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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수님, 하고 부르는 후배 윤영(박해일)에게 “형수 아닌데. 이혼했어요” 하고 대뜸 밝히고, 그 후배와 즉흥적으로 군산 여행길에 오른 여자. “미친 거 같아. 갑자기 오라는 사람도 그렇고 따라온 나도 그렇고”라고 말하지만 실은 불혹의 나이를 지난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윤영을 따라왔을까. 바람나 이혼한 전남편(윤제문)에게 “개새끼”라고 혼쭐내주고,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고 지금도 갈팡질팡하는 후배 윤영을 다그치며, 마음에 드는 민박집 주인 이사장(정진영)에겐 “저한테 궁금한 거 없으세요?” 하며 먼저 호감을 표하는 여자. 점쟁이에게 “그렇게 많이 알면 점집을 차려라”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소신껏 살았던 여자가, 그런데 길을 잃었다. 영화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의 송현의 군산 여행은 과거에 발목 잡히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길을 잃은 그녀의 짧은 버퍼링이다. 기대고, 울기도 하고, 실소를 자아내기도 하지만 우리는 송현이 앞으로 나아가리라 믿고 응원하게 된다. 문소리라서,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배우 문소리, "문소리의 리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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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의 그해 여름>(2017)은 카를라 시몬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엄마를 잃은 6살 소녀가 친척집에 맡겨진 뒤 낯선 환경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담는다. 천재적인 아역 라이아 아르티가스의 연기와 감독의 사려 깊은 연출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바르셀로나에서 살던 프리다(라이아 아르티가스)는 외삼촌 부부를 따라 시골로 내려간다. 어른의 눈으로 보았을 때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외삼촌 부부가 프리다를 냉대하는 것도 아니고, 사촌동생 아나(파울라 로블레스)는 프리다를 좋아한다. 하지만 영화는 프리다가 느끼는 불안, 질투, 회피, 영악함, 투정, 눈치보기, 거짓말, 죄의식, 반항, 그리움, 애정결핍, 서운함, 우울, 두려움, 안도감 등을 담아낸다.
흔히 엄마를 잃은 아이가 친척집에 맡겨지는 서사를 다룰 때 가장 쉬운 접근이 차별이나 학대를 당하는 이야기다. 아이는 ‘이노센트’한 존재로, 죽은 엄마와의 관계는 이상적으로 그려진다. 즉 행복하게 살던 순진한 아이가
섬세하게 가족이 되는 과정을 살피는 <프리다의 그해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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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 플레이어들이 움직인다. 올해 초 <곤지암>이 26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컨저링> 시리즈나 블룸하우스 영화 등 할리우드 공포영화들이 국내 관객 사이에서 꾸준하게 사랑받기 시작하면서 한동안 맥이 끊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한국 공포영화 시장도 조금은 분주해진 듯하다. 이러한 흐름 아래 <여고괴담>(1998)의 박기형 감독이 시나리오 공모전을 주최하고 나섰다. <여고괴담>은 한국영화사에서 사실상 공포영화 붐을 일으켰던 영화이며 지금은 톱스타 반열에 오른 수많은 배우들과 개성 넘치는 감독을 발굴해낸 시리즈였다. 그 시작을 함께했던 박기형 감독은, 물론 공포영화의 외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되묻게 되었다고 한다. 마침 올해가 <여고괴담> 개봉 2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에 그가 준비하는 공포영화 시나리오 공모전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올 것 같다. 장르영화에 대한 저변이 확대되
<여고괴담> 박기형 감독, 개봉 20주년 기념 공포영화 시나리오 공모전 주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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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을 앞둔 애니메이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올해 제22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2018)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지난 8월 23일 이미 팬들과 한 차례 만남을 가졌다. 미리 설명해둘 것이 있다. 애니메이션은 작가 스미노 요루의 동명 소설이 인기를 얻었을 때 영화와는 별개로 만화와 애니메이션 모두 제작이 결정된 상태였다. 지난해 개봉(2017년 10월 25일 국내개봉)했던 실사영화의 애니메이션 버전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실사영화를 기억하는 관객에게는 익숙한 제목과 줄거리겠지만, 실사영화와는 다른 매력을 지닌, 소설에 더욱 충실한 작품이다. SICAF2018 개막식에 참석했던 우시지마 신이치로 감독과 다카하시 유마 프로듀서를 만나 애니메이션의 기획 방향과 매력에 대해 물었다.
