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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캐나다 토론토의 공군 비행장 부지를 이용해서 공원을 만드는 현상설계가 진행되었다. 렘 콜하스는 이 현상설계에 공원설계 계획안을 제안한다. 수많은 원과 선으로 구성된 그의 다운스뷰 공원(Downsview Park) 프로젝트는 ‘나무 도시’(Tree City)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배치도의 원들은 작은 숲을, 선들은 산책과 운동을 할 수 있는 길을 의미한다. 렘 콜하스는 이 길들을 ‘교차하는 1천개의 오솔길’이라고 명명했다. 자연을 인공적으로 재단하여 사용하는 서구식 정원의 전통 안에 있는 이 프로젝트는, 도시에서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길과 교차점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프로젝트이다. 아마도 그것이 프로젝트 이름을 ‘나무 도시’로 붙인 이유일 것이다.
최근에 홍상수의 영화를 볼 때면 끝없이 교차하는 길들을 보고 있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지금’ 아닌 ‘지금’과 ‘여기’ 아닌 ‘여기’에도 반복될 것 같은 상상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윤웅원의 영화와 건축] 개별작품보다 필모그래피 전체로 읽히는 홍상수의 세계와 다운스뷰 공원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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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갇혀버린, 내가 강화하고 있는 사회구조에 맞서기란 너무 어려웠다.’ 에머 오툴의 <여자다운 게 어딨어>의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고?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겠다. 강남역 한복판에서 여성 혐오 살해가 벌어지고, 거대한 정치적 목소리를 내보자고 모인 광장에서는 성차에 따른 혐오 발언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이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마땅히 ‘나쁜’ 페미니스트여야만 한다.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다’는 결과론적인 말 따위는 쓸모없다. 사회적 편견 때문이든 개인의 경험에서든 각자가 만들어둔 ‘범죄 가능형 프로필’로 폭력을 예방하겠다는 생각은 가장 손쉽고 가장 안일하며 위험한 대처법이다. 여성을 향한 혐오와 폭력의 언사는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그러니 그런 프로파일링이 다 무슨 소용인가. ‘우리는 누구를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지 절대 알 수 없다’는 페미니스트 록산 게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쁜’ 페미니스트가 될
[정지혜의 숨은그림찾기] 오드리 에스트루고의 <뷰티풀 레이디스>와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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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동물사전> 영화표는 머글, 아니 노마지들의 마법사 세계 방문증이나 다름없다. 한데 정상적이라면 극장 밖을 나선 후에 발동되어야 마땅한 기억지우기 마법이 웬일인지 조금 더 일찍 시작됐다. 영화 말미 그린델왈드가 변신을 풀고 원래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 이것이 영화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한 것이다. 콜린 파렐이 조니 뎁으로 변신하는 장면은 관객을 현실로 되돌리는 이 영화 최대의 ‘킥’이다. 특정 배우의 외견을 비하하는 의미가 아니다. 조니 뎁의 경우 콜린 파렐과의 너무 큰 간극과 현실 이미지가 겹쳐 몰입을 파괴하는 정도가 상당히 심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신비한 동물사전>에서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은 CG이고, 반대로 영화의 생기를 앗아가는 것은 실사 배우들이다. 내가 새삼 놀랐던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생생한 CG 캐릭터와 이질적인 실사 배우
CG의 권능에 대해 말하는 건 이제 입이 아플 정도다. 현실이 아닌 필름(=영화)을 모사하기 시작한 그래픽은
[송경원의 영화비평] <신비한 동물사전> 말하는 대로, 보는 대로, 상상하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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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이 요즘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지난 몇년간 활동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몇 개월 전부터 눈에 띄게 활동이 늘었다는 인상이다. <힙합의 민족>이나 <리바운드> 같은 방송 출연 덕분일 것이다. 나는 요즘 주석의 초기 앨범들을 다시 듣고 있다. 다시 들어보니 당시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고로 주석이라는 뮤지션에 대해, 이제 와서 혹은 이제야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주석은 한국에서 여러 가지를 ‘처음 시도’하거나 꼭 처음이 아니더라도 ‘퀄리티 있게 처음으로’ 보여준 뮤지션이었다고.
