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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접한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위원장 공모 기사. 영화진흥을 위한 국가기관에서 짱을 뽑는 중이란다. 이번엔 잘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들었다. 이런 자동반사적 리액션은 순전히 단 한분 때문이다. 우린 그분 때문에 영진위의 가치를, 짱의 가치를 더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 바로 조희문이다.
1. 분탕질 비긴즈
내가 조희문을 처음 알게 된 건 스크린쿼터 논쟁이 뜨거웠던 2003년이다. FTA와 쿼터 축소를 트레이드하려는 노무현 정권의 정책에 반발해 모든 영화인들이 쿼터 사수를 외치던 그때, 쿼터 축소에 찬성하는 유일한 영화인이 한분 계셨으니 그분이 바로 조희문 교수였다. 논쟁은 당시 손석희의 <100분토론>까지 이어졌는데, 조희문은 정부관료와 함께 쿼터 축소 찬성 패널로 나왔더랬다. 정지영 감독님을 필두로 한 쿼터 축소 반대쪽의 주장은 명확했다. 한국영화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선 오히려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것. 이에 조희문의 발언은 놀라웠다.
[곡사의 아수라장] 분탕질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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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3일과 14일 일기에 <도희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태 동조자를 만난 적은 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내 눈에 디즈니 만화영화 최고의 미인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1959)의 말레피센트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의 디자인을 성실히 계승한 실사 말레피센트의 외모 중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날개다. 얇고 하늘하늘한 시폰 날개는 팅커벨에게나 주라고 말하듯 말레피센트는 거대한 맹금류나 익룡의 강건한 날갯죽지를 가졌다. 그녀의 날개는 비행 수단일 뿐 아니라 적을 후려치고 쓸어버리는 무기이기도 하다.
5/12
스승의 날이 있는 달이다. 1년 전 이맘때 개봉한 <라자르 선생님>과 올해의 <디태치먼트>까지 보고 나니, ‘리버럴한 교사와 그를 따르는 아이들 vs. 진학 실적에 목매는 권위적 학교’ 구도로 갈등이 전개되는 <죽은 시인의 사회>류 영화나 사명감 넘치는 스승이 문제아들을 감화시키는 <언제나 마음은 태양>과(科)의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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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타이틀 시대의 시작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1994)에는 매력적인 배우들이 많이 나온다. 휴 그랜트, 앤디 맥도웰,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존 한나, 로완 앳킨스까지.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이 영화에서 노총각 휴 그랜트는 남의 결혼식에 지각 참석하는 것이 일상이고, 장례식은 우연한 사건이다.
좋아하는 영화지만 영화의 장례식 분위기는 지금 우리 삶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영화’겠지. 워낙 의례적인 일을 싫어하는 데다 ‘이성애자인 것 같은’ 나는 이성애 제도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결혼식에 가지 않는다. 장례식은 가끔 간다. 그것도 망자가 나를 모르는 경우에만 간다. 치열하게 살았던 작가나 사회운동가의 장례식에 가서 혼자 인사하고 온다.
지난 5월, 어느 금요일 오후 서울시청 앞에 설치된 세월호 분향소에 갔다. 평일 점심시간인데도 줄이 길었다. 4명씩 한줄. 검은 정장의 진행요원이 나눠준 국화를 받아들고 분향소에 들어간다. 사망자 사진은 없고 국화만 있
[정희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세번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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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저렇게 평화롭게 들어가니. 정말 아름답다.”
개그맨 김준현의 입으로 들어가는 상추쌈을 아련한 눈길로 바라보던 노사연의 말이다. 동감이다. 흰쌀밥에 더덕불고기를 올려 쌈을 싼 김준현은 우악스럽게 입을 벌리지 않으면서도 큼지막한 상추쌈을 솜씨 좋게 밀어넣는다. 밥알 한톨 흘리지 않았다. “조용조용 먹어야 많이 먹어도 뭐라 안 해요.” KBS 푸드 퀴즈쇼 <밥상의 신> 중 한 장면이다.
