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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시나리오를 가슴에 안고 아파서, 가슴속 깊은 곳이 너무 아려와서 한동안은 그렇게 멍한 채 있었다. 그리고 불현듯 ‘내가 해야겠다. 해보고 싶다. 소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민정 - ‘컨셉북 <버스, 정류장> 중’
“어, 내가 왜 이러지? 어우∼ 야, 나 왜 이래요….” <버스, 정류장>의 첫 시사회. 이미연 감독과 김태우가 순서대로 인사를 한 뒤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첫 인사를 떼던 김민정이 갑자기 주저앉듯 무너진다. 주르르륵,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려내리는 통에 옆에 있던 김태우가 “신인여우상 받는 장면을 예행연습 하나봅니다”라고 재치있게 넘어가긴 했지만, 정작 당황한 건 본인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냥 무대 올라가기 전부터 기분이 너무너무 이상해서 누가 야!, 라고만 불러도 당장 울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글쎄 뭐였을까. 긴장, 기대, 두려움, 이런 것들이 다 섞였던 게
<버스, 정류장>의 소희 김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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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우기가 뿌려대는 빗줄기 속에 놓여진 평창동의 버스 정류장에서, 늦가을 차가운 새벽 바람을 맞고 있는 성북동의 버스 정류장에서, 자신의 상처를 감당하기 버거워 훌쩍 사라져버리는 어린 소녀를 기다렸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재섭이 되어가고 있었다….”
김태우 - ‘컨셉북 <버스, 정류장> 중’
남자가 운다. 꺽꺽 소리내어 서럽게 운다. 열일곱 어린 소녀 앞에서 엄마품에 안긴 소년처럼 서럽게도 울어댄다. “어떻게 울어야지, 이런 느낌을 살려서 울어야지 하는 생각도 없었어요.” 어쩌면 꿍 하니 웅크리고 살아왔던 초라한 서른둘 인생을 위한 한 바탕, 어쩌면 찰 것도 빌 것도 없던 마음에 큰 구멍 하나를 내버린 소녀를 향한 한 바탕. 차곡차곡 쌓아왔던 감정들이 분출구를 찾은 순간, 재섭도 김태우도 아무런 계산없이 그렇게 울고 있었다.
우리가 오랫동안 김태우를 알아왔다고 자부해도, 그의 연기를 드라마나 영화에서 수차례 봐왔다고 방심해도, <버스, 정류장>의 김태우
<버스, 정류장>의 재섭 김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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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복절도할 엽기적인 커플도 봤다.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운 커플도 봤다. 간혹 서먹서먹한 커플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커플도 봤다. 그러나 이렇게 따뜻하게 기분좋은 커플은 처음이다. “선생님은 진실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같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열일곱 소녀와 “세상을 띄엄띄엄 살 순 없을까?”며 자문하는 서른두살 남자. 그들의 만남과 소통을 그린 <버스, 정류장>의 김태우와 김민정은, 얌전하고 내성적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세상없이 유쾌한 청춘들이었다.
