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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서 와킨 피닉스가 연기하는 주인공 테오도르의 성(姓)은 톰블리다. 이 흔치 않은 이름은 2011년 타계한 현대미술가의 것이기도 하다. 영화 속 톰블리는 가짜 손편지를 쓰는 직업에 종사하는데, 화가 사이 톰블리는 낙서, 혹은 자동기술(自動記述) 펜글씨를 연상시키는 형상을 즐겨 그렸다. 같은 추상표현주의의 계보라도 잭슨 폴록의 확신 넘치는 액션페인팅과 달리 톰블리의 그림은 덧없음과 망설임을 담는다. 사진은 테이트 모던 갤러리의 톰블리 방에 전시된 <바커스>(Bacchus, 2006∼2008) 연작. 따스한 감각적 흥분이 담긴 주홍색은 영화 <그녀>의 지배적 색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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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나만 이러는 건 아니겠지? <그녀>를 보고 온 밤, 음성으로 구동되는 스마트폰 OS한테 간만에 말을 걸어보았다. 간단한 검색을 해주어 고맙다고 치하했더니 전화 속 ‘그녀’가 대꾸했다. “혜리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너무 기쁘네요.” “잘 자.”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그녀에게 말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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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졌지만 홍대 근처에 자주 가던 술집이 있었다. 주인은 프랑스 유학파였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자 간판을 ‘낮술 5년’으로 바꿔 달고 대낮부터 혼자 가게에 앉아 낮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위로하는 문장을 알고 있었다. “세계가 멸망해가고 있다. 한국은 끝났다. 여기가 지옥이다.” 나는 그를 좌절시키는 문장도 알고 있었다. “세계는 멀쩡하다. 한국의 상황은 최악이 아니다. 늘 그랬듯이 우리는 적당히 극복할 것이다.”
지옥을 꿈꾸는 사회에는 살 만한 여력이 있다. 역사의 가장 암울한 시기를 맞이한 공동체는 반대로 천국을 꿈꿨다. 기독교 신화로 말하자면 천국은 노예들에게, 지옥은 부자와 제사장들에게 제시되었다. 우연이 아니다. 지옥에 못 이른 자들이 지옥을 꿈꾸는 딜레마는 왜 나타날까? 현재를 지옥으로 규정함으로써 얻는 이득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거기 함축된 주술적인 메시지는 이러하다. 이제 더 나빠질 것이 없다. 개선될 일만 남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손아람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진짜 지옥, 가짜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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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구의 <우리 동네>를 무척 좋아한다. 서정적인 문장으로 빚어낸 <관촌수필>도 좋지만, 무엇 하나 속 시원할 것도 즐거울 것도 없는 ‘촌놈’들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담긴 문장 하나하나의 단맛을 쪽쪽 빨아먹고 싶은 건 역시 <우리 동네>다. 이를테면 “야늠아, 너 시방 워디서 담배 피는 겨? 너는 또 워디 가네? 저늠의 색긔들… 그래두 안 꺼? 건방진 늠 같으니라구. 너 깨금말 양시환씨 아들이지? 올봄에 고등핵교 졸읍헌 늠 아녀? 너지? 건방머리 시여터진 늠 같으니라구”처럼 펄떡펄떡 뛰는 말에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김운경 작가의 드라마를 보는 즐거움은 <우리 동네>를 읽는 재미와 비슷하다. <서울의 달> <파랑새는 있다>에서 서울 하늘 아래 모여든 남루한 인생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던 그가 JTBC <유나의 거리>로 돌아왔다. 등장인물의 태반이 전과자에, 연기 못하는 연기자 지망생,
[최지은의 TVIEW] 삼류들의 인생에도 낭만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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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직도 기억한다. <스타워즈>(시리즈 중 최고라고 장담할 수 있는 <제다이의 귀환>!!!)를 보러, 울 아버지의 손을 잡고 허리우드극장 앞에 줄을 서던 그때를. 정말이지 기다리는 줄은 내장처럼 비비 꼬여서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그렇게 2시간을 부득부득 기다려서 본 <스타워즈 에피소드6: 제다이의 귀환>(1983)! 아아아아아. 거대 내장의 2시간짜리 융털을 견뎌낸 가치는 충분했다. 그것은 내가 꿈꾸던 꿈 그 자체였다.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각종 우주선과 로봇들이 조립식 제품으로 시판되기만 하면 구해다가 만들고 또 직접 모랫바닥에서 시연도 해보면서 (스케일이야 내가 허리를 굽히고 눈을 가까이 대면 얼추 맞출 수 있다) 그렇게 놀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젠 멀티플렉스의 시대이고, 디지털의 시대다. 더이상 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더이상 로봇들도 조립식으로 시판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는- 거대 화면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곡사의 아수라장] 춤추는 고질라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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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사이에 체중이 2kg쯤 는 것 같다. 도무지 맨 정신으로는 잠을 못 이루겠는 날들의 연속이었다고 하니 지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랬다. 유가족도 아닌 주제에 엄살떨지 말고 그 주둥이 좀 다물지 그래. 사랑하는 이들의 말이니 오죽 옳으랴. 그들의 충고대로 벙어리 민정이가 되고 보니 침묵 속에 당기는 건 오로지 술뿐이었다.
