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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tvN <최신유행 프로그램> 새 시즌이 시작했다는 사실을 여기저기 뜨는 ‘짤’(인터넷상에 올라오는 사진, 그림이나 짤막한 영상)을 보고 알았다. 몇년 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를 모았던 ‘100일 기념 이벤트로 번화가에서 하회탈 쓰고 상모놀이 펼치다가 여자친구에게 차인 썰’을 재구성해 찍은 콩트는, 원글의 클라이맥스인 “여자친구를 유혹하려는 것처럼 어깨춤을 추면서 다가갔다가 멀어졌다가 다가갔다가 멀어졌다” 장면을 실로 완벽히 구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프로그램은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유행한 모든 ‘드립’과 유머 코드를 쏟아부어 이를 공유하는 시청자로부터 웃음을 낚는 예능이다. 그래서 아는 만큼 웃기기도 하고, 보이는 만큼 찜찜할 때도 있다. 수평적 문화와 독창적 비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젊은 꼰대인 대표(권혁수)의 기분에 좌우되고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IT 스타트업을 배경으로 한 코너 ‘스타트엇!?’에는 노골적인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구도’가 등장하다
<최신유행 프로그램>, 모든 것은 드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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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심 <엑시트>가 천만 영화가 되길 바랐건만 941만 관객에서 그쳤다. 아깝게 천만 관객에 다다르지 못한 다른 영화들로는 970만 관객의 <검사외전>(2016), 935만 관객의 <설국열차>(2013) 등이 있다. 아무튼 그러길 바랐던 이유는 <엑시트>가 천만 관객을 돌파한다면, 한국영화 역대 박스오피스에서 유일하게 20대 주인공이 등장하는 천만 영화가 되기 때문이다. 믿기 힘들지만 1761만 관객의 <명량>(2014)부터 1008만 관객의 <기생충>(2019)에 이르기까지, 총 19편의 역대 천만 한국영화들 중 동시대를 다룬 영화에서 20대 주인공은 찾아보기 힘들다. 1174만 관객의 <태극기 휘날리며>(2004)에서 장동건과 원빈이 연기한 두 형제는 한국전쟁 당시 확실히 20대 이하일 테지만, 동시대 영화는 아니다. <암살>(2015)의 독립군과 <실미도>(2003)의 부대원들도 20
[주성철 편집장] 20대 관객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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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t Badass Asian. MBA를 처음 알게 된 건 래퍼 딥플로우의 인스타그램을 통해서다. “오늘 나온 MBA 크루 앨범 강력 추천. 엉뚱한 애들 빨지 말고 앞으로 대세에 얘네 넣어라.” 딥플로우가 멋있다고 하니 관심이 갔다. 그와 나는 힙합을 보는 눈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멋의 기준 말이다. 그 ‘멋’을 바꿔 말하면 ‘태도’가 될 수도 있다. 힙합이 다른 어떤 장르보다 스스로의 고유한 태도를 유별날 정도로 중요시해왔다는 점을 잊지 말자. 그리고 MBA는 최근 몇년간 한국 힙합을 통틀어 힙합의 그 속성을 가장 강력히 떠올리게 하는 크루다. 암, 그렇지. 힙합은 태도지. 처음부터 끝까지. MBA의 노래 <무리>는 태도 그 자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힙합 고유의 태도 그 자체다. MBA는 이 노래에서 우린 무리라고 말한다. 우린 집단이고 뭉쳐 있으며 형제이고 식구라고 말한다. 발라드를 즐겨 듣는 사람은 이 노래 앞에서 당황할 수도 있다. 하지만 힙합을 좋아하는
[마감인간의 music] MBA <무리>, 힙합은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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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생략된 ‘은희’와 ‘지숙’의 두 번째 투숏은 지숙의 방 침대에 누워 ‘sex’를 발음하는 전자사전 기계음을 반복 청취하며 자지러지는 모습이다. 사적 공간인 ‘방’에서 기계음을 빌려 크게 발음해보는 섹스, 섹스, 섹스…. 영화가 대서사시처럼 그려낸 10대 여성의 “광대한 마음의 지도”, “정서적 스펙트럼”의 한축은 분명 온갖 종류의 ‘친밀성’에 대한 갈구다. 그건 ‘성애적인 것’을 포함하며, 결코 특정 성별을 대상으로만 작동하지도 않았다. 영화 <벌새> 이야기다.
