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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있지 않습니까. 감이란 거. 이거 정말 무시할 수 없는 겁니다. 스마트폰의 LED가 번쩍입니다. 메일이 왔다는 걸 알려주는 거죠.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합니다. 전기신호고 들고 나면서 점멸이 일어나는 것뿐인데 묘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이럴 때 메일을 열어보면 어김없습니다. ‘출전요청메일.’ 전화도 마찬가집니다. 연애를 경험해본 분들은 잘 아시잖아요? 지금 내가 걸고 있는 이 전화, 분명 받아야 할 타이밍인데 안 받습니다. 그리고 지금 걸려오는 전화, 뭔가 느낌이 이상합니다.
지난 토요일이었을 겁니다. 제 빨간색 소니 티포 스마트폰이 부르릉거리면서 전화가 왔음을 알려주는데, 책상 전체를 진동시키면서 떨리는 그 품새가 예사롭지가 않은 겁니다. 스피커를 귀에 대고 목소리를 들어보니 <씨네21> 담당기자였습니다. 그러며 마감엄수를 이야기하는데 통상적인 전화내용이기에 더욱 어색했습니다. 왜냐하면 마감을 넘기기 전에 이런 전화를 받은 것이 처음이었거든요. 이거 뭔가 ‘히든
[김남훈의 디스토피아로부터] 파이터는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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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살 무렵까지는 할머니 방에서 드라마를 봤다. SBS <옥이이모>, KBS <서울뚝배기>, MBC <사랑이 뭐길래>처럼 시골 동네가, 오만 사람들이, 시끌벅적한 가족이 나오는 이야기들이었다. 노년에 고향을 떠나 거동이 불편한 남편과 함께 낯선 도시의 좁은 아파트에 들어와 살게 되신 할머니는 TV 속의 사람 구경을 좋아하셨다. 야물딱지게 사투리를 쓰는 꼬맹이들의 논두렁 등하굣길도, 고운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던 아가씨가 드디어 착한 짝을 만나 시집가는 날도, 간신히 입에 풀칠할 만큼 벌면서도 허풍에 배가 터지던 사내들이 술에 취해 골목길을 비틀대며 신세한탄하는 모습도 할머니의 옆자리에서 봤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모두 돌아가실 줄 알았더라면 좀더 많은 걸 함께 보고 이야기했을 텐데, 그때 내 나이의 두배가 되고서도 아직 후회한다. 아니, 할머니가 아직 살아 계시다면 지금 재밌게 할 수 있는 얘기가 더 많을 텐데, 그게 아쉽다
[최지은의 TVIEW] 푸근한 낭만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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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18일 이후 일기에는 <노예 12년>의 상세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86회 오스카 시상식은 중앙집중적으로 한치 오차 없이 통제된 쇼를 포기하고 SNS 시대에 호응하는 모험적인 연출을 시도했다. MC 엘렌 드제너러스는 무대보다 객석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스타들을 쉴 새 없이 조력자로 끌어들이고 셀카를 찍었으며, 급기야 돌비 시어터로 피자를 주문해 올림포스의 신들처럼 보이는 스타들도 3시간 넘는 중계를 시청하고 있는 당신들과 똑같이 배고픈 중생이라는 점을 세계 영화팬들에게 어필했다. 몸매만 봐서는 이날의 한 조각이 10년 만에 처음 먹는 피자였을 법한 배우들도 꽤 보였지만. ‘먹방’이란 단어가 만들어지기 오래전부터 먹는 연기의 달인이었던 <노예 12년>의 제작자 브래드 피트가 제일 신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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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몇살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내 인생 최초의 ‘호러 영상물’은 미국 노예사를 한 가문의 연대기로 극화한 TV시리즈 <뿌리>였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두번 보기 힘든, 한번만 볼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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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과 비정상을 나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가 처한 입장에 따라 혹은 가치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아가 동일한 행위도 그것이 놓인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 정상일 수도 있고 비정상일 수도 있다. 당연히 입고 다녀야 할 옷을 목욕탕 안에서 입고 있으면 ‘비정상’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생각은 고도의 지식이나 복잡한 논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정상의 정상화’란 말을 떡하니 정부의 주요 목표로 내세운다는 건 이러한 간단한 생각조차 하지 못했거나 혹은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밖엔 해석할 수 없다.
