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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와세다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가르치는 교수님, 그리고 10여명의 학생들을 학교로 초청하여 토론회를 열었다. 격년으로 중요한 현장을 직접 학생들과 방문한다는 교수님은 역시 언론인 출신이어서 그런지 내뱉는 말만은 소위 ‘야마’가 확실했다. 그가 던진 야마는 다름 아닌 ‘반지성의 시대’. 일본과 한국의 우경화 경향에 대해 그가 내린 진단이다. 좌우의 문제 혹은 진보,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현상은 ‘반지성’이 횡행하는 게 본질이라는 것. 지인의 소개를 통해 열게 된 토론회라서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 말 한마디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사실 ‘지성’이라고 하는 말이 주는 엘리트주의적 어감으로 인해 평소에 잘 사용하지도 않았다. 지성이 주는 위선적 느낌, 잘난 척에 대해 거부감이 많았고, 그래서 솔직한 ‘감성’을 프로그램에 담아내는 데 노력했다. 그런 이유로 내가 만든 <지식채널e>는 ‘감성 지식’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프로그램을 만들
[김진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반정치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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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둘뿐인 공간에서 ‘선생님의 남편이 선생님을 이름으로 부르고 같은 방을 쓴다니 기분이 이상하다’고 서툴게 말을 잇는 스무살 연하의 남자를 바라보는 마흔살 여자의 얼굴. 침착하려 애쓰는 표정 안쪽으로 사랑의 말들을 흡수하는 그 얼굴에 도리어 이쪽이 무언가를 들킨 것처럼 긴장하고 만다. 독학으로 재능을 쌓은 천재 피아니스트 이선재(유아인)나 서한그룹 예술재단 산하 아트센터의 기획실장 오혜원(김희애)처럼 범상치 않은 부류의 사랑에 공감의 숟가락을 얹기 뭣해서, 사바나 초원의 생태계 다큐인 양 거리를 두려 해도 쉽지가 않다. JTBC 드라마 <밀회>를 볼 때면 이런저런 감정 중 유독 수치심에 반응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 카메라는 혜원이 선재를 보는 시점으로 연하남의 수줍은 질투를 화면 가득 서비스하는 대신, 선재를 올려다보는 혜원이 어떻게 반응하고 언제 이성의 끈을 놓는지 측면에서 기록한다. 선재에게 달려들어 키스하고도 “나 지금 너 아주 무섭게 혼내준 거
[유선주의 TVIEW] 숨을 곳 없는 수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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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의 징후 중 하나는 여위어가는 표정이다. 나이가 들수록 얼굴은 감정의 진폭을 게을리 반영한다. 배우도 사람이니 늙어감에 따라 안면근육이 둔해진다. 다만 그들은 캐릭터에 따라 표정의 스펙트럼을 좁혔다 넓힐 수 있다. 강제로 입양된 아들을 수십년 뒤 찾아나서는 <필로미나의 기적>의 주인공 필로미나는, 낙천적 천성과 신앙으로 끔찍한 슬픔을 쓸어 담으며 살아온 할머니다. 그녀를 연기하는 주디 덴치의 클로즈업은, 특정 표정과 감정이 관련돼 있다는 상식을 깨끗이 뒤엎는다. 배우가 생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관객에게 충분히 전달된다는 연기의 설화를 그녀의 필로미나가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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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만화가, 감독을 가족 친지로 두는 일은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진배없다는 평소 믿음이 사라 폴리 감독의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를 보면서 확고해졌다. 우선 픽션일 경우, 극중 캐릭터의 말과 행동에서 내 모습의 일부를 발견한다고 치자. 작가/감독이 아무리 “넌 영감을 줬을 뿐이야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옛날 옛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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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땐 <9시 뉴스>가 정말 싫었다. 저런 재미없는 걸 매일 보는 어른들의 세계가 불쌍했다. 뉴스 따위 몰라도 부채감 없이 마냥 행복했던 내 인생의 파라다이스는 유년기에 끝났다. 별별 사건사고로 시작해 정권의 입맛에 맞춰 조작, 찬양, 고무되는 용비어천가 뉴스로 마감하는 일상. 때로 뉴스를 꺼버리고 귀를 씻어야 삶의 수분이 간신히 조절되는 불행한 시절을 참 오래도 견디는 중이다. 아예 뉴스를 끄고 살면 좋겠지만, 동시대 삶에 대한 ‘그놈의 부채감’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 벌써 여러 해째 지상파 뉴스의 ‘의도적 무뇌충’ 수위가 심해지는 상황에 설상가상 요즘은 식당이나 터미널 등 공공장소에서 <TV조선> 같은 종편을 틀어놓는 곳들이 부쩍 눈에 많이 띈다. 도대체 ‘언론’이라 칭할 수 없는 것들이 ‘언론’의 이름으로 대중 속에 파고드는 속도, 무섭다.
