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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의 인물로 단일한 공간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끌고가는 방식은 종종 시도된다. 그러나 선택한 하이 컨셉이 단순한 형식 유희를 넘어 내용과 조응하는 정당성을 획득하고 영화 전체를 지탱하는 경우는 드물다. 구스타브 몰레르 감독의 <더 길티>는 드문 성공의 예다. <더 길티>의 솔로 주인공은 야간 비상구조 콜센터에서 야근중인 경찰 아스게르(야코브 세데르그렌). 업무규정 위반 혐의로 콜센터에 임시 배치된 그에게 납치당했다는 여성의 전화가 걸려온다. 능력과 직감을 자신하는 아스게르는 현장요원과 연결하는 임무를 넘어 피해자를 직접 구하려 한다. <더 길티>는 인물을 움직이는 사건 자체도 충분히 긴장을 자아내지만 결말에 이르러 관객이 이해하게 되는 것은 주인공의 캐릭터라는 점에서 전화 통화만으로 이뤄진 또 다른 영화 <로크>(2013)와 친구다.
03/10
가려진 여자들의 스토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내용이 제목 그대로였던 <히든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유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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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 출연 이우라 아라타, 오다 에리카 / 제작연도 1998년
내 인생에서 단 한편의 영화를 고른다면 무엇일까. 나는 세계의 미래를 결정짓는 사람처럼 고민하고 있었다. 수없는 제목들, 이야기들, 선택들, 이름들이 떠오르고 사라졌다. 동시에 그 영화를 보던 당시의 내가 소환되어 그 시절이 갖는 의미들을 내 앞에서 떠들었다. 고민은 영화 자체의 의미, 영화를 보는 시간의 의미에 이어 영화를 만드는 의미까지 이어졌다.
<원더풀 라이프>는 천국으로 가기 전 공간, 림보의 이야기다. 림보의 직원들은 도착한 망자들에게 지난 삶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은 한순간의 기억을 묻고, 그들을 위해 그 순간을 재연해준다. 한편의 영화를 고르려 삶 전체를 탈탈 털며 돌아보는 내 모습이 딱 영화 속 인물들이었다. 두꺼운 일기를 뒤적이며 삶의 한순간을 찾듯 영화를 떠올리다 끝내 이 영화를 골랐다. 이 선택은 그동안 나를 위로하고, 때로 다그치며 함께해준 모든 영화와 삶의 순
[내 인생의 영화] 김의석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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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김해일(김남길)은 믿음 없는 신자는 성당에 나오지 말고 ‘<TV 동물농장> 보시라’라는 말을 거침없이 한다. 유능함과 정치력으로 권력에 줄을 댄 검사 박경선(이하늬)은 ‘가즈아!’ 같은 대사를 차지게 뱉는다. 허세뿐인 형사 구대영(김성균)은 야구 배트에 머리를 맞아 ‘갓 쓴 사람’을 만나도 남보다 두개골이 두껍다고 자랑한다. SBS <열혈사제>는 경망스러운 재담을 주고받는 말 많은 코미디다.