은희는 “우리 키스하자”라며 남자친구 지완과 이성애 행위를 실험하지만, 그와 나란하게 교차되는 것은 록카페에서 “X” 맺기로 결의한 “보이시한” 후배 ‘유리’, “짧은 머리”에 담배를 피우며 은희를 매료시킨 ‘영지’와의 관계다. 그 관계들은 순식간에 돌변하고 상실된다는 점에서, 은희에게 공평하게 소중했고 가혹했다.
유리 옆에서 은희가 <사랑은 유리 같은 것>을 부르는 장면은 단연 최근 본
사랑은 유리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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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마크 웹 / 출연 조셉 고든 레빗, 주이 디샤넬 / 제작연도 2009년
23살 때였던가. <500일의 썸머>를 처음 영화관에서 봤을 때 나이가. 당시 23살의 나는 여느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내 앞에 놓인 여러 과제들을 버겁게 해내고 있었고 불투명한 미래에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한편 그때의 난 매일 새로운 경험과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활기찬 에너지가 넘쳤으며, 또 영원할 것만 같은 20대의 사랑을 하고 있었다. 여러 의미로 나에겐 역동적인 시기였다.
영화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내레이션으로 아주 경쾌하게 시작된다. 각기 다른 환경과 가치관으로 자라난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임을 알려줄 그들의 성장배경이 짧은 필름으로 지나간다. 칙칙한 사무실에서 자신의 꿈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던 톰(조셉 고든 레빗)의 인생에 파란색 나비를 달고 나타난 썸머(주이 디샤넬)의 해맑은 웃음은, 그녀가 그에게 앞으로 가장 이상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사랑을 가져다
[내 인생의 영화] 강한나 배우의 <500일의 썸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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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산 게장 골목에서는 딸이나 며느리에게 게장 저작권과 상속권이 승계된다. 요리를 하는 여성이 권력을 잡고 그들의 남편이나 아들은 식당 주차요원을 하거나 손님에게 파인애플을 판다. KBS <동백꽃 필 무렵>에는 요식업이나 식재료를 취급하는 여성 사장만 여덟이다. 혼자 아들을 키우는 외지인 동백(공효진)도 게장 골목에 술집 ‘까멜리아’를 열고 나름 6년을 버텼다. 술을 판다고 막 대하는 사람들 틈에서 상처를 입던 동백이 각성하고 변화하는 이야기인 만큼 이웃의 면면에도 눈이 간다. 특히 ‘3대 며느리 게장’의 CEO 박찬숙 역의 김선영 배우를 보는 즐거움이 각별하다. 화려한 부인복의 목깃을 세우고, 귀걸이와 목걸이는 늘 세트로 맞춘다. 푸른빛 도는 회색의 눈썹 문신, 진한 립스틱은 입술 안쪽이 지워져 테두리만 남아 있다. 동백 네 개업 떡을 잘라 입에 넣는 손가락의 매니큐어가 군데군데 벗겨진 것까지 구현하는 디테일에 감탄만 나온다.
찬숙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상대방 말꼬리를
<동백꽃 필 무렵>, 김선영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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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complete me.” <제리 맥과이어>(1996)에서 스포츠 에이전시 매니저 제리(톰 크루즈)가 도로시(르네 젤위거)에게 고백하며 유명해졌던, ‘넌 나를 완성시켜주는 존재’라며 멜로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이 대사는 <다크 나이트>(2008) 취조실 장면에서 조커(히스 레저)가 브루스 웨인(크리스천 베일)에게 하기도 했다. 선이 있으면 악도 있고 배트맨이 있는 세상에 조커도 있다는 의미로, 조커는 그렇게 배트맨을 필요로 했다. 자신에게 쨉도 되지 않는 재미없는 경찰들에 비하자면 배트맨은 그야말로 흥미로운 적수였기 때문이다.