무엇보다 모든 게 ‘straight from 힙합!’이었다. 사운드, 작법, 태도, 주제, 구성, 아트워크부터 비유 하나, 관용어구 하나까지 모든 것에서 주석이 힙합이라는 장르/문화의 열렬한 팬이었음이 너무나 잘 느껴진다. 2000년 전후는 무언가 진지하고 거창한 랩 가사들이 만연한 시기였다. 돌이켜보면 당시 시대의 기운 같기도 하고 ‘힙합 정신’이라는 미국의 모호한
[마감인간의 music] 힙합은 주석이다 - 주석, <開戰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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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우 대표를 마지막으로 본 건 8년 전이었다. 2009년 가을, 그는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열린 아시아필름마켓을 찾았다. 2006년 그는 서울 명동의 한 건물과 임대 계약을 맺은 뒤 5개 스크린을 갖춘 극장 ‘시큐엔(CQN) 명동’을 운영하다가 6개월 만에 건물주에게 사기당해 건물에서 쫓겨났다. 2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재판을 진행했던 그는 수입이나 공동 제작을 할 만한 프로젝트들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부산을 찾았던 것이다. 되돌아보면 이봉우 대표의 인생은 자신이 제작한 영화 <박치기!>(2004)의 제목처럼 늘 박치기의 연속이었다. 영화 제작사이자 배급사인 ‘씨네콰논’을 설립해 <서편제>(1993), <쉬리>(1998), <공동경비구역 JSA>(2000) 등 한국영화를 일본에 배급했고, <박치기!>, <아무도 모른다>(2004), <훌라걸스>(2006), 등 일본영화를 제작해 한국
[씨네 인터뷰] "과거를 되돌아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 레스페 이봉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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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런스> SILENCE
감독 마틴 스코시즈 / 출연 앤드루 가필드, 애덤 드라이버, 리암 니슨, 아사노 다다노부, 이세이 오가타, 가세 료, 쓰카모토 신야, 고마쓰 나나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신작 소식이다. 장편 극영화 연출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이후 3년 만이다. 엔도 슈사쿠가 쓴 1966년 소설 <침묵>을 영화화한 <사일런스>는 감독이 평생을 꿈꿔온 프로젝트로 알려져 있다. 사라진 스승(리암 니슨)을 찾기 위해 일본으로 떠난 로드리게스(앤드루 가필드)와 가루프(애덤 드라이버) 신부의 여정을 그린 영화다. 영화 속 무대는 17세기 일본의 해안가 마을로 설정됐지만 실제 촬영지는 대만이다. 스코시즈 감독과 <갱스 오브 뉴욕> <순수의 시대>를 함께 작업한 제이 콕스가 각본에 힘을 보탰다. 2017년 1월 북미 개봉예정.
[WHAT'S UP] 3년만에 돌아온 마틴 스코시즈의 신작 <사일런스> SIL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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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망명자 출신의 코신스키는 1971년 <정원사 챈스의 외출>(Being There)이라는 소설을 썼다. 소설은 1979년 피터 셀러스와 셜리 매클레인 주연으로 영화화됐다. 미국에서 영화로 만들어지자 우리나라에 책이 번역되었고, 그것을 내가 읽은 모양이다. 책은 두어 차례 더 번역된 후 절판되었고, 영화는 수입되지 않은 것 같다. 영화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에 <챈스>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다.