-작가 스미노 요루의 데뷔 소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을 맡으면서 가졌던 고민은 무엇이었나. 영화를 어떤 방향으로 각색해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우시지마 신이치로 감독, 다카하시 유마 프로듀서 - 원작의 독후감을 쓰듯 만든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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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고든 그린의 <할로윈>은 원작의 주인공 로리 스트로드(제이미 리 커티스) 캐릭터가 40년 후 어떻게 계승됐는지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노년이 된 로리는 자신의 딸 캐런(주디 그리어)과 손녀 앨리슨(앤디 마티책)에게 언젠가 돌아올 살인마 마이클 마이어스에 맞서 싸우는 법을 가르친다. 앨리슨을 연기한 앤디 마티책 역시 “원작 속 제이미 리 커티스의 연기를 참고했다. 앨리슨은 17살 당시 로리가 낳은 알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할로윈>의 마지막 장면은 그가 할머니와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세상의 위해와 맞서 싸우는 강한 여성으로 자랄 것임을 암시한다.
70, 80년대 파이널 걸 캐릭터의 아이콘이었던 제이미 리 커티스의 뒤를 이어 ‘파이널 걸’로 발탁된 신인 앤디 마티책은 여러모로 새 시대의 여성 캐릭터에 어울리는 배경을 갖고 있다. 원래 그는 상위 20위권 대학에 입학할 만큼 재능을 갖춘 축구선수였다. 가끔 모델 일을 겸하던 고등학생 앤디 마티책은
<할로윈> 앤디 마티책 - 새 시대의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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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 입문자에게 처음 권하는 소설은 단연코 사조삼부곡으로 불리는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순서다. 저작권 계약을 하지 않고 무단발간된 고려원판이 사조삼부곡을 <영웅문> 3부작으로 국내 소개해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영웅문> 3부작이라는 이름이 오히려 원래 책 제목보다 더 잘 알려졌다. 또한 사조삼부곡이 그렇듯 영화와 드라마 등으로 여러 번 영상화되었거나 김용의 팬들 사이에서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인 <소오강호> <녹정기>를 함께 소개한다. 방대한 세계를 짧은 글로 축약하느라 무리가 발생한 데 대해서는 강호 대협들의 양해를 바라는 바다.
<사조영웅전> 전 8권
사조삼부곡 첫 번째 작품. 대만에서 1천만부, 중국에서 1억부 이상 판매됐다. 몽골이 세워지고 송나라가 멸망하는 시기까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임안(현 항저우) 인근을 무대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권선징악의 구도가
김용 소설 베스트 5종 -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소오강호> <녹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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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30일 신필(神筆) 김용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서 <영웅문>이란 명칭으로 출간되어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등의 작품을 통해 국내에도 잘 알려진 김용은 15편의 무협 소설로 중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 중 한명으로 자리매김했다. 글을 통해 협을 추구했던 영웅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기고 간 작품들은 이미 전설이 되어 중국 대중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김용의 무협은 <소오강호>(1990), <동방불패>(1992), <동사서독>(1994) 등 90년대 홍콩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무협영화뿐 아니라 드라마, 게임으로도 확장되어 지금도 꾸준히 재탄생 중이다. 사해형제(四海兄弟) 무림강호(武林江湖)인을 자처하는 송경원 기자가 대협객에 대한 기억과 존경이 뒤섞인 추모의 글을 썼다. 이다혜 기자가 국내 정식 출간된 김용의 대표적인 소설들을 함께 소개하니, 아직 책으로 접하지
