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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는 병에 시달렸다. 결국 스위스 바젤대학의 교수직도 35살 때 그만뒀다. 불과 25살 때 임용돼, 학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던 자리였는데, 병이 강단 경력을 중지시킨 셈이다. 이후 니체는 건강을 돌보기 위해 맑은 공기를 찾아 여름이면 스위스 알프스의 실스마리아로, 그리고 겨울이면 따뜻한 지중해 연안의 니스, 제노바 등으로 옮겨가며 집필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때, 곧 건강을 걱정하며 떠돌 때, 니체는 필생의 역작들을 써냈다. 니체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는 제노바의 바닷가와 실스마리아의 숲에서 잉태됐다. 니체가 매일 제노바와 그 주변의 해변을 미친 듯 하루 종일 걸은 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부를 불과 10일 만에 써낸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알프스와 지중해 도시를 떠도는 방랑 생활과 저술 활동은 서로 비례하며 상승곡선을 그렸다. 그런데 이런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 발생했으
[한창호의 트립 투 이탈리아] 북부 산업의 중심지 토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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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담>의 초반부는 흔한 88만원 세대 젊은이의 일상을 소묘한다. 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윤주(이상희)는 졸업작품 전시를 위해 고물상에서 작품 재료로 쓸 폐품을 고른다. 그는 방 두개짜리 집에서 또래 여자 친구에게 월세를 내며 세들어 산다. 그 여자 친구는 남자와의 섹스를 좋아하는데 윤주에게 왜 연애를 안하느냐고 성화다. 작업실에서 고단하게 일을 하며 편의점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남들 일할 때 아버지는 뭘 했나 모른다고 불평하는 대학원 친구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짓는 이 여자주인공 윤주는 딱히 매력을 느낄 겨를이 없을 만큼 평범하다.
학교 강의실, 좁은 월셋집, 고물상, 작업실, 편의점 등으로 구획 지어진 윤주의 주된 공간에서 비일상적인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다. 유일하게 극적이랄 수 있는 사건이 있다면 그건 연애다. 제목 그대로 이 영화는 윤주의 연애담을 그리는데 묘사 방식이 종래의 다른 영화들과 많이 다르다. 그건 이 영화가 여자들의 사랑을 다룬 영화
[김영진의 영화비평] 연애의 과정과 젊은이들의 삶을 특별한 방식으로 묘사하는 <연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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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생인 나는 이전 세대 ‘운동권’ 추억에 거부감이 있었다. 펄럭이는 빨갛고 파란 깃발과 비장미 넘치게 선동하는 ‘운동권 음악’들에 관한 거부감이랄까. 지난 토요일 참여한 집회도 아주 오랜만에 나선 집단행동이었다.
11월12일 토요일 오후 8시 반 경복궁역 앞은 이미 많은 사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저마다 구호를 외치고, 목청껏 함성을 내지르고, 촛불과 스마트폰 불빛을 흔들었다. 이미 내가 아는 경복궁역과는 완벽하게 다른 생경한 장소로 변해 있었다.