해일은 구담시 교구의 손님신부로 머무는 중에 구청장과 특수부 부장검사, 경찰서장, 국회의원이 연루된 지역 카르텔과 마주한다. 과거 국정원 대테러 요원이었던 그는 ‘성령을 깡으로 받았나’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두려움이 없다. 경찰서와 구청을 수없이 드나들어도 해일의 활약은 곧 가로막힌다. 바티칸의 교황에게 편지를 쓰고, 교황이 친서를 보내 대통령까지 주목하는 사건이 되었어도 카르텔 분쇄는 지난하다. 그 답답함을 견디게 하는 것이 코미디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드
[TVIEW] <열혈사제>, 두렵지만 옳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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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호 특집은 <컬러 퍼플>(1985)부터 <블랙팬서>(2018)까지, 1980년대 이후 블랙시네마 총정리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20편을 엄선하면서, 흑인 감독들이 연출한 영화에 주목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포함시키지 못해 아까운 영화들이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쿠엔틴 타란티노의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와 <헤이트풀8>(2015)일 것이다. 그는 <저수지의 개들>(1992)로 데뷔한 이래 끊임없이 다채로운 장르의 여정을 이어왔다. 매번 신작을 내놓을 때마다 이전 영화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탈주’의 태도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채워왔다. 그런 점에서 두 영화는 그가 두번 연이어 서부극을 만든 것이기에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종종 서부극에 느끼는 매혹에 대해 얘기한 적 있다. 단 ‘남북전쟁 이전 미국 남부의 노예사회’를 그려내고 싶어 했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가 그 시기에 딱 맞는 영화
[주성철 편집장] 블랙시네마 특집, 그리고 타란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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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을) 신뢰하는 친한 동생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며칠 지났을까. 나는 각 잡고 감상을 시작했다. 오호라. 강렬한 퍼즈 톤 기타가 내 귀를 압도하더니 보컬은 들릴 듯 말 듯한 볼륨으로 그 사이를 부드럽게 흐른다. 세상은 이런 유의 음악을 보통 슈게이징(shoegazing)이라 칭한다. ‘고개를 숙이고 구두를 보면서 연주한다’라는 의미다. 메인스트림은 아니지만 1990년대 이후 꽤 단단한 팬 베이스를 보유하고 있는 장르라고 보면 거의 정확하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지금껏 꽤 많은 수의 슈게이징 밴드 음악을 접했다. 걸작도 있었고, 망작도 있었다. 이를 가르는 기준은 적어도 나에겐 하나뿐이다. 마치 분쇄기 소리처럼 들리는 기타 연주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주요 멜로디가, 비록 뒤에 묻혀 있다 하더라도 기억에 남아야 한다는 거다. 이런 측면에서 바로 이 앨범, 나싱(Nothing)의 통산 3집 《Dance on the Blacktop》(2018)은 최소 별 4개는 받을 자격이 있다. 각각
[마감인간의 music] 나싱 《Dance on the Blacktop》, ★★★★+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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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의 결근으로 그날 체육 시간에는 우리 반과 옆 반의 피구 시합이 벌어졌다. 운동장에 주전자 물을 부어 그은 선 안으로 아이들이 비좁게 섰다. 피구는 공에 맞으면 ‘죽는’ 경기다. 공을 잡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밀집도가 높은 초반엔 공에 맞은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대부분 나처럼 공을 두려워해 섣불리 잡지 못하는 아이들이다. 평소엔 나도 포식자를 피해 우르르 떼 지어 다니는 작은 물고기같이 도망가다 휩쓸려나갔다. 근데 그날은 웬 운이 따라주었는지 중반이 넘도록 살아남았다.
경기는 우리가 열세였지만 담임 선생님도 안 계신데 질 순 없다는 이상한 승부욕이 아이들 사이에 있었는지 응원의 열기가 거셌다. 여느 때라면 벌써 탈락해 여유롭게 응원이나 하고 있을 내가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덩치가 작아 그나마 공을 운좋게 피하긴 했지만 빠른 공을 잡을 실력도 용기도 없었다.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공은 마치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알 수 없
나를 죽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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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마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머리칼이 불꽃 모양으로 일렁이고 눈은 한쌍의 화이트 홀처럼 빛나고 팔다리는 열기를 뿜어낸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그저 슈퍼 파워의 진부한 만화적 묘사로 보였던, 각성한 캡틴 마블(브리 라슨)의 이미지는 놀라운 해방감을 자아낸다. 이 이미지는 “만약 내가 자유로워진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여성 일반의 잠재된 자문에 대한 강력한 외마디소리 답변이기 때문이다. 캐롤 댄버스(브리 라슨)가 캡틴 마블로 도약하는 계기는 외적으로 주어지는 에너지가 아니라 언제나 내면에 품고 있던 뇌관에서 안전핀을 뽑는 결단이다.