아주 어려서 고아가 된 이후 중년이 되기까지 정원사로 살아온 챈스는 평생 저택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 다른 사람들보다 지능이 낮은 그의 유일한 낙은 TV를 보는 것이고, 그는 현실 세계와 TV 속 세계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 고령의 주인이 죽자 그는 주인의 고급 신사복을 입고 처음으로 세상으로 나오는데, 길을 가다가 엘리자베스의 차에 치인다. 엘리자베스는 대통령과 자주 독대할 정도로 저명한 재계인사 랜드의 부인인데, 챈스가
[조광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정원사 챈스의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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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김태영 감독과의 인터뷰를 결심한 건 1980년대에 만든 그의 첫 영화 때문이었다. 그는 <칸트씨의 발표회>(1987), <황무지>(1988) 등 독립영화의 역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을 만들었다. 전작의 무거운 현실과 <딜쿠샤>의 가벼운 몽상 사이에 놓인 무수한 간극이 궁금해졌다. 알고 보니 그는 <세계영화기행> 등 다수의 방송다큐멘터리를 연출한 잔뼈 굵은 연출가이자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등 실험적인 대작의 손 큰 제작자였다. 그러다 미완으로 남은 비운의 뮤지컬영화 <미스터 레이디>의 실패 이후 뇌출혈과 그에 따른 후유증으로 몸의 반쪽이 마비되는 장애를 안게 되었다. <딜쿠샤>는 어쩌면 영화를 둘러싼 그의 모든 삶이 녹아든,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의 대작이다. 그의 삶 자체가 곧 드라마인데,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 욕심내기보다는 주변 사람들과 이웃들의 이야기를
[people] <딜쿠샤> 김태영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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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식사 시간을 피해서 읽을 것’이라는 경고로 시작하는 단편 <예술과 중력가속도>의 주인공은 현대무용을 한 은경씨를 만나 그녀에게 푹 빠진다. 은경씨는 원래 달에서 춤추던 무용수였다. 지구와는 중력이 달라서 점프의 높이가 완전히 달랐다. 어느 날 달과 화성의 중력으로 춤을 출 수 있는 기회가 생기자 은경씨는 주인공을 초대하는데, 주인공은 중력이 바뀌는 데 적응을 못하고 구토를 시작한다. 당장 경험 가능한 선에서만 예술작품을 창작하고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어쩌면 SF라는 장르가 그런 경험을 선사할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SF장르에 대한 은유가 되고, 배명훈 작가의 말을 빌리면, 백령도 여행길에 배 위에서 구토를 하며 떠올린 이 이야기는 “어떤 장이 어떤 예술을 발생시킬 수 있고 그게 안 이루어질 때 왜 예술가는 괴로워지는가”에 대한 것이다. “SF의 기본 구조 중 하나다. 내가 뭘 하고 싶은데 그게 안 되게 하는 무언가. 국제정치학에 대한
[trans x cross]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안 되게 하는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들” - 단편소설집 <예술과 중력가속도> 출간한 배명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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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늦기 전에!
올 한해 상영한 다양성영화 중 29편을 선정해 재상영하는 앙코르전 ‘늦어도 11월에는’이 필름포럼에서 열린다. 11월30일부터 12월6일까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 제이 로치의 <트럼보>, 필립 가렐의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 미셸 프랑코의 <크로닉>, 자비에 지아놀리의 <마가렛트 여사의 숨길 수 없는 비밀> 등 상영기간이 짧아 미처 챙기지 못했던 영화들, 다시 한번 관람해도 아깝지 않을 영화들을 다시 불러모았다. 상영작 중 <트럼보> <백엔의 사랑> <립반윙클의 신부> <트루스> <헝거> <아이 인 더 스카이>는 영화 관계자들의 GV도 마련된다.
지브리와 재즈와 크리스마스
올 연말엔 지브리 음악들을 재즈풍으로 즐겨보자. 2011년부터 매년 한국을 방문해온 가즈미 다테이시 트리오가 지브리 음악을 연주하는 <지브리, 재
[culture highway] 더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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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우창 경희대 포스트모던음악학과 교수, 가수 김현철·심현보, 음악감독 모그, 재주가수 웅산 등 강의
* 경희대 포스트모던음악학과와 연계한 실습 및 교육과정 협력 계획
* 가수 EXO·김창렬·주희·팝핀현준·아웃사이더·성악가 최성봉 등 문화예술경영학과 재학 중
경희사이버대학교가 실용음악학과(신설), 문화예술경영학과 등을 포함한 3개 학부, 26개 학과(전공)을 대상으로 2017학년도 1학기 신·편입생 1차 모집을 오는 12월 1일(목)부터 2017년 1월 10일(화)까지 진행한다.
