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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은 소설가 한강이 12년 만에 펴낸 중•단편 소설집이다. 그간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등 주로 장편소설로 독자들을 찾았던 그녀이기에 이번에 출간된 <노랑무늬영원>이 더 반갑다. 계간지에 발표했었던 단편 6편, 중편이자 표제작 <노랑무늬영원>을 엮은 이 책은 줄곧 한강의 작품을 관통하던 상처와 회복 사이의 고민을 전면에 드러내 보인다. 특히 첫 작품 <회복하는 인간>과 마지막 작품 <노랑무늬영원>에서 그 고민은 더욱 도드라진다. 먼저 <회복하는 인간>은 우연히 입은 화상을 치료하면서 언니와의 관계와 언니의 죽음으로 비롯된 마음속 상처를 바라본다. 표제작 <노랑무늬영원>은 교통사고로 손을 다쳐 더이상 붓을 들 수 없게 된 화가 현영의 갈등과 좌절을 이야기한다. 두 작품 모두 물리적 상처와 회복을 통해서 내면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셈이다. 이는 같이 수록된 <왼
[도서] 상처와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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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리 해고로 직장을 잃었지만 꿈이 있어 행복하다’ 혹은 ‘나는 불치병에 걸려 삶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행복하다’라는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고, 강상중은 <살아야 하는 이유>에 썼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만 찾기 힘든 것은 아니다. 그런 말을 믿는 사람도 찾기 힘들기는 매한가지다. 자신과 타인의 행복의 키를 재려니 언제나 객관적으로 보이는 수치라는 기준이 필요하다. 집은 몇평, 연봉은 얼마, 결혼 여부와 자녀 유무(나아가 자녀의 학업 성취도), 차종, 키와 몸무게, 집안, 배우자의 집안… 이것저것 다 있다 해도 취향이 구리면 실망.
내가 안간힘을 써서 그 기준을 맞추고 있으니 타인도 그 기준에 맞춰 살고자 마땅히 불행할 정도로 노력해야 한다. 직업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고 있다니 그러면 직업 때문에 원형탈모가 생기고 얼굴 피부가 다 뒤집어진 나는 어쩌라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줘, 내게 있는 직업이 네게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응답하라, 불행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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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사랑하는 이라면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숙제 같은 이름이 있다. 앨프리드 히치콕,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같은 거장들이 남겨놓은 방대한 양의 숙제들. 반드시 봐야만 한다고들 하는 그 수많은 걸작영화들. 그들의 작품을 보고 반한 이는 물론이고 그들의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그들이 남겨놓은 족적을 훑지 않고는 현대영화를 이해할 수 없다. 마틴 스코시즈도 그중 하나다. 설사 그의 작품을 한편도 보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름을 모를 수 없는 위대한 영화감독, <마틴 스코세이지와의 대화>는 비단 그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연서일 뿐만 아니라 그를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다.
