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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에 준공되었고 1999년에 재건축 논의가 시작돼 2018년에 마침내 이주와 철거가 모두 진행된 서울 강동구의 둔촌주공아파트. 143개동, 5930세대가 거주했던 오래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철거되기 전, 누군가는 이 공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둔촌주공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이인규씨는 독립 출판물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를 펴냄으로써 아파트 단지에 깃든 사사롭지만 기억할 만한 시간들을 정리한다. 라야 감독의 <집의 시간들>은 그 기록 프로젝트의 연장선상에 놓인 작품이다. 영화는 여러 개인의 구술 인터뷰와 아파트 내외부의 이미지로 이루어진다. 서울의 아파트 단지로선 드물게 녹지를 끼고 있는 아파트. 그곳에서 20년 넘게 살며 자식들을 키운 중년의 여성과 남성, 자신이 유년기를 보낸 곳에서 자식을 낳아 키우는 여성 등 10여명의 인터뷰 대상자들은 둔촌주공에서 살며 느낀 것들을 들려준다. 휴식 공간으로서의 집, 공동체의 토대로서의 집에 대한 얘기를
<집의 시간들> “당신에게 집은 어떤 의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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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무능한 임금 이조(김의성)가 간신배에 둘러싸여 왕권을 잃어가던 조선시대. 청나라에서 수학하던 왕자 이청(현빈)이 세자이자 형인 이영(김태우)의 부름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그때 야귀떼가 창궐하면서 백성들의 터전이 쑥대밭이 된다. 세자 이영을 비롯한 그의 수하들이 반역을 꾀했다는 죄를 물어 숙청을 당하면서 조정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 궁의 안팎에서 벌어지는 혼란을 틈타 무능한 이조에 맞서 다른 뜻을 품고 있는 병조판서 김자준(장동건)이 일을 꾸미기 시작한다. 왕위는 물론 국가의 안위에 아무런 관심이 없던 이청은 자신을 지도자로 모시려는 반란군들의 등쌀에 못 이겨 일단 야귀떼를 무찌르기 시작하는데 그 수가 점점 불어나 한성까지 위험해진다. 좀비라는 공포영화의 단골 소재를 조선시대로 이식하는 과정에서 <창궐>이 택한 전략은 재난보다는 액션에 방점을 찍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야귀란 존재는 좀비와 뱀파이어의 성격을 일부 차용해 만든 괴물이다. 이에 맞서 이청을
<창궐> 야귀떼가 온 세상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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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골목 귀퉁이 작은 카페 안. 노트북을 펼쳐놓은 아름(김민희)은 상념에 빠져 있다. 아니, 카페 안 사람들의 말을 훔쳐 듣는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시차를 두고 카페에 들어온 사람들의 대화는 가지각색이다. 죽은 친구를 언급하며 책임을 추궁하는 여자(공민정)와 이에 반발하는 남자(안재홍), 극단에서 나와 오갈 데 없어 후배(서영화) 집에 얹혀살아보려는 남자(기주봉), 그리고 직접 글을 써보지만 잘 풀리지 않아 작가인 후배(김새벽)에게 같이 써보지 않겠냐고 제안하는 배우(정진영).
마주앉은 상대의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다음 반응이 이어지는 카페 안의 작은 테이블들. 끊임없는 대화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잠깐의 휴지기를 주는 순간은, 이 다종다양한 인물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카페 바깥에 늘어선 화분들을 바라볼 때뿐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의 영희(김민희)가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던 배추꽃처럼, 이 영화의 화분 안 풀잎들도 화려하지 않다. 조금은 한심하고
<풀잎들> 한적한 골목 귀퉁이 작은 카페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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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단편소설에서 제목을 따온 <영하의 바람>은 주인공 영하의 10대 시절을 순차적으로 따라가는 성장영화다. 성장을 재촉하는 건 영하(零下)의 바람처럼 매서운 시련이다. 하지만 영화는 시련의 강도보다 그에 대처하는 소녀들의 처세에 집중한다. 버림받지 않으려고 빠르게 적응하고 체념하는 법을 배워버린 소녀들. 그러나 그 바람을 함께 맞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소녀들의 한줌 따뜻한 마음이 영화에 맺혀 있다.
