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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던진 질문에 한참을 고민한다.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가 싶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잘 모르겠어요’. 처음엔 자신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좀처럼 드러내고 싶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홍상수 감독의 <우리 선희>에서 선희로 분한 정유미는 선희처럼 모두의 눈길을 잡아끌고, 선희처럼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선희처럼 알 수 없다. 그녀를 설명하려는 말은 차고 넘치지만 그 어떤 것도 없는 미로에 빠진 기분. 몇번의 대화가 오가고 미로를 헤맨 끝에 겨우 실타래 한쪽 끝이 잡힌다. ‘모르겠다’는 대답이야말로 최선을 다한 진심의 형태다.
<우리 선희>에는 선희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나온다. 선희는 어떤 아이니. 내성적이고 자기표현을 잘 하지 않지만 똑똑하고 똘기도 있는 용감한 친구. 마무리는 항상 착하고 예쁘다로 끝나는 두루뭉술한 답변. 이 모든 표현들은 정확히 선희를 묘사하고 있지만 동시에 선희를 완벽하게 오해하도록 만든다. 단어의
[정유미] 정유미라는 질문 오늘이라는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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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메이크업 받고 같이 촬영하는 거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지?” <씨네21> 표지 촬영 현장에 들어선 <우리 선희>의 두 배우, 이선균과 정유미가 재미있어한다. 두 사람은 <첩첩산중>과 <옥희의 영화>, <우리 선희>까지 홍상수 감독의 세 영화에서 호흡을 맞췄다. 다른 드라마나 영화 현장에서 만났다면 지금과는 다른 관계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고 이선균이 말한다. “장르적으로나 캐릭터적으로나, 본연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보호막이 없는” 홍상수 감독의 현장에서 모든 배우들은 “자연스럽고, 꾸밈없고, 편한” 모습으로 서로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보니 정해진 컨셉과 설정이 있는 촬영과 만남이 두 배우에겐 오히려 어색하면서도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 같다. 세편의 영화에서 연인 사이로 호흡을 맞춘 그들이지만, 프레임 바깥에서 이선균은 정유미에게 “말 없이 곁에 서 있어도 안심이 되는” 선배고, 정유미는 이선균에게 “<우리 선희>
[우리 선희]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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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자들 사이에서 문와쳐 윤창업(37) 대표는 “아이디어가 많고, 도전을 즐기는 젊은 기획 프로듀서”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01년 영화 전문 투자사 아이엠픽쳐스에 들어가 기획, 투자, 제작 관리, 마케팅, 해외 세일즈를 두루 경험했고, 2004년부터서는 제작사 화인웍스의 창립 멤버로 합류해 <마음이…>로 프로듀서 데뷔를 했다. 2008년에는 자신의 회사 문와쳐를 창립해 <블라인드>(감독 안상훈/출연 김하늘, 유승호)로 236만여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의 관객을 불러모았다. 이후 여러 편의 영화를 동시 기획하며 활발히 활동하던 윤 대표는 올해 초 2013년은 ‘안식년’이라며 숨고르기를 선언했다. 그랬던 그가 올해가 다 가기 전에 현장에 돌아왔다. 한/중 합작영화 <짜이찌엔 아니>, 한/미 합작영화 <더 캐치>, 한/일 합작영화 <핀란드 파파>, 세편의 합작 프로젝트를 한꺼번에 들고서 말이다.
-“2013년은 쉬어가는
[윤창업] “중국시장에 제대로 들어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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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영화 전문감독이었던 히로키 류이치가 몇 년 전부터 사랑스러운 성장영화들을 내놓고 있다. 제15회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키즈아이 섹션에 초청된 <괜찮아 3반>은 <오체불만족>의 작가 오토다케 히로타다가 초등학교 교사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쓴 동명소설이 원작이다. 이 영화는 팔과 다리가 없는 아카오 선생(오토다케 히로타다)과 5학년 3반 아이들이 함께 보낸 일년을 다정한 시선으로 지켜본다. 영화를 찍는 동안 히로키 류이치는 수많은 아역배우들의 “현장 선생님”이 되어야했다. 그에겐 “도전적인 프로젝트”였던 <괜찮아 3반>의 촬영 이야기를 들어봤다.
