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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8일에 개봉한 영화 중에는 다큐멘터리가 무려(!) 다섯편이나 있다. 진재운 감독의 <위대한 비행>, 손석 감독의 <인피니트 콘서트 세컨드 인베이전 에볼루션 더 무비 3D>, 닉 스트링거 감독의 <아기 거북 토토의 바다 대모험>, 김형렬 감독의 <맥코리아>, 그리고 김재환 감독의 <MB의 추억>이 바로 그 영화들이다. 그런데 이 영화들의 면면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다큐멘터리’라는 다섯 글자가 품는 이 세상의 넓음과 다양함에 놀라게 된다.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를 현장 그대로 찍어왔다는 뜻인가 하면 자연의 위대함을 담아내는 작업을 의미하기도 하고, 사회, 정치 풍자를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아시아 다큐멘터리의 스펙트럼과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책이 바로 <허구가 아닌 현실: 아시아 다큐멘터리의 오늘>이다. 이 책을 펴낸 아시아 다큐멘터리 네트워크(이하 AND, 부산국제영화제 주관)는 다양한 아시아 다큐멘터리 영화
[도서] 아시아 다큐멘터리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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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하는 여자들의 그림책>의 원제는 ‘우리의 집들’(Nos Maisons)이다. 중세부터 20세기까지 그려진 그림(과 약간의 사진)들 속 생활공간 묘사를 분석한다. 254x235mm라는 넉넉하고 묵직한 책의 크기 덕에 그림 속 장면을 크게 만날 수 있음은 장점. 하지만 집에 대해 전문적이고 심도 깊은 분석을 담고 있지는 않다. 무심코 지나쳤던 명화 속 구석의 가구 하나하나가 말을 걸어온다.
유럽의 침대에 두터운 커튼을 친 이유를 아는 사람? 이 책에 따르면 “침대 주위로는 잠자는 사람들을 밤의 추위로부터 보호해주는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 있다. 차가운 바닥의 냉기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침대는 나무로 만든 단 위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침실은 바로 거실이었다. 집주인의 침대는 거실에 놓이곤 했다. 개인 공간은 없었고, 침실이 놓인 주변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지금의 거실과 같았다. 살롱(거실)이 발달하면서 침실은 비로소 사적인 공간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침실에서 시작해
[도서] 아 참 침대는 가구가 아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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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을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것도 있다. 돌아갈 수 없음, 회복할 수 없음, 돌파할 수는 더더욱 없음. 차라리 내가 망해버리는 편이 낫겠다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만이 남아 있을 때. <만>의 여주인공은 설마 자신이 그리 되리라고 상상할 일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부유한 친정집과 다정한 남편을 둔 스물네살의 그녀는 입학 자격이 까다롭지 않아 어른이든 아이든 맘대로 들어갈 수 있는 사립학교에 들어가 미술을 배운다(참고로 이 소설은 1928년작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그린 스케치에 대해 이상한 소문이 돈다. 그녀의 그림이 모델이 아닌 미쓰코라는 학생을 닮았다는 풍문으로, 교장이 그녀에게 ‘수상한 소문’을 추궁하기에 이른다. 친분이 전혀 없던 두 사람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수군거림 탓에 서로를 의식하게 되고 가까워진다. 처음에는 단순한 마음이었다. 돈 때문에 학생을 음해하는 교장에 대한 비웃음, 근거없는 말에 대한 코웃음. 설마 그 소문이 진짜가 될 줄은 몰랐지.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그저 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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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톡틱톡. 지난여름 베를린의 어느 동네를 걷던 중 어디선가 공 소리가 들려왔다. 