봄이 오는데! 맘껏 아름다워진 꽃나무들을 찾아다니며 사랑고백을 만끽하기에만도 봄 한철은 너무나 짧고 아쉬운데
[김선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새’ 뉴스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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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이란 묘한 장르다. 보는 사람들은 이야기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고, 조금만 자료를 뒤져보면굵직굵직한 사건마다의 승자와 패자 또한 쉽게 알 수 있다. 등장인물 자체가 스포일러라는 농담은 그래서 나온다. 과거의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가상의 인물들이 한복을 입고 나오는 퓨전사극,혹은 역사적 사실을 조합해 흥미로운 가설을 만들어내는 팩션사극은 좀 다르지만 사료를 바탕으로 한 이른바 ‘정통사극’의 길은 운신의 폭이 좁은 만큼 험난하다. 까다로운 고증을 거치며 역사왜곡을 피해가면서도 지루해선 안 된다. 세상과 드라마 시장과 시청자의 기호는 빠르게 변해가지만 사극이 활용할 수 있는 재료는 과거의 그 시대에 멈춰 있다. 결국 과제는 더욱 까다로워진다. 어떻게 동시대와 호흡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 것인가.
KBS <정도전>은 모처럼 묵직한 무게감과 이야기의 재미를 동시에 갖추고 나온 대하사극이다. 국사 시간에는 “태정태세 문단세”를, 국어시간에는 <하여가>와 <단
[최지은의 TVIEW] 이것이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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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추격전은 마담 D가 구스타브(레이프 파인즈)에게 상속한 16세기 거장 요하네스 반 호이틀의 작품 <사과를 든 소년>으로 말미암아 벌어진다.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영향을 받은 북유럽 화풍을 따르는 이 초상화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전체가 그렇듯 ‘정교하게 발명된 역사’다. 반 호이틀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은 감독의 작명이고 실제로는 영국 화가 마이클 테일러가 앤더슨의 구체적 의뢰를 받아 실제 모델을 두고 그림을 완성했다. 극중에서 <사과를 든 소년>을 훔친 자리에 걸어두는 얼핏 에곤 실레의 실패작처럼 보이는 그림 역시 ‘실레풍’의 누드를 의뢰받은 현대 화가 리치 펠레그리노의 패러디 그림이다. 모르긴 해도 10년 안에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팀 버튼에게 헌정한 것과 유사한 웨스 앤더슨 전시회가 열릴 거라는 예측에 내가 소장한 앤더슨 영화 DVD를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고양이와 개에 관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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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인디포럼영화제 역사 19년 동안 다른 영화제와 일정이 젓가락처럼 이렇게 딱 붙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개막일도 같고, 폐막일도 같다. 심지어 서울에서 두 영화제가 동시에 치러진다. 아니나 다를까, 두 영화제 일정이 똑같은 것에 혼란을 느낀 관객의 불만이 서서히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바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두달 전부터 사무국을 통해 웬만하면 일정은 서로 피해주는 게 이쪽의 상도이자 예의라고 거듭 촉구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대답만 빈 접시처럼 돌아왔다. 맙소사, 하나의 은유를 빗대자면, 근근이 벌어먹고 사는 골목 상권에 어느 날 갑자기 자리를 꿰차고 들어오는 대형 마트의 위용이랄까. 규모로 보나 인지도로 보나 급이 다른 두 영화제가 길 하나를 두고 같은 날 좌판을 벌여야 하다니, 동네 슈퍼같은 인디포럼 입장으로선 몹시 곤혹스럽다. 관객층도 적잖이 겹친다. 아찔하다.
