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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내레이션을 맡은 배우 기키 기린의 목소리로 이따금 반복되는 이 문구는 영화가 보여주는 삶의 철학을 요약한다. 다큐멘터리 <인생 후르츠>는 오랫동안 자연과 융화된 삶을 일궈온 주인공들의 삶 속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아이치현 가스가이시 고조지 뉴타운의 어느 단층 주택에 90살 쓰바타 슈이치와 87살 히데코 부부가 산다. 슈이치는 오랫동안 건축가로 일하며 과거 고조지 뉴타운 개발 계획에 참여했으나 중도에 손을 떼고 슬로 라이프로 선회한다. 아내와 40년째 꾸려온 공간은 슈이치가 펼치고자 한 이상적 건축관이 고스란히 새겨진 소우주다. 정원에서 자라는 120종의 채소와 과일에는 그가 손수 만든 노란 푯말이 여기저기 꽂혀 있다. 이름 아래에는 ‘죽순아 안녕!’, ‘기다려집니다’와 같은 정다운 환영 인사도 빼놓지 않는다. 목마른 작은 새들을 위해 마련한 수반과 배달원을
<인생 후르츠> 오래 익을수록 인생은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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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밤 소녀 안나가 실종된다. 과거 무고한 사람을 폭탄테러범으로 몰았던 전례가 있는 전국구 형사 보겔(토니 세르빌로)은 폐쇄적인 산골 마을에 도착해 안나의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하고, 언론을 이용해 대중이 소녀의 실종에 관심을 가지도록 사건의 판을 키운다. 그 과정에서 6개월 전 가족과 함께 마을에 이사 온 마티니 교수(아레시오 보니)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물증이 나오지 않자 보겔은 증거 조작으로 마티니를 체포하고, 사건이 종결되나 싶은 순간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빨강 머리 10대 소녀 실종사건이 여럿 있었고, 그것이 ‘안개 남자’의 소행일 거라고 주장하는 기자가 나타난 것이다. 사건은 그렇게 다시 미궁 속으로 빠진다.
“위대한 작가의 첫 번째 원칙은 카피다.” “희생양을 찾아야 한다. 가급적이면 결백한 사람으로. 모두가 그를 의심해야 한다.” 마티니 교수가 강의 도중 학생들에게 하는 이 말에 안나를 납치한 범인을 추적할 만한
<안개 속 소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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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라인>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강렬한 푸른 섬광으로 인간의 정신을 잃게 만드는 외계 종족의 횡포가 지구를 장악한다. 이들은 인간의 뇌를 추출해 종족 번식과 유지에 활용하는데, 일단 긴 촉수를 뻗어 머리를 낚아챘다 하면 뇌를 빼내는 건 일사천리다. 전작인 <스카이라인>(2010)이 졸지에 외계 생명체에 붙잡힌 연인의 악몽을 그렸다면, 속편은 서사의 동력으로 부성애를 택했다. 아내를 잃은 전직 형사인 마크(프랭크 그릴로)가 아들 트렌트(조니 웨스턴)와 함께 외계 함선에 빨려 들어가고, 그는 곧 아들을 구하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
<스카이라인2>는 자극적인 이미지로 잠시 눈길을 끈다. 인간의 신체를 무자비하게 갈라놓는 외계 생명체의 만행은 경악스럽고, 외계 종족과 함선은 그 디테일만 떼어놓고 보면 꽤 훌륭한 CG 기술을 자랑한다. 초저예산 SF영화임을 고려하면 준수한 성과지만, 영화는 거기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스카이라인2&
<스카이라인2> 강렬한 푸른 섬광으로 인간의 정신을 잃게 만드는 외계 종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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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의 인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동명의 TV애니메이션이 극장판으로 탈바꿈했다. 올해 3월 종영한 TV애니메이션은 예능 프로그램 멤버인 유재석, 이광수, 송지효, 지석진, 김종국의 특징을 딴 동물 캐릭터로 사랑받았다. 종족을 대표해 런닝맨 챔피언십에 참가한 각각의 멤버들이 어느덧 의기투합해 지구 멸망을 막는다는 세계관이 바탕이다. 극장판 <런닝맨: 풀룰루의 역습>은 제목 그대로 풀룰루족의 등장이 핵심적이다. 풀룰루족의 부활을 런닝맨들이 방해했다고 믿는 제사장 아콩이 런닝맨 멤버들을 납치해 300년의 징역을 내린다. 이를 면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함정이 숨어 있는 복잡한 미로를 뛰어다니며 런닝맨 서바이벌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영화는 풀룰루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로를 헤매는 런닝맨들의 추격전으로 이뤄진다. 어린이들의 집중력이 흐트러질 때쯤 매번 새롭게 스테이지가 갱신되는 게임의 리듬이 지배적이다. 경쾌한 색채, 점점 강도를 더해가는