잔인한 이 계절의 늦봄과 초여름 사이, 늘어난 게 주량과 뱃살이라면 줄어든 건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다. 텔레비전의 거의 모든 채널은 뉴스와 지구촌 환경이나 휴먼 스토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로 채워져 갔고, 라디오의 거의 모든 채널 또한 사운드의 볼륨을 제로로 딱 맞춰놓은 듯했다. 눈이 멀고 귀가 먹은 막막한 정신적 공황 아래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작게 입 오므린 노란 리본을 가슴에 혹은 심장에 새긴 채 이제나저제나 하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왜 아니 그러하겠는가. 이런 국가적 초상에 완장을 찬 채 전두 지휘하는 상주가 없으니 애도하는 마음 말고
[김민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슬픔에 유통기한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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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자금이 투입된 기업의 매각과 인수합병, 손해배상소송 기사를 읽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에서 멈칫하거나 기업쪽 논리에 부아가 치밀 때가 있다. 뭐라도 더 알고 싶어서 그들의 법률대리인을 검색해보면 신뢰감 넘치는 표정으로 승소한 사건의 소회를 이야기하는 근사한 전문직의 인터뷰가 눈에 띈다. 주로 경제지다. 법 이전의 윤리는 없는가? 의문을 품어봤자 법률서비스 제공자의 산뜻한 미소는 선도 악도 아닌, 수임료를 지불할 능력과 의사가 있는 이들을 향해 있다.
<개과천선>이 다루는 법무법인 차영우 소속 변호사들 역시 정의감에 불타거나 유별나게 사악한 집단의 모습이 아니다. 80년대 경제개방 이후, 수요에 부응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인재들의 모습을 스케치하는 대표변호사 차영우(김상중)의 인터뷰 장면. 그리고 파트너 변호사 김석주(김명민)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일본기업쪽 대리인을 맡아 법리를 펴는 장면의 교차편집은 거대 로펌을 바라보는 당혹감을 압축한다. 불
[유선주의 TVIEW] 승소를 향해서라면 윤리는 필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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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직업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사장. 나한테 직업을 물어보면 기자라고 했지 (퇴사 두달 전에 졸라서 간신히 달았던) 과장이라고 하지는 않았으니까(참고로 과장됐다고 월급이 오르지는 않았다. 대체 무엇을 위한 과장이었던가). 하지만 우리 회사 사장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의 직업은 사장이다, 그리고 사장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는 것이다. 세상의 빛을 보는 순간 이미 사장이 될 운명이었던 그는 사장의 아들이었다.