김유리 감독이 소녀의 성장담을 데뷔작으로 만들게 된 건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의 감수성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사회로 나오면서 성장통을 겪었다. 자연스럽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됐고, 어쩌면 우리가 경험하는 최초의 부조리는 가정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개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쁘고의 구분이 모호한 복잡한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돼 문제가 생겨도 “인정상 묵인되고 용인되는” 경우가 많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들⑦] <영하의 바람> 김유리 감독 - 영하의 바람을 견디게 하는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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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부산영화제 화제작 중 한편인 <벌새>는 느린 걸음으로 관객을 뒤흔든다. 김보라 감독은 소재를 자극적으로 풀어내는 여느 학원 성장담과 달리 인물과 거리를 둔 채 차곡차곡 일상의 공기를 쌓아나간다. 덕분에 이 내밀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묘사될수록 모두의 경험담으로 확장된다. 무너진 성수대교의 상처가 1994년에 머물지 않고 어제의 일처럼 되살아나고, 일상을 버텨내는 소녀의 흔들림이 그 사소함으로 모두의 어린 시절과 겹쳐지는 기적. <벌새>를 통해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중인 김보라 감독에게 그 지난했던 시간에 대해 물었다.
-부산에서 관객 반응이 뜨거웠다. 넷팩상(NETPAC Award) 수상도 축하한다.
=100만번은 봤는데 영화를 막상 스크린에서 보니 눈물이 쏟아졌다. 김새벽, 박지후 배우 모두 울고 있더라. 상영하기 전부터 몸이 아플 정도로 걱정이 됐다. 관객의 분위기가 너무 따뜻해서 위로받고 나온 기분이다. 1993년생 남자 관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들⑥] <벌새> 김보라 감독 -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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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기>는 꼭 열성팬들을 몰고 다니는 인기 아이돌 그룹 같았다. 관객과의 대화는 팬미팅을 방불케 할 만큼 열기가 뜨거웠고, 관객은 이옥섭 감독이나 배우들이 하는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귀를 쫑긋 세웠다. 배우 이주영을 응원하는 플래카드도 간간이 보였다. 분명한 건 이 영화가 <4학년 보경이>(2014), <연애다큐>(2015), <걸스 온 탑>(2017), <세 마리>(2018) 등 여러 단편영화에서 보여준 이옥섭 감독의 색깔을 충실하게 유지하되, 전형적인 서사 문법에 얽매여 있지 않으면서 느슨하게 이어진 것처럼 보이는 에피소드들을 재기 넘치게 연결한다는 사실이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메기>는 CGV아트하우스상을 포함해 시민평론가상, KBS 독립영화상, 올해의 배우상(이주영 수상) 등 올해 영화제의 굵직굵직한 상 4개를 싹쓸이했다. “시상식 직전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어 숙소에서 누워 있었다. 구교환 선배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들⑤] <메기> 이옥섭 감독 - 위로와 질문을 던지는 존재가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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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워바디>는 고시합격의 길은 멀기만 하고 취업의 문턱은 좁기만 해 번번이 실패를 경험하는 주인공 자영(최희서)을 통해 청년 세대의 답답한 현실을 보여준다. 동시에 달리기를 통해 자신의 몸을 알아가는 자영에게 섹슈얼리티라는 새로운 탐구영역을 제시한다. <아워바디>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연출전공 33기 출신인 한가람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청년 세대’이자 ‘여성’으로서 감독 개인의 경험을 많이 반영했다는 <아워바디>는 자영을 연기한 배우 최희서의 극사실적인 연기와 섬세한 연출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아워바디>의 주인공 최희서는 제23회 부산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했다.