그 누구도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마틴 스코세이지와의 대화>를 읽고 나면 마틴 스코시즈라는 사람의 전체적인 윤곽이 만져진다. 이는 온전히 인터뷰어인 리처드 시켈의 역량이다. 저 유명한 히치콕과 트뤼포의 대화처럼 좋은 인터뷰란 질문하는 자와 받
[도서] 인간 마틴 스코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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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커 버스커의 <여수 밤바다> 첫 소절, 가사를 바꿔 불러보자. “소설 <은수저>, 이 소설에 담긴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주고파.” 어떤 책은 쓰일 때 의도한 적 없는 전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나카 간스케는 1885년에 태어났고 대학 시절 나쓰메 소세키의 문하생으로 글을 썼는데, 1913년에 나쓰메 소세키의 추천으로 첫 소설 <은수저>를 <아사히신문>에 연재할 기회를 얻었다. 후일 나카 간스케는 당시를 회상하며 돈에 쪼들려 글을 팔았다며 자책하고 시(詩)에 대한 애정을 고백했단다. <은수저>는 집 안 오래된 책장 서랍 안에 든 작은 상자에서 시작한다. 그 안에는 별보개고둥이며 동백나무 열매,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자질구레한 것들이 가득 들어 있는데 그중에는 진귀한 모양의 은수저가 들어 있다. 나카 간스케는 작은 수저로 바다처럼 깊고 끝없는 유년기의 추억을 한 수저씩 길어올린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천천히 읽기를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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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쉼없이 걸었다. 롯폰기힐스의 모리타워에서 시작해 쓰타야 서점을 거쳐 그의 숙소가 있는 아카사카까지 걸어갔다. 별별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쓰고 있는 중인 책, 빨리 차기작을 만들어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 그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 여행 등. 그중 도쿄에 도착하기 전 여행했던 루모이라는 동네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유독 즐거워 보였다. 루모이? 일본 최북단의 삿포로에서 기차로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항구 마을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바다 건너편의 러시아 대륙이 보인다나. 그때 그는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머리가 무거워서 다녀왔어요. 그곳에 갔더니 마을이 참 평화롭고 조용해서 좋았어요. 덕분에 복잡한 생각을 조금이나마 정리할 수 있었어요.”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복잡하게 엉켜 있던 무언가를 길에서 정리하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이것은 지난해 이맘때쯤, 단편 <폴라로이드 작동법>, 장편 데뷔작 <조금만 더 가까이>를 만든 김종관 감독과 도쿄에서 우연히
[도서] 버려진 시간에 다시 기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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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는 1993년부터 96년까지 <팔루카빌>이라는 만화 시리즈를 작업했다. 이번에 번역출간된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는 그 <팔루카빌> 시리즈의 에피소드 일부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코믹스 저널>에서는 ‘20세기 코믹스 베스트 100’을 꼽으면서 이 작품을 52위에 올렸다. 주인공과 작가의 이름이 같은 것은 그들이 사실 동일인이기 때문이다. 북미에서 자전적 코믹스들이 등장한 1990년대의 인기 작가 중 하나인 세스는 만화에서 주변인들을 등장시켜 사실성을 더했는데 <너 좋아한 적 없어>의 체스터 브라운도 세스와 절친한 동료 만화가다. 주인공 세스는 만화를 좋아한다. 그것도 옛날 <뉴요커>에 실렸던, 지금은 구하기 힘들고 작가 이름도 이제는 잊혀진 그런 만화들을 좋아한다. 그러다 한 작가, 캘로에게 매혹된다.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이제는 작품을 구해보기도 힘든 그 작가가 사망한 도시가 세스 자신이 유년기를