10월 30일 94살로 타계한 작가 김용과 그의 무협 소설과 ‘김용 유니버스’를 추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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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가 개관 11주년을 기념해 지난 11월 7일부터 11일까지 5일간 기획전 ‘ Ⅰ- 독립영화 여성감독전’을 열었다. 이 기획전에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관을 구축해온 여성감독 14인의 작품이 상영됐다. <씨네21>은 이들 중 장편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연출한 5명의 감독에게 만남을 청했다. <이태원>의 강유가람 감독, <방문>의 명소희 감독, <구르는 돌처럼>의 박소현 감독, <기억할 만한 지나침>의 박영임 감독, <공사의 희로애락>의 장윤미 감독이 그들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서울여성국제영화제, DMZ국제다큐영화제 등을 통해 주목받아온 이들의 작품은 한국영화에서 종종 배제되곤 하는 여성의 시선과 목소리를 예리한 감각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번 대담은 여성 독립영화 감독들의 작업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하는 목적과 더불어 독립영화 제작의 열악한 환경 가운데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생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개관 11주년 기획전 ‘I - 독립영화 여성감독전’의 감독 5인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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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작 <할로윈>의 주연배우들이 40년 만에 그대로 복귀한 <할로윈>. 1986년작 <여곡성>을 32년 만에 리메이크한 <여곡성>. 제목마저 동일하게 지으며 ‘고전의 맥을 잇는다’는 정체성을 띤 동서양의 두 공포영화가 함께 극장에 걸렸다. <할로윈>은 북미에서 흥행 기록을 세우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여곡성> 역시 진부한 스토리로 혹평을 피하지 못했으니, 원작의 아성을 따라가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각 나라의 고전 공포영화를 토대로 한 만큼, 두 영화는 동서양의 공포 코드를 관찰하기에는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그렇다면, 과연 동양과 서양의 공포영화는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 장르의 혼합, 공식을 깨는 신선한 공포영화들이 다수 등장하고 있지만 ‘상대적인 기준’으로 동서양의 공포영화를 비교해봤다.
종교적 배경 차이
‘종교’는 공포영화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소재다.
귀신이라고 봐주는 거 없다? 동서양의 공포영화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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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의 대부 스탠 리 명예회장이 11월12일(현지 시간), 향년 95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자택에서 건강이 악화된 그는 급히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스탠 리 회장은 몇 년 전부터 폐렴으로 병원을 오가며 투병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스탠 리 회장의 별세 소식에, 마블 스튜디오를 비롯해 그와 함께했던 배우들은 애도의 뜻을 전했다. 마블 스튜디오는 공식 SNS를 통해 “스탠 리의 별세에 큰 슬픔을 갖고 추모한다”고 게재했다. ‘아이언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나는 당신에게 많은 것을 빚졌다. 편안히 쉬시길”이라고 전했으며, ‘울버린’ 휴 잭맨은 “그는 슈퍼히어로 우주에서 선구적인 존재였다. 그의 유산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에 작은 도움이 돼 영광이었다”라고 전했다. 이외 캡틴 아메리카를 연기한 크리스 에반스, 헐크를 연기한 마크 러팔로 등 여러 배우, 영화인들의 추모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스탠 리 회장의 공식 트위터에는 ‘1922~2018 Ex
마블의 대부 ‘스탠 리’ 명예회장, 향년 95세로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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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스타’라는 이름이 그만큼 잘 어울리는 배우가 또 있을까. 1960년대 한국영화는 신성일의 이름을 거치지 않고는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다. 신성일은 스타의 아우라로 이들 영화화의 어떤 기운을 만들어낸다. 신성일의 길고 긴 필모그래피 중 감독의 페르소나로서 시대성을 보여줬던 영화를 꼽아봤다. 김기덕, 신상옥, 이만희, 이성구, 이장호, 임권택, 정진우 감독은 신성일의 얼굴을 빌려 시대의 비정함과 낭만, 세련됨과 아픔을 표현했다. <씨네21> 기자들이 좋아하는 영화 속 신성일의 얼굴들을 통해 그 모습을 찾아보았다.