모든 직업엔 업무가 따르는 법이다. 우리 회사 사장 A씨도 하루를 바쁘게 보낸다. 아침에 나오면 비서가 내린 커피를 마시며 서너종의 신문을 읽고, 밖에서 법인카드로 누군가와 점심을 먹고, 한두 시간 낮잠을 잔 다음, 목청 좋게 통화를 하며 술 마실 약속을 잡고, 헬스클럽에 가서 두 시간 운동을 하면, 어느덧 퇴근시간. 하루가 짧기도 하지. 틈틈이 밖에서 사기꾼을 데려오거나 사기꾼이 하는 말을 듣고 와서 혼란을 야기하여 직원들의 근무시간을 늘리는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아니라고, 당신 싫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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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옴니버스 <신촌좀비만화>를 통틀어 제일 깊은 공간은, <피크닉>의 소녀가 뒤집어쓴 이불 속이다. 아픈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의무를 작은 어깨에 짊어진 수민(김수안)이 순정만화를 읽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짓는 우주가 그 안에 들어 있다. <피크닉>은 인물의 상황을 공간감으로 옮겨놓아 감흥을 준다. 수민이네가 사는 좁고 깊은 집의 구조, 작은 아이의 몸집과 대비되는 너른 바다와 호젓한 숲길의 광활함이 기술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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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so serious? <다크 나이트>의 조커(히스 레저) 소환이나 그룹 샤이니의 노래 얘기가 아니다. 이것은 영화 <10분>의 주인공인 6개월 인턴사원 호찬(백종환)에게 정규직원들이 제일 자주 던지는 물음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시청각 지원’을 하자면, “뭘 그렇게 진지하고 난리야? 응?”으로 해석되는 말에 찡긋하는 눈짓과 어깨 툭 치기가 동반되는 그림을 상상하면 된다. 호찬은 초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세대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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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말했다. 이처럼 한국인들이 슬픔과 우울증을 동시에 앓게 된 건 한국전쟁 이후 처음 아니냐고. 하기는 곡절 많은 현대사의 그 숱한 비극들이 존재하지만, 다리며 건물이며 수많은 붕괴사고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생때같은 어린아이들을 한꺼번에 수장해버린 건 이미 언어 너머의 비명에 가깝다. 구할 수 있었는데도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통곡처럼 한반도를 휩쓸었다. 여전히 시신을 찾지 못한 유족들의 절규가 귓등을 치고, 가까스로 일상을 추스른 사람들조차 심연의 우울증에 빠져 있다.
한국이란 나라의 추한 민낯을 목격한 탓이 크다. 도망친 선장에, 구조의 기미도 없던 해경에, 구조 대책은커녕 진도에 내려가 사진이나 찍는 한심한 정부 관료들에, 국가안전관리시스템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재난 컨트롤 타워가 아니라고 스스로의 무능력을 염치없이 실토한 청와대와 구조 책임의 주체이면서도 도리어 책임을 묻겠다는 대통령의 저 뻔뻔한 정신세계 앞에서 시민들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애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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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밀회>가 방송되던 시기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둘은 전혀 다른 사건이었지만,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은 올봄을 보내고 결국 내게 남은 것은 하나의 질문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언제 생이 끝날지 모르고 어떻게 삶의 이유를 잃을지 모르는 이 세상에서 도대체 무슨 마음을 갖고 살아갈 것인가.
