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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남루한, 직업은 (야설)작가. 통장잔고는 3320원에 월세는 5개월치가 밀려 있다. 전직 (에로)영화 감독으로 지금은 인터넷 (성인)사이트 운영자인 그의 지인의 해설에 따르면 루한씨가 야설작가가 된 것은 이름에서부터 운명지어진 것으로, “네가 남씨이기 때문에, 네 이름은 ‘남자의 크고 넓은 봉우리’를 뜻하는 거야. 너야말로, 이 시대의 짓밟히고 억눌리고 초라해진 남성들의 봉우리를 다시 ‘크고 넓고 거대하고 굵직하게’ 일으켜 세울 사명을 띠고 이 땅에 보내진 인물이란 말이야.” 하지만 그를 이렇게 소개할 수도 있겠다. 조만간 소설집을 계약할 예정인 등단 작가.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삼촌이라고 부르며 한 남자를 소개한다. 그리고 루한은 삼촌이라 불리는 정신병자이자 전 세계챔피언 복서이자 매미 애호가, 그러니까 매미 에너지 연구는 20년, 복싱은 8년 하고 무도(<무한도전> 말고 舞蹈) 인생은 3년을 보낸, 어딘가 허경영을 연상시키는 공평수의 자서전을 쓰는 일을 맡게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구라의 능력자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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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을 보면 당연히 그 안의 내용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마련이다. 소설가 고종석의 새 장편소설 <해피 패밀리>는 제목의 ‘해피’라는 단어 때문에 오히려 ‘언해피’한 가족의 이야기가 먼저 그려지는 책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상이 맞았다. <해피 패밀리>는 핏줄로 이어져 있기에 어떤 타인보다 가까울 수밖에 없으나 그러기에 더 잔인한 ‘가족’의 허상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가족 구성원의 이름을 딴 챕터로 나뉘어 있다. 한민형, 한진규, 민경화 등 가족 구성원은 각자 자신의 이름을 딴 챕터 안에서 개인의 사연을 풀어놓는다. 모두의 사연을 모아 완성된 하나의 이야기는 개인의 초상화를 모아 만든 기이한 가족사진이 되는데 재밌는 것은 사진이 완성될 때 이 가족이 품은 비밀 또한 실체를 드러낸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해피 패밀리>는 모든 이의 입을 빌려 최후의 진실까지 달려나가게 만드는 서사구조가 매력적인 소설이다.
등장인물들이 털어놓는
[도서] 어쩌면 그의 마지막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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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남편들의 취미생활 중에 꽤 눈에 띄는 것이 바로 목공이다. 목공을 배우는 데는 몇 가지 이점이 있는데, 일단 집에서 탈출을 할 수 있으며 목공을 배운다는 이유는 탈출의 이유로 꽤 근사하다. 간단한 가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위한 작은 의자나 테이블, 책장, 안락의자(별로 안락해 보이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더라만), 심지어 스피커를 조립해서 그 케이스를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아내도 반대하지 않는 괜찮은 취미활동. 하다 보면 승부 근성이 생겨서 작업을 반복하면서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어내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일이 유독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던 날, ‘본격적으로 해서 아예 전업으로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으로도 이어지는 모양이다. 아내의 타박을 듣고 이내 포기하기 마련이지만. <젊은 목수들>은 목공이라는 취미를 직업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에게 솔깃할 만한 책이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태어난, 그야말로 젊은 목수들의 인터뷰를 실은 이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목수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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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은 간 때문일까? 생긴 것이 약 같고, 효능도 약과 똑같다고 광고하는 그것들을 믿어도 좋은가? 1일 3회 식후 30분을 못 지키면 약을 먹으면 안되나?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회원들이 쓴 <식후 30분에 읽으세요>는 약에 대한 다양한 궁금증을 해소해준다. 늙어도 살쪄도 작아도 피곤해도 약을 권하는 사회에서 똑똑하게 살아남는 법. 더불어 도덕과 과학이 충돌하는 임상실험에 관해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만들고 부자가 먹는다’ 장에서 문제제기한다.