-미래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청년 세대의 좌절과 자신의 몸을 알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를 결합했다. 어떻게 구상한 이야기인가.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연구과정을 준비할 때부터 청년 세대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당시 운동이라곤 모르고 평범하게 살던 지인이 갑자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들④] <아워바디> 한가람 감독 - 몸을 통해 건강한 여성의 에너지를 표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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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더라도 끝까지 밀고 나간 부분을 좋게 봐주신 게 아닐까 싶다.” 올해 부산영화제 뉴 커런츠상을 수상한 <호흡>의 권만기 감독은 처음부터 걱정이 많았다. <호흡>은 납치에 관계되었던 여인이 시간이 흐른 후 성장한 피해자 소년을 만난 뒤 벌어지는 상황을 다룬 영화다. 끝내 떨쳐버리지 못할 죄의식과 용서의 의미를 더듬는 이 영화는 호흡이 가빠질 만큼 진중한 무게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솔직히 반응이 좋지 않을 거라고 각오했다. 정확히는 이 이야기를 정면으로 받아들여주거나 반대로 불쾌함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권만기 감독의 말처럼 <호흡>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직선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밖에 없는 영화다. 유괴 피해자인 소년과 다시 만난 가해자의 죄책감은 용서, 그리고 구원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호흡>은 소재가 강렬할 뿐 아니라 연출도 에둘러가지 않는 영화다. 불편할 수 있는 이야기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들③] <호흡> 권만기 감독 - 항상 딜레마에 매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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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는 가장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에게서 절실했던 애정을 받는 소녀의 아이러니를 그린다. 그는 부모를 죽게 만든 교통사고의 가해자를 찾아갔다가 상문(유재명)과 향숙(김호정) 부부가 보여주는 친절함에 마음이 풀어지고,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들을 좋아하게 된다. <미쓰 홍당무>(2008), <비밀은 없다>(2015)의 스크립터를 거쳐 첫 장편영화를 만든 차성덕 감독도 극중 영주처럼 10대 시절 부모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20살 때 학교 실습시간에 썼던 한줄의 시놉시스에서 시작한 영화다. 문득 내 부모를 죽게 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 이야기를 끝내야지 다음 작품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주>는 올해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서 상영된 작품 중 가장 먼저 개봉이 확정되어 11월 22일 관객을 만난다.
-향숙은 피 하나 섞이지 않은 영주에게 선의를 베푸는 인자한 인물이다. 부모를 죽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들②] <영주> 차성덕 감독 - 불편한 것을 들춰보는 이야기에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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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들 반응? 영화가 귀엽다더라. (웃음)” 영화를 연출한 안주영 감독의 말처럼, <보희와 녹양>은 올해 부산영화제에 초청된 한국영화아카데미 제작영화 5편(<보희와 녹양> <호흡> <아워바디> <마왕의 딸, 이리샤> <눈물>) 중 가장 밝고 착한 작품이다. 하지만 캐릭터의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희와 녹양> 역시 절대 가볍지 않은 고민이 녹아 있다. 단편 <옆구르기>(2014), <할머니와 돼지머리>(2016) 등을 연출한 후 안주영 감독이 만든 첫 장편영화 <보회와 녹양>은 권만기 감독의 <호흡>과 함께 ‘한국영화의 오늘-비전’부문 KTH상을 수상했다.
-마른 체구에 섬세한 성격의 보희는 흔히 말하는 ‘남성성’에서 벗어난 캐릭터다. 여자인 녹양쪽에서 보희를 이끌어줄 때가 많다.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기존 성 역할대로 행동하라고 강요받지 않나. 나 역시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들①] <보희와 녹양> 안주영 감독 - 외롭지 않은 아이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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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감독의 작품이 수적으로 증가한 것과 여성(특히 10대 소녀)의 서사가 늘어난 것.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에서 공개된 한국 독립영화의 특징은 대략 이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심지어 남자배우와 여자배우에게 돌아가는 올해의 배우상도 <메기>의 이주영과 <아워바디>의 최희서, 두 여자배우에게 돌아갔을 정도다. <씨네21>이 부산영화제 기간에 만난 한국 감독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역시나 여성감독들의 활약이 눈에 띈다. <호흡>의 권만기 감독, <메기>의 이옥섭 감독, <벌새>의 김보라 감독, <보희와 녹양>의 안주영 감독, <영하의 바람>의 김유리 감독, <아워 바디>의 한가람 감독, <영주>의 차성덕 감독까지. 미래가 기대되는 7명의 감독을 부산에서 만났다.