<런닝맨: 풀룰루의 역습> 미로를 헤매는 런닝맨들의 추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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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8년 3월 프랑스 북부 지역. 독일군의 전면 공격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무렵, 신임 장교 롤리(에이사 버터필드)가 이곳에 도착한다. 롤리는 친분이 있는 스탠호프 대위(샘 클라플린)와 함께 근무하고 싶다며 최전방 격전지로 자진해서 들어간다. 전장에서 만난 스탠호프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그는 전쟁의 공포를 술로 버티고 있다. 그런 스탠호프가 의지하는 장교는 건강하고 인간적인 오스본 중위(폴 베타니). 한편 롤리가 최전방에 도착한 다음날, 독일군 참호를 기습 공격하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기습 공격에 나설 장교 두명으로 오스본과 롤리가 지목되고, 스탠호프는 자신이 아끼던 이들을 전장으로 보내야 하는 상황에 고통스러워한다. <저니스 엔드>는 최전방 참호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했던 병사들의 최후 4일을 기록한 전쟁영화지만, 전쟁영화에 으레 등장하는 클리셰가 없다. 영웅시되는 인물도 없고, 화려한 전투 신도 없고, 눈물겨운 전우애도
<저니스 엔드> 최전방 참호에서 불안에 떨던 병사들의 최후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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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신민재)는 성실한 퀵서비스 기사다. 작은 무역회사인 삼진물산에 물건을 배달할 때마다 자신을 환하게 대해주는 다영(이호정)에게 눈길이 간다. 근무시간에 딴짓하기 좋아하는 삼진물산 직원들은 다영에게 일을 미루기만 한다. 조직 생활이 여전히 서툰 다영은 늘 일에 치여 살지만 밤을 새는 한이 있더라도 책임감 있게 맡은 일을 처리한다. 그나마 귤을 건네고 반갑게 인사하는 퀵서비스 기사 민재로부터 작은 위안을 받는다. 사장의 딸이자 삼진물산의 실세인 하람(강하람)은 특별한 이유 없이 다영을 싫어하고, 직원들과 공모해 다영에게 ‘굉장히 어려운 일’을 맡겨 다영을 괴롭히려고 한다. 민재는 다영에게 힘이 되어주기 위해 삼진물산에 입사한다.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의 흑백 무성영화처럼 오로지 인물의 행동과 표정으로 상황과 메시지를 전달한다. 다소 과장된 몸짓과 표정 덕분에 다영을 괴롭히는 삼진물산 직원들은 무척 얄밉고, 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다영은 안타까우며, 그런 다영을 위해 무엇이
<다영씨> 다영에게 힘이 되어주기 위해 삼진물산에 입사한 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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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공효진)은 은행에 다니며 오피스텔에서 자취를 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여성이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 그는 현관문의 도어록 덮개가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비밀번호를 바꾼다. 그날 밤 누군가가 경민의 집에 침입하려 한다. 경민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은 ‘사건이 터졌을 때만 도와줄 수 있다’며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그로부터 얼마 뒤, 경민의 집에서 낯선 사람의 흔적이 발견되고 의문의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자신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낀 경민은 직장 동료 효주(김예원)의 도움을 받아 직접 사건의 실체를 좇는다.
