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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단점이 있지만 <로봇, 소리>는 특수효과가 어디까지나 이야기에 봉사하도록 통제한 드문 한국 SF다. 진화한 인공지능 무인 위성 ‘소리’는, 이 영화의 구경거리가 아니라 가장 사려 깊고 독창적인 캐릭터이며 극중 누구보다 주체적으로 운명을 개척한다. 나아가 쿨레쇼프 효과(?)를 활용한 연기로 <아이언 자이언트>의 감동을 재현하는 돋보이는 배우이기도 하다. CG 대신 실물 로봇을 캐스팅한 효과는 훌륭하다. 소리의 흠집난 패널에 아침 햇살이 떨어지는 장면만으로도 수고가 아깝지 않다. “보호는 고마운 것입니까?” 감정을 덜어낸 간략한 명제로 구성된 소리의 화법은, 대화하는 법을 몰랐던 해관(이성민)을 한 발짝씩 각성으로 이끌어간다. 홀로 남은 소리가, 전동 휠체어를 굴려 도시의 밤거리를 돌돌 가로질러가는 대목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다. 질주하는 자동차, 지치고 취한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 문득 멈춰 길고양이에게 고개를 돌리는 소리는 마치 지상을 여행하는 천사 같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폴링 인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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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토드 헤인즈는 <캐롤>(2015)의 도입부에서 데이비드 린의 1945년 작품 <밀회>의 도입부를 정확하게 재연한다. <밀회>를 떠올려보자. 기차역 카페 귀퉁이에 알렉(트레버 하워드)과 로라(셀리아 존슨), 두 남녀가 앉아 있다. 우연히 지나가던 여성이 여주인공 로라를 발견하고 다가와 친숙하게 말을 건다. 로라와 남자가 약간 당황해 하지만 그런 그들의 표정에 숨은 절박함에는 무관심한 듯 여자는 수다를 멈추지 않는다. 그 여정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인 줄 알았더라면 여자는 차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상황을 깨달은 알렉은 자리를 먼저 뜨면서 로라의 어깨 위로 손을 지그시 얹는다. 그가 떠나고 정신을 잃었던 로라는 기운을 차려 집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교외의 아담한 집에서 자상한 남편과 귀여운 두 아이가 그녀를 반긴다. 로라는 “이곳은 내 집이고 당신은 내 남편이며 내 아이들은 2층
[이용철의 영화비평]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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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근현 감독이 <번개맨>으로 돌아왔다. <번개맨>은 1999년부터 현재까지 EBS <모여라 딩동댕>을 통해 어린이들 사이에서 인기 캐릭터로 자리잡은 ‘번개맨’을 주인공으로 한 특수촬영물(이하 특촬물)이다. TV방송뿐 아니라 이미 공개방송과 뮤지컬을 통해 번개맨은 열성적인 어린이 팬층을 두텁게 확보해왔다. 영화는 사랑스러운 조이랜드와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천진한 소녀 한나(루나) 등을 보호하는 번개맨(정현진)을 통해 꿈과 희망이라는 단순하지만 확실한 메시지를 전한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항쟁 때 상처 입은 이들이 펼치는 응징의 기록 <26년>(2012), 한 예술가의 번민을 풀어낸 <봄>(2014)이라는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해보면 <번개맨>은 확실히 새로운 선택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의 개봉(2월11일)을 앞둔 조근현 감독을 만나 어떤 이유로 이 작업에 참여하게 됐는지와 <번개맨>을 만들기까지의 과정
[people]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만들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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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부대 요원 출신의 용병 웨이드 윌슨(라이언 레이놀즈)은 취향과 장난기마저 똑 닮은 바네사(모레나 바카린)를 만나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행복은 광고처럼 짧은” 법. 말기 암 선고를 받은 웨이드는 비밀 임상실험에 참여하며 재기를 노린다. 극한의 고문으로 이뤄진 실험 후 웨이드는 암을 치료할뿐더러 무한한 재생 능력을 얻으며 불사의 존재가 된다. 하지만 동시에 부작용으로 호러영화에 어울릴 법한 외양을 갖는다. 스스로 슈트까지 지어 입고 ‘데드풀’이 된 웨이드는 자신을 고문한 자를 찾아 제대로 복수한 뒤 당당히 바네사 앞에 나서려 한다.
