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생 민아와 교사 서린(이유영)은 비슷한 수법을 이용한 성범죄의 피해자들로 등장한다. 음료수를 건네받고 정신을 잃은 이들이 사지가 묶인 채 조종당하는 영상이 유포된다. 얼마 못 가 영화는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것 같았던 두 사건이 실은 동일 인물에게 14년의 긴 시차를 두고 발생한 연쇄 범죄임을 밝힌다. 무방비로 언론에 노출된 피해자는 손쉽게 새 범죄의 타깃이 되고, 새로운 세대는 점점 더 빠르고 간편하게 모방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정보에 노출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에 기반한 서사다. 이처럼 실화를 모티브로 한 픽션을 내건 <나를 기억해>는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청소년들이 직접 ‘소라넷’을 비롯한 각종 음란물 사이트를 통해 동영상을 제작, 유포하는 일각의 세태를 선명히 반영한다. 그러나 디지털 성범죄의 현재를 조명하려는 유의미한 시도와 달리 카메라의 시선은 번번이 시대착오적이다. 가해자의 시선에 담긴 피해자의 몸이 그대로 전시되고, 장르적 쾌감이 동원된 연출과
<나를 기억해> 주위의 누구도 믿을 수 없다
-
미국 인디애나주의 콜럼버스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케이시(헤일리 루 리처드슨)는 성실한 도서관 사서다. 하지만 케이시의 진짜 관심사는 건축. 콜럼버스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모더니즘 건축 박물관이라 할 수 있는 소도시로, 이곳엔 엘리엘 사리넨이 설계한 퍼스트 크리스천 교회, 엘리엘 사리넨의 아들 에로 사리넨의 작품인 노스 크리스천 교회와 밀러 하우스, 데버라 버크의 어윈 유니언 뱅크 등 현대 건축가들의 작품이 도시의 상징처럼 자리하고 있다. 한편 유명한 건축학자 아버지를 둔 진(존 조)은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콜럼버스에 도착한다. 그리고 케이시를 만난다. 케이시는 투어 가이드가 된 것처럼 진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콜럼버스의 건축물들을 소개한다. 건축을 매개로 한 만남이 반복되면서 두 사람은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한 고민을 서로에게 조금씩 꺼내 보이기 시작한다. 콜럼버스라는 매력적인 도시를 배경으로 한 두 남녀의 만남이란 점에서, 이들의 진지하고 지적인 대화가 영화
<콜럼버스> 모더니즘 건축의 메카, 콜럼버스
-
죽은 자들이 마지막으로 들른다는 섬, 미륵도에 떡을 찧는 노인이 살고 있다. 노인은 정성스레 지은 떡으로 망자의 마지막을 위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쥐 한 마리가 나타나 노인이 듣던 유일한 매체인 라디오를 망가트린다. 화가 난 노인은 쥐를 잡으려다 절구를 부수게 된다. 한편 바다에 커다란 폭풍이 친 뒤, 선생님과 학생들이 미륵도에 찾아온다.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2012)를 연출한 오멸 감독의 작품이다. 2014년 가을에 촬영된 이 영화는 2015년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 CGV아트하우스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세월호를 다루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 감독은 “뭐든 해야 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영화는 영화의 책무에 대한 고뇌의 결과다. 영화예술이 어떻게 사회와 관계 맺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단순한 언어로 풀어내지 않는다. 그래서 대사는 적고 인물은 자주 정물이 된다. 이 인물들에게서 너무도 단단하
<눈꺼풀> 죽은 자들이 마지막으로 들른다는 섬, 미륵도
-
인류 종말의 초기 단계로 보이는 가까운 미래, 이미 폐쇄된 뉴욕주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부부와 세 자녀가 맨발로 숨죽인 채 시골 마을의 식료품점을 헤맨다.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해 소리의 근원지를 파괴하러 달려오는 괴생명체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 이후 1년여의 시간을 지나친 영화는 어느덧 만삭의 에블린(에밀리 블런트)이 출산을 앞둔 시기에 관심을 맞춘다.