축구 게임이라도 벌어졌나 싶어 가봤더니 ‘닭장’(사방이 철창으로 둘러싸인 동네 풋살 경기장.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다)에는 꼬마 둘뿐이었다. 둘은 1:1 대결이나 공을 주고받는 패스 게임을 하고 있지 않았다. 나란히 선 채 벽을 상대로 공을 차고 있었다. 한참을 지켜봤는데 그 놀이에는 나름 몇 가지 규칙이 있었다. 공을 한번만 터치해야 할 것. 공이 바닥에 닿지 않아야 할 것 등. 어른에게도 쉽지 않은 게임이었는데 둘의 호흡은 바르샤의 미드필드 이니에스타와 사비 못지않았다. <나는 축구선수다>에서 소개한 축구스타 반 페르시(맞다. 올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그 잘나신 아스널의 주장 말이다)의 어린 시절을 따라가다 보니 베를린에서 만난 두 꼬마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의 반 페르시 역시 위의 두 꼬마처럼 닭장에서 보냈다고 한다. 친구와 둘뿐이었을 때 그는 ‘골 투 골’이라는 특별한
[도서] 축구선수 어릴 적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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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의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이 출간되었다. 프롤로그를 통해 하드보일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맥락에서 힘을 발휘했는지를 짚은 뒤 한국에 출간된 많은 하드보일드 소설에 대한 리뷰를 실었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은 총 5개 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 ‘개 같은 세상, 그래도 외면할 수 없다’에서는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 톰 롭 스미스의 <차일드44>,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를 비롯한 소설들이, 2장 ‘악해져도 좋다 어떻게든 살아남아라’에는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 교고쿠 나쓰히코의 <우부메의 여름> 등이, 3장 ‘학교는 진실을 가르쳐주지 않는다’에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짐승의 길>, 대실 해밋의 <붉은 수확> 등이, 4장 ‘구차해도 좋다 자신만의 길을 가라’에는 제프리 디버의 <본 콜렉터>, 리 차일드의 <추적자>, 기리노 나쓰오의
[도서] 하드보일드 소설 독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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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소장용’이라고 부르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내용이 좋아서, 혹은 필요해서 두고두고 봐야 할 경우가 그 첫째, 물건으로서의 아름다움이 빼어나 애착을 갖게 된 경우가 두 번째, 작가에 대한 애정이 특별한 경우 등. 가장 좋은 경우는 그 모두가 이유일 때다. 국립예술자료원이 기획하고 수류산방이 펴낸 예술사구술총서(시리즈 1권은 한반도 르네상스의 기획자 박용구 편이었다) 다섯 번째 책 <박완서, 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가 그렇다. 소설가 박완서의 사진자료를 포함한 그의 인생의 매 순간에 대한 정리, 주변 사람들과의 교류, 사회활동까지를 정리했다. 집으로 더듬어보는 작품의 궤적과 딸 호원숙의 참고 구술도 실렸다. 어디까지나 구술을 기본으로 한 기록물이기 때문에 그 읽는 맛을 살리기 위해, 오른쪽 페이지에 구술이 흐르는 동안 왼쪽 페이지를 구술 내용과 연관된 각주로 처리했다. 예술사구술총서가 소장용으로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이 풍부한 각주 때문으로, 구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다시, 박완서를 읽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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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폰 트리에가 듣는다면 조금 서운해하겠지만 내게 있어 가장 위대한 ‘멜랑콜리아’는 진은영의 시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진은영, <멜랑콜리아>의 일부)라는 마지막 구절을 읽고서 몇번이나 그 구절을 소리내어 읽었던 경험이 아직도 생각난다. 다시 떠올려도 그건 가장 보편적인 서정이 슬픔과 우울에 대한 감정과 세계를 확장시키는 진귀한 경험이었다.