한 시간 남짓 있다가 가수 이승환이 공연한다는 광화문광장을 향해 친구들과 천천히 걸었다. 정부청사 앞에 설치한 대형 화면에 나온 이 용감한 가수의 목소리를 따라 세종대왕 동상 앞을 걸으며, 이번 집회에서 그의 공연 마지막 노래인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를 들었다. 이 노래를 평소에 들었다면 그저 평범하고 애절한 사랑 노래로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공연이 열리는 무대를 향해 걸어
[마감인간의 music] 다시 만난 환타스틱 - 이승환, 《Hwantas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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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2009), <러스트 앤 본>(2012), <디판>(2015)에 이르기까지 시나리오작가 토마 비드갱은 자크 오디아르의 영화세계를 구축하는 데 숨은 지지대 역할을 해왔다.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아내와 대학 때부터 절친한 친구였던 토마 비드갱은 그 인연으로 자크 오디아르와 영화에 관한 의견을 함께 나누던 지인이었다. 배급 업무에 종사하던 그는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2005)의 시나리오에 참여한 걸 계기로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 대상을 수상한 <예언자>에 정식으로 크레딧을 올리며 본격적으로 시나리오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베르트랑 보넬로의 <생 로랑>(2014), 에릭 라티고의 <미라클 벨리에>(2014) 등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전방위적인 작업을 해오던 그가 이번에 첫 연출작 <카우보이>(2015)로 또 한번의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 <카우보이>는 집 나간 딸을 찾아나선
[씨네 인터뷰] "<카우보이> 시나리오는 마치 ‘내 노래’ 같더라" - <카우보이> 감독·<예언자> <러스트 앤 본> 시나리오작가 토마 비드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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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 바이 나이트> LIVE BY NIGHT
감독 벤 애플렉 / 출연 시에나 밀러, 조 살다나, 스콧 이스트우드, 엘르 패닝
1919년 보스턴 경찰 해산 후 경찰 아버지를 둔 커클린 삼형제는 뿔뿔이 흩어진다. 그중 막내 조 커클린(벤 애플렉)은 어둠의 세계에 손을 뻗는다. 범죄 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조는 지역 거대 조직 보스의 연인인 에마 굴드(시에나 밀러)와 사랑에 빠진다. 둘은 함께 은행을 털고 도주할 궁리를 하지만 에마의 배신으로 좌절된다. 조는 야망과 복수에 휩싸여 범죄 세계에 더 깊게 발을 내딛는다. <리브 바이 나이트>는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한 범죄 스릴러 드라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셔터 아일랜드> <미스틱 리버>를 쓴 작가 데니스 루헤인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의 각본은 벤 애플렉이 썼다. 내년 1월13일 북미 개봉예정.
[WHAT'S UP]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한 범죄 스릴러 <리브 바이 나이트> LIVE BY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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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마자 텔레비전을 켠다. 채널은 TV조선. 내 살다살다 TV조선을 보는 날이 다 오다니. 아침 시트콤을 보는 심정으로 우병우의 검찰 출두를, 대통령이 담화문을 발표하는 장면을 본다. 호빠 출신과 무당의 조합. 그 날고 긴다는 문화계 황태자의 굴욕적인 호송 장면까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한순간 놓치면 줄거리를 따라갈 수도 없는 급박한 전개다. 누군가가 그랬다. 가장 대중적인 시나리오는 익숙한 구조에 신선한 설정으로 탄생한다고. 대통령 임기 말에 습관적으로 터지는 측근 비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현실적인 설정을 얻어 역대급 스캔들이 되었다. 임성한 드라마를 챙겨 보던 친구를 한심해하던 나에게도, 이것은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마성의 드라마다.
한때 열혈 영화청년의 정신을 되살려 난 분노를 뒤로하고 조용히 이 아침 드라마의 시나리오를 해체/분석해본다. 눈앞의 반전을 위해 급급하게 만들어진 시나리오가 아니다. 치밀하게 초반부터 장치를 깔아둔 공이 많이 들어간 각본이다. 증거
[노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우리가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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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배우 김윤석, 유해진, 주원 등이 소속된 심엔터테인먼트가 한국 화이브라더스로 사명을 바꾸고 새 출발했다. 중국 최대 종합 미디어 그룹인 중국 화이브러더스가 심엔터테인먼트를 인수한 결과다. 이 과정에서 지승범 대표이사가 한국 화이브라더스를 이끌게 되면서 주목받고 있다. 그는 영화산업 현장에서 한번도 일해본 적 없는 영화계 밖의 ‘뉴 페이스’다. 회계법인 삼정KPMG FAS의 애널리스트 출신으로 컨설팅 전문 기업 이퀄리브리엄파트너스 대표를 지낸 ‘금융맨’이다. 그는 중국 화이브러더스와의 인수를 적극적으로 이뤄냈고, 앞으로 한국 화이브라더스를 재무장해 ‘화이브러더스만의 생태계’를 만들겠다고 전했다. 그의 전략을 들어봤다.
-영화산업 내에서 한번도 일해본 적 없다. 한국 화이브라더스와의 새 출발에 어떻게 뛰어들게 된건가.