스페인영화 <슬립 타이트>가 원작이다. 그러나 한 여자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남자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원작과 달리, <도어락>은 스토킹을 당하는 여성의 심리와 그를 보호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취약한 안전망에 초점을 맞춘다. 도시에서 홀로 살아가는 여성인 경민에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공기처럼 익숙하다. 버스 정류장에서
<도어락> 혼자 사는 원룸에 누군가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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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도의 날>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사실을 확인하는 것.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그리고 항상 깨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국가부도의 날> 결말부에 깔리는 전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의 내레이션은 배우 김혜수 본인의 일상적 다짐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바쁘게 보고 듣는 이 배우의 습벽은 예술만을 대상으로 한정하지 않아서, 같이 읽고 싶은 기사 링크를 채팅창에 하도 자주 올리는 바람에 친구들이 피로를 호소할 정도다. 연기생활 30주년인 2016년 이후 <굿바이 싱글>(2016), 드라마 <시그널>(2016), <미옥>(2017)까지 우연히도 김혜수는 약자 혹은 다음 세대가 일단 무사히 어른이 될 수 있도록 그때까지 지켜주려는 인물을 연기했다. KBS <다큐 공감-김혜수의 난민일기>(2017)에서 난생처음 만난 난민 어린
<시그널>부터 <국가부도의 날>까지, 김혜수를 복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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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도의 날>은 복기하기 괴롭지만 직시해야 하는 진실을 들추는 영화다. 최근 대중문화 영역에서 90년대를 낭만적으로 회고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지만 수많은 실직자를 양산한 IMF 금융위기도 분명 그때 있었다. 더 나은 대책을 모색하는 충실한 논의를 거치지 않은 ‘급한’ 처방책이었다는 정당한 비판은, 여전히 교과서나 미디어에서 적극적으로 노출되지 않는 ‘비주류’이다. 여성 캐릭터가 이끄는 작품에 투자를 주저하는 한국영화계의 분위기 속에서도 위기를 감지하고 정부 관료와 맞서는 주인공 한시현(김혜수)을 여성으로 설정한 것은 이 프로젝트에 필연적이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영화제에서 엄성민 작가의 <국가부도의 날> 시나리오를 접한 후 이틀 만에 연락했다는 오효진 프로듀서, 연출 제안을 받은 후 몇 시간 만에 마음을 결정했다는 최국희 감독을 만나 영화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오효진 프로듀서는 2016년 <씨네21>과 인터뷰에서 “여자가 도
<국가부도의 날> 최국희 감독·오효진 프로듀서, "긴박했던 운명의 일주일에 동참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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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도의 날>은 패배의 이야기다. 한국은 국제금융 시장에서 신뢰를 잃었고, 한국은행 통화정책팀 한시현(김혜수)의 주장은 매 순간 재정국 차관(조우진)을 비롯한 정부 관료들에게 묵살당하고, 스테인리스 그릇을 만드는 소기업 사장 갑수(허준호)는 미도파백화점과 어음을 매개로 거래를 했다가 파산 위기에 처한다. 이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환율이 폭등해 주가가 떨어지고 부동산이 폭락할 때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마련한 윤정학(유아인)도 나라가 망하니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처지다.