-오토다케 히로타다의 소설 <괜찮아 3반>을 영화화했다.
=프로듀서가 원작자가 직접 출연할 거라면서 나에게 영화화를 제안했는데, 원작을 읽어보니 도전적인 프로젝트가 될 것 같았다. 원작에 있는 에피소드를 거의 그대로 살려서 쓴 각본을 토대로 영화를 찍었다. 잔잔한 영화라 자칫 설교하는 것처럼 보일
[flash on] 오체불만족? 오감대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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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백마 탄 왕자님’이 다시 돌아온다. 백마 탄 왕자님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아마 이 남자의 모습과 가장 닮아 있지 않을까. 언제나 스위트한 미소가 걸려 있는 입꼬리, 한없이 든든해 보이는 어깨와 가슴, 위기에 빠진 누군가를 보면 주저하지 않고 손부터 내밀 것 같은 신사적인 태도까지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까운 이 남자, 대니얼 헤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대니얼 헤니는 우리가 으레 기억하던 매너 좋고 선량한 왕자님이 아니다. <스파이>의 이중스파이 라이언 역으로 우리 곁에 돌아온 대니얼 헤니에게선 어쩐지 위험스러운 분위기가 풍긴다.
대학 시절엔 농구선수로 활약했고, 미국에서 모델 일을 하며 런웨이와 연극 무대를 오가던 대니얼 헤니는 CF를 찍던 중에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헨리 킴 역에 캐스팅되어 브라운관에 데뷔했다. KBS 드라마 <봄의 왈츠>의 필립, 영화 <Mr. 로빈 꼬시기>의 로빈 헤이든을 차례로 거치며 그의
[대니얼 헤니] 나쁜 젠틀맨이라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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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의 시에 늘 호의적이었던 신형철 평론가는 “김경주의 시는 감각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이라는 기율에 충실하다”고 썼다. 그런 그가 새로운 ‘감각’의 시극(詩劇)을 준비 중이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자고 있어, 곁이니까> 등을 쓴 시인이자 극작가인 김경주가 시극 <나비잠>을 무대에 올린다. 서울 사대문 축성에 얽힌 신화와 창작설화를 시적 언어와 라이브 음악 및 인형극, 그림자극, 영상 등 다양한 이미지의 오브제를 융합해 무대화한 것으로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데오도라 스키피타레스가 협연연출에 나선다. 데오도라 스키피타레스는 ‘<뉴욕타임스> 최우수 연극 10선’에 선정되면서 주목받았던 예술가로 뮤지컬 <라이언 킹> 그림자극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모국어의 충만한 속살’과 ‘우리 자장가의 아름다움’을 근사하게 담아낼 <나비잠>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추석인 9월19일 개막해 29일까
[trans x cross] 굿나잇, 불면의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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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ography
<깡철이>(2013), <숨바꼭질>(2013), <베를린>(2012), <신세계>(2012), <전설의 주먹>(2012),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1), <부당거래>(2010), <이끼>(2010), <박쥐>(2009), <비열한 거리>(2006),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가을로>(2006), <친절한 금자씨>(2005), <혈의 누>(2005), <발레교습소>(2004), <올드보이>(2003), <클래식>(2002), <공동경비구역 JSA>(2000), <텔미썸딩>(1999), <해피엔드>(1999), <접속>(1997)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어린 시절 즐겨부르던 동요가 스릴러영화의
[STAFF 37.5] 공간을 음악으로 표현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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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영화
2013 <뫼비우스> <신의 선물>
2012 <분노의 윤리학>
2011 <로맨틱 헤븐>
2009 <10억> <말보로 전쟁> <귀신 이야기>
2006 <펀치 스트라이크>
드라마
2011 <TV 방자전>
2007 <산너머 남촌에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은 배우들에게 큰 도전이다. 한 사람 몫을 맡기도 벅찰 법한 영화 <뫼비우스>에서 배우 이은우는 ‘아내’와 ‘애인’ 두 가지 역을 동시에 맡아 뫼비우스의 순환고리를 연결했다. 그녀는 “감정을 동물적인 본능으로 표현하는 김기덕 감독만의 방식에 동참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배역을 고르는 기준이 “하고 싶은 이야기,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에 대한 공감에 있기 때문이다. 감독을 믿고 따른 결과, “친구들도 못 알아볼 정도”로 새로운 모습을 표현해내며 연기 스펙트럼을 확장했다.
