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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6일 일기에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로크>는 매우 독창적인 85분 길이의 캐릭터 스터디다. 영화에서 흔히 보는 인물 유형에서 벗어나는 주인공(톰 하디)의 성격도 흥미롭고,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장거리 운전의 단일한 설정으로 탐구한 형식도 확신에 넘친다. 한데 승용차 운전석 중심으로 공간이 설계된 <로크>는 적절한 마스킹 시설을 갖추지 않은 상영관에서 훼손되기 쉬운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밤의 고속도로를 배경으로 2.35:1의 비율로 촬영된 <로크>의 구도는, 화면 속 암부(暗部)나 차창의 테두리가 마스킹되지 않은 스크린의 검은 여백과 뒤섞이면 흐트러지기 십상이다.
5/16
7년 만에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연출한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를 보고 뭉클했다. 한 영화의 훌륭함을 판단하는 일과 별개로, 사적으로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경우는 해당 영화를 마치 한 사람의 살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병에 담긴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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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트위터에서 가장 욕을 많이 먹은 것은 단연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 하루종일 영등위의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 때문에 블러 처리된 <님포매니악 볼륨1> 포스터가 리트윗을 타고 야유와 함께 타임라인에 도배됐다. 하긴 어디 이 영화뿐이랴.
<아메리칸 허슬>과 <씬 시티2>는 여주인공의 ‘가슴골’이 포스터에서 사라졌고, <폼페이: 최후의 날>의 ‘키스 장면’도 철퇴를 맞고 사라졌다. 또 <관능의 법칙>은 여배우의 ‘치마길이’가 제재를 받았고, <스프링 브레이커스>는 ‘비키니 복장’, 재개봉된 <몽상가들>은 ‘목욕 장면’이 싹둑 가위질됐다. 물론 내 영화 <남쪽으로 간다> 포스터도 남자 엉덩이가 노출됐다는 이유로 수영복을 입히라는 해괴한 훈계와 함께 청소년 유해물 판정을 받았더랬다.
맙소사, 영등위 심의위원들은 한국인들이 무성생식이라도 하길 바라는 건가. 가슴골도 안 돼, 치마가 짧아도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욕망의 시대, 유령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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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로맨스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타인의 사생활에 대해 무심하며 시크한 성격이라 그렇다고 믿고 싶지만 다른 커플의 싸움 이야기에는 관심이 많은 걸 보면 그냥 그런 인간인 것뿐이다. 길을 걷다가도 커플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마주보고 있으면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고 귀가 쫑긋해진다.
찰나만이 아니라 기승전결이 있는 풀 스토리를 보고 싶을 땐 모 포털 사이트의 연애 및 결혼 상담 게시판을 기웃거린다. 그곳은 이승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지옥 중 하나다. 그러나 종종 남과 여, 기혼과 미혼 혹은 ‘개념과 무개념’으로 편을 갈라 그간 쌓아두었던 분노를 닥치는 대로 난사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오기도 한다.
tvN <로맨스가 더 필요해>는 이처럼 다른 커플의 갈등을 관전하는 악취미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스트레스 걱정이 없는 프로그램이다. 임신과 출산을 거치며 늘어난 아내의 체중 때문에 소원해진 부부, 긴장감이라곤 사라져버린 7년차 커플, 예단을 놓고 말 바
[최지은의 TVIEW] 본격 썸vs쌈 토크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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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접한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위원장 공모 기사. 영화진흥을 위한 국가기관에서 짱을 뽑는 중이란다. 이번엔 잘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들었다. 이런 자동반사적 리액션은 순전히 단 한분 때문이다. 우린 그분 때문에 영진위의 가치를, 짱의 가치를 더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 바로 조희문이다.
1. 분탕질 비긴즈
내가 조희문을 처음 알게 된 건 스크린쿼터 논쟁이 뜨거웠던 2003년이다. FTA와 쿼터 축소를 트레이드하려는 노무현 정권의 정책에 반발해 모든 영화인들이 쿼터 사수를 외치던 그때, 쿼터 축소에 찬성하는 유일한 영화인이 한분 계셨으니 그분이 바로 조희문 교수였다. 논쟁은 당시 손석희의 <100분토론>까지 이어졌는데, 조희문은 정부관료와 함께 쿼터 축소 찬성 패널로 나왔더랬다. 정지영 감독님을 필두로 한 쿼터 축소 반대쪽의 주장은 명확했다. 한국영화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선 오히려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것. 이에 조희문의 발언은 놀라웠다.