데드풀의 가장 큰 매력은 슈퍼히어로의 전형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데드풀은 갖가지 수단으로 적을 죽이는 잔혹한 액션 마니아지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캐릭터 시계를 애용하는 천진난만한 어른이다. 그는 울버린에 버금가는 힐링 팩터 능력에다 뛰어난 무술 실력까지 갖췄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도 농담을 멈출 줄 모르는 수다쟁이다. 영화는 다
괴짜 슈퍼히어로 데드풀의 무한 매력 <데드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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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는 닭보다 알이 더 많은 농장에서 수탉으로 자라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지만 특유의 소심함에 특별한 면모를 보여주진 못한다. 어느 날 빌리와 친구들이 사는 농장이 팔릴 위기에 처하고, 농장의 아저씨 수탉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챔피언 썬더와의 대결을 결정한다. 결투를 신청하러 치킨 파이터 마을로 들어서고, 경기 주관자의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빌리가 경기에 출전하게 된다. 자신 없는 빌리는 포기하려 하지만, 친구들의 응원을 받아 자기만의 기술을 훈련한다.
<빌리와 용감한 녀석들: 치킨 히어로>(이하 <치킨 히어로>)는 2012년부터 한국에서 개봉되고 있는 <빌리와 용감한 녀석들> 시리즈의 일환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와 관련이 없는 멕시코 애니메이션이다. (스페인어로 알을 뜻하는) 우에보 카툰에서 제작한 <치킨 히어로>는 닭과 알을 내세워 소심한 주인공 빌리가 점차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군더더기 대사들로 채운 초•중반부를 지나면 빌리가
소심한 닭 빌리의 챔피언 도전기 <빌리와 용감한 녀석들: 치킨 히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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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맨(정현진)은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을 지켜주려고 오늘도 하늘로 날아오른다. 조이랜드의 조이랜드 극장 역시 번개맨의 호위 아래 어린이들을 위한 공연을 준비한다. 공연의 주인공인 한나(루나)를 비롯해 시침(이수완), 뭉치(한승현), 주크(김보선), 박스(이재윤) 등이 춤과 노래를 신나게 연습 중이다. 한나는 소망이 있다. 언젠가 번개맨처럼 하늘을 날아보는 것이다. 그런 한나를 꼬드겨 번개맨을 위협하려는 자가 있다. 자신 대신 아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번개맨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잘난마왕(송욱경)이다. 잘난마왕은 자신의 요원인 나잘난(이봉균)과 더잘난(박중금)을 앞세워 한나를 블랙홀에 빠뜨리려 한다. 그럼 분명 한나를 구하러 번개맨이 올 테고 그때를 노려 번개맨을 공격할 속셈이다. 번개맨의 힘의 원천인 번개 파워를 잃게 하는 게 그의 목표다. 게다가 잘난마왕은 이미 희망의 땅 우정랜드까지 파괴한 상태다.
<번개맨>은 1999년부터 현재까지 EBS 어린이 프로그램 <
번개맨은 오늘도 하늘로 날아오른다 <번개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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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배우 진우(유아인)는 스타 작가 경아(이미연)의 드라마에 출연하며 한류스타로 발돋움한다. 몇년 후, 달라진 입지를 과시하듯 경아의 캐스팅 제안을 거절하던 진우는 우연히 경아가 미혼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수년 전의 사건을 더듬는다. 성찬(김주혁)네 가게에서 마주친 나연(이솜)과 수호(강하늘)는 첫눈에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둘은 SNS로 서로를 탐색하는 시기를 거쳐 현실 속 연인으로 발전하지만 수호는 나연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할 자신이 없다. 집주인과 세입자 사이인 주란(최지우)과 성찬은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댄다. 사기를 당해 금전적으로 어려워진 주란이 반대로 성찬의 집에 세입자로 들어가면서 관계에도 변화가 온다. 발도 넓고 오지랖도 넓은 성찬은 주란의 연애를 위해 SNS 코칭을 시작한다.