03/08
<캡틴 마블>이 전환점을 맞이하기까지 캐롤(브리 라슨)은 이중의 가짜 정체성에 갇혀 있다. ‘남성성이 곧 인간성’이라고 암시하는 교육을 믿고 여성적 파워를 억누르고 있는 동시에, 지구인으로서 정체성을 제거당한 채 크리족의 모범적 전사가 되고자 노력한다. 관객 역시 크리족의 세계관에 따라, 할리우드 상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캡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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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세르지오 레오네 / 출연 헨리 폰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제이슨 로바즈 / 제작연도 1968년
자꾸만 펼쳐보게 되는, 밑줄 가득한 손때 묻은 소설 같은 영화들이 있다. 한컷, 한신의 밀도에 숨죽이고 도대체 저 숏은 뭘까 하며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들. 그중 하나가 오래전 누군가의 말처럼 공기가 느껴지는 영화, 바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옛날 옛적 서부에서>다. 하지만 무엇보다 첫신에서 열연을 펼치며 종횡무진 날아다닌 파리의 윙윙거림 같은 부끄러움으로 남는 영화. 오랜 간절함 끝에 4수 만에 입학한 대학의 오티. 몇 순배의 술잔이 돌자 서먹하고 데면데면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선배, 동기들은 자신들의 베스트영화로 ‘선빵’을 날리기 시작했다. 당시 나에게 영화란 풍문으로 들었지만 보지 않은 영화, 말 그대로 듣도 보도 못한 영화, 봐도 안 본 것 같은 영화 그리고 보지도 않고 본 것 같은 영화들로 나뉘어 있었다. 정말이지 동서양을 망라하고 두루두루 꼼꼼하게 흘러나
[내 인생의 영화] 김중현 감독의 <옛날 옛적 서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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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 사람들의 얘기는 나이를 먹어서야 귀에 들어온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체력은 국력이 아니어도 내 경력과 직결되고, 건강은 정말로 중요하다. 다이어트에 날린 돈과 시간을 운동하는 데 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몸 하나 지탱하기 힘들어진 뒤에야 운동을 시작한 요즘 JTBC <위대한 운동장–SKY 머슬>을 본다. 운동하는 여성들의 강인함을 내세운 캠페인, “너라는 위대함을 믿어”로 화제를 모은 나이키가 제작 협찬한 프로그램답게 여성 출연자와 지도자의 비중이 높다는 것은 눈에 띄는 장점이다. 아르바이트 수입을 운동에 쏟아붓는 고등학생, 소매치기를 멋지게 제압하는 전사가 꿈이었다는 대학생, ‘기지개 운동’밖에 못하고 있다는 워킹맘 등 각기 다른 이유로 출연을 신청한 여성들도 반갑다.
운동의 가장 좋은 점은 내 몸을 외양이 아니라 기능을 기준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키가 너무 큰 게 콤플렉스라는 여성에게는 수영하기에 유리한 조건이라는 격려, 볼링은 키가 조금
[TVIEW] <위대한 운동장–SKY 머슬>, 방향 알고 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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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시나리오작가들의 101가지 습관>은 저자 칼 이글레시아스가 14명의 유명 시나리오작가들을 길게 인터뷰하여 ‘글쓰는 환경 만들기’, ‘글쓰는 습관’, ‘시간 조절’, ‘원고 고쳐 쓰기’ , ‘인간관계 만들기’, ‘에이전트 구하기’, ‘프로작가처럼 행동하기’ 등 각각의 주제에 맞게 내용을 편집해서 엮은 책이다. 집필 스타일과 환경이 저마다 다르기에 특정 주제에 대해 말이 길 때도 있고 짧을 때도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유독 ‘글 막힘’ 주제에서는 하나같이 말이 많다는 것이었다. 세상 그 어떤 대단한 시나리오작가라도 역시 글이 막힐 때가 가장 답답하고 괴롭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럴 때 대부분의 작가들이 내놓은 해법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냥’ 아무 글이라도 쓰라는 것이었다. 일단 쓰기 시작하면 아이디어는 반드시 떠오른다는 얘기다. <의뢰인>(1994), <로스트 인 스페이스>(1998) 등의 시나리오를
[주성철 편집장] 시나리오작가 특집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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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쿠치 모모코는 일본의 80년대를 뒤흔든 아이돌이었다. 특히 그는 80년대 중반에 왕성하게 활동하며 남자들의 우상이 됐다. 청순한 외모, 상냥함과 겸손함, 가창력은 부족하지만 듣기 좋은 음색 등 기쿠치 모모코는 여성 아이돌의 전형이자 그 카테고리에서 왕과 같았다. 최근의 시티팝 열풍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기쿠치 모모코의 음악 역시 다시 조명받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앨범에 수록된 노래들이 다시 소환됐다. 그중에서도 《Adventure》는 앨범이 통째로 시티팝 명작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리고 이같은 평가는 라무의 앨범 《Thanksgiving》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기쿠치 모모코가 80년대 후반 들어 돌연 결성한 밴드 라무의 유일한 앨범 말이다.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Thanksgiving》은 뉴훵크, 신스팝, 일렉트로, 솔 같은 단어를 자잘하게 꺼내게 한다. 라무 자체가 흑인 여성 코러스 두 명과 여러 남성 세션을 대동한 밴드였으니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