올해 제76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으며,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가 제작한 코믹북 원작 영화 중 최초로 주요 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가 된 <조커>에는 바로 그 조커(호아킨 피닉스)의 영혼의 파트너 배트맨이 등장하지 않는다. 나중에 배트맨이 될 어린 브루스 웨인과 그의 아버지 토마스 웨인(브렛 컬런)이 등
[주성철 편집장] <조커> 보며 <펭귄>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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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철이라는 음악가를 좋아한다. 처음 그의 음악을 알게 된 것은 밴드 ‘불독맨션’ 때문이었다. 김현철이 쓰고 부른 불후의 명곡 <춘천가는 기차>를 리메이크한, 원곡보다 좀더 경쾌한 멜로디의 기타 연주와 평소에는 사투리를 쓰는 싱어송라이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주는 대비를 좋아했다. 카세트테이프가 서서히 사라졌지만 음반 가게는 아직 번창하던 시절, 불독맨션의 음악은 항상 가까이 있었다. 요즘 발견의 기쁨을 느끼는 음반은 2016년 11월 발매한 5집 《늦어도 가을에는》이다. 첫곡 <가을>은 잔잔하다. 계절이 바뀔 때 으레 하는 행동으로 새로 오는 계절을 조곤조곤 이야기한다.
그는 목소리와 클래식기타 선율만으로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 줄 안다. 앨범의 세 번째 곡 <출렁이는 달빛>을 들으면, 연휴가 시작될 때 충동적으로 걸었던 서울의 밤과 새벽의 텅 빈 도로가 떠오른다. ‘출렁이는 달빛 아래서/ 일렁이는 마음을 본다/ 밀려오는 바람 타고/ 끝도 없이 나부
[마감인간의 music] 이한철 《늦어도 가을에는》, 그 시절의 감흥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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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을 보면서 영화 <기생충> 생각이 났다. 특히 주인공 가족의 아버지 기택(송강호)이 했던 말 “아들아, 넌 계획이 있구나”가 자꾸 떠올랐다.
옛날엔 “가족계획”이란 말이 있었다. 1960년대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정부가 펼친 캠페인이었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정부 표어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리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가족계획”이란 말은 있었지만 “계획가족”이란 말이 있었나 싶다. 가족계획이 자녀수의 조절을 통해 전체 사회의 비용을 절감하는 국가정책이라면 계획가족은 단기적 혹은 중장기적 계획을 수립함으로써 생계와 사회적 이동을 효율화하는 가족 내 정책이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사회의 가족은 계획가족을 지향한다. 다만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자원의 양과 질이 다를 뿐이다. 특히 세습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질수록, 금융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전문가주의가 득세할수록, 부모가 고학력에 고임
계획가족의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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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클로드 샤브롤 / 출연 상드린 보네르, 이자벨 위페르 / 제작연도 1995년
아주 어릴 적부터 무턱대고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모두가 흘려들었지만 스스로는 꿈을 찾았다고 뿌듯해했다. 문학과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어머니와 서부영화와 팝송을 좋아하는 아버지 밑에서 취향의 중심추를 이리저리 옮기며 지내던 어느 날, 문득 영화가 마음에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는 걸 다 할 수 있잖아!’ 인생을 뒤흔드는 걸작을 보고 영화를 선택하는 낭만적 수순이 아니라 나름대로 꾀를 내어 욕심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내가 영화를 하게 된 쑥스러운 계기다. 그때부터 단순무식하게 매일같이 비디오가게를 들락거렸는데, 마침 일어난 예술영화 붐으로 세기말 지방도시의 청소년이었던 나에게도 누벨바그영화들이 도착했다. 그 유명한 고다르와 트뤼포, 바르다와 로메르까지. 그때의 나에게 누벨바그의 영화적 권위는 무겁고 버거웠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무게를 잡고 있는 여드름쟁이 소녀에게 클로드 샤브롤의 영화는