=중국에서 산 지 10년 정도 됐다(칭화대학 대학원 EMBA 석사과정을 마쳤다.-편집자). 중국쪽 투자 펀드의 운영과 관련된 일을 해왔다. 그러다 몇해
[people] 한국 화이브라더스 지승범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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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이주원)가 복면을 쓴 악당들에게 쫓기고 있다. 눈을 질끈 감고, 악몽에서 깼나 했더니 또 꿈이다. 남자는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골목길을 헤매고 또 헤맨다. <혼자>(2015)는 초반부 실험적인 장르영화처럼 보이지만 흐름을 좇다보면 곧 무의식의 세계를 내밀히 담아낸 영화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는 수면과 해저 깊은 곳을 오가는 능숙한 잠수부처럼 유영하며 의식과 무의식의 궤적을 추적한다.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낸 박홍민 감독은 꿈과 현실, 감독과 관객의 자리를 오가며 메타적 구조를 겹겹이 쌓는다. 진도의 씻김굿을 소재로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3D영화 <물고기>(2011)로 데뷔한 박홍민 감독은 이번에는 <혼자>로 서사와 형식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했다. <혼자>는 제41회 서울독립영화제 심사위원상과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상과 올해의 배우상(이주원)을 받았고, 밴쿠버국제영화제와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등의 해외 영화제
[people] <혼자> 박홍민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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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플릿> 촬영현장(<씨네21> 1066호 기획 기사 ‘도박 볼링의 세계가 펼쳐진다-최국희 감독의 <스플릿> 촬영현장’ 참고)에서 만난 최국희 감독은 불도저 같았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규모가 꽤 큰 내기 볼링 장면을 찍고 있었는데, 신인답지 않게 진행이 빠르고 노련했다. 모니터 위에 전자시계까지 놓고 진행할 만큼 각오도 단단했다. “원래 성격이 약간 급하기도 하고,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목표 분량을 다 소화할 수 없으니까. (웃음)” 최국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 <스플릿>은 한때 잘나간 볼링 선수였지만 어떤 사건을 겪으며 나락으로 떨어진 철종(유지태)과 자폐 성향을 가진 볼링 천재 영훈(이다윗), 두 남자가 파트너가 되어 일생을 건 내기 볼링 시합에 나가는 성장담이다. 때로는 드라마를 섬세하게 구축하고, 때로는 볼링 시합을 경쾌하게 묘사하는 솜씨가 최국희 감독을 꼭 빼닮았다. 그는 “스코어는 다소 아쉽지만 적은 회차에 적은 예산으로 최
[people] <스플릿> 최국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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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의 그 냉혹한 해결사가 아니다. 크리스토퍼 매쿼리가 제작자로 물러나고, <가을의 전설>(1994), <라스트 사무라이>(2003) 등을 연출한 에드워드 즈윅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잭 리처: 네버 고 백>이 11월30일 개봉한다. 이번 영화에서 잭 리처(톰 크루즈)는 스파이 혐의를 받고 억울하게 수감된 수잔 터너 소령(코비 스멀더스)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현실과의 모든 연결고리를 끊고 살아가려던 1편의 잭 리처를 생각하면, 엉성하고 서툴지만 조금씩 누군가와의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2편에서의 그의 모습은 확연한 변화로 다가온다. 어떤 규모의 영화를 연출하든 늘 캐릭터간의 관계를 중요하게 다뤄온 에드워드 즈윅 특유의 연출 스타일이 시리즈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11월7일 톰 크루즈와의 내한 기자회견을 마친 뒤, 에드워드 즈윅 감독을 만나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잭 리처: 네버 고 백> 이
[people] <잭 리처: 네버 고 백> 에드워드 즈윅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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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왜 스스로를 왜소하게 바라보게 됐는가.’ 도올 김용옥 선생이 질문한다. 주체적인 역사 인식을 위해서는 중국의 중원 중심주의나 신라사 중심의 한국 고대사에서 벗어나 고구려와 발해의 정신을 다시 불러내야 한다는 게 그의 대답이다. 도올 김용옥은 생각에 머물지 않고 직접 중국 다롄과 환인, 연길 일대의 땅을 밟으며 고구려와 발해의 흔적을 좇았다. 11월24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나의 살던 고향은>(감독 류종헌)은 이러한 도올의 지적 여정의 기록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 20년 된 그의 동숭동 집필실로 향했다. 소담한 텃밭을 지나 아담한 양옥 안으로 들어서자 보이는 건 온통 사상가 김용옥의 말과 글이 돼준 책들뿐이다. 그의 눈가에는 약간의 피로가 엿보였으나 그것도 잠시뿐. 예의 시원시원한 말투로 작금의 시대를 향한 자신의 언어를 풀어냈다.