[곡사의 아수라장] 분탕질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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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3일과 14일 일기에 <도희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태 동조자를 만난 적은 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내 눈에 디즈니 만화영화 최고의 미인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1959)의 말레피센트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의 디자인을 성실히 계승한 실사 말레피센트의 외모 중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날개다. 얇고 하늘하늘한 시폰 날개는 팅커벨에게나 주라고 말하듯 말레피센트는 거대한 맹금류나 익룡의 강건한 날갯죽지를 가졌다. 그녀의 날개는 비행 수단일 뿐 아니라 적을 후려치고 쓸어버리는 무기이기도 하다.
5/12
스승의 날이 있는 달이다. 1년 전 이맘때 개봉한 <라자르 선생님>과 올해의 <디태치먼트>까지 보고 나니, ‘리버럴한 교사와 그를 따르는 아이들 vs. 진학 실적에 목매는 권위적 학교’ 구도로 갈등이 전개되는 <죽은 시인의 사회>류 영화나 사명감 넘치는 스승이 문제아들을 감화시키는 <언제나 마음은 태양>과(科)의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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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타이틀 시대의 시작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1994)에는 매력적인 배우들이 많이 나온다. 휴 그랜트, 앤디 맥도웰,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존 한나, 로완 앳킨스까지.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이 영화에서 노총각 휴 그랜트는 남의 결혼식에 지각 참석하는 것이 일상이고, 장례식은 우연한 사건이다.
좋아하는 영화지만 영화의 장례식 분위기는 지금 우리 삶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영화’겠지. 워낙 의례적인 일을 싫어하는 데다 ‘이성애자인 것 같은’ 나는 이성애 제도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결혼식에 가지 않는다. 장례식은 가끔 간다. 그것도 망자가 나를 모르는 경우에만 간다. 치열하게 살았던 작가나 사회운동가의 장례식에 가서 혼자 인사하고 온다.
지난 5월, 어느 금요일 오후 서울시청 앞에 설치된 세월호 분향소에 갔다. 평일 점심시간인데도 줄이 길었다. 4명씩 한줄. 검은 정장의 진행요원이 나눠준 국화를 받아들고 분향소에 들어간다. 사망자 사진은 없고 국화만 있
[정희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세번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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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저렇게 평화롭게 들어가니. 정말 아름답다.”
개그맨 김준현의 입으로 들어가는 상추쌈을 아련한 눈길로 바라보던 노사연의 말이다. 동감이다. 흰쌀밥에 더덕불고기를 올려 쌈을 싼 김준현은 우악스럽게 입을 벌리지 않으면서도 큼지막한 상추쌈을 솜씨 좋게 밀어넣는다. 밥알 한톨 흘리지 않았다. “조용조용 먹어야 많이 먹어도 뭐라 안 해요.” KBS 푸드 퀴즈쇼 <밥상의 신> 중 한 장면이다.
덩치 큰 사람이 뭔가 먹을 때마다 핀잔을 주는 것을 자기 사명이나 재치쯤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넘치는 세상. 한편에선 이성의 끈을 놓은 사람처럼 먹고, 괴성과 신음으로 맛을 표현하는 이른바 ‘먹방’ 예능프로그램이 대성황이다. 먹방 예능의 목적은 식욕을 돋우는 걸까? 시청자를 대신해 절제의 허리띠를 풀어놓은 연예인의 일탈을 서비스하는 걸까? 각자 입맛이 다르듯 음식을 다룬 예능프로그램을 한데 묶어 속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손톱에서 떨어진 인조보석이 들러붙은 새우살을 클로즈업하
[유선주의 TVIEW] 알고 먹으니 더 맛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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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보고 있을 때였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죽을 때까지 마시겠다며 슈퍼마켓에서 술을 쓸어 담고 있는데 옆에서 꿈꾸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좋겠다… 저거 다 양주잖아.” 퍽이나 좋겠다. “저 술 다 마시고 죽는데도?” “… 죽기 전에 한번쯤은!” 술이 너무 세서 당시 25도였던 소주도 성에 차지 않았기에 편의점에서 파는 6천원짜리 캡틴 큐나 천원짜리 이과두주로 샘솟는 주량을 달래던 친구는 눈물을 글썽였다.