그녀의 새 시집 <훔쳐가는 노래>는 어떤 기억과 대상에 대한 가장 선명한 노래처럼 들린다. 여전히 그녀가 내려놓은 단어와 단어 사이, 행과 행 사이에 무수한 감정들이 쏟아지지만 이번 시집은 좀더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생생한 감정들이 뭉치고 흩어지면서 유려하게 흘러간다. “금지된 일터로부터 망명한 당신/ 다시 돌아가기 위해 26년을 기다리게 될 당신/ 이보오 올해가 그 마지막 해라오/ 힘을 내요 당신은 꼭 돌아가게 될 것이오.”(진은영, <Bucket List-시인 김남주가
[도서] 진은영의 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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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기에는 새로운 생활철학이 필요하다. 낭비를 줄이자는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큰 일부터 사소한 일까지 예산을 줄여서 전보다 훨씬 못한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구매활동이 자신이 처한 어려움에 대한 한탄과 비관, 스트레스로 이어지지 않게 하려면 가장 기본적으로 구매하고자 하는 마음부터 다시 정돈해야 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말부터 일본에서 살았다는 도미니크 로로의 <심플하게 산다>는 동양의 단순한 삶에 매혹된 서구인의 글인데, 그 시기가 일본 버블경제의 흥망성쇠를 정통으로 통과한, 그러니까 동양식 무절제가 낳은 비극을 목도한 시기임을 생각하면 다소 헛웃음을 웃게 되는 면은 있으나 ‘단순하게 살기’가 의미하는 만족의 중추를 다른 맛으로 길들이기 프로젝트가 발목부터 차오르는 불경기를 보다 참을 수 있을 만한 것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도미니크 로로는 물건, 몸, 마음의 관점에서 단순함을 논하는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필요 이상으로 탐하지 말라’ 정도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새로운 생활철학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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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연어낚시>는 정치풍자소설이고, 직장인을 위한 멜로드라마다. 후자에 대해 잠깐 설명하면, 직장인을 위한 멜로드라마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가 사랑할 수 없지만 관계를 끊을 수 없는 대상인 직장 상사와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발생한다. 상사 뒤에는 시스템이 버티고 있고, 아무리 논리적인 설득으로도 ‘보스’의 비이성적인 결단을 막을 수 없다는 데서 싹트는 인간적 비애가 공감의 원천이다.
주인공 알프레드는 영국 런던의 에너지기후변화부 산하 국립해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어느 날 그는 엄청난 자본을 보유한 의뢰인이 ‘연어를 예멘으로 가져가 그곳에 연어낚시를 소개하고 싶다’는 황당무계한 편지를 받는다. 황당한 이 제안을 외무부에서 밀어붙이면서 문제가 커져가더니, 윗사람은 국고보조금이 삭감된 마당에 민간부문에서 자금이 들어올 일을 마다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아내는 한달 생활비를 생각하면 사표는 말도 안된다고 잘라 말하고, 총리관저에서는 총리가
[도서] 풍자에서 감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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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초상>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에는 ‘지식인들’이라는 제목이 붙었고, 2부는 ‘기업가들’이라는 명제로 묶여 있다. 모든 이야기는 사실상 톈안먼 사태에서 시작하며, 그 이후 중국의 정신적 변화상이 1부, 물질적 변화상이 2부가 되는 셈이다. 각 부는 3장으로 이루어졌는데, 하나의 장은 한 사람의 이야기다. 베이징에서 나고 자라 톈안먼 사태 때 미국으로 건너가 지금은 영어로 중국에 관한 글을 출판하는 자젠잉은 이 책을 사적이고도 공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 책의 첫장은 바로 그녀의 배다른 오빠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일단 이것만은 말해두자. 2부에서는 대부분 입이 떡 벌어지는 성공담이 줄을 잇는다. 1980년 홍콩의 공장 조립라인에서 일하던 열네살 소녀가 2010년대에 들어 <포브스>가 발표하는 자수성가한 세계 10대 여성 부호에 이름을 올리는 중국식 성공신화다. 아마도 다시는 전세계 어디서도 반복될 수 없을, 미친 성장의 증거들이다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지식인들 그리고 기업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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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지는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가 우울하게 하는가. 천계영의 만화 <드레스 코드>는 후자인 사람을 위한 ‘리얼 변신 프로젝트’다. 나에게 맞는 옷이 아니라 매장에서 괜찮아 보이는 옷을 무턱대고 산 뒤 옷걸이에 처박아두는 사람에게 유용한 가이드다. <드레스 코드>는 어디에서 옷을 살 것인가부터 시작한다. 옷 사러 갔다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사이즈 보여드릴까요?”라고 묻고, 두어벌 입어보기도 전에 뭐 하나를 고르라는 종업원의 말에 스트레스받은 적이 있다면 SPA(기획, 제조, 유통까지 하는 의류 브랜드) 브랜드를 공략할 것. 가서 마음껏 입어보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통해 ‘어울리는’ 아이템을 찾을 것.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옷장 채우는 마법의 가게가 된 SPA 브랜드를 주목하라는 말이 식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어울리는’ 옷을 찾는 법에 대해서라면 얘기가 다르다. 매스컴이 아닌 내 몸을 패션 교본으로 삼는 일 말이다. 백날 새 옷을 사도 비슷해 보인다는 말을