2018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한국영화들 이야기 ① ~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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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이웃한 이탈리아는 1960~70년대 스파게티 웨스턴의 기원국으로 세르지오 레오네 같은 웨스턴 장르의 전설적인 인물을 배출했지만, 같은 시기 프랑스는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 같은 감독들의 작품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일까. 오늘날까지 프랑스 감독들에게 웨스턴 장르는 그야말로 도전 이상의 그 무엇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이 부인할 수 없는 프랑스 영화사의 ‘경험명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작품이 나왔다. 바로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시스터스 브러더스>(2018).
19세기 미국 땅이 골드러시 붐으로 요란하게 꿈틀거리던 시기. 엘리(존 C. 라일리), 찰리(호아킨 피닉스) 시스터스 형제는 코모도르에게서 금 채취에 획기적인 포뮬러를 발견한 화학자 페르만 케르미츠 웜(리즈 아흐메드)을 암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길을 나선다. 그런데 시스터스 형제에게 페르만의 위치를 보고하기 위해 고용된 사설탐정(마이크 질렌홀)이 마음을 바꿔 페르만을 돕기 시작하면서, 이 두 그룹의
[파리] 자크 오디아르 감독 신작 관객과 평단 모두 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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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미하엘 하네케 / 출연 장 루이 트랭티냥, 에마뉘엘 리바, 이자벨 위페르 / 제작연도 2012년
지난해 다리우스 콘지 감독과의 인터뷰 도중이었다. 만 3살에 운명처럼 영화와 사랑에 빠져버린 이야기에 이어, 무성영화 시대의 걸작부터 천천히 접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제7의 예술을 열렬히 경배하는 예술가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존경심이 들었다. 그날 밤, <아무르>를 다시 보았다. 그가 촬영감독으로서 잡아낸 눈부신 빛과 깊은 어둠을 따라가다보니 마지막에는 불을 삼킨 듯, 가슴이 뜨거워졌다. 슈베르트의 음악 속에 존재하는 천국과 지옥처럼 강렬한 대비가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푸른 빛깔과 관조하는 듯한 카메라, 차가운 질감의 영상언어 너머의 불같은 에너지… <아무르>는 <하얀 리본>에 이은 미하엘 하네케의 또 다른 걸작이다.
2012년 <아무르>를 파리의 한 영화관에서 보았을 때, 주변에서 구급차를 불러주겠다고 걱정할
김나희 음악평론가의 <아무르> 왜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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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은 일가친척을 일컫는 킨드레드(kinred)의 줄임말이다. 소설 <킨>의 내용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 수 있게 하는 단서이기도 하고. 1976년 6월 9일은 다나의 생일이었다. 약혼자 케빈과 동거를 시작한 다나는 짐 정리로 분주하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쓰러진다. 정신을 차리자 다나는 한 소년(루퍼스)이 호수에 빠진 것을 구해내고 있다. 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그녀에게 총을 들이대고 다나는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다나가 타임슬립한 그곳은 1815년 메릴랜드주. 흑인이 노예생활을 하던 시대였다. 그녀는 매번 소년이 죽을 뻔한 상황에 과거로 소환되고, 자신이 죽을 뻔한 상황에 현실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백인인 루퍼스가 자신의 조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과거로 간 다나는 흑인 자유민인척하고 살아남는다. 그것은 백인인 케빈이 그녀와 함께 타임슬립을 경험하면서 그나마 가능해진 일이다. 케빈이 함께 과거로 돌아갔을 때, 케빈은 다나보다 수월하게 그 삶에 적응한
씨네21 추천도서 <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