신설한 실용음악학과는 경희대 포스트모던음악학과와 연계한 실습과 교육과정 협력이 이뤄질 계획이다. 이우창 경희대 포스트모던음악학과 교수, 가수 겸 작곡가인 김현철, 심현보, 음악감독 모그, 재주가수 웅산 등이 강의한다.
문화예술경영학과는 가수 EXO·김창렬·주희·팝핀현준·아웃사이더, 성악가 최성봉, 판소리 명창 김주리 등 다양한 대중문화예술인들을 비롯해 문화예술 전반
[경희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실용음악학과 등 3개 학부, 26개 학과(전공)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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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를 걷다가 잠시 멈췄다. ‘바디숍’이 있고, ‘고디바’가 있고, 그 사이에 박근혜가 있었다. 기묘한 풍경이었다. 박근혜는 바디숍을 택할 수 있었고, 고디바를 택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둘 다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디숍만 택했다.
물론 이곳의 ‘고디바’는 벨기에산 명품 초콜릿 제조사의 서울 매장이며, 바디숍은 흔한 화장품 가게일 뿐이다. 그런데 달리 읽혔다. 고디바 때문이었다.
고디바는 사람 이름이기도 하다. 11세기 잉글랜드 중부 코벤트리의 영주 부인 고디바는 몰락해 가는 농민들의 삶이 안타까워 남편에게 가혹한 세금 징수를 멈춰달라고 간청한다. 남편은 비웃는다. 당신이 진심이라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도시오! 고디바는 고심 끝에 영주의 제안을 따른다. 농민들은 감격한다. 그녀가 알몸으로 마을을 도는 동안 누구도 창밖을 내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한 사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재단사 톰이 몰래 훔쳐보다가 걸려 두눈을 잃고
[노순택의 사진의 털] 고디바와 바디숍 사이의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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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페이 더 고스트>는 팀 레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판타지 호러영화다. 연출을 맡은 울리 에델은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뿐 아니라 <트윈픽스> <납골당의 아이들> 등 초자연적 현상과 공포를 결합시킨 TV시리즈, <아발론> <니벨룽겐의 반지> 등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한 판타지영화 경험도 풍부하다. 주연 니콜라스 케이지는 <노잉>(2009)에 이어 아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초자연적 세계에 개입해야 하는 교수 출신 아버지 역할을 맡았다.
마이크(니콜라스 케이지)는 대학에서 괴테나 어빙의 공포문학을 연구하느라 바쁘다. 핼러윈데이 당일 마이크는 학수고대하던 교수 인정 통보를 받게 된다. 늦은 시간에야 돌아온 마이크는 아들 찰리와 심야의 핼러윈 축제장소에 간다. 아이는 자꾸만 무언가 이상한 현상들을 목격한다. 이어 “유령에게 대가를 지불할 수 있어?”라는 불가해한 말을 남긴 채 사라져버린다.
끝내 오리무중인 주인공의 목적의식 <페이 더 고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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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사기로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동현(전석호)은 새 삶을 꿈꿔볼 새도 없이 빚 독촉에 시달린다. 그가 일주일 내로 갚아야 하는 돈은 1억2천만원. 채권자의 요구대로 신장 한쪽을 떼어주고 절반을 탕감받는다 해도 6천만원이 남는다. 동현은 연락을 끊고 살던 작은형 동근(진용욱)을 떠올린다. 지적장애를 가진 형은 같은 장애를 가진 재진(이혁), 앞을 보지 못하는 선우(이정주)와 함께 지낸다. 10년 넘게 착실히 일해온 셋은 월급을 꼬박 모아둔 턱에 든든한 목돈을 갖고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동현은 셋의 환심을 사 돈을 뜯어내려 한다. 하지만 이들 앞엔 사회복지사 은아가 버티고 있다. 동근과 사랑하는 사이인 은아는 동현을 경계하고, 동현 또한 형에 대한 은아의 진심을 의심한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수한 형과 약삭빠르고 철없는 동생. 익숙한 설정에서 예상할 수 있듯, <작은형>은 형을 이용하려던 사기꾼 동생이 형의 진심을 깨닫고 개과천선하는 이야기다. 장애, 전과 기록
세상 물정 모르는 순수한 형과 약삭빠르고 철없는 동생 <작은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