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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성함께쓰기를 한 지 벌써 이십년이 넘어간다. 사람들에게 처음 이름을 말하면 세번에 한번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권김현영과 박이윤재가 결혼하면 아이 성은 박이권김 네 글자가 되나요?” 성이 길어지는 걸 걱정하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아 좀 놀랄 정도였는데, 그럴 때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말씀드리곤 했다. “조한지영과 전영록이 결혼해서 두 아이가 태어났어요. 자신도 부모성함께쓰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아들은 아버지의 부계성과 어머니의 모계성을 따라 자신을 전한지훈으로 부른대요. 딸은 어머니의 모계성과 아버지의 부계성으로 성을 만들어 조전미영이고요.”
그러면 그렇게 복잡해서 등록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있다. 우선 큰 오해부터 풀자. 애초에 부모성함께쓰기운동의 목적은 부모 성을 공동으로 등록하자는 데 있는 게 아니었다. 1997년 3월 8일 여성대회 이이효재 선생님을 비롯한 170여명의 여성계 인사들이 부모성함께쓰기운동에 동참하며 호주제 철폐를 외쳤다. “호주제,
부모 성을 함께 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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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이와이 슌지 / 출연 나카야마 미호, 도요카와 에쓰시, 사카이 미키, 시노하라 가쓰유키, 가시와바라 다카시 / 제작연도 1995년
큰 군부대가 인접한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군 주둔지 내의 복지회관에서는 매달 한편의 영화를 무료로 상영했는데, 친구들과 모여 보러 가곤 했다. 그 시절 접한 대부분의 영화를 그곳에서 만났다. 1999년, 학교에서 가장 떠들썩하게 화제가 된 영화는 <매트릭스>였다. 하지만 나의 1999년을, 아니 청소년기 전체를 온전히 사로잡은 영화는 따로 있었다. 복지회관의 한 좌석에 앉아 <러브레터>의 오프닝을 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설원 위에 죽은 듯 숨을 참고 누워 있던 여자가 숨을 몰아쉬며 눈을 뜨는 장면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눈을 털고 일어난 여자가 넓게 펼쳐진 설원을 걸어내려가는 원경이 오랫동안 펼쳐진다. 그때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날 이후 용돈을 모아 <러브
[내 인생의 영화] 박근영 감독의 <러브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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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자료를 찾다보면 남자주인공을 캡처해 보정한 사진들을 자주 접한다. 얼굴이 가무잡잡한 40대 모 배우는 밀가루 같은 피부에 귤색 입술을 하고 온라인을 떠돈다. 그의 혼백이라 해도 그처럼 희지는 않을 것 같지만, 아무튼. tvN <그녀의 사생활>이 다루는 덕후의 세계에서 “보정은 사랑”이란다. 미술관 큐레이터 성덕미(박민영)는 업무가 끝나면 카메라를 들고 아이돌 사진을 찍는 ‘홈마’(홈마스터)로 활동한다. ‘가짜 연애’라는 단서를 달고 만나던 신임 관장 라이언 골드(김재욱)에 대한 마음도 ‘덕질’을 하다 깨닫는다. 덕미는 카메라에 찍힌 관장의 사진을 뽀얗게 보정하다 화들짝 놀란다. “널 보정했어요”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확증이다.
덕미는 아이돌과 팬의 관계를 유사연애 감정을 거래하는 판매자와 소비자 관계로 보고 양쪽의 상도덕을 말할 만큼 분별력 있는 인물이다. 또한 보정한 작업물을 일반 팬에게 배포하는 ‘홈마’의 위치는 일정 부분 창작자이며 유통자를 겸한다.