<콰이어트 플레이스>가 주는 쾌감은 주로 가족들이 쌓아올린 다양한 생존 전략이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적절한 타이밍에, 유효하게 기능할 때 발생한다. 청각장애를 지닌 맏딸 레건(밀리센트 시먼스) 덕분에 수화를 할 수 있다는 점, 가장 리(존 크래신스키)가 운영하는 지하실에 CCTV와 주파수 증폭기가 설치된 점 등 허투루 다뤄지는 세부가 없기에 더욱 깔끔하고 만족스러운 스릴을 낳는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관습, 한번쯤 본 듯한 호러영화의 컨셉을 안목 있게 선별한 뒤 경제적이고 영리하게 배합해낸 영화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소리내면 죽는다!”
-
-
아수라장이 된 우주선에서 <램페이지>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우주에서 비밀리에 진행하던 유전공학 실험의 부작용으로 모든 과학자가 사망하고, 유전자 변형 물질을 담은 캡슐이 지구에 불시착한다. 세계 각지에 서식하던 고릴라, 늑대, 악어가 이 유전자 변형 물질에 노출되는데, 그 영향으로 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과 공격성을 지닌 괴수로 거듭난다. 샌디에이고 야생 동물원에 살고 있던 알비노 수컷 고릴라 조지도 그중 하나다. 괴수로 변해버린 조지가 동물원에서 탈출하자, 그와 깊은 교감을 맺고 있던 영장류 학자 데이비스(드웨인 존슨)는 조지의 폭주를 막기 위해 애쓴다. 불법 유전자 실험을 감행한 유전공학회사 에너진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전학자 케이트(나오미 해리스), 정부 요원 러셀(제프리 딘 모건)이 데이비스와 힘을 합친다.
<램페이지>는 1986년 미드웨이사가 출시한 동명의 아케이드 게임에서 모티브를 얻은 영화다. 거대한 킹콩과 고질라, 늑대가 도심을 파괴한다는 스
<램페이지> 초거대 괴수들이 미쳐 날뛴다!
-
마리나(다니엘라 베가)는 노래하는 트랜스젠더다. 그와 동거하던 남자친구 올란도(프란시스코 리예스)가 갑작스럽게 동맥류 증상으로 죽음을 맞이해 당황스럽다. 하지만 올란도가 사망하기 직전 함께 있었던 사람이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모두가 마리나를 범죄자 취급하며 모욕한다. 의사는 그를 부를 때 남자를 지칭하는 대명사를 쓰고 마리나가 여자 이름을 대자 별명이냐고 대꾸한다. 마리나의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주지 않는 올란도의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계단에서 구르며 몸에 생긴 상처마저 그의 탓으로 돌리려고 한다. 마리나의 처지를 동정하며 격려하는 사람은 다른 방식의 차별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 마리나가 애인이 죽었다는 사실에 온전히 슬퍼하기 위해서는 트랜스젠더를 향한 세상의 편견을 먼저 버텨내야 한다.
영화는 올란도의 얼굴에서 시작되지만, 긴 도입부가 지난 후 극의 진짜 주인공이 올란도가 아닌 마리나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배치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마리나는 2.35:1의 넓은 화면 속에서 항상
<판타스틱 우먼> 트랜스젠더를 향한 세상의 편견
-
<당신의 부탁>에서 임수정이 연기하는 효진은 혹독한 인생의 환절기를 조용히 나고 있다. 결혼에 뜻이 없다가 만난 이혼남(김태우)을 깊이 사랑하여 아내가 되었지만 갑작스런 사고가 남편을 앗아갔다. 효진의 트라우마는 단번에 쓰러뜨리는 대신 스며든다. 친구(이상희)와 보습학원을 운영하며 남들만큼 일상을 감당하고 있지만, 효진은 사실 아무 데도 있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훌쩍 떠나거나 은둔할 만큼 드라마틱한 인간도 아니다(그런 일에는 약간의 자기도취가 필요한 법이다). 망가지진 않았지만 고장난 효진에게 어느 날 예전 시댁 식구가 뻔뻔한 부탁을 들이민다. 남편과 전 부인 사이의 16살 아들 종욱(윤찬영)이 사고무친한 처지가 됐다며 “애는 아무래도 엄마가 키워야 하지 않겠냐”고 들이댄다. 동의해서가 아니라 아무려면 어떠랴 하는 심정으로 데려온 소년도 효진에게 바라는 바가 없다. 그러니까 <당신의 부탁>은 모성이 모두를 구원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종욱은 효진을 신경 쓰