약을 먹을 때 물을 얼마나 마셔야 한다고 알고 있는지? 혹시 TV드라마에서처럼 물 한 모금을 머금고 약 한줌을 꿀꺽 삼키는 게 전부는 아닌지? 약 복용의 기본은 가능하면 복용 간격을 일정하게 해서 물을 한컵 이상 마시는 것이다. 물을 적게 마셨다가는 알약이 제대로 위까지 가지 못하고 식도에 걸쳐서 녹기 때문에 식도에 자극을 주고, 그러다 보면 염증이 쉽게 생기고, 염증이 생기면 식도염 때문에 속이 불편해진다고 한다. 콜라나 주스와
[도서] 약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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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천재 예술가들의 삶을 다룬 콜린 윌슨의 비평서 <아웃사이더>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주목. <정신기생체>는, <아웃사이더>의 주제를 연장하되 거기에 SF라는 형식을 입히고 H. P. 러브크래프트풍 양념을 살짝 얹은(러브크래프트가 이 소설의 탄생에 어떻게 기여했는지에 관한 재미있는 스토리가 서문에 나와 있다) 작품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정신기생체>를 먼저 만난 SF 독자라면 이 소설과 이란성 쌍둥이 관계인 <아웃사이더>에 대한 호기심이 솟아날 것이다.
두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기계적이고 우리의 본질에서 먼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당신이라면 뭐라고 답하겠는가? 돈? 가족 혹은 타인? 사회구조? 철학과 심리학 전문가이면서 SF 애호가였던 윌슨은 두 가지 버전으로 흥미로운 대답을 내놓았다.
<정신기생체>는 꽤 독창적인 SF다. ‘인간
[도서] 우주적 정신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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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성생활을 하지만, 우리는 거의 예외없이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섹스’에 대해 이상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알랭 드 보통이 쓴 <인생학교 - 섹스>의 첫 문장이다. 왼쪽 페이지에 소개된 책과 키워드가 ‘섹스’로 일치하고 번역자도 같지만 두 책의 공통점은 그게 다다. 보통은 특유의 다소 학구적인 태도로, 우리 모두 섹스에 관해서라면 약간씩 이상한 면을 지니고 있는 게 당연하다는 사실을 여러 행위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시킨다. 때로 연애의 과정이 읊어지고 페티시즘이 도마에 오르지만, 섹시함의 의미(우리가 누군가의 옷차림을 보고 섹시하다고 말할 때, 그 말 속에는 그 옷을 입은 사람의 세계관이 마음에 든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거절당한다는 행위(거절을 ‘도덕적 판단’으로 생각해버리는 나쁜 버릇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발기불능까지 다루어진다(특정 문제 해결을 위해 유익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삽화가 한 페이지 크기로 실려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지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섹스를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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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파이어 유혹>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필두로 한 ‘그림자’ 시리즈 같은 에로티카 삼부작이다. 에로티카는 로맨스의 하위 장르인데, ‘그레이’ 시리즈 이전에는 엄밀히 말해 로맨스보다는 포르노에 더 가까운 인상이 짙은 장르이기도 했다. 애초에 여주인공이 처녀인 설정부터가 많지 않았다. 