-<나의 살던 고향은>은 고구려, 발해 기행 관련 강의와 2015년에 출판한 <도올의 중국 일기> 5권
[trans x cross] “우리 역사와 조상에 대해 자부심을 갖길” - <나의 살던 고향은> 도올 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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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VA LA VIDA!
콜드플레이가 내한한다. 이미 포털 검색어까지 오른 이 소식을 모르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티케팅 일시. 11월23일(수) 오후 12시에 현대카드 선예매, 24일(목) 오후 12시에 일반예매가 예정돼 있다. 1998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콜드플레이는 7장의 앨범을 통해 7번 그래미어워드를 수상하고 8천만장 이상의 앨범 판매를 기록한, 명실상부 동시대 최고의 밴드다. 콜드플레이는 내년 4월1일부터 아시아 투어를 시작해 싱가포르, 필리핀, 대만을 거쳐 한국에 도착한다. 2017년 4월15일,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의 꿈 같은 만남을 놓치지 말자. 모두 티케팅 성공하시길!
너무 앞서간 데뷔작 <개그맨> 블루레이 출시
대학 시절 한국영화사 수업 시간에 이명세감독의 데뷔작 <개그맨>(1988)을 처음 봤다. 비디오테이프였던 까닭에 화질은 좋지 않았지만 이명세 감독의 감각만큼은 밀레니엄 시대에도 결코 밀리지 않았다. 훗날
[culture highway] VIVA LA V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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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현 시국을 본다면, 드라마 <시크릿 가든>(2010)의 김주원(현빈)이 (주어 없이) 책상을 쾅쾅 치며 탄식할지도 모르겠다. 지난 11월15일 JTBC <뉴스룸>은 박근혜 대통령이 차움의원의 VIP 시설을 이용하기 위한 가명으로 <시크릿 가든>의 여주인공 이름인 ‘길라임’을 사용 했다고 보도했다. 덕분에 무려 6년 전 드라마의 키워드들이 시대를 역행해 실시간 검색어 1위를 달리고 있다. 2011년, <시크릿 가든>으로 <씨네21>과 인터뷰(790호)하며 표지를 장식한 현빈은 “이 뜨거운 관심도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 영화든 드라마든 이야기의 여운이 주는 기간이 지속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의 현빈은 <시크릿 가든>이 6년 뒤 뜨겁게 화제가 될 줄 전혀 몰랐을 거다. 김주원의 명대사도 다시금 세간에 회자 중이다. “(길라임에게) 댁 완전 이상한
[메모리] 그게 상식이야 - <시크릿 가든> 현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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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영화학도 세명이 메릴랜드주 버키츠빌 근처 숲에서 숲속 마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던 중 실종된다. 1년 후 그곳에서 그들이 촬영한 필름이 발견되고 유가족들에게 돌아간 필름은 영화화된다. 페이크 다큐멘터리 <블레어 윗치>(1999)는 영리한 마케팅으로 흥행에 성공한 호러영화다. 이후 제작된 저예산 호러영화에 숱한 모티브를 제공하기도 한 혁신적인 작품이었다. 2016년에 만들어진 <블레어 위치>는 죽은 영화학도 중 한명인 헤더의 동생 제임스(제임스 앨런 매퀸)가 당시 필름에서 “생존해 있는 누나의 모습을 본 것 같다”고 주장하면서 시작한다. 어쩌면 헤더가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제임스와 친구들은 버키츠빌로 떠난다. 전작 <블레어 윗치>와 마찬가지로 일행의 조난과 부상, 사위를 짐작할 수 없는 어두운 숲과 빼곡한 나무들, 영문 모를 괴성과 텐트 밖에 걸린 목각인형 등을 사용해 공포감을 조성한다. 제임스 일행이 사용하는 장비들은 시대
불을 켜도, 혼자 보지 않아도 무서운 공포 <블레어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