<좋아해줘>는 SNS를 연애의 발판으로 삼는 요즘의 연애 풍속도를 담는다. 현실에서처럼 여섯 남녀에게도 무신경한 댓글은 거절의 의미로 읽히기 일쑤고 타임라인 복습은 연애 도입
세 커플의 호흡이 돋보이는 작품 <좋아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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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의 <동주>는 윤동주(강하늘)와 그의 사촌이자 오랜 친구인 송몽규(박정민)에 관한 영화다. 혹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의 아픔을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살아낸 예술가와 활동가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두 사람의 상반된 기질을 부각시키는 데 집중한다. 송몽규는 일찍이 등단하지만 이후 독립운동에 전념하며 학생들을 조직하는 데 앞장서는 반면, 말수가 적고 섬세한 심성을 지닌 윤동주는 내내 홀로 시를 쓴다. 함께 연희전문학교를 다닐 때에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같이 옥살이를 할 때에도 독립을 염원하고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는 마음은 윤동주와 송몽규 모두 마찬가지인 것으로 그려진다. 다만 송몽규와 달리 윤동주에게 문학은 어디에서도 저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끝내 <동주>는 일제강점기에도 달리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어느 시인의 부끄러움에 관한 영화다. 내레이션으로 삽입된 윤동주의 시들은 모두 그 부끄러움에 관해 고백하고 있다.
흑백으로 제작된 <
내레이션으로 삽입된 윤동주의 시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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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나 베게너(에디 레드메인)와 게르다(알리시아 비칸데르)는 각각 풍경화와 인물화를 주로 그리는 화가 부부다. 게르다의 명성은 아이나에 비해 낮은데, 두 사람은 이것이 실력 차라기보다는 성차로 인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게르다는 발레리나 울라(앰버 허드)를 모델로 인물화를 그리는 중이다. 발부분만 남겨둔 상태인데 울라가 나타나지 않자 게르다는 장난삼아 남편에게 발 모델이 되어줄 것을 청한다. 못 이긴 척 아내의 청을 승낙한 아이나는 스타킹의 감촉에서 잃어버렸던 쾌락을 느낀다. 베게너 부부는 울라로부터 무도회에 초대받는다. 아이나가 자신의 유명세로 부담을 느끼자 게르다는 아이나에게 여장을 권한다. 망설이던 아이나는 결국 릴리 엘베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무도회장으로 향한다. 아이나는 그곳에서 헨릭(벤 위쇼)을 만나고 그의 적극적인 구애에 못 이겨 키스를 나눈다. 이 장면을 목격한 게르다는 큰 충격에 빠진다.
세계 최초 성전환수술을 한 남자로 일컬어지는 아이나 베게너의 실화를
세계 최초 성전환수술을 한 남자 <대니쉬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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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 Hunger
감독 스티브 매퀸 / 출연 마이클 파스빈더, 스튜어트 그레이엄 / 수입•배급 오드 / 개봉 3월
스티브 매퀸의 데뷔작이다. 1981년, 메이즈 교도소에 수감된 바비 샌즈(마이클 파스빈더)는 단식 투쟁을 시작한다. 그는 영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싸우는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일원이다. 바비와 함께 수감된 많은 아일랜드 청년들은 죄수복을 거부해 알몸으로 추운 옥중 생활을 견디고, 교도관들이 만들어놓은 질서에 저항하며 옥사 벽을 배설물로 칠한다. 먼저 국내 개봉한 <셰임>(2011)과 <노예 12년>(2013)으로 이미 증명했듯 스티브 매퀸은 저항하는 인물의 의연함을 긴밀한 장면의 연결로 섬세하게 드러낼 줄 안다. 가해자의 위치에 놓인 이들 역시 사적 영역에선 평범하고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앳된 얼굴의 군인은 폭력의 수라장 한켠에서 소리 죽여 울며, 교도관은 병든 노모를 방문하다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는다. 보편적
[Coming Soon] 스티브 매퀸의 데뷔작 <헝거> Hu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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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감독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전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숨겨진 부분들에 대해 짐작할 수는 있다. <아버지의 초상>(2015)은 다만 대부분 영화에서 ‘시네마틱한 말하기’라 믿는 ‘시점의 자유로운 이동’에 대해서만 거부한다. 이 점이 이 작품을 독특한 위치로 끌어올린다. 과거 다큐멘터리영화의 감독들이 선호하던 사실적 화면의 취향과 함께, 스테판 브리제는 자신의 영화를 더 미니멀한 것으로 세공해낸다. 이 미니멀한 미장센에 대한 의지는 그의 이전 작품들에서도 찾을 수 있는 특징이다. <마드무아젤 샹봉>(2009)이나 <어 퓨 아워스 오브 스프링>(2012) 등 이전의 연출작들은 주인공의 심리를 3인칭 관점에서 최대한 간소화해 풀어낸다는 점에서 흡사한 리듬감을 지녔다. 하지만 이 전략은 인공적 절제미를 더 강조해 보여준다. 간소화되고, 그래서 아름답다. 사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찾
[이지현의 영화비평] 단순한 확신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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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예술과 문화적인 흐름’이라 정의되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는 용어를 여러 번 들었지만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Minimalism’이라는 트위터 계정의 이미지들이 내 시선을 끌었다. 애써 노력한 흔적마저 지워버린 순간에 도달한 그 안정감은 요사이 내가 절실히 원하는 바로 그 느낌이었다.