먹먹한 마음으로 <밀회>를 따라갔다. 스무살, 재능과 젊음 외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남자아이와 마흔, 눈부신 성공을 이뤘지만 역설적으로 무엇 하나 자기를 위한 것을 갖지 못했던 여자의 위험한 사랑 이야기. 틀린 내용은 아니지만 <밀회>는 이렇게 요약하기엔 왠지 아쉬워 자꾸 돌아보게 되는 작품이다. 정치 드라마이기도 음악 드라마이기도 청춘 드라마이기도, 동시에 통속 드라마이기도 한 이 작품은 뛰어난 지휘자와 독주자, 오케스트라가 만나 만들어낸 우아하고도 견고한 세계였다. 그 안에 들끓던 인간들의 욕망과 위선을 굳이 돌이켜 끄집어낼 필요는 없을
[최지은의 TVIEW] ‘특급드라마’를 떠나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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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지옥’은 알다시피 B급영화를 망라한 CDF급영화를 틀어주는 상영회다. 지난 상영회에선 <클레멘타인> <버데믹> <사무라이캅> 등 내로라하는 막장영화들을 상영했는데, 그중 박중훈 주연, 김청기 감독의 <바이오맨>은 엄청난 반응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터미네이터>가 되고 싶었지만 <람보2>처럼 찍혔고 끝내 척 노리스 영화처럼 되어버린 이 영화에 비명을 지르지 않은 관객은 없었으리라. <바이오맨>의 열광적인 상영이 있은 뒤,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일이 터지고 말았다. 웬 미국 독립영화 하나가 상영되자 시네마지옥의 분위기는 열광, 아니, 광란의 도가니로 변해버렸고 관객의 울부짖음은 <바이오맨>의 반응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 영화의 제목은 <더 룸>. 방이란 뜻이다. 왜 제목을 방이라고 지었는지는 감독 겸 주연인 토미 웨소(Tomy Wiseau)만이 알고 있을 듯하다. 영화 내내
[곡사의 아수라장] 토미 웨소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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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8일 일기에 <온리 갓 포기브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표적>에는 여성 인물 넷이 나온다. 중앙서 강력계 형사인 강영주(김성령)와 박수진(조은지), 임신한 채 납치되는 희주(조여정)와 광역수사대원 유현영(염지영)이다(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이들이 이야기 안에서 보여주는 물리적 힘과 지력, 문제 해결 방식은 여자라서 주어지는 특권 혹은 제약과 무관하다. 여전사가 아니라 열심히 일하는 경찰이고, 악녀가 아니라 그냥 악당이다. <의뢰인>의 김성령, <감시자들>의 진경과 한효주, <더 테러 라이브>의 전혜진이 구현했던 새로운 여성 인물형의 계보(系譜)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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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침몰했고 많은 것들이 함께 침몰했다. 아니, 진작 침몰하고 있었음이 확인됐다. <방황하는 칼날>과 <한공주>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명제가 있었다. “내 아이만 지켜서는 내 아이를 지킬 수 없다.” 아이들에게 주어진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부모의 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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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상품보다 화면만 기억되는 광고처럼 내용보다 제목이 오래 남는 영화가 있다. 임창정 주연의 <파송송 계란탁>(감독 오상훈, 2005)은 좋은 영화지만 제목만 들으면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보다 라면이 먹고 싶어진다. 실제로 라면에 파를 송송 썰어넣고 계란을 탁 깨서 끓여먹은 이도 많았을 것이다. 영어 제목도 ‘파송송 계란탁’(Son, My Enemy, Pasongsong Gyerantak)이라니. 라면과 계란의 조화는 환상적이지만 어떤 식탁에서는 그렇지 않다. 원래 이 글의 제목은 ‘라면이 문제일까 계란이 문제일까’ 혹은 ‘계란이 더 문제’였다. 하지만 나는 죄 없는 라면과 계란에 ‘문제’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세월호 사건을 둘러싼 ‘가해자들’의 말과 행동은 시간이 갈수록 점입가경이어서 모두가 정신이 붕괴된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내 생각에, 압권은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비보도를 전제로 기자들과 나눈 대화에서 “(서남수 장관이)
[정희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라면일까 계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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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코디언을 켤 줄 안다. 이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짠한 눈으로 나를 보며 밥값을 내주곤 한다. 피아노나 바이올린과는 다르게 아코디언이라고 하면 저녁 끼니를 걱정하며 동전 그릇 놓고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가 떠오르나 보다(그래서 내가 바이올린도 했다는 건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코디언을 배우게 된 이유가 내 숱한 불행의 씨앗 중 하나이기는 하다. 가난 때문이 아니라 그걸 가르친 음악 선생 때문이었는데… 그걸 밝히기 전에 먼저 음악 선생이란 어떤 존재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음악을 가르치려면 뻔뻔해야 하는 건가. 오래전 <짱>을 보며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던 나는 진짜 선생님처럼 생긴 선생님들만 가득했던 시골 초등학교에서 홀로 베토벤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지휘자 스타일의 검은 정장만 입고 다녔던 나의 음악 선생, 정확하게 말하면 밴드부 지도교사를 떠올렸다. 초등학교였으니 음대가 아니라 교대 나왔을 텐데, 카라얀 행세를 했었지.
당시 한창 인기 많았던 차인표가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문득, 나의 슬픈 아코디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