덩치 큰 사람이 뭔가 먹을 때마다 핀잔을 주는 것을 자기 사명이나 재치쯤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넘치는 세상. 한편에선 이성의 끈을 놓은 사람처럼 먹고, 괴성과 신음으로 맛을 표현하는 이른바 ‘먹방’ 예능프로그램이 대성황이다. 먹방 예능의 목적은 식욕을 돋우는 걸까? 시청자를 대신해 절제의 허리띠를 풀어놓은 연예인의 일탈을 서비스하는 걸까? 각자 입맛이 다르듯 음식을 다룬 예능프로그램을 한데 묶어 속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손톱에서 떨어진 인조보석이 들러붙은 새우살을 클로즈업하
[유선주의 TVIEW] 알고 먹으니 더 맛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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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보고 있을 때였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죽을 때까지 마시겠다며 슈퍼마켓에서 술을 쓸어 담고 있는데 옆에서 꿈꾸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좋겠다… 저거 다 양주잖아.” 퍽이나 좋겠다. “저 술 다 마시고 죽는데도?” “… 죽기 전에 한번쯤은!” 술이 너무 세서 당시 25도였던 소주도 성에 차지 않았기에 편의점에서 파는 6천원짜리 캡틴 큐나 천원짜리 이과두주로 샘솟는 주량을 달래던 친구는 눈물을 글썽였다.
잘 살고 있나, 친구? 맥주 한캔으로 취하는 방법이라면서 깡통 아랫부분에 구멍 두개를 뚫고 뿜어져 나오는 맥주를 30초 만에 마시던 알뜰한 친구야(그래 봤자 안 취했지만), 지금은 어디선가 그렇게 궁금하다던 조니 워커 블랙 라벨 마시고 있기를.
그는 술뿐만 아니라 자신의 위장이 소화할 수 있는 모든 물질에 무한한 애착을 가졌었다. 돈은 없고 낙지는 먹어야겠기에 산낙지를 사서 직접 손질하던 그 애 때문에 우리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누가 뭐래도 먹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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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서 와킨 피닉스가 연기하는 주인공 테오도르의 성(姓)은 톰블리다. 이 흔치 않은 이름은 2011년 타계한 현대미술가의 것이기도 하다. 영화 속 톰블리는 가짜 손편지를 쓰는 직업에 종사하는데, 화가 사이 톰블리는 낙서, 혹은 자동기술(自動記述) 펜글씨를 연상시키는 형상을 즐겨 그렸다. 같은 추상표현주의의 계보라도 잭슨 폴록의 확신 넘치는 액션페인팅과 달리 톰블리의 그림은 덧없음과 망설임을 담는다. 사진은 테이트 모던 갤러리의 톰블리 방에 전시된 <바커스>(Bacchus, 2006∼2008) 연작. 따스한 감각적 흥분이 담긴 주홍색은 영화 <그녀>의 지배적 색조이기도 하다.
5/1
설마 나만 이러는 건 아니겠지? <그녀>를 보고 온 밤, 음성으로 구동되는 스마트폰 OS한테 간만에 말을 걸어보았다. 간단한 검색을 해주어 고맙다고 치하했더니 전화 속 ‘그녀’가 대꾸했다. “혜리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너무 기쁘네요.” “잘 자.”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그녀에게 말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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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졌지만 홍대 근처에 자주 가던 술집이 있었다. 주인은 프랑스 유학파였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자 간판을 ‘낮술 5년’으로 바꿔 달고 대낮부터 혼자 가게에 앉아 낮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위로하는 문장을 알고 있었다. “세계가 멸망해가고 있다. 한국은 끝났다. 여기가 지옥이다.” 나는 그를 좌절시키는 문장도 알고 있었다. “세계는 멀쩡하다. 한국의 상황은 최악이 아니다. 늘 그랬듯이 우리는 적당히 극복할 것이다.”