나는 왜 갑자기 그런 가르침이 예사롭지 않게 느끼는 것일까. 뒤늦게 철이 들어서일까. 아니, 인간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니면 시대의 징후일까. 시대의 징후를 추적하려면 서점에 가야 한다. 나는 교보문고에 가서 도서검색용 컴퓨터를 두드린 끝에 <미니멀리스트>라는 책을 찾아냈다. 잘나가던 직장에 사표를 던진 후, 편안한 소파와 책 몇권만 남긴 채 물질적 요소를 최소화하고 살고 있다는 두 남자의 이야기다. 예술이 아니라 삶 자체를 미니멀하게 하자는 이야기가 이 시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게 된 모양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간디, 이런
[조광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Wi-Fi 미니멀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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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과학 소설가인 아서 C. 클라크나 팝 가수 엘튼 존, 그리고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는 모두 영국 왕실로부터 작위를 받았다. 다시 말하면 엘튼 존 ‘경’이다. 후작이나 남작, 백작 등은 마치 <삼총사> 속 달타냥에게나 주어지는 중세시대의 명칭 같지만, 현대 영국에서는 예술인들에게도 폭넓게 이런 작위를 수여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영예는 중세시대의 그것 못지않다. 이 작위를 추리소설가로서 1971년에 받은 인물이 있다. 추리소설의 여제 애거사 크리스티다. 그녀의 수많은 명작 중에 으뜸이라고 꼽히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And Then There Were None)를 그녀의 탄생 125주년을 맞아 <BBC One>에서 3부작 특집 드라마로 방송했다. 번역본이 늘 그렇듯이 ‘그리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의 제목을 단 번역본을 처음 접한 나로서는 ‘남지 않았다’의 오싹함이 더 깊숙이 와닿지만, 어쨌든 추리소설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손에 꼽을 정도의 명작
[김호상의 TVIEW] 125년을 건너온 오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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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16 <감옥에서 온 편지>
2016 <동주>
2015 <검은 사제들>
2015 <성난 변호사>
2014 <패션왕>
드라마
2015 <용팔이>
188cm의 껑충한 키에 담박하고 수수한 얼굴. 소탈한 차림새로 스튜디오로 성큼 들어온 민진웅은 “큰 키 때문에 험상궂은 역할을 자주 맡는다”며 웃어 보였다. 드라마 <용팔이>의 우직한 경호원 상철, <성난 변호사>의 투박하고 어설픈 용역 갑수, <패션왕>의 마초 두치에 이어 곧 개봉할 <감옥에서 온 편지>에서 특수부대 출신 살인청부업자를 맡았다는 그다. 그런 그가 <동주>에서 맡은 역할은 여태까지와는 다르다. 동주(강하늘)와 몽규(박정민)의 연희전문학교 동기이자, 쾌활하고 속깊은 친구 처중 역을 맡은 그는 “처중의 평범하지만 인간미 있는 모습에 끌려 지원했다”고 한다.
“동주와 몽규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who are you] 평범함이 성실함과 만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