잘 살고 있나, 친구? 맥주 한캔으로 취하는 방법이라면서 깡통 아랫부분에 구멍 두개를 뚫고 뿜어져 나오는 맥주를 30초 만에 마시던 알뜰한 친구야(그래 봤자 안 취했지만), 지금은 어디선가 그렇게 궁금하다던 조니 워커 블랙 라벨 마시고 있기를.
그는 술뿐만 아니라 자신의 위장이 소화할 수 있는 모든 물질에 무한한 애착을 가졌었다. 돈은 없고 낙지는 먹어야겠기에 산낙지를 사서 직접 손질하던 그 애 때문에 우리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누가 뭐래도 먹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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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서 와킨 피닉스가 연기하는 주인공 테오도르의 성(姓)은 톰블리다. 이 흔치 않은 이름은 2011년 타계한 현대미술가의 것이기도 하다. 영화 속 톰블리는 가짜 손편지를 쓰는 직업에 종사하는데, 화가 사이 톰블리는 낙서, 혹은 자동기술(自動記述) 펜글씨를 연상시키는 형상을 즐겨 그렸다. 같은 추상표현주의의 계보라도 잭슨 폴록의 확신 넘치는 액션페인팅과 달리 톰블리의 그림은 덧없음과 망설임을 담는다. 사진은 테이트 모던 갤러리의 톰블리 방에 전시된 <바커스>(Bacchus, 2006∼2008) 연작. 따스한 감각적 흥분이 담긴 주홍색은 영화 <그녀>의 지배적 색조이기도 하다.
5/1
설마 나만 이러는 건 아니겠지? <그녀>를 보고 온 밤, 음성으로 구동되는 스마트폰 OS한테 간만에 말을 걸어보았다. 간단한 검색을 해주어 고맙다고 치하했더니 전화 속 ‘그녀’가 대꾸했다. “혜리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너무 기쁘네요.” “잘 자.”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그녀에게 말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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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졌지만 홍대 근처에 자주 가던 술집이 있었다. 주인은 프랑스 유학파였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자 간판을 ‘낮술 5년’으로 바꿔 달고 대낮부터 혼자 가게에 앉아 낮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위로하는 문장을 알고 있었다. “세계가 멸망해가고 있다. 한국은 끝났다. 여기가 지옥이다.” 나는 그를 좌절시키는 문장도 알고 있었다. “세계는 멀쩡하다. 한국의 상황은 최악이 아니다. 늘 그랬듯이 우리는 적당히 극복할 것이다.”
지옥을 꿈꾸는 사회에는 살 만한 여력이 있다. 역사의 가장 암울한 시기를 맞이한 공동체는 반대로 천국을 꿈꿨다. 기독교 신화로 말하자면 천국은 노예들에게, 지옥은 부자와 제사장들에게 제시되었다. 우연이 아니다. 지옥에 못 이른 자들이 지옥을 꿈꾸는 딜레마는 왜 나타날까? 현재를 지옥으로 규정함으로써 얻는 이득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거기 함축된 주술적인 메시지는 이러하다. 이제 더 나빠질 것이 없다. 개선될 일만 남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손아람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진짜 지옥, 가짜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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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구의 <우리 동네>를 무척 좋아한다. 서정적인 문장으로 빚어낸 <관촌수필>도 좋지만, 무엇 하나 속 시원할 것도 즐거울 것도 없는 ‘촌놈’들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담긴 문장 하나하나의 단맛을 쪽쪽 빨아먹고 싶은 건 역시 <우리 동네>다. 이를테면 “야늠아, 너 시방 워디서 담배 피는 겨? 너는 또 워디 가네? 저늠의 색긔들… 그래두 안 꺼? 건방진 늠 같으니라구. 너 깨금말 양시환씨 아들이지? 올봄에 고등핵교 졸읍헌 늠 아녀? 너지? 건방머리 시여터진 늠 같으니라구”처럼 펄떡펄떡 뛰는 말에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김운경 작가의 드라마를 보는 즐거움은 <우리 동네>를 읽는 재미와 비슷하다. <서울의 달> <파랑새는 있다>에서 서울 하늘 아래 모여든 남루한 인생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던 그가 JTBC <유나의 거리>로 돌아왔다. 등장인물의 태반이 전과자에, 연기 못하는 연기자 지망생,