지옥을 꿈꾸는 사회에는 살 만한 여력이 있다. 역사의 가장 암울한 시기를 맞이한 공동체는 반대로 천국을 꿈꿨다. 기독교 신화로 말하자면 천국은 노예들에게, 지옥은 부자와 제사장들에게 제시되었다. 우연이 아니다. 지옥에 못 이른 자들이 지옥을 꿈꾸는 딜레마는 왜 나타날까? 현재를 지옥으로 규정함으로써 얻는 이득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거기 함축된 주술적인 메시지는 이러하다. 이제 더 나빠질 것이 없다. 개선될 일만 남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손아람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진짜 지옥, 가짜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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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구의 <우리 동네>를 무척 좋아한다. 서정적인 문장으로 빚어낸 <관촌수필>도 좋지만, 무엇 하나 속 시원할 것도 즐거울 것도 없는 ‘촌놈’들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담긴 문장 하나하나의 단맛을 쪽쪽 빨아먹고 싶은 건 역시 <우리 동네>다. 이를테면 “야늠아, 너 시방 워디서 담배 피는 겨? 너는 또 워디 가네? 저늠의 색긔들… 그래두 안 꺼? 건방진 늠 같으니라구. 너 깨금말 양시환씨 아들이지? 올봄에 고등핵교 졸읍헌 늠 아녀? 너지? 건방머리 시여터진 늠 같으니라구”처럼 펄떡펄떡 뛰는 말에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김운경 작가의 드라마를 보는 즐거움은 <우리 동네>를 읽는 재미와 비슷하다. <서울의 달> <파랑새는 있다>에서 서울 하늘 아래 모여든 남루한 인생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던 그가 JTBC <유나의 거리>로 돌아왔다. 등장인물의 태반이 전과자에, 연기 못하는 연기자 지망생,
[최지은의 TVIEW] 삼류들의 인생에도 낭만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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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직도 기억한다. <스타워즈>(시리즈 중 최고라고 장담할 수 있는 <제다이의 귀환>!!!)를 보러, 울 아버지의 손을 잡고 허리우드극장 앞에 줄을 서던 그때를. 정말이지 기다리는 줄은 내장처럼 비비 꼬여서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그렇게 2시간을 부득부득 기다려서 본 <스타워즈 에피소드6: 제다이의 귀환>(1983)! 아아아아아. 거대 내장의 2시간짜리 융털을 견뎌낸 가치는 충분했다. 그것은 내가 꿈꾸던 꿈 그 자체였다.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각종 우주선과 로봇들이 조립식 제품으로 시판되기만 하면 구해다가 만들고 또 직접 모랫바닥에서 시연도 해보면서 (스케일이야 내가 허리를 굽히고 눈을 가까이 대면 얼추 맞출 수 있다) 그렇게 놀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젠 멀티플렉스의 시대이고, 디지털의 시대다. 더이상 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더이상 로봇들도 조립식으로 시판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는- 거대 화면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곡사의 아수라장] 춤추는 고질라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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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사이에 체중이 2kg쯤 는 것 같다. 도무지 맨 정신으로는 잠을 못 이루겠는 날들의 연속이었다고 하니 지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랬다. 유가족도 아닌 주제에 엄살떨지 말고 그 주둥이 좀 다물지 그래. 사랑하는 이들의 말이니 오죽 옳으랴. 그들의 충고대로 벙어리 민정이가 되고 보니 침묵 속에 당기는 건 오로지 술뿐이었다.
잔인한 이 계절의 늦봄과 초여름 사이, 늘어난 게 주량과 뱃살이라면 줄어든 건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다. 텔레비전의 거의 모든 채널은 뉴스와 지구촌 환경이나 휴먼 스토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로 채워져 갔고, 라디오의 거의 모든 채널 또한 사운드의 볼륨을 제로로 딱 맞춰놓은 듯했다. 눈이 멀고 귀가 먹은 막막한 정신적 공황 아래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작게 입 오므린 노란 리본을 가슴에 혹은 심장에 새긴 채 이제나저제나 하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왜 아니 그러하겠는가. 이런 국가적 초상에 완장을 찬 채 전두 지휘하는 상주가 없으니 애도하는 마음 말고
[김민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슬픔에 유통기한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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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자금이 투입된 기업의 매각과 인수합병, 손해배상소송 기사를 읽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에서 멈칫하거나 기업쪽 논리에 부아가 치밀 때가 있다. 뭐라도 더 알고 싶어서 그들의 법률대리인을 검색해보면 신뢰감 넘치는 표정으로 승소한 사건의 소회를 이야기하는 근사한 전문직의 인터뷰가 눈에 띈다. 주로 경제지다. 법 이전의 윤리는 없는가? 의문을 품어봤자 법률서비스 제공자의 산뜻한 미소는 선도 악도 아닌, 수임료를 지불할 능력과 의사가 있는 이들을 향해 있다.