그럼 도대체 왜 이런 간단한 생각을 안 하거나 못한 걸까? 우선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기준이 정부와 국민이 동일하다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라고 정색하면서 묻는 표정이랄까? 혹은 그 기준에 동의하지 않는 국민이 있다고 해도 정부의 기준이 ‘옳기’ 때문에
[김진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비정상의 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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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극이 멜로와 로맨틱 코미디를 제치고 TV 미니시리즈의 단골 장르가 된 지 꽤 오래다. 억울함에 대한 대중적 공감을 출발선으로 삼고, 원한에서 비롯한 추진력으로 사적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도모하는 복수극의 주인공들은 초기엔 주로 죄 없는 희생양이 된 아버지를 대신해 심판에 나섰다. 그리고 장르가 반복과 깊이를 더해가는 동안 그들은 복수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악한 아버지와 대면하는 지점에 도달했으며, 돈이나 권력의 상징인 아버지들의 자리를 노리거나 사회적으로 고발하는 등 부조리의 원인으로 구세대를 지목하고 맞서는 중이다. 복수극으로 인한 냉소와 허무 끝에서 몇몇 드라마들은 무기력한 주인공이 재활하고 가족을 되찾는 이야기를 내놓았고, 사적 복수에 눈이 먼 자가 만들어낸 희생양의 가족으로 시점을 옮겨, 다시 사법 시스템을 통한 구명의 절차를 짚기도 했다.
어쩌면 복수를 테마로 한 이야기에서 뽑을 수 있는 단물은 다 빠진 게 아닌가 싶던 이즈막에 KBS 드라마 <태양은 가득히>
[유선주의 TVIEW] 복수 앞에서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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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파딜라 감독의 <로보캅>에는 위장을 메슥거리게 하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중상을 입은 경찰 알렉스 머피(요엘 신나만)가 로봇공학의 힘을 빌려 반인간 반기계로 거듭난 본인의 실체를 첫 대면하는 장면이다. 슈트가 천천히 벗겨지면 내부는 텅 비어 있다. 아니, 얼굴과 뇌, 척수와 폐, 그리고 오른손이 잔재로 남아 있다. 관객은 순간 알렉스가 느끼는 구토감을 공유한다. 신체 호러의 거장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찬조연출한 듯한 이 장면은, 이물감이나 통증 없이 인간과 천연덕스런 일체를 이루는 첨단 슈트 및 인공지능 로봇에 익숙해진 우리를 뒤흔든다. 기계와의 접합을 위해, 훼손을 면한 신체 일부도 절제했으리라는 짐작이 공포를 더한다. 이 장면은 <아이언맨3>에서 토니 스타크의 몸에 고분고분 날아와 붙는 슈트 조각의 경쾌한 이미지와 대척점에 있다. 아무리 자신의 뇌가 최종통제권을 갖는다고 해도 알렉스는 이 신체에 감금된 가엾은 수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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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 애덤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여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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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글들이 마음을 찡하게 하는 요즘이다. 첫 번째는 뜻밖에도 법원 판결문이다. 지난 2월 초, 쌍용차 정리해고가 부당했음을 판결한 판사가 읽어 내려간 판결문엔 ‘인내의 시간이 그리 길지 않기를 바란다’는 대목이 있었다. 아, 법정에서 읽히는 판결문이 이렇게도 따뜻할 수 있구나. 이런 시간이 좀더 빨리 왔더라면! 고통 속에 억울하게 숨져간 스물네분의 영정이 떠올라 더욱 가슴 아팠다.