<당신의 부탁> 임수정 - 배우가 계단을 오를 때
-
<씨네21> 창간 23주년을 함께 기념하기 위해 배우 정우성의 별책부록 <청춘의 초상, 정우성>을 발간했다. 1994년 <구미호>로 스크린에 데뷔한 정우성은 모두가 환호하는 청춘의 이미지에 안주하지 않은 채 진화와 성장을 거듭해온 대표 배우다. 그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 데뷔 24년이 지난 지금, 정상의 자리에서 꾸준히 도전을 멈추지 않는 배우 정우성의 매력에 대해 이야기해줄 분들을 한자리에 모셨다. <비트>로부터 시작해 최근작 <아수라>까지, 정우성의 연기를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김성수 감독, 그리고 <아수라>를 함께한 한재덕 사나이픽처스 대표, 정우성과 함께한 작품은 <마담뺑덕> 한편이지만 꾸준히 영화적 우애를 나누고 있는 임필성 감독, 정우성이 가진 매력의 총합을 보여준 <강철비>의 양우석 감독, 이렇게 네명의 영화인들과 대담 자리를 마련했다. 이들 모두 정
정우성과 영화 친구들
-
지난 4월 8일 런던 동쪽에 자리한 전시 공간 ‘180 더 스트랜드’ (180 The Strand)에서 열린 영화 <개들의 섬>에 사용된 17개의 실제 세트 및 인형 전시회가 성황리에 종료됐다. 전시회쪽은 매일 3천명 넘는 관객이 몰려든 덕분에 전시 일정을 3일간 연장했다고 전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4월 6일까지 누적 관람객 수는 4만명으로, 주말에 찾을 관객을 더하면 최소 5만명 이상이 ‘180 더 스트랜드’를 찾을 것”으로 예측했다. 이어 “전시가 진행되는 중에는 언제나 4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전시회장 밖에서 줄을 길게 서고 있었다”며 전시회장 주변 풍경을 전하기도 했다.
‘180 더 스트랜드’에 전시된 17개 세트 중에는 와타나베 교수의 실험실, 메가사키 도시 및 쓰레기 도시의 몇몇 풍경 등이 포함돼 있다. 가장 인기 있었던 섹션은 ‘보스’가 운동선수 동료들과 즐겨 찾던 누들 바에서 영감을 얻은 아리얼 (Areal) 누들 바로, 전시회를
[런던] 웨스 앤더슨 감독의 스톱모션애니메이션에 사용된 인형 전시회
-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상업영화에서 ‘디지털적 실험’이란 말 자체가 어색한 지금, 디지털 촬영을 가장 혁명적으로 활용한 곳은 방송과 웹의 세상이다. 그곳 세상에서 기획, 방영되는 프로그램의 번성은 디지털 촬영장비의 발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역으로 방송과 웹 프로그램을 영화화하는 경우도 생겼다. 세간에 뜨겁게 거론 중인 <곤지암>이 한 예다. 해외에서 페이크 다큐멘터리 장르의 영화가 간혹 엄청난 수익을 올린 사례와 비교해, 한국에서 대중의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킨 페이크 다큐로는 <곤지암>이 현재까지 거의 유일하다. 그렇다면 <곤지암>이 방송과 웹 프로그램의 디지털적 특성을 충실하게 재현한 작품인가? 혹은 디지털적인 정신과 태도가 제대로 구현된 작품인가? 내 대답은 ‘아니오’다. 지난해에 공개된 이두환의 <혼숨>(2016)이나 좀더 예전에 나온 비셔스 형제의 <그레이브 인카운터>(2011)가 차라리 위 질문에 더 어울
<곤지암>의 영리한 공간 활용
-