[도서] 당신,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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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장사의 신>인 이 책은 이자카야 체인을 여럿 거느린 우노 다카시의 요식업 성공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다. 스탭들은 모두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그의 원칙은 ‘사원은 모두 독립시킨다’라고 한다. <장사의 신>을 보면 그가 독립시킨 사원들의 신규 매점을 두고 메뉴니 하는 것들을 시시콜콜 같이 고민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사장님이 아닌 아버지라는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장사 기술의 전수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책의 조언을 듣고 있자면 꼭 요식업을 하겠다고 작정한 사람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고 타인을 상대로 한 장사(어떤 의미에서는 잡지를 만들어 파는 일도 큰 의미에서 접객업 아닐까?)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알아두면 좋을 철학과 잔기술이 고루 들어 있다. 이런 충고 어떤가. “어떤 때라도 경영자나 점장이 절대 입에 담아선 안되는 건 ‘한가하다’는 말, 바로 이 한마디야. 이건 친구끼리라도 말해선 안돼.” 특이한 메뉴 이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성공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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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8일에 개봉한 영화 중에는 다큐멘터리가 무려(!) 다섯편이나 있다. 진재운 감독의 <위대한 비행>, 손석 감독의 <인피니트 콘서트 세컨드 인베이전 에볼루션 더 무비 3D>, 닉 스트링거 감독의 <아기 거북 토토의 바다 대모험>, 김형렬 감독의 <맥코리아>, 그리고 김재환 감독의 <MB의 추억>이 바로 그 영화들이다. 그런데 이 영화들의 면면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다큐멘터리’라는 다섯 글자가 품는 이 세상의 넓음과 다양함에 놀라게 된다.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를 현장 그대로 찍어왔다는 뜻인가 하면 자연의 위대함을 담아내는 작업을 의미하기도 하고, 사회, 정치 풍자를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아시아 다큐멘터리의 스펙트럼과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책이 바로 <허구가 아닌 현실: 아시아 다큐멘터리의 오늘>이다. 이 책을 펴낸 아시아 다큐멘터리 네트워크(이하 AND, 부산국제영화제 주관)는 다양한 아시아 다큐멘터리 영화
[도서] 아시아 다큐멘터리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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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하는 여자들의 그림책>의 원제는 ‘우리의 집들’(Nos Maisons)이다. 중세부터 20세기까지 그려진 그림(과 약간의 사진)들 속 생활공간 묘사를 분석한다. 254x235mm라는 넉넉하고 묵직한 책의 크기 덕에 그림 속 장면을 크게 만날 수 있음은 장점. 하지만 집에 대해 전문적이고 심도 깊은 분석을 담고 있지는 않다. 무심코 지나쳤던 명화 속 구석의 가구 하나하나가 말을 걸어온다.
유럽의 침대에 두터운 커튼을 친 이유를 아는 사람? 이 책에 따르면 “침대 주위로는 잠자는 사람들을 밤의 추위로부터 보호해주는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 있다. 차가운 바닥의 냉기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침대는 나무로 만든 단 위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침실은 바로 거실이었다. 집주인의 침대는 거실에 놓이곤 했다. 개인 공간은 없었고, 침실이 놓인 주변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지금의 거실과 같았다. 살롱(거실)이 발달하면서 침실은 비로소 사적인 공간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침실에서 시작해
[도서] 아 참 침대는 가구가 아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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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을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것도 있다. 돌아갈 수 없음, 회복할 수 없음, 돌파할 수는 더더욱 없음. 차라리 내가 망해버리는 편이 낫겠다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만이 남아 있을 때. <만>의 여주인공은 설마 자신이 그리 되리라고 상상할 일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부유한 친정집과 다정한 남편을 둔 스물네살의 그녀는 입학 자격이 까다롭지 않아 어른이든 아이든 맘대로 들어갈 수 있는 사립학교에 들어가 미술을 배운다(참고로 이 소설은 1928년작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그린 스케치에 대해 이상한 소문이 돈다. 그녀의 그림이 모델이 아닌 미쓰코라는 학생을 닮았다는 풍문으로, 교장이 그녀에게 ‘수상한 소문’을 추궁하기에 이른다. 친분이 전혀 없던 두 사람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수군거림 탓에 서로를 의식하게 되고 가까워진다. 처음에는 단순한 마음이었다. 돈 때문에 학생을 음해하는 교장에 대한 비웃음, 근거없는 말에 대한 코웃음. 설마 그 소문이 진짜가 될 줄은 몰랐지.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그저 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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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톡틱톡. 