[TVIEW] <그녀의 사생활>, 보정과 왜곡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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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회 칸국제영화제가 지난 5월 14일 개막했다. 올해는 장영엽, 김현수 기자가 칸으로 떠나 생생한 소식을 전해줄 예정이다. <씨네21> 칸 라이브 방송을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전달할 예정이며 거기에 더해 댓글로 궁금한 영화, 만나보고 싶은 경쟁부문 감독들을 알려주면 이후 취재에도 적극 반영할 생각, 이라고 장영엽 기자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더 하겠다고 의욕적으로 SNS에 썼기에, 나 또한 순수한 독자의 심정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전해본다. 영화제 개막과 동시에 보내준 소식에는, 전세계 영화기자들이 빼놓지 않고 보는 칸국제영화제 <버라이어티> 데일리 1호에 ‘South Korea Needs to Clean Up Biz’라는 제목의 기사와 함께 승리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린 기사도 있었다. 한국영화 소식이 자주 실려도 시원찮을 판에, 참으로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시 짐 자무시의 개막작 <데드 돈 다이>가 가장 궁금했다(
[주성철 편집장] 올해 칸국제영화제가 쏘아올릴 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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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7일. 미세먼지 따위는 거의 없는 화창한 봄날이었다. 휘파람이 절로 나올 만한 날씨인데 실내에 계속 처박혀 있을 수는 없는 법. 재빨리 일을 끝마치고 방송국을 나섰다. 시간은 오후 5시. 생방송까지는 대략 3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이미 기분이 좋은 상태였지만 이 상태를 더욱 끌어올려줄 음악이 필요했다. 휘파람을 잘 불지 못해서일까. 대신 휘파람을 불어줄 누군가를 내 아이팟 안에서 찾아봤다. 빌리 조엘의 <The Stranger>? 명곡이지만 너무 많이 들었다. 시티즌 제인의 <So Sad and Alone>? 불과 며칠 전에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나간 곡이다. 최근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서 순항 중인 조너스 브러더스의 <Sucker>? 좋은 선택이지만 좀 뻔했다. 치열한 고민 끝에 내가 선택한 뮤지션은 앤드루 버드였다. 미국 출신 인디 포크 뮤지션으로 2019년 3월 통산 12집 앨범 《My Finest Work Yet
[마감인간의 music] 앤드루 버드 <Sisyphus>, 휘파람이 있는 초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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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두 번째 백수 시절, 가을볕 좋은 어느 날. 책 한권 들고 마을 뒷산에 올랐다. 산이라고 부르기엔 높지 않아 딱히 이름도 없는 언덕배기에는 흔한 운동기구와 간이 정자가 있었다. 벤치에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고 있는데, 60대쯤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일회용 카메라를 건네며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꽤 본격적인 등산을 할 법한 복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동산의 정자에서 기념사진이라고…? 무의미한 정자 기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의 표정은 소풍 나온 아이처럼 너무도 해맑았다. 다리 한쪽을 정자 기둥 받침대에 올리고 집게손가락을 볼에 대는 깜찍한 동작을 취하는 순간, 당황스러워 찰칵. 카메라를 돌려받은 남자는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 시간여행자다! 미래에서 온 사람.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굳이 이 시간, 이 장소에 와서 내게 기이한 기념사진을 요청할 리 없었다. 혹시 그는 미래의 내가 아니었을까?
시간 여행을 위한 나와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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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스 스티븐스>는 교사의 이야기다. 사별의 회한에서 벗어나지 못한 레이첼 스티븐스(릴리 레이브)는 스트레스를 감추는 데에 능하다. 학생들의 사적인 질문을 침착히 걷어내고 좋은 교사의 본분을 다하려고 한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갇혀 있어.” 영어수업 중 레이첼이 던진 한마디가 본인의 이야기임을 눈치채는 학생은 거의 없다. 어느 날 예술적 재능이 풍부한 한 소년(티모시 샬라메)이 그의 슬픔을 알아보고 다가오자 레이첼은 이 갑작스런 친밀함을 교사로서 현명하게 관리하고자 최선을 다한다. 줄리아 하트 감독은 엄살 부리기 싫어하는 주인공의 성격을 존중하듯, 프레임의 구도와 조명을 통해 간접적 방식으로 레이첼의 심리적 고립을 표현한다.