[도서] 어울리는 옷 찾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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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작의 작가에겐 늘 의혹의 꼬리표가 붙기 마련이다. 1년에 서너권 이상의 작품을 말 그대로 ‘쏟아내는’ 일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작가생활 40년 동안 무려 980편의 저서를 집필한 괴물작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경우, 편집자들이 어림잡아 셈해봤더니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을 빼곤 늘 책상 앞에 붙어 있어야 가능한 작업량이었다고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 역시 이런 ‘의혹 클럽’에 가입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표지와 내용이 바뀔 뿐, 서점 신간 코너에 변함없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히가시노의 작품은 장르로는 추리물, 서스펜스, 학원물, 소재로는 수학, 과학,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등을 넘나들며 독자들의 왕성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왔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번 신작은 그의 데뷔 25주년을 기념하는 <매스커레이드 호텔>이다. 히가시노의 작품을 둘러싼 모든 미스터리의 실마리가 사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가 각양각색의 사람이 몰려
[도서] 관계라는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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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에 대한 대표적인 부정적 편견은 그것이 ‘이 세계’의 일을 다루지 않는다는 데서 비롯한다. 외계인? 우주? 미래? 우리가 인간이나 지구, 현재도 제대로 못 보는 판국에? 하지만 한번만 생각해보라. 재벌 아들과 가난한 여자가 순수한 사랑으로 맺어져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는 어디가 현실적인가? 무대나 소재가 낯선 어휘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그 안에서 무엇을 느끼는가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말이다. SF장르를 대표하는 필립 K. 딕에 접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래서 상상력만큼이나 현실감각이다.
렌 와이즈먼 감독의 2012년판 리메이크 <토탈 리콜>과 폴 버호벤 감독의 오리지널 <토탈 리콜>과 그 작품들의 원작 소설(놀랍게도 단편이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를 나란히 놓고 들여다보면 사건의 시발점에서 느껴지는 현실감각이 흥미롭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에게는 이룰 수 없는 소원이 하나 있다. 그는 화성에 가고 싶다. 간절히. 밤 동안의 욕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불만 만땅!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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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면장갑을 끼고 넘겨야 할 것만 같은 책이 여기 있다. 인도 독립출판사 타라 북스가 만든 <나무들의 밤>은 숲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온 인도 중부 곤드족 출신 아티스트 세명의 작품을 엮은 수제 그림책이다.
‘환상적 수목도감’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 그림책은 열아홉 그루의 나무가 짐승과 인간, 우주의 생명을 보듬는 이야기다. 지난 16년간 민속 예술과 민담을 작가와 아티스트, 수제본 장인들의 협업을 통해 핸드메이드 북에 담아온 타라 북스는 공정무역 관행을 준수하는 노동자 공동 소유 출판사다.
타라의 다른 책처럼 <나무들의 밤>은 코뮌 생활을 하는 장인 14명의 손끝에서 태어났다. 버려진 천과 마포, 꽃으로 만든 재생지를 천연염색한 다음 일일이 세 아티스트의 작품을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내고 수작업 제본한 이 책은 각 권이 세상에서 유일한 판본이어서, 복제품이되 정결한 아우라를 두르고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사랑을 카피하다>(Certi
[도서] 아름다움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