“내 얼굴이 어려 보여서 그런 거야.” “내가 정신적으로 성숙해서 그런 거라니까요.” 71년생, 82년생. 한살 빠진 띠동갑인 이들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놀리다가 여고생처럼 맞장구치며 속닥거리는 모습은, 누구에게 실례인지는 모르겠지만, 동갑의 연인 혹은 익숙한 친구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막역함도 “백이면 백, 모든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나리오”를 들고 “가장 근접한 느낌”을 찾기 위해 감독
<버스, 정류장>의 김민정, 김태우의 행복한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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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장 가는 길> 등 일련의 경마장 시리즈와 <새> <진술> 등을 통해 새로운 소설을 해온 작가 하일지씨가 또 한번의 실험을 감행했다. 지난 2월에 <마노 카비나의 추억>(민음사 펴냄)이라는 시네로망을 내놓은 것이다. ‘시네로망’이란 영화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읽히기 위해 쓴 시나리오. <마노 카비나…>는 50살의 시인 서인하가 자신에 관한 문학 관련 다큐멘터리를 찍는 현장에서 만난 23살의 여자 강수미를 보면서 느끼는 심리적 변화와 그로 인한 내면 파괴를 그리고 있다. <경마장 가는 길> <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 등의 소설이 영화화되고, <경마장 가는 길>을 직접 각색하는 등 하일지씨와 영화계의 인연은 꽤 가까운 편. 처남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갑자기 체포된 철학교수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소설 <진술>도 배우 박광정이 감독 데뷔작으로 영화화하고 있다.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
시네로망 <마노 카비나의 추억> 출간한 소설가 하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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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그를 부르는 이름이 무엇이었건, 2002년 현재 스티븐 소더버그는 주류 할리우드 제1급의 재능을 지닌 감독이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인디와 메인스트림 양쪽 진영을 향해 영구 중립을 선언하고, 포커 테이블에 앉은 ‘꾼’처럼 조용히 이분법을 무너뜨려가는 전략으로 지금의 의자를 차지했다. 3월1일 개봉하는 그의 신작 <오션스 일레븐>은 범죄영화를 매만지는 그의 숙련된 솜씨와 스타의 육체에 신선한 피를 돌게 하는 재주를 마음껏 자랑한 영화다. 8500만달러짜리 오락영화를 만들면서도 특유의 근면함과 기동력을 잃지 않았다. 일요일 멕시코 티후아나에서 <트래픽> 촬영을 마친 이튿날 캘리포니아 버뱅크로 날아와 점심을 먹으며 <오션스 일레븐>의 시나리오를 수정했던 그는 지난해 3월 오스카 시상식 이튿날 새벽 6시부터 라스베이거스 현장에서 ‘액션!’을 외쳐 소더버그의 감독상 수상을 핑계로 밤새 축배를 들며 여유를 부렸던 <오션스 일레븐> 팀을 아연실색하
<오션스 일레븐> 만든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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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여길 봐 주세요, 러셀!” 여기저기서 포토콜 요구가 이어졌지만 그는 상관없다는 듯 황급히 걸어 들어간다. 짧은 턱수염과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자란 고수머리, <글래디에이터> 때보다 족히 5, 6kg은 불어난 듯한 육중한 몸집. 그는 기자회견장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드럼치듯 신경질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함께 자리한 감독 론 하워드와 제니퍼 코넬리가 민망할 만큼 질문은 러셀 크로에게만 집중되고, 당일 후보작 발표를 한 오스카 관련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염문설을 뿌렸던 니콜 키드먼에 대해 “그녀는 지금 라스 폰 트리에와 함께 스웨덴에 있소. 나쁜 날들을 보내고 있을 게 분명하지, 하하”라며 특유의 괴상한 조크를 선사하던 그는, “머리(brain)와 근육(brawn) 중 어떤 걸 쓰는 걸 좋아하느냐”는 황당한 질문이 튀어나는 순간, 마치 애써 자신을 진정시키듯 과장된 정중함으로 입을 열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부탁드리는 바이지만 그런 쓸데없는 질문은 제
젠장, 할리우드보다 소와 대화하는 게 더 좋다니까, 러셀 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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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TV에서 예지원을 여러 번 만날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가요 청백전 스타일의 오락 프로그램이었는데, 거기서 예지원의 활약은 대단했다. 머리를 틀어올리고 차이니스 드레스를 입은 채 조신하게 <홍콩 아가씨>를 부르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머리를 산발하고 겉옷을 거칠게 벗어 내던지더니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무대를 활보하며 <배반의 장미>를 불러젖혔다. 대본도 강요도 없었다. 그냥 예지원의 ‘설정’이었다. 예기치 않은 반전, 아니 배반에, 녹화장도 안방도 뒤집어졌다. 예지원이 자신을 희화화해서가 아니라, 그 가무가 장기자랑이라는 무대에 어울리지 않게 진지하고 열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불면 날아갈 듯 작고 가녀린 몸매, 오목조목 참한 이목구비의 이 아가씨가 준비한 진짜 ‘반전’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예지원 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가 언제부턴가 <여고시절>의 왈패가 됐지만, 그 전엔 정반대였다. <꼭지>나 <줄리엣의