이중 한시현은 ‘언더독’ 서사에 부합하는, 그래서 모든 관객의 지지를 받는 제1의 주인공이다. 그는 한국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외국 투자자들의 의심이 시작되면서 달러가 빠져나가자, 정부가 외환보유고를 투입해서라도 환율 방어에 나선 상황을 지적한다. 아무리 보고서를 올려도 위에서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듣지를 않는다. 경제 관료들이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후, 한시현은 다수 해외 투자자
<국가부도의 날>이 제기한 한국 사회의 시스템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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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초, 한국에서는 <타이타닉>(1997)으로 인한 외화 유출을 우려하며 불매 운동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타이타닉>이 흥행에 성공하자, 이 때문에 금 모으기 운동의 성과가 물거품이 됐다는 비판도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돌이켜보면 이는 IMF 금융위기의 원인이 서민들의 과소비에 있다는 당시 분위기가 불러일으킨 엉뚱한 자책이었다. <국가부도의 날>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나라가 국민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어쩌면 지금도 외면하고 있는 이야기를 전한다. IMF 구제금융 도입에 찬성하며 사태를 숨기기에 급급한 재정국 차관(조우진)에 맞서는 한국은행 통화정책팀 한시현 팀장(김혜수)의 주장은 실제로 1997년 당시 주류에게 묵살당한 소수의견이기도 한데, 주인공을 여성 캐릭터로 설정한 점이 <국가부도의 날>의 문제의식에 진득한 무게감을 더한다. 임수연 기자가 재능 있는 신인 작가의 시나리오를 발굴한 오효진 프로듀서, 영화를 연출한 최
1987에 이은 1997, <국가부도의 날>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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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전 세계 아니 전 우주의 생명체 절반을 먼지로 만들어버린 루소 형제 감독. 그 가운데 <어벤져스 4>(가제)의 메가폰도 잡은 그들이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 로키(톰 히들스턴)의 행방에 대해 언급했다.
크리스 에반스는 10월5일(이하 현지시간), 트위터를 통해 “<어벤져스 4>의 촬영이 공식적으로 종료됐다. 지난 8년간 캡틴 아메리카를 연기해서 영광이었다”며 작별 인사를 남긴 바 있다. 톰 히들스턴의 로키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빌런 타노스(조슈 브롤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상태.
루소 형제는 11월29일 와의 인터뷰에서 크리스 에반스의 트위터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이에 조 루소는 “그는 우리보다 더 감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 에반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He's not done yet.) 구체적으로는 말하기
<어벤져스 4>의 루소 형제 감독이 직접 밝힌 캡틴 아메리카와 로키의 행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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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영국 극장가에 오랜만의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지난 11월 16일 J. K. 롤링의 새 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이하 <그린델왈드의 범죄>)가 개봉 첫주 1232만파운드를 벌어들이며 영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는 개봉 첫 주말 중 2110만파운드를 벌어들인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 이은 올해 두 번째로 높은 흥행기록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저스티스 리그>와 <패딩턴2>가 선전했던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영국 박스오피스 매출이 20%가량 상승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11월에는 그 밖에도 <거미줄에 걸린 소녀> <후드> <너티버티 록스!> 등의 개봉이 예정되어 있어 극장을 찾을 영국 관객수는 계속 예년의 기록을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11월 영국 박스오피스 순위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작품으로는, 개봉 첫주 6위에 오른 <번
[런던] J. K. 롤링과 방탄소년단 영국 극장가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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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폴 버호벤 / 출연 엘리자베스 버클리, 카일 맥라클란, 지나 거손 / 제작연도 1995년
10년 전, <씨네21> 창간 13주년 기념 ‘1995-2008 영화 베스트10’ 선정에 참여한 적이 있다. 리스트를 채워갈 즈음, 한편의 영화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포함시키지 않았다. 얼마 후, 어느 영화제에서 만난 당시 <버라이어티>의 수석 평론가에게 그때 포함시키지 못했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맙소사, 난 그 영화를 항상 베스트10에 빼먹지 않고 넣는걸!” 폴 버호벤의 <쇼걸>은 내게 뼛속까지 부끄러운 길티 플레저였던 셈인데, 이후 “사실 나도 너무 좋아해”라며 속삭이는 사람을 만날라치면 그 은밀한 반가움과 동맹의식에 부들부들 기뻐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 대놓고 컬트의 명성을 갖게 된 <쇼걸>의 팬덤은 사실 수줍지도 조용하지도 않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개봉 당시 폴 버호벤-조 에스터하즈 콤비의 전작인 &
박진형 프로그래머의 <쇼걸> 뼛속까지 길티 플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