물론 영화제 일정이 법으로 규제된 것도 아니고, 사정상 일정을 변경하는 건 흔한 일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영화제 상생의 기본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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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선 역할을 하는 단서나 진상을 감추고 일부만 드러내는 트릭을 세간에선 ‘떡밥’이라 부른다. 보는 이의 기대와 호기심을 가불해다 쓴 떡밥은 해명이 정교하지 못하면 자연히 실망을 부른다. 그런데 대체 어쩔 셈인가 걱정스러울 정도로 많은 떡밥을, 그것도 보란 듯이 던지는 드라마가 있다.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시간을 거슬러 운명을 바꾸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 SBS 드라마 <신의 선물-14일>이다.
시사프로그램 작가 김수현(이보영)과 그녀의 딸 샛별(김유빈)은 ‘데스티니’라는 이름의 카페에서 폴라로이드를 찍고, 여주인에게 ‘조만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되며,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 끝나는 운명’이라는 불쾌한 예언을 듣는다. 이를 발단으로 카메라는 이들 가족의 주변 인물과 사건 사고 하나하나에 의미심장하게 머문다. 애인과 다투던 수현의 후배작가, 사형제 폐지 입장을 밝힌 수현의 남편 인권변호사 한지훈(김태우)과 그에게 오물을 던지는 피해자 유가족. 학교 앞 문방구
[유선주의 TVIEW] 떡밥으로 끝나지 말아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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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웨스 앤더슨 감독의 첫 호텔 영화는 아니다. <다즐링 주식회사> 의 프롤로그로 공개된 13분 길이의 소품 <호텔 슈발리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코디네이션을 고집하는 앤더슨의 영화로서는 드물게 벌거벗은 감정을 담은 작품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과거의 사연을 가진 남녀(제이슨 슈워츠먼, 내털리 포트먼)가 한 호텔에서 계획되지 않은 재회를 한다. 그리고 미처 묻지 못한 것들을 묻는다.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둘 중 한 사람이 이 호텔에서 잊기 힘든 대사를 남겼다. “난 절대 당신의 친구는 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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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좀 막 다뤄주세요.”
내가 만약 고(故) 다이애나 왕자비라면, 그녀 특유의 눈치 보듯 상대를 올려다보는 사슴 같은 눈망울로 영화 <다이애나>의 올리버 히르비겔 감독에게 청원했을 것 같다. 이 영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죽은 귀족들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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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있지 않습니까. 감이란 거. 이거 정말 무시할 수 없는 겁니다. 스마트폰의 LED가 번쩍입니다. 메일이 왔다는 걸 알려주는 거죠.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합니다. 전기신호고 들고 나면서 점멸이 일어나는 것뿐인데 묘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이럴 때 메일을 열어보면 어김없습니다. ‘출전요청메일.’ 전화도 마찬가집니다. 연애를 경험해본 분들은 잘 아시잖아요? 지금 내가 걸고 있는 이 전화, 분명 받아야 할 타이밍인데 안 받습니다. 그리고 지금 걸려오는 전화, 뭔가 느낌이 이상합니다.