<개과천선>이 다루는 법무법인 차영우 소속 변호사들 역시 정의감에 불타거나 유별나게 사악한 집단의 모습이 아니다. 80년대 경제개방 이후, 수요에 부응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인재들의 모습을 스케치하는 대표변호사 차영우(김상중)의 인터뷰 장면. 그리고 파트너 변호사 김석주(김명민)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일본기업쪽 대리인을 맡아 법리를 펴는 장면의 교차편집은 거대 로펌을 바라보는 당혹감을 압축한다. 불
[유선주의 TVIEW] 승소를 향해서라면 윤리는 필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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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직업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사장. 나한테 직업을 물어보면 기자라고 했지 (퇴사 두달 전에 졸라서 간신히 달았던) 과장이라고 하지는 않았으니까(참고로 과장됐다고 월급이 오르지는 않았다. 대체 무엇을 위한 과장이었던가). 하지만 우리 회사 사장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의 직업은 사장이다, 그리고 사장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는 것이다. 세상의 빛을 보는 순간 이미 사장이 될 운명이었던 그는 사장의 아들이었다.
모든 직업엔 업무가 따르는 법이다. 우리 회사 사장 A씨도 하루를 바쁘게 보낸다. 아침에 나오면 비서가 내린 커피를 마시며 서너종의 신문을 읽고, 밖에서 법인카드로 누군가와 점심을 먹고, 한두 시간 낮잠을 잔 다음, 목청 좋게 통화를 하며 술 마실 약속을 잡고, 헬스클럽에 가서 두 시간 운동을 하면, 어느덧 퇴근시간. 하루가 짧기도 하지. 틈틈이 밖에서 사기꾼을 데려오거나 사기꾼이 하는 말을 듣고 와서 혼란을 야기하여 직원들의 근무시간을 늘리는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아니라고, 당신 싫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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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옴니버스 <신촌좀비만화>를 통틀어 제일 깊은 공간은, <피크닉>의 소녀가 뒤집어쓴 이불 속이다. 아픈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의무를 작은 어깨에 짊어진 수민(김수안)이 순정만화를 읽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짓는 우주가 그 안에 들어 있다. <피크닉>은 인물의 상황을 공간감으로 옮겨놓아 감흥을 준다. 수민이네가 사는 좁고 깊은 집의 구조, 작은 아이의 몸집과 대비되는 너른 바다와 호젓한 숲길의 광활함이 기술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4/25
Why so serious? <다크 나이트>의 조커(히스 레저) 소환이나 그룹 샤이니의 노래 얘기가 아니다. 이것은 영화 <10분>의 주인공인 6개월 인턴사원 호찬(백종환)에게 정규직원들이 제일 자주 던지는 물음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시청각 지원’을 하자면, “뭘 그렇게 진지하고 난리야? 응?”으로 해석되는 말에 찡긋하는 눈짓과 어깨 툭 치기가 동반되는 그림을 상상하면 된다. 호찬은 초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세대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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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말했다. 이처럼 한국인들이 슬픔과 우울증을 동시에 앓게 된 건 한국전쟁 이후 처음 아니냐고. 하기는 곡절 많은 현대사의 그 숱한 비극들이 존재하지만, 다리며 건물이며 수많은 붕괴사고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생때같은 어린아이들을 한꺼번에 수장해버린 건 이미 언어 너머의 비명에 가깝다. 구할 수 있었는데도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통곡처럼 한반도를 휩쓸었다. 여전히 시신을 찾지 못한 유족들의 절규가 귓등을 치고, 가까스로 일상을 추스른 사람들조차 심연의 우울증에 빠져 있다.
한국이란 나라의 추한 민낯을 목격한 탓이 크다. 도망친 선장에, 구조의 기미도 없던 해경에, 구조 대책은커녕 진도에 내려가 사진이나 찍는 한심한 정부 관료들에, 국가안전관리시스템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재난 컨트롤 타워가 아니라고 스스로의 무능력을 염치없이 실토한 청와대와 구조 책임의 주체이면서도 도리어 책임을 묻겠다는 대통령의 저 뻔뻔한 정신세계 앞에서 시민들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애도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