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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들

최근 열린 두 전시, 노원희의 <얇은 땅 위에>와 윤석남의 <벗들의 초상을 그리다>는 흥미롭게 대조적이었다. 노원희 그림의 등장인물들은 대개 얼굴이 없다. 윤곽은 있되 이목구비가 있어야 할 자리는 비어 있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영감을 받아 그렸다는 <무기를 들고>에서 여자들은 텅 빈 얼굴을 한 채 한손에 프라이팬을 번쩍 들고 궐기 중이다. 반면, 윤석남은 오랜 벗들의 머리칼 한올, 주름살 하나까지도 세밀하게 그려낸다. 각각의 초상화에는 해당 주인공을 대표하는 물건들을 함께 그림으로써, 이 여성이 다른 누구로도 대체될 수 없는 ‘오직 그녀’임을 지시했다.

얼굴의 추상성과 고유성에 집중하는 두 재현에 위계적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무용하다. 다만 각각의 서로 다른 효과에 대해서는 고민해보고 싶다. 이를테면, 한국·일본·중국·영국 등지에서 발간된 <82년생 김지영>의 표지에 모두 ‘얼굴 없는 여자’가 그려졌다는 점. ‘김지영’의 생애에 많은 이들이 ‘내 이야기’처럼 공감한 것은, 마치 거울을 보듯, 공백으로 남겨진 ‘김지영’의 얼굴에 자신의 모습을 투사했기 때문이다. 극도로 추상화된 빈 얼굴은 동일성에 호소하며 ‘보편’의 위상을 점한다. 하지만 ‘보편’으로 상정된 얼굴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와 더불어 산다는 현실에 종종 침묵한다. 100만 독자들은 선량하고 무해하게 살아온 ‘김지영’에게 이입했지만, 과연 우리는 피부색이 검고 한국어 발음이 어색한 김지영, 휠체어를 탄 채 수십개의 계단 앞에서 멈춘 김지영, 성매매업소로 출근해 고단한 밤을 보내는 김지영을 상상했을까.

한편, 누군가의 눈가 주름과 잔털을 세밀하게 응시한다는 것은 그것에 깃든 세월, 즉 그가 경험한 시간의 풍화작용과 그 내력에 관심을 갖는다는 뜻이다. 그 정황과 자취들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이 그를 대체 불가능한 존재, 고유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아줌마의 뒤통수일지라도, 나는 그것이 새로 만 파마임을 알아보고, 미용실에서 만족스럽게 웃던 내 엄마의 미소를 떠올리는 것처럼. 하나 고유성에의 강박은, 그럼에도 우리가 함께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걸 종종 잊게 한다. 자식 잃은 슬픔은 친부모만 알 수 있고, 장애인 이동권 문제는 장애인들만의 관심사이며, 퀴어문학은 반드시 퀴어작가가 써야 한다는 식의 지적·정치적 방기를 합리화하는 알리바이로서 고유성·특수성을 운운하는 사례는 많다.

2019년이 저물 무렵, 당신은 누구의 어떤 얼굴을 떠올리시는지. 한국도로공사가 외주 용역업체 소속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들을 직접고용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정당한 판결이 났을 때, 그럼에도 그것이 이행되지 않을 때, 신문기사에 보도된 수납원들은 웃었는가, 울었는가. 프랑스의 이미지학자 자크 오몽은 모든 유사성의 근원이자 모든 자아에 대한 하나의 대표 이미지로 상상되는 ‘얼굴’과의 관계를 사유함으로써 영화는 비로소 ‘예술’이 될 수 있었다고, 자신의 책 <영화 속의 얼굴>에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