지난 토요일이었을 겁니다. 제 빨간색 소니 티포 스마트폰이 부르릉거리면서 전화가 왔음을 알려주는데, 책상 전체를 진동시키면서 떨리는 그 품새가 예사롭지가 않은 겁니다. 스피커를 귀에 대고 목소리를 들어보니 <씨네21> 담당기자였습니다. 그러며 마감엄수를 이야기하는데 통상적인 전화내용이기에 더욱 어색했습니다. 왜냐하면 마감을 넘기기 전에 이런 전화를 받은 것이 처음이었거든요. 이거 뭔가 ‘히든
[김남훈의 디스토피아로부터] 파이터는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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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살 무렵까지는 할머니 방에서 드라마를 봤다. SBS <옥이이모>, KBS <서울뚝배기>, MBC <사랑이 뭐길래>처럼 시골 동네가, 오만 사람들이, 시끌벅적한 가족이 나오는 이야기들이었다. 노년에 고향을 떠나 거동이 불편한 남편과 함께 낯선 도시의 좁은 아파트에 들어와 살게 되신 할머니는 TV 속의 사람 구경을 좋아하셨다. 야물딱지게 사투리를 쓰는 꼬맹이들의 논두렁 등하굣길도, 고운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던 아가씨가 드디어 착한 짝을 만나 시집가는 날도, 간신히 입에 풀칠할 만큼 벌면서도 허풍에 배가 터지던 사내들이 술에 취해 골목길을 비틀대며 신세한탄하는 모습도 할머니의 옆자리에서 봤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모두 돌아가실 줄 알았더라면 좀더 많은 걸 함께 보고 이야기했을 텐데, 그때 내 나이의 두배가 되고서도 아직 후회한다. 아니, 할머니가 아직 살아 계시다면 지금 재밌게 할 수 있는 얘기가 더 많을 텐데, 그게 아쉽다
[최지은의 TVIEW] 푸근한 낭만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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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18일 이후 일기에는 <노예 12년>의 상세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86회 오스카 시상식은 중앙집중적으로 한치 오차 없이 통제된 쇼를 포기하고 SNS 시대에 호응하는 모험적인 연출을 시도했다. MC 엘렌 드제너러스는 무대보다 객석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스타들을 쉴 새 없이 조력자로 끌어들이고 셀카를 찍었으며, 급기야 돌비 시어터로 피자를 주문해 올림포스의 신들처럼 보이는 스타들도 3시간 넘는 중계를 시청하고 있는 당신들과 똑같이 배고픈 중생이라는 점을 세계 영화팬들에게 어필했다. 몸매만 봐서는 이날의 한 조각이 10년 만에 처음 먹는 피자였을 법한 배우들도 꽤 보였지만. ‘먹방’이란 단어가 만들어지기 오래전부터 먹는 연기의 달인이었던 <노예 12년>의 제작자 브래드 피트가 제일 신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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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몇살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내 인생 최초의 ‘호러 영상물’은 미국 노예사를 한 가문의 연대기로 극화한 TV시리즈 <뿌리>였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두번 보기 힘든, 한번만 볼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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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과 비정상을 나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가 처한 입장에 따라 혹은 가치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아가 동일한 행위도 그것이 놓인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 정상일 수도 있고 비정상일 수도 있다. 당연히 입고 다녀야 할 옷을 목욕탕 안에서 입고 있으면 ‘비정상’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생각은 고도의 지식이나 복잡한 논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정상의 정상화’란 말을 떡하니 정부의 주요 목표로 내세운다는 건 이러한 간단한 생각조차 하지 못했거나 혹은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밖엔 해석할 수 없다.
그럼 도대체 왜 이런 간단한 생각을 안 하거나 못한 걸까? 우선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기준이 정부와 국민이 동일하다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라고 정색하면서 묻는 표정이랄까? 혹은 그 기준에 동의하지 않는 국민이 있다고 해도 정부의 기준이 ‘옳기’ 때문에
[김진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비정상의 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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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극이 멜로와 로맨틱 코미디를 제치고 TV 미니시리즈의 단골 장르가 된 지 꽤 오래다. 억울함에 대한 대중적 공감을 출발선으로 삼고, 원한에서 비롯한 추진력으로 사적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도모하는 복수극의 주인공들은 초기엔 주로 죄 없는 희생양이 된 아버지를 대신해 심판에 나섰다. 그리고 장르가 반복과 깊이를 더해가는 동안 그들은 복수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악한 아버지와 대면하는 지점에 도달했으며, 돈이나 권력의 상징인 아버지들의 자리를 노리거나 사회적으로 고발하는 등 부조리의 원인으로 구세대를 지목하고 맞서는 중이다. 복수극으로 인한 냉소와 허무 끝에서 몇몇 드라마들은 무기력한 주인공이 재활하고 가족을 되찾는 이야기를 내놓았고, 사적 복수에 눈이 먼 자가 만들어낸 희생양의 가족으로 시점을 옮겨, 다시 사법 시스템을 통한 구명의 절차를 짚기도 했다.
어쩌면 복수를 테마로 한 이야기에서 뽑을 수 있는 단물은 다 빠진 게 아닌가 싶던 이즈막에 KBS 드라마 <태양은 가득히>
[유선주의 TVIEW] 복수 앞에서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