지난여름 베를린의 어느 동네를 걷던 중 어디선가 공 소리가 들려왔다. 축구 게임이라도 벌어졌나 싶어 가봤더니 ‘닭장’(사방이 철창으로 둘러싸인 동네 풋살 경기장.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다)에는 꼬마 둘뿐이었다. 둘은 1:1 대결이나 공을 주고받는 패스 게임을 하고 있지 않았다. 나란히 선 채 벽을 상대로 공을 차고 있었다. 한참을 지켜봤는데 그 놀이에는 나름 몇 가지 규칙이 있었다. 공을 한번만 터치해야 할 것. 공이 바닥에 닿지 않아야 할 것 등. 어른에게도 쉽지 않은 게임이었는데 둘의 호흡은 바르샤의 미드필드 이니에스타와 사비 못지않았다. <나는 축구선수다>에서 소개한 축구스타 반 페르시(맞다. 올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그 잘나신 아스널의 주장 말이다)의 어린 시절을 따라가다 보니 베를린에서 만난 두 꼬마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의 반 페르시 역시 위의 두 꼬마처럼 닭장에서 보냈다고 한다. 친구와 둘뿐이었을 때 그는 ‘골 투 골’이라는 특별한
[도서] 축구선수 어릴 적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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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의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이 출간되었다. 프롤로그를 통해 하드보일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맥락에서 힘을 발휘했는지를 짚은 뒤 한국에 출간된 많은 하드보일드 소설에 대한 리뷰를 실었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은 총 5개 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 ‘개 같은 세상, 그래도 외면할 수 없다’에서는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 톰 롭 스미스의 <차일드44>,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를 비롯한 소설들이, 2장 ‘악해져도 좋다 어떻게든 살아남아라’에는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 교고쿠 나쓰히코의 <우부메의 여름> 등이, 3장 ‘학교는 진실을 가르쳐주지 않는다’에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짐승의 길>, 대실 해밋의 <붉은 수확> 등이, 4장 ‘구차해도 좋다 자신만의 길을 가라’에는 제프리 디버의 <본 콜렉터>, 리 차일드의 <추적자>, 기리노 나쓰오의
[도서] 하드보일드 소설 독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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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소장용’이라고 부르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내용이 좋아서, 혹은 필요해서 두고두고 봐야 할 경우가 그 첫째, 물건으로서의 아름다움이 빼어나 애착을 갖게 된 경우가 두 번째, 작가에 대한 애정이 특별한 경우 등. 가장 좋은 경우는 그 모두가 이유일 때다. 국립예술자료원이 기획하고 수류산방이 펴낸 예술사구술총서(시리즈 1권은 한반도 르네상스의 기획자 박용구 편이었다) 다섯 번째 책 <박완서, 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가 그렇다. 소설가 박완서의 사진자료를 포함한 그의 인생의 매 순간에 대한 정리, 주변 사람들과의 교류, 사회활동까지를 정리했다. 집으로 더듬어보는 작품의 궤적과 딸 호원숙의 참고 구술도 실렸다. 어디까지나 구술을 기본으로 한 기록물이기 때문에 그 읽는 맛을 살리기 위해, 오른쪽 페이지에 구술이 흐르는 동안 왼쪽 페이지를 구술 내용과 연관된 각주로 처리했다. 예술사구술총서가 소장용으로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이 풍부한 각주 때문으로, 구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다시, 박완서를 읽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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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폰 트리에가 듣는다면 조금 서운해하겠지만 내게 있어 가장 위대한 ‘멜랑콜리아’는 진은영의 시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진은영, <멜랑콜리아>의 일부)라는 마지막 구절을 읽고서 몇번이나 그 구절을 소리내어 읽었던 경험이 아직도 생각난다. 다시 떠올려도 그건 가장 보편적인 서정이 슬픔과 우울에 대한 감정과 세계를 확장시키는 진귀한 경험이었다.
그녀의 새 시집 <훔쳐가는 노래>는 어떤 기억과 대상에 대한 가장 선명한 노래처럼 들린다. 여전히 그녀가 내려놓은 단어와 단어 사이, 행과 행 사이에 무수한 감정들이 쏟아지지만 이번 시집은 좀더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생생한 감정들이 뭉치고 흩어지면서 유려하게 흘러간다. “금지된 일터로부터 망명한 당신/ 다시 돌아가기 위해 26년을 기다리게 될 당신/ 이보오 올해가 그 마지막 해라오/ 힘을 내요 당신은 꼭 돌아가게 될 것이오.”(진은영, <Bucket List-시인 김남주가
[도서] 진은영의 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