정진우 감독의 <초우>(1966)
감독 정진우 / 출연 신성일, 문희, 트위스트 김, 전계현
“차이코프스키를 좋아하는 분이 사람을 그렇게 패세요?” 음악감상실에서 영희(문희)에게 집적대는 남자들을 제압하는 철(신성일). 이어서 그는 외제차 안에서 고상한 음악가를 들먹이며 영희를 유혹한다. 배우 신성일의 도시적인 매력으로 문을 연 <초우
시대의 얼굴, 감독의 페르소나 신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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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큰 별 신성일이 향년 81살로 생을 마감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의 영화 인생을 기념하는 회고전과 특별 전시가 성공적으로 치러졌고, 올해 10월 역시 예의 세련되고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영화제를 방문했던 그의 모습을 보았기에 지난 11월 4일의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은 영화인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사실 그는 지난해 6월부터 폐암 말기의 투병 생활을 견뎌오고 있었다. 한국 미남의 대명사였고,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스타였지만 결국 한 인간으로서 병마를 이기지는 못했던 것이다.
한국영화, 아니 한국의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넓혀 보아도, 신성일(申星一) 만큼 ‘별’(星)이라는 이름값에 걸맞은 완벽한 이력과 최고 수준의 행보를 보인 이가 있을까. 그는 1960년대 초반 청춘영화의 아이콘으로 등극한 뒤 1970년대까지 20년 동안 최고 스타의 자리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이는 객관적 수치로도 증명되는데, 1960년대 그의 한해 출연작은 무려 50편에
한국영화 최고의 스타 고 신성일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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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손등에 올라온 발진이 쉬이 가라앉지 않아 조금 겁을 먹고 병원을 찾았다. 나이 지긋한 의사 선생님은 대상포진을 걱정하며 호들갑을 떨던 나를 진정시키면서 그저 접촉성 피부염일 뿐이라고 약을 바르면 금방 괜찮아질 거라며 웃어 보였다. 지난 몇주간 만진 거라곤 노트북과 외장하드 밖에 없는데 대체 어디에서 무엇에 감염된 건지 알 수 없던 나는 다시 한번 오랜 피로 누적을 들먹이며 대상포진 의심을 시도했다. 하지만 인내심까지 많은 상냥한 선생님은 손을 너무 자주 씻거나 심한 미세먼지에 노출되는 등 다양한 요소가 원인이 될 수 있다며 혹시 출퇴근길에 공사 중인 곳이 있냐고 물었다. 생각해보니 편집실 근처에 두개의 큰 빌딩이 한참 올라가는 중이었고, 며칠 전부터는 하수도 공사까지 시작해 가까운 길을 두고 한참을 돌아가고 있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버스 정류장에 내려 걸어가는 도중에도 신축 빌라와 상점들이 생겨나고 있었네. 정류장 앞도 무슨 일인지 잔뜩 파헤쳐지고 있었고. 가만있자
서울은 공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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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재개봉하는 <페르세폴리스>는 마르잔 사트라피 감독의 자전적 그래픽노블에 움직임을 부여한 핸드드로잉 애니메이션이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기에 유년을 보내고 우여곡절 끝에 유럽으로 이주한 마르잔(키아라 마스트로이안니)의 성장기는 독특한 ‘액자’에 담겨 있다. 영화는 안정에 도달한 현재의 주인공이 타인에게 들려주는 향수 어린 추억담이 아니라, 여전히 불안과 결핍을 안고 사는 마르잔이 담배를 피우며 빠지는 회상이다. 그의 부모와 할머니는, 젠더 불평등이 만연한 폐쇄 사회에서 딸이 행복할 수 없음을 확인하자, 딸을 변화시키는 대신 떠나보냈다.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라며. 그리움에 공항까지 온 마르잔은 차마 테헤란행 티켓을 사지 못하고 대합실에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동시에 화면에서는 색채가 사라진다. 결말 즈음 영화가 다시 현재로 복귀하면 우리는 마르잔이 파리 공항에서 덧없이 보내는 하루가 이번이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짐작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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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평생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