사랑뿐 아니라 섹스를 여자들이 소비한다(남자를 위한 에로티카/포르노와 다른 점은, 여자가 독자인 책에서는 가능하면 1대1 관계가 주를 이루지만 남자가 독자인 책에서는 여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20여년 전 교복 입은 소년들에게 판타지를 제공했던 도미시마 다케오 소설들이 대표적이다). ‘크로스파이어’ 삼부작을 쓴 실비아 데이는 미국에서 잘 알려진 로맨스 소설 작가로, EBOOK은 이미 한국에서도 판매순위 상위에 랭크되어 있다. EBOOK 시장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장르소설을, 무엇보다도 로맨스라는 장르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거대한 시장이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도서] “날 가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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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해, 류상욱은 문득 앙드레 바쟁을 언급하며 ‘데일리 크리틱’이란 말을 꺼냈다. 이어 바쟁이 뜻하는 바를 완전히 행하지는 못하더라도 매일 영화에 대한 글을 썼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필자처럼 게으른 사람은 꿈도 못 꿀 일이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암을 선고받고 한해를 넘긴 이가 바로 내 앞에서 태연하게 했던 말이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도 류상욱은 성실하게 글을 한편씩 써나갔고, 그런 글들이 모여 한권의 책이 출간됐다. 2007년, 류상욱은 가족과 함께 홀연히 싱가포르로 떠났다. 그리고 ‘익스트림무비’라는 웹진에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정성일 선생의 추천으로 월간지 <키노>에 썼던 글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글이었다. ‘한국에 영화학이 있는가?’라고 호기롭게 질문하던 때는 자연스레 사라졌고, 어느새 그는 영화와 자유롭게 대면하고 글은 유연하게 푸는 시기에 도달했다. 수도승이 면벽하며 자신의 화두와 싸우듯이, 그는 오로지 영화와 마주해
[도서]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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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여주인공 수정은 부잣집 아들 재민과 동거하는 중에 그의 약혼녀가 일하는 곳이자 그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화랑에서 일한다. 재민은 물론, 수정을 좋아하는 인욱도 그녀에게 “거기 꼭 나가야겠어? 오기야 자존심이야”라며 그만둘 것을 종용한다. 수정은 두 남자가 화를 내건 달래건 듣지 않는다. 재민의 재력도 인욱의 학벌도 갖추지 못한 그녀에게, 팁으로 먹고사는 노래방 도우미 같은 아르바이트가 전부이던 그녀에게, 전화받고 청소하고 은행 심부름이나 가끔 하면서 한달에 백만원이 보장되는 일자리는 자존심 ‘따위’로 그만둘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한승태의 <인간의 조건>을 읽다가 그 장면이 생각났다. <인간의 조건>은 단순히 일이 힘드네 박봉이네 하는 표현으로 묘사될 수 없는, 드라마 속 수정의 일자리와도 퍽이나 다른 몇몇 일자리에 관한 체험보고서다.
진도에서 꽃게잡이를 한 것을 비롯해, 서울의 편의점과 주유소, 아산의 돼지농장,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꽃게잡이 배를 타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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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띠지에 쓰인 광고문구를 빌리면 ‘30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마스다 미리의 만화 3권이 나란히 출간되었다. 30대 미혼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는 인기에 힘입어 시바사키 고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고, 독신주의라고 불리는 고모와 엄마를 바라보는 소녀의 이야기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그리고 과감히 시골로 이사간 하야카와와 그녀의 두 친구들(혹시 궁금하다면 말이지만 모두 여자다) 이야기를 그린 <주말엔 숲으로>가 그 책들이다. 이 만화의 등장인 물을 저 만화에서 만나게 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별개의 이야기들. 물론 별개라고는 해도 결국 다 겹쳐 보이는 30대 언저리 여자들의 일상 이야기다.