두 번째는 한 시민의 편지글이다. 해고 무효 판결이 내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옥죄고 있는 손해배상금 47억원. 대다수 사람들에게 상상조차 어려운 이런 액수의 돈을 해고노동자들에게 배상하라고 하는 어이없는 현실의 바닥에는 무엇이 있나. 노동조합의 쟁의는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이다. 그런데 정당한 권리 행사에 자본은 손해배상 청구나 가압류 압박 등으로 실력행사를 한다. 천박하고 저열한 반윤리적 물신의 횡포. 이 과정에서 노동자 가족과 노조는 끔찍한 고통 속에 유린된다. 이 고통이 너무나
[김선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나눔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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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르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디어 아티스트 출신 스티브 매퀸 감독은 구도의 파괴력을 잘 안다. 때로는 지나치게. 매퀸의 숙고에서 비롯된 <노예 12년>의 몇몇 숏은 극장을 나온 뒤에도 계속 쑥쑥 자라나 가슴을 파고들고 뇌리에 우거진다. 노예가 된 솔로몬(치웨텔 에지오포)은 백인 감독에게 반항했다는 이유로 간신히 발끝만 땅에 닿도록 목이 매달린다. 버둥거리는 그의 등 뒤에서 다른 노예들은 일과를 계속하고 벌레가 울고 바람이 분다. 이것이 노예제도가 존재하는 평화로운 세계의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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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르윈>의 포크 싱어 르윈(오스카 아이작)은 고생스런 여행 끝에 유명 매니저 버드 그로스만(F. 머레이 에이브러햄) 앞에서 실력을 보일 기회를 얻는다. 르윈의 노래를 듣고 난 버드의 평은 명쾌하다. “솔로로는 안 되겠어. 듀엣이었다고? 재결합하게.” 그러나 르윈의 파트너는 자살했으며 르윈에게는 듀엣이건 트리오건 새로운 팀의 일원이 될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인사이드 <인사이드 르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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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새벽은 야만의 밤이었다. 경주 리조트 붕괴사건. 10명 사망에 다친 사람도 100명이 넘는다. 19살 신입생들이 캠퍼스의 봄도 못 보고 비명에 갔다. 눈밭 위에 구르는 운동화 사진, 심장이 저렸다. 무너진 지붕 밑에서 살려달라는 외침과 비명이 들린다고 했다. 어디 나뿐이었겠는가, 사망자가 더 늘지 말기를 기도하며 속보 채널에 귀를 기울였던 게.
하지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공중파 3사에서는 그 비극의 순간에 올림픽을 중계하고 있었다. 피겨 선수들이 빙글빙글 춤을 추고, 중계진이 들뜬 목소리로 희희낙락했다. 그리고 화면 하단의 속보 자막으로 사망자 숫자가 심드렁하게 지나갔다. 올림픽 기간 “김연아는 대한민국이다”라는 광고 카피를 주야장천 틀어대던 방송국들, 저기 경주에서 생사를 오갔던 어린 학생들은 대한민국이 아니었나 보다. 저들의 목숨은 소치의 빙판보다 덜 반짝거리나 보다.
비극적이게도, 어젯밤 저 공중파 TV야말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한국형 대형참사의 원인을 적나라하게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야만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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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내 주위에서도 불륜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던 A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상하게 덤덤한 얼굴을 했던 건 사실 너무 놀랐기 때문이었다. 현실은 의외로 KBS <사랑과 전쟁> 혹은 주말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천박한’ 불륜남녀와 닮아 있지 않았다. 평범하고 점잖은 그들에겐 현실의 벽을 불사를 만큼 열렬한 로맨스도 드라마틱한 이별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관계는 자연스레 알려졌고 힘없이 무너져 흐지부지 끝났다. 처음부터 그들의 관계를 몰랐던 사람이라면 영원히 모르고 지낼 만큼 겉으로는 변한 게 없었지만 가끔 생각한다. 그렇게 상처를 주고받은 사람은 그 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무것도 그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들은 도대체 무엇과 싸우고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이 혼란스런 주제에 대한 답에 가장 성실하게 접근한 드라마는 <사랑과 전쟁> 첫 시즌을 썼던 하명희 작가의
[최지은의 TVIEW] 서늘한 성찰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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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의 정중앙을 차지하는 꽃꽂이처럼, 영화에도 종종 센터피스 구실을 하는 장면이 있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의 오스카(마이클 B. 조던)는 집행유예 중인 청년이다. 너무 늦기 전에 좋은 아빠와 파트너, 아들이 되고 싶어 안달하지만, 남아 있는 나쁜 습관과 사회의 선입견 탓에 진전은 더디다. 영화가 담은 그의 힘든 하루 중 오스카는 길 잃은 온순한 개가 뺑소니 사고를 당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가해자는 자취를 감추고 결백한 피만 아스팔트를 적신다. 죽은 개에게 감정을 이입한 오스카가 가족사진을 응시하는 동안, 지금까지 중립적 기록자의 자세를 유지하던 영화는 잠시 숨을 죽이고 속도를 늦춤으로써 무언의 해석을 개입시킨다. 감독이 보는 인물의 DNA가 축약된 시퀀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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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집을 떠나 독립한 10여년 전 겨울, 나는 좁은 원룸에 입주할 책을 엄선하느라 책장 앞에서 고심을 거듭했다. ‘안데르센 동화전집’ 10권 중에서는 <주석병정>이 수록된 7권과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눈, 눈물, 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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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기간입니다. 저도 이제 마흔을 넘겼기에 하계, 동계 포함해서 십수 차례 올림픽 개회식을 봤습니다만 여전히 알쏭달쏭합니다.