[마감인간의 music] 라무 《Thanksgiving》, 너무 일찍 도착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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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가버나움>은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 사는 12살 소년 자인(자인 알 라피아)이 사람답게 살고자 있는 힘껏 발버둥친 고난의 한철을 담아낸 이야기로, 이 어린 소년의 힘겨운 수난사에 어쩌면 우리가 평생 모르고 살았을 지구 반대편 폭력의 현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화는 특히 지금 이 순간 레바논 사회의 여성들이 어떤 끔찍한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지 속속들이 마주하게 하며, 그들이 처한 잔혹한 상황이 자인의 인생을 어떻게 지옥으로 만들어가는지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엄마처럼 조혼으로 팔려간 여동생 사하르는 이른 임신으로 사망하고, 가출 후 함께 살던 미혼모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은 아기 요나스(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를 남겨둔 채 불법체류자로 잡혀간다. 시장에서 만난 또래 친구 메이소운은 스웨덴 입양을 꿈꾸지만 그게 악몽이 되진 않을지는 영원히 미지수다. 실상 자인의 고통은 모두 자인이 믿고 사랑하며 의지하는 주변 여성들의 고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들이 괴로운
나의 괴로움이 너의 고통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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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장이머우 / 출연 공리, 갈우 / 제작연도 1995년
살다보면 누구나 힘든 시기를 맞는다. 그럴 때면 ‘왜 살지? 산다는 건 뭘까?’라고 묻게 된다. 정답은 없겠지만, 가장 힘들던 시절 나에게 산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라고 생각의 꼬리를 물게 해준 영화가 장이머우 감독의 <인생>이다. <허삼관 매혈기>로 유명한 작가 위화의 <살아간다는 것>(한국 제목 <인생>)이 원작인 영화는 중국 격변기에 처한 한 남자를 통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부유한 지주의 외아들로 태어난 주인공 부귀(갈우)는 아버지의 재산을 밑천 삼아 도박을 즐기다 아내도 떠나고 재산도 탕진한다. 나락으로 떨어진 부귀는 절망하지만 곧 자신과 같은 지주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중국 공산당에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도박으로 재산을 잃지 않았다면 그 사형대의 주인공은 부귀 자신이었을 터다. 영화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펼쳐지는 한 남자(부귀)의
[내 인생의 영화] 이한 감독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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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이 제일 구리네. 혜자가 뭐야 혜자가.” 병원 대기실에서 이름이 촌스럽다며 불평하는 딸의 등짝을 후려치는 엄마. 모녀간의 일상적인 다툼 같지만 딸이 배우 김혜자고 엄마가 이정은인 낯선 그림이다. JTBC <눈이 부시게>의 25살 김혜자(한지민)는 시간을 되돌리는 시계로 아빠(안내상)를 구했고, 시계를 쓴 만큼 몸이 늙어서 70대 노인(김혜자)이 되어버렸다. 황당한 설정 같아도 당사자인 혜자나 가족들이 노화에 적응하는 모습은 가볍지 않다. 혜자는 부모님 방문 틈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본다. 빠듯한 살림에 노인이 매일 먹는 약값을 대느라 늦도록 잠들지 못하고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를 듣는다. 늙은 딸을 여전히 딸이라 받아들이는 것과 별개로 당장 노인을 돌봐야 하는 가족들이 감당하는 경제적, 심리적 부담이 있다.
기르던 개가 물 정도로 체취가 바뀐 혜자는 바로 며칠 전까지 입었던 옷에 얼굴을 파묻고 20대의 냄새를 맡아본다. 젊은 몸으로 돌아가 활개를 치다가 꿈이라는
[TVIEW] <눈이 부시게>, 저마다 다른 눈으로 보는 드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