04/23
<어벤져스: 엔드게임>(이하 <엔드게임>)의 언론 배급 시사에 앞서,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관계자가 무대에 올랐다. “오늘 예고편은 <토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시즌 피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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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얀 드봉 / 출연 키아누 리브스, 샌드라 불럭 / 제작연도 1994년
1994년,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마치고 친구들과 학교 근처 영화관에 가서 <스피드>를 보았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영화가 끝난 후에도 나는 영화에 완전히 압도됐다. 고등학생의 시험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려주는,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만드는 영화였다. 테러범(데니스 호퍼)은 출근길 버스에 폭탄을 설치하고, LA경찰인 잭(키아누 리브스)에게 3가지 조건을 내건다. 속도가 50마일 이하로 내려가면 폭탄이 터지며, 승객 중 누구도 내려서는 안 되며, 3시간 내에 370만달러를 입금하라는 것이다. 테러범이 내건 조건과 출근길 시민들을 볼모로 한 협박은 나에게 리얼하게 느껴졌고, ‘저런 아슬아슬한 상황을 잭이 어떻게 해결해나갈까’ 하는 생각에 같이 고민하며 영화에 몰입했다. 더구나 버스기사가 총에 맞자 승객이었던 애니(샌드라 불럭)가 버스를 운전하게 되면서 잭 혼자 영웅이 되는 이야기가 아
[내 인생의 영화] 김지혜 제작자의 <스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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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미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힌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워런은 자서전 <싸울 기회>에서, 자신이 처음 정치에 뛰어들 무렵 들었던 한 여성 전문가의 조언을 소개한다. “우리는 시도해야 합니다. 한 여자가 선거에 출마하면 다음번 여자가 훨씬 더 쉽게 출마할 수 있고, 그런 식으로 여자들이 승리하게 될 거예요.” 물론 다른 전문가의 말처럼, 공직에 나서는 여성은 남성에겐 펼쳐지지 않는 가시밭길을 밟아야만 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녀의 외모를 먼저 언급하고 나서 그녀가 한 말에 대해 이야기하죠.”
뉴욕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 역시 같은 고민을 했다. “여성이 출마 준비를 할 땐 세상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많은 결정을 해야 해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세상을 바꾸는 여성들>은 2018년 민주당 예비선거에 도전했던 네명의 여성 후보를 따라가는 작품이다. 거액의 기업 후원금을 받으며 오랫동안 지역구를 지켜온 남성 정치인들
[TVIEW] <세상을 바꾸는 여성들>,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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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스무살을 맞은 전주국제영화제에 잘 다녀왔다. 원래 갈 계획이 없다가 가게 되니,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올해도 <씨네21>이 영화제 공식 데일리로 참여하면서, 매일 어떤 기사와 인터뷰로 채울지 데일리 구성안을 짜는 것보다 더 힘든 삼시세끼 맛집 순례 구성안을 짜느라 고생했다. 기자들 모두 출장 기간 중반을 통과하며 가져온 바지가 맞지 않는다고 호소했고, 특히 술독에 빠진 송경원 기자는 매일 밤 자리가 파한 뒤에도 나라 잃은 백성처럼 숙소로 복귀하길 거부하며 전주 영화의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혹시 그의 행방을 아시는 분들의 제보를 기다린다). 데일리 작업실은 전주 라운지의 <스타워즈> 컨테이너, <스타워즈> 갤러리와 가까워 하루 종일 수백번 무한 반복되는 존 윌리엄스의 <스타워즈> O.S.T를 듣느라 계속 그 환청에 시달리기도 했다(한동안 <스타워즈>를 볼 일 없을 것 같다). 그렇게 9권의 데일리가 끝났다.