왈패본색, <생활의 발견>의 예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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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가 시장점유율을 높여가는 동안 직배사들도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지난해 <번지점프를 하다> <소름> <나비> 등을 배급했던 브에나비스타 코리아가 올해 <폰>이라는 한국영화에 투자하기로 결정한 것도 직배사의 입지를 확고히 다지려는 의도일 것이다. 과연 지난 10년간 메이저로 자리잡아온 직배사 대표가 바라보는 2002년 영화계는 어떤 모습일까?브에나비스타 코리아 대표 김상일씨는 비교적 일찍 이런 시장흐름을 감지한 인물이다. 97년 <남자의 향기>를 배급하면서 한국영화 배급을 시작한 그는 99년 <댄스 댄스> 투자, 배급을 통해 얼마간 수업료를 내기도 했다. 지난해 <씨네21>이 집계한 ‘한국영화 파워 50위’ 안에 직배사 대표로 유일하게 꼽힌 것도 2000년 직배사 가운데 매출 1위를 차지한 것 이상으로 <시월애> <오! 수정> 등 한국영화 배급에 적극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역회사인
한국영화 <폰>에 투자하는 브에나비스타 코리아 대표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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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5일 로스앤젤레스 포시즌 호텔에서 <콜래트럴 데미지>의 홍보를 위해 인터뷰에 참석한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만났다. 엄청난 거구가 들어설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아놀드는 보통 사람보다 약간 큰 키에 환한 미소를 띈 사람이었다. 본인도 스스로 흉내내며 웃음거리를 만드는 오스트리아 액센트가 섞인 영어 발음과 약간은 둔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아놀드 슈워제네겁니다. 이번엔 무슨 영화냐고요? 에이 잘 아시면서…. 네, 또 액션영화입니다. 이번엔 로스앤젤레스에서 소방관이 되어 마천루 테러사태로 억울하게 죽은 가족의 복수를 위해 콜롬비아까지 날아가 테러리스트들을 혼내주는 역할이죠. 많이 들어보셨잖아요. 9월11일 뉴욕테러 사태가 나자마자 개봉이 연기된 그 영화 말입니다. 네, <콜래트럴 데미지>요. 에, Collateral은 사전을 찾아보시면 ‘부차적인’ 뭐 그런 뜻이고, Damage는 ‘손상, 피해’ 이런 뜻인 거는 잘 아실 테고요. 그러니까
돌아온 영웅, <콜래트럴 데미지>의 아놀드 슈워제네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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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을 기다렸다. 단 하루 촬영한 <초록물고기>부터 인터넷 영화 <극단적 하루>까지 꼽으면 출연작은 줄잡아 10편. 눈 까뒤집고 찾지 않아도 정재영이 발견되는 영화는 <킬러들의 수다> 정도일까.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하고 대학로에 뛰어든 스물여섯부터 약 6년. 연극무대와 조·단역 생활을 거쳐온 많은 배우들의 길을 따라 걸으며 정재영은 묵묵히 기다렸다. <킬러들의 수다>의 냉철하고도 엉뚱한 킬러로 멋지게 한방 날렸던 그는, 마침내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펄펄 난다. 전직 복서 출신의 투견꾼 독불이로 물고 물리는 개싸움 같은 인생의 진창을 뒹굴며, 살기 위해 한없이 비굴해지는, 그러나 원시적 폭력성이 터져나오는 순간 마침내 모든 곤경을 휴지통에 처박아버리는, 거세당한 마초의 속살을 드러내면서.
삐쭉삐쭉하게 내린 앞머리도 독불이의 컨셉 때문이라지만, 예쁘장하기까지 한 눈에 사람좋은 웃음만 봐서는 그에게서 좀체 험악한 구석을 찾아
<피도 눈물도 없이>의 독불이, 정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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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와이키키 브라더스> <욕망>의 공통점. 명필름이 제작한 영화? 맞다. 좀더 꼼꼼히 들여다보자면, <접속> <조용한 가족> 등 기획력이 돋보이는 대중영화로 안정된 브랜드 네임을 굳혀온 명필름이, 상업적 가능성보다 대안적인 영화를 고민한 흔적의 결과이기도 하다. 남북 분단이라는 가볍지 않은 소재와 기획의 충실함, 대중적인 재미를 적절히 안배한 <공동경비구역 JSA>의 성공을 전후로, 명필름의 필모그래피는 ‘웰 메이드’ 상업영화에 저예산의 실험, 영화의 주요관객인 20대의 취향에 갇히지 않는 소재, 작가적 개성을 존중한 시도로 운신의 폭을 넓혀왔다. 이러한 시도 뒤에는 심재명 대표의 기획력과 함께 그의 부군인 이은 감독의 뚝심이 버티고 있다.
