주연으로 발탁한 감독은 <에덴의 동쪽>의 엘리아 카잔이다. 당시에 엘리아 카잔은 거칠 게 없는 탄탄대로의 감독이었다. 카잔은 말론 브랜도와 짝을 이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한창호의 영화비평] 아웃사이더의 초상화
-
<8일째 매미>(2011), <술이 깨면 집에 가자>(2010), <남의 섹스를 비웃지마>(2007), <좋아해>(2005) 등으로 친숙한 얼굴 나가사쿠 히로미.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동안에 빈틈없는 연기는 그녀가 20년 넘게 다양한 이미지로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요인이다. 그는 <세상의 끝에서 커피 한잔>으로 제51회 대만금마장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언어의 벽을 넘어 영화를 통해 마음을 나누었다”는 출연 소감 및 수상 소감을 서면으로 전한 나가사쿠 히로미는 진심을 다해 연기하는 진지한 배우라는 인상을 풍겼다.
-<세상의 끝에서 커피 한잔>에 출연하게 된 계기는.
=대만 출신의 감독이 일본에서 촬영하고, 촬영감독(신마 단쿠로)은 런던에서 주로 활동하는 분이다. 이런 글로벌한 기획이 새로움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 같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헤어진 지 30년이 넘었고 실종된 지 8년이 된 아버
[people] “영화의 여운을 꼭 느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