[내 인생의 영화] 임오정 감독의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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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털이 떨어질 때 벚꽃도 지겠지/ 나는 져버릴 꽃이 되긴 싫어 I’m the tree.” Mnet <퀸덤>에서 <너나 해> 무대의 막을 연 AOA 지민의 랩은 또렷한 선언과도 같았다. 검은 슈트를 입고 화사한 미소 대신 강렬한 시선을 보내며, 노출 있는 의상에 하이힐을 신은 남성 댄서들과 함께 절도 있는 안무를 소화하는 AOA의 모습은 관객에게는 물론 자신들에게조차 새로운 것이라고 했다. 바로 전주에 “새 구두를 신고 짧은 치마를 입어봐도 넌 몰라봐 왜 무덤덤해 왜/ 딴 늑대들이 날 물어가기 전에 그만 정신 차려 boy”(<짧은 치마>)라며 자신들의 5년 전 히트곡을 부르던 모습과 의상부터 태도까지 모든 면에서 대비되어 더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이들이 페미니스트 선언을 했냐고 한다면 글쎄다. 하지만 많은 여성이 환호하고, 적지 않은 남성들이 불쾌해한 것은 분명 재미있는 현상이다. 물론 과도한 의미 부여는 금물이다. <페미니즘을 팝니다>
<퀸덤>, 꽃이 아닌 나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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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호 특집은 10월 3일 개막하는 24회 부산국제영화제 미리보기다. 올해도 <씨네21>은 공식 데일리로 영화제와 함께한다. 장영엽, 이주현, 김현수, 김소미 등 <씨네21> 기자들이 추석 연휴를 전후로 부지런히 프리뷰룸에 출퇴근하며 무수히 많은 영화를 봤고, 20편의 추천작을 엄선했다. 카자흐스탄 감독 예를란 누르무함베토프, 리사 타케바의 개막작 <말도둑들. 시간의 길>을 시작으로 임대형 감독의 폐막작 <윤희에게>에 이르기까지, 85개국 303편의 영화와 이제 곧 만나게 될 것이다. 이번 영화제는 넷플릭스 영화 <더 킹: 헨리 5세>처럼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 영화를 포용하는 등 시대에 발맞춘 변화를 선보일 예정인데, 특히 <더 킹: 헨리 5세>에서 헨리 5세가 되는 할 왕자를 연기한 티모시 샬라메가 부산을 찾을 예정이라 일찌감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기대작 중 스크리너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 소개하지 못한 작품은 추후
[주성철 편집장] 24회 부산국제영화제 추천작, 그리고 정일성 촬영감독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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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오의 데뷔앨범 《Immunity》는 음악 잡지 <NME>로부터 별 다섯개 만점을 받았다. ‘그 정도는 아니’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 앨범이 비평가를 흥분하게 할 요소를 다수 갖춘 것은 사실이다. 팝의 상식을 깨는 팝, 주류와 언더그라운드의 균형, 세대론 가능한 인터넷 성장 스토리 같은 것들 말이다. 《Immunity》는 신뢰받는 언더그라운드 테이스트메이커 피치포크로부터도 8점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미국의 우효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극히 앳된 목소리로 부르는 힙한 사운드,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쉽고 애틋한 멜로디 같은 것들 때문이다. 대담함 면에서 클레어오는 우효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 믹스 엔지니어와 싸우는 모습이 상상되는 깜짝 놀랄 노이즈(<Sofia>), 808 드럼과 베이스 위주로 만든 미니멀 팝(<Closer To You>)도 들려준다.
서서히 주류 레이더에도 잡히기 시작했다. 2018년 두아 리파의 투어 오프닝을 맡았고, 같은 해
[마감인간의 music] 클레어오 《Immuni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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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예술로 얻고 싶다면 그만한 시간을 기울여야 한다. 책으로 진입하는 머리글을 읽을 인내심과 스크린 앞에 꼼짝 않고 앉아 있는 두 시간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어색한 분위기와 초조함과 마법 같은 이끌림과 불현듯 다가오는 슬픔 같은 것들이 몸을 통과하도록 두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다면 작품 역시 아무것도 내놓지 않을 것이다. 요약된 소설과 압축된 영화와 후렴만 있는 음악은 심장에 도달할 힘을 잃을 것이다. 예술의 경험이란 작가와 향유자가 시간을 함께 견디는 경험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삶의 경험이다.
꼭 예술로 뭔가를 얻어야 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런 경험 하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반론은 타당하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먹고 사는 이상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는 사람만 남아 있는 세계에서 살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시간을 견
이상적인 경청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