이은 감독이 제작을 추진중인 것으로 최근 알려진 <아리랑>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아리랑>은 님 웨일즈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1920∼30년대
<아리랑> 제작 추진중인 명필름 이사 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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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지 않고 굳지 않은 빛나는 강철은 따로 없어라.
기나긴 시련거쳐 당당히 선, 저 강철의 모습을 보아라.
그 모습은 핏발선 얼굴도 들떠 있는 쇳소리도 아니요.
투쟁의 용광로에서 다듬어진 부드럽고 넉넉히 열려진 가슴….”
‘강철은 따로 없다’ 중에서
유오성은 단단했다. 그것은 비단 언론에 공개되어 찬탄을 이끌어내었던 그의 육체의 단단함만은 아니다. 800만명이 넘는 흥행신화를 이룬 <친구>의 미향에 취하지 않고, CF 섭외가 밀려드는 스타덤 등극에 방심하거나 물러지지 않고, 길고 독한 훈련의 용광로로 자신을 던진다는 건 왠만한 자기관리 능력이 없으면 힘든 일이다. 말그대로 강철 같은 배우 유오성이 돌아왔다.
지난해 3월 <친구> 개봉과 함께 유오성은 참 많이 바빴다. 몰려드는 인터뷰들과 수많은 행사 참여, 그렇게 정신없는 몇 개월을 보내고 그는 잠시 접어두었던 제2의 본업에 열중했다. “늘 미안한 마음이 많았던 집사람 심부름도 재깍재깍 하고, 아들
강철같은 배우, 유오성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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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생. 이제 스물넷이 된 그의 첫 느낌은 ‘식물성’이다. 호리호리한 체격과 모질거나 모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 덕분이기도 하지만, 거기엔 <진주만>에서 에블린이 자신보다 친구 레이프를 더 사랑할까 두려워하는 파일럿 대니의 쓸쓸한 사랑의 여운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리라.
<진주만> <블랙 호크 다운>. 여름과 겨울을 잇따라 폭격한 두편의 전쟁영화에서 조시 하트넷은 포화 속의 이상주의자이자 아름다운 청년으로 다가왔다. 물론 일찍이 10대 공포영화 <패컬티>에서 마약을 제조해 팔던 소년으로, <할로윈 H20>에서 제이미 리 커티스의 아들로 스쳐지나가기는 했지만. <블랙 호크 다운>에서 조시 하트넷은 이상주의자 멧 에버스만 하사로 등장한다. 머리보다 몸이 앞서는 긴박한 전장에서 에버스만이 부상당한 동료의 동맥에서 솟구치는 피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위생병을 돕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이 어찌해볼 수 없는 절망적인
<블랙 호크 다운>의 조시 하트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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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월5일 CJ엔터테인먼트는 영화계에선 처음으로 코스닥에 등록된다. 명필름이 그뒤를 이을 전망이고 강제규필름, 스타맥스 등 규모가 큰 영화사들이 다들 코스닥 등록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CJ의 첫발은 의미심장해보인다. 영화업이 제조업이나 정보기술(IT)산업 못지않게 수익성과 안정성을 보장받는 분야라는 것을 시장에서 인정받은 셈이다. CJ엔터테인먼트 이강복 대표는 최근 몇달간 정신없이 바빴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코스닥 등록, 튜브엔터테인먼트, 영화사 봄과의 제휴, NABI픽처스에 대한 투자, 2002년 라인업 결정 등 2002년 영화시장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일들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이 순조롭게 마무리되고 있기 때문일까? 그의 표정은 무척 밝다. 하긴 튜브와 제휴한 뒤 내놓은 첫 작품 <나쁜 남자>부터 흥행을 하고 있으니 출발이 좋은 2002년이다. CGV라는 막강한 멀티플렉스 체인을 등에 업은 국내 양대 메이저배급사 중 하나, CJ에 올해는 무
영화계 최초 코스닥 등록되는 CJ엔터테인먼트 이강복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