마스다 미리는 어디까지나 여자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아주 예민하고 까칠하고 때로 지저분하기까지 한 일상의 순간을 드러내 보여준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에서 어린 소녀는 고모와 엄마가
[도서] 손끝만 보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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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 <배가본드>의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건축가 가우디의 자취를 찾아 길을 밟는 여정. 한권의 책과 75분짜리 DVD가 묶여나왔고, 초판에는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스케치로 만든 달력이 함께 증정된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팬에게 특히 의미있을 <페피타>는 그의 글(그가 그린 한글도 있다)과 스케치, 사진과 상념을 두루 경험할 수 있는 화집이다. 한 작가가 다른 작가의 모든 것을 궁금해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생중계한다. 일단 한 가지.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팬이 아니라면, 혹여나 바르셀로나 여행에 대한 정보를 중심에 두고 책을 찾고 있다면 <페피타>는 부족함이 적지 않은 책이다. 꽤 듬성듬성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가우디에 관해 가볼 만한 장소와 만나볼 만한 사람, 각 장소에 대해 해설해줄 사람을 돕는 코디네이터가 있었던 모양인데 그 설명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그곳에서 느낀 것들을 가감없이
[도서] 가우디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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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키우는 이들이라면 아마 공감할 거다. 어느 날 책장을 돌아보니 고양이 서적이 차곡차곡 들어서고 있다는 걸. 책이 모이는 이유는 다양하다. 고양이 집사로서의 무지를 탓하며 사거나, 남의 집 고양이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사거나, 때로는 그냥 예쁜 사진이 들어 있어서라도 산다. 그런데 주위를 돌아보면 유독 개 집사보다 고양이 집사들이 이렇게 책을 모은다(확인되지 않은 짐작이므로 애견 책을 열심히 읽는 독자들에겐 죄송하다). 어쩌면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의 높은 열독률은 도무지 그 속을 종잡을 수 없는 고양이들의 아리송한 습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모호함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지식이라도 쌓을 겸 책을 모으고 있는 고양이 애호가라면 <그림 속의 고양이>는 더없이 도움이 되는 책이다. 고대,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 등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고양이를 어떤 존재로 생각해왔으며 그 모습이 미술사에 어떻게 각인되어왔
[도서] <최후의 만찬> 속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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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말에 부석사에 다녀왔다. 차 없이 대중교통만을 이용해, 새벽에 청량리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풍기역으로 가서 버스로 부석사에 가는 여정이었다. 기차에서도 버스에서도 내가 최연소 승객이었다. 부석사까지의 버스에서 본 밖의 풍경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그 차를 타고 있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고 있는 시골집들이었다. 이리저리 기울어 있는 집에서 허리가 잔뜩 굽은 할머니가 마당에 빨래를 넌다. 할머니의 옷가지뿐이다. 경기도 인근의 농가에서는 피부색 다른 며느리도 드물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날 그곳에는 온통 할머니, 할아버지뿐이었다. 폐가를 이웃해 사는 마지막 주거자들. 어떤 집도 처음부터 폐가는 아니었으리라. 마지막으로 집을 지키는 노인이 세상을 떠나면, 그 집은 그대로 죽어버린다. 그 명징한 사실이 삼십여분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붉게 물든 사과와 더불어 나를 잡아끌었다(한편으로는, 그 누구의 죽음으로도 집의 수명이 다하지 않는 도시의 주거문화도 생각해보게 된다. 도시의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노인과 집은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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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시대를 위한 지도자는 따로 있다. 기분 장애, 특히 양극성 장애 분야의 전문가로 하버드 의과대학과 케임브리지 헬스 얼라이언스에서 임상의학을 가르치고 있는 나시르 가에미가 쓴 <광기의 리더십>은 정신질환을 갖고 있었던 지도자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시대와 그들이 세상을 이끈 방식을 담았다. 그는 강조한다. 정신질환은 단순히 제정신이 아니라거나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다거나 정신병에 걸렸다는 뜻이 아니다. 가장 평범한 정신질환, 즉 우울증과 조증은 대체로 사고력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비정상적인 기분과 관련 있다. 그들은 실제로는 대체로 제정신이다. 항상 조증이나 우울증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조증이나 우울증에 대한 ‘소인’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조증이나 우울증에 동반되는 여러 요소들이 직접적으로 지도자의 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어떻게 정신질환이라는 약점이 힘이 될 수 있을까. 처칠, 링컨, 간디, 루스벨트, 케네디, 히틀러 등의 사례가 창의성,
[도서] 광기와 천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