올
[주성철 편집장] 스무살 전주국제영화제와 함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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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 차일드. 맏이와 막내 사이에 낀 아이. 삼 형제로 말하자면 둘째. 90년대 드라마 <느낌>으로 치면 김민종. 제목만 보면 이 노래는 제이 콜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작품 같다. 사실 자전적인 작품은 맞다. 하지만 이 노래에서 제이 콜은 자신의 집안 대신 힙합 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두 세대 사이에 끼어서 죽을 지경이야/ 나는 누군가에겐 형이고 누군가에겐 동생이지/ 21 새비지와 녹음을 마친 다음/ 제이 지와 점심을 먹으러 가.” 힙합 신의 미들 차일드. 20살 래퍼들에겐 큰형이지만 제이 지나 나스에게는 작은동생뻘인 존재. 그게 바로 현재 제이 콜의 위치다. 그리고 이 틈바구니에서 혼란을 느낀 제이 콜은 균형을 잡으려고 애쓴다. 형들의 힙합과 동생들의 힙합이 이렇게나 다른데, 나는 그 중간에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 진솔하고도 현실적인 이야기가 이 노래에 담겨 있다. 이 노래를 들은 후 한국 힙합으로 눈을 돌리면 한명이 시야에 들어온다. 오왼 오바도즈. 얼
[마감인간의 music] 제이 콜 <Middle Child>, 전통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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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글쓰기 관련 특강을 한 꼭지 맡아 하게 됐다. 글쓰기라니, 내가 들어야 할 강의인데 나 같은 사람이 무슨 강의를 하나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제 와서 감독을 꿈꾸게 된 멋진 계기나 나만의 창작론 같은 걸 만들어낼 수도 없고 해서, 그냥 수업 내내 실상 나라는 사람이 예술과 글쓰기와 얼마나 거리가 먼 사람인지, 그런 평범하고 별 볼 일 없는 내가 삶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겪으며 어떻게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창작을 시작하게 됐는지, 그래서 아직도 내게 글쓰기가 얼마나 어렵고 또 어떤 고민들이 있는지 등을 구구절절 풀어놓았다. 이 애매하고도 은밀한 고백은 열심히 눈을 밝히고 귀를 기울이며 더 큰 이야기를 나눠준 수강생분들 덕분에 다행히 조금은 덜 부끄러운 것이 되었고 또 조금은 더 의미있어지기도 했다. 사람들 앞에서 어떻든 나 자신을 고백할 수 있게 된 이런 상황이 조금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수업 말미에 한 수강생이 조심스레 던진
아직 괜찮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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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는 집단 체험의 예술이지만 장민승 감독과 음악가 정재일의 명상적 중편 <오버 데어>는 혼자만의 관람도 권할 만하다. 2015년부터 2년간 제주의 자연을 촬영한 영상과 사진이 때로는 안개로 매개된 디졸브로, 때로는 단호한 컷으로 연쇄되는 <오버 데어>는 화면 안 소리를 배제하고 정재일의 음악으로 사운드트랙을 채웠다. 고드프리 레지오 감독과 필립 글래스의 문명비판적 <카시> 3부작을 연상하는 관객도 있겠으나, <오버 데어>는 자연의 이미지를 미학화하고 나아가 추상화한다. 정재일의 음악은 자연의 순환을 닮아서 낙숫물처럼 이미지의 표면을 건드리다가 격랑을 이루고 다시 잦아든다. <오버 데어>의 메시지는 감독이 이 영화가 자연을 바라보는 관습적 시선을 벗어나 열심히 대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연히 생성된다.
04/13
음식점 덕향오리의 사장이자 독신모인 김미희(김소진)는 샐러리맨 기혼남 권대원(김윤석)과 사랑에 빠져 임신하기에 이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사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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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왕가위 / 출연 유덕화, 장만옥, 장학우 / 제작연도 1988년
나는 하숙생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갓 상경한 대학 새내기 시절, 하숙집에서 선배들의 머슴(?) 생활을 했는데 그들은 밤에 나를 종종 불러 재밌는 이야기를 시키곤 했다. 처음 며칠은 무사히 넘겼지만 레퍼토리는 바닥났고 재미가 없거나 준비된 얘기가 없으면 난감했다. 몇주 뒤 새로 선배 한명이 입주했는데 그와는 늘 영화 이야기를 나누며 잠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로드쇼>나 <스크린> 같은 영화 월간지를 탐독하던 나였지만 대학에서 학사경고를 받아가며 영화 생각만 하던 선배가 해주는 얘기는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그런 선배 덕분에 비디오방에서 재발견한 영화가 <열혈남아>(원제 <몽콕하문>)다. 이미 중학생 때 친구집에 모여서 봤던 영화다. <영웅본색>이나 <첩혈쌍웅>을 기대했던 친구들에게 온갖 비난을 들었지만 이 영화를 몰라본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던
[내 인생의 영화] 유태경 감독의 <열혈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