[최지은의 TVIEW] 삼류들의 인생에도 낭만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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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직도 기억한다. <스타워즈>(시리즈 중 최고라고 장담할 수 있는 <제다이의 귀환>!!!)를 보러, 울 아버지의 손을 잡고 허리우드극장 앞에 줄을 서던 그때를. 정말이지 기다리는 줄은 내장처럼 비비 꼬여서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그렇게 2시간을 부득부득 기다려서 본 <스타워즈 에피소드6: 제다이의 귀환>(1983)! 아아아아아. 거대 내장의 2시간짜리 융털을 견뎌낸 가치는 충분했다. 그것은 내가 꿈꾸던 꿈 그 자체였다.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각종 우주선과 로봇들이 조립식 제품으로 시판되기만 하면 구해다가 만들고 또 직접 모랫바닥에서 시연도 해보면서 (스케일이야 내가 허리를 굽히고 눈을 가까이 대면 얼추 맞출 수 있다) 그렇게 놀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젠 멀티플렉스의 시대이고, 디지털의 시대다. 더이상 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더이상 로봇들도 조립식으로 시판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는- 거대 화면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곡사의 아수라장] 춤추는 고질라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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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사이에 체중이 2kg쯤 는 것 같다. 도무지 맨 정신으로는 잠을 못 이루겠는 날들의 연속이었다고 하니 지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랬다. 유가족도 아닌 주제에 엄살떨지 말고 그 주둥이 좀 다물지 그래. 사랑하는 이들의 말이니 오죽 옳으랴. 그들의 충고대로 벙어리 민정이가 되고 보니 침묵 속에 당기는 건 오로지 술뿐이었다.
잔인한 이 계절의 늦봄과 초여름 사이, 늘어난 게 주량과 뱃살이라면 줄어든 건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다. 텔레비전의 거의 모든 채널은 뉴스와 지구촌 환경이나 휴먼 스토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로 채워져 갔고, 라디오의 거의 모든 채널 또한 사운드의 볼륨을 제로로 딱 맞춰놓은 듯했다. 눈이 멀고 귀가 먹은 막막한 정신적 공황 아래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작게 입 오므린 노란 리본을 가슴에 혹은 심장에 새긴 채 이제나저제나 하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왜 아니 그러하겠는가. 이런 국가적 초상에 완장을 찬 채 전두 지휘하는 상주가 없으니 애도하는 마음 말고
[김민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슬픔에 유통기한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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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자금이 투입된 기업의 매각과 인수합병, 손해배상소송 기사를 읽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에서 멈칫하거나 기업쪽 논리에 부아가 치밀 때가 있다. 뭐라도 더 알고 싶어서 그들의 법률대리인을 검색해보면 신뢰감 넘치는 표정으로 승소한 사건의 소회를 이야기하는 근사한 전문직의 인터뷰가 눈에 띈다. 주로 경제지다. 법 이전의 윤리는 없는가? 의문을 품어봤자 법률서비스 제공자의 산뜻한 미소는 선도 악도 아닌, 수임료를 지불할 능력과 의사가 있는 이들을 향해 있다.
<개과천선>이 다루는 법무법인 차영우 소속 변호사들 역시 정의감에 불타거나 유별나게 사악한 집단의 모습이 아니다. 80년대 경제개방 이후, 수요에 부응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인재들의 모습을 스케치하는 대표변호사 차영우(김상중)의 인터뷰 장면. 그리고 파트너 변호사 김석주(김명민)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일본기업쪽 대리인을 맡아 법리를 펴는 장면의 교차편집은 거대 로펌을 바라보는 당혹감을 압축한다. 불
[유선주의 TVIEW] 승소를 향해서라면 윤리는 필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