<나를 기억해>에서 이유영이 연기한 서린은 과거를 지운 채 사는 여자다. 어린 시절 겪은 성범죄 사건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 탓이다. 고등학교 선생님이 된 뒤 약혼자와 결혼을 앞둔 어느 날, ‘마스터’라는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온 문자 한통은 그녀의 새로운 인생에 균열을 일으킨다. 흥미로운 건 서린이 환기된 과거에 숨기보다는 자신의 트라우마와 맞서 싸우려 한다는 점이다. 데뷔작 <봄>부터 이번 영화까지 매 작품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이유영은 서린에게 장르영화 속 인물에게서 볼 법한 계산된 연기보다 따스한 체온을 불어넣었다. 현재 MBC 단막극 <미치겠다, 너 땜에!> 촬영으로 한창 바쁜 이유영을 만나 나약함에서 강인함으로 자연스럽게 변모하는 서린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단막극 제목이 <미치겠다, 너 땜에!>던데. 누구 때문에 미치는 건가. (웃음)
=남자친구(김선호) 때문에. (웃음) 8년 된 친구와 하룻밤을 보낸
<나를 기억해> 이유영 - 결말의 반전이 나를 사로잡았다
-
유희경의 시집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에는 시집 이름과 동명의 시가 3편 수록되어 있다. 세개의 챕터는 매번 동명의 시로 시작한다. 세 번째 챕터의 시는 <우리에게 잠시 신들이었던>이니 완전히 동명이라곤 할 수 없겠다. 처음에는 시 속의 ‘신’이 하늘에 계신 그 신인 줄 알았다. 그러나 다른 시편들을 읽어내려가면서 시인이 호명한 신 앞에 ‘당’이라는 글자가 생략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 시집의 온전한 제목은 ‘우리에게 잠시 당신이었던’일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어쩐지 당신이라는 글자를 쓸 때에는 그 말이 곰살맞고 다정하게 느껴진다. 유희경의 시에서 화자는 호명되지 않는 대신 이인칭들이 등장한다. 당신이다. 이 시집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이 봄, 그리고 이야기이다. 이야기 속에서 당신은 내내 다정하고 함께 시간을 나눈다. 그 시간 속으로 봄은 여러 번 온다. 수록시 <합정동>
씨네21 추천도서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
한산한 역 앞 공원 분수, 일용직으로 일하는 18살 슈지는 클럽에서 만난 여자 아렌과 약속을 잡고 기다리는 중이다. 주변에는 중년 남성, 여대생, 주부, 노부인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때 검은 헬멧에 에나멜 코트를 입은 남자가 나타나 회칼을 휘두르고, 무차별 살인사건에 4명이 목숨을 잃는다. 마약에 취한 범인은 사건 직후 사망하고, 겨우 목숨을 건진 슈지는 의문의 남성으로부터 “도망쳐, 열흘 동안 살아남으”라는 경고를 받는다. 죽은 줄 알았던 범인은 계속 슈지의 목숨을 노리고, 형사 소마와 프리라이터 야리미즈가 슈지를 돕는다. 드라마 <트릭2> <파트너>의 각본가 출신 오타 아이의 <범죄자>는 방대한 분량으로 거대한 조직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방송국, 정치가, 대기업, 의료업계, 경찰조직 등 사건이 벌어지는 다양한 조직에 대한 묘사가 생생해서 발로 뛴 작가의 성실함이 느껴진다. 1권당 700페이지, 총 2권. 분량의 압박이 있지만, 일단 첫장을
씨네21 추천도서 <범죄자>
-
이국적인 음식점, 연트럴파크의 활기가 가득한 젊은 거리 연남동에는 다소 이질적인 점집이 하나 자리 잡고 있다. 이름하여 ‘미남당’, 거 참 자신만만한 점집의 간판 보소, 용하기로는 물론이고 8 대 2 가르마에 명품 슈트까지 차려입어 더 유명한 미남 박수무당이 이 점집의 주인 남한준이다. 점 보러 온 손님 엉덩이가 바닥에 닿기도 전부터 무슨 연유로 여길 왔으며, 현재 상황까지 소상히 꿰고 있는 이 점쟁이는 사실 신내림은커녕 사주도 볼 줄 모르는 사기꾼이다. 물론 말솜씨만으로 용하다는 명성을 얻기란 어려운 일, 예약 시 받는 전화번호와 이름을 통해 흥신소에서 손님 주변을 훑고, 전직 FBI 출신인 동생 혜준이 각종 SNS 신상털이를 통해 사전조사를 완료하여 한준 일당은 미리 상대의 소상한 프로필을 손에 넣고 상담을 시작한다. 그렇다고 사기만 치는 것이 아니니 이들을 악당이라 할 순 없다. 이 박수무당은 부적으로 상대의 마음을 다스릴 뿐 아니라 실제로 사건에 개입해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씨네21 추천도서 <미남당 사건수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