저 사람들은 왜 저기서 하얀 천을 들고 뛰어다니는지, 왜 저기서 저렇게 단체로 굴러다니는지 방송국 아나운서나 어느 대학교 교수님의 해설을 들어봐도 여전히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개막식뿐만이 아니라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올림픽을 대하는 언론의 태도입니다. 좀더 세부적으로 말씀드리면 ‘올림픽 선수들에 대한 언론의 태도’입니다. 올림픽이 열릴 때면 TV나 신문이나 가릴 것 없이 모두 뜨겁습니다. 용광로에서 막 꺼낸 듯이 시뻘건 열기가 뿜어져 올라올 듯합니다. 태극전사, 낭자군단, 대첩, 승전보, 부상투혼 등. 단어로만 보며 멀리 적지로 떠난 병사들의 전투소식을 들려주는 듯합니다.
국가대표들이 외국에 나가 시합할 때 마치 전투상황을 중계하듯 종군기자처럼 기사를 쏟아내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 들어온 표현이라고 합니다. 내선일체를 고취시
[김남훈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전사’라 부르지 말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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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 선수의 새 쇼트프로그램 곡목을 듣고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어릿광대를 보내주오’라는 제목이 혹 어릿광대에 비유한 자신을 떠나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뜻이 아닐까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스티븐 손드하임 작사/작곡의 뮤지컬 넘버 <send in the clowns>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확신했던 남자의 마음이 자신과 같지 않음을 알게 된 여배우가 자신의 상황을 타이밍이 어긋나 망쳐진 무대에 비유하고 이를 수습할 어릿광대를 호출하는, 쓸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뭘 표현할지는 그녀의 몫이지만, 그간 얼음 위에서 보여준 다양한 모습을 회상하며 그제야 염치없이 감탄사를 보탰다. 그리고 기왕이면 다시 금메달을 따는 편이 그녀에게 더 좋은 일이리라 생각했다.
소치동계올림픽으로 은퇴를 앞둔 그녀의 지난 경기 영상이나 다시 봤으면 하던 차, 마침 설 연휴중에 방송된 다큐멘터리 <김연아, 챔피언>(KBS)은 이제껏 그녀를 다뤘던 어떤 다큐보다 담담한
[유선주의 TVIEW] 간증의 브라보는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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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10일, 11일 일기와 사진 설명에 <만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만찬>의 말미에는 거의 숙명처럼 보이는 폭설이 내린다. 관객은 외출한 인철의 가족이 귀가하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원하는 모순된 입장에 처한다. 그동안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이름도 모르는 형사들의 피로한 얼굴을 쳐다보게 만든다. 그러다 문득 우리는 이 익명의 남자들이 돌아갈 집과 거기 있을 가족을 상상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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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가장 유쾌한 한탕. 제대로 사기치고 화끈하게 즐겨라!”
나는 지금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보도자료 표지로도 인쇄된 한국판 포스터의 카피를 보고 있다. 이건 좀 세다. 문구에 힘입어 한국판 포스터의 조던 벨포트는 훨씬 동경할 만한 인물로 보인다. 이 카피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가 공개된 직후 <LA 위클리>에 항의 글을 투고한 금융사기 피해자 가족들에겐 보여주지 않는 편이 나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