그녀는
[who are you] 이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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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라 해야 할까, 소녀라 해야 할까, 여자라 해야 할까, 어른이라 해야 할까. 조곤조곤 야무지게 대답을 뱉어내는 고아성을 보며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할지 망설였다. 담담한 눈빛과 말투는 어른스러웠고, 사소한 말에도 윗니를 활짝 드러내며 웃는 표정은 영락없는 소녀였으며, 간간이 긴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짓과 다소곳한 자세는 여성스러웠고, 변함없이 동그랗고 귀여운 콧방울은 아이의 것이었다. 그 모두를 조금씩 가지고 있지만 그중 어느 하나에만 속하지 않는 어른아이. 차라리 이 애매한 단어가 그녀의 인상과 연기를 말하는 데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그 어른아이의 인상이 봉준호 감독에게도 특별히 소중했던 것일까. <괴물>에서 세주를 지켰던 현서처럼, <설국열차>의 요나도 자신 역시 보호받아야 할 소녀이면서 자기보다 어린 소년을 품에 안고 있다. 일본 대지진 참사를 기리기 위한 옴니버스영화 <3.11 센스 오브 홈 필름즈>에 실린 봉준호의 단편에서도 그
[고아성] 미래를 달리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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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종사>를 취재하기 위해 서울 시내의 한 호텔 복도 앞에 모인 수많은 매체 기자들은 고수와의 대련을 앞둔 도전자처럼 보였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거대한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 채 손에 들린 질문지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다. 문이 30분마다 열리는 까닭에 또각또각하는 구두 소리만 들릴 뿐 복도는 날카로운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장소가 복도로 바뀌었다”는 스탭의 안내를 받고 복도 한쪽 모퉁이에 자리한 소파에 이르자 장쯔이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 흐트러짐 없는 자세, 고집이 느껴지는 무표정 등 그의 태도에선 30분마다 상대를 바꿔가며 대련한 데서 오는 피곤한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영화에서 그가 연기한 위엄 가득한 ‘궁이’처럼.
전국 무술계를 제패한 ‘궁(宮)가’의 유일한 혈육. 인생의 봄에서 겨울로 훌쩍 뛰어넘는 시기의 엽문(양조위)과 무술로 교감한 여자. 아버지인 궁 대인(왕경상)이 자신의 후계자였던 제자 마삼(
[장쯔이] 완벽하고 강한 구(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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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룸에 들어선 양조위는 한숨 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아침부터 분단위로 배정된 인터뷰 루트에서 이제야 좀 벗어난다는 안도감으로 읽혔다. 한국에서 가지는 마지막 인터뷰, 그의 밝은 미소는 ‘이제 좀 편히 있어도 좋지 않을까’라고 무언의 동의를 구하는 것 같기도 하다. 구석자리를 골라 앉은 그는 바짝 의자를 당겨 기자와의 거리를 좁히는데, 양조위의 눈빛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꼭 그만큼의 거리다. 몇 차례 양조위와 가진 인터뷰에서 절절히 깨달은 것 하나. 그는 눈빛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엽문을 말하기 전에, 그는 <비정성시><화양연화> <무간도>에서 보았던 깊은 슬픔이 모두 뒤엉켜 있는 눈빛을 내놓는다. 배우의 정수를 훔쳐보는 것 같아 숨이 턱 막히는 경험이다.
<일대종사>에서 양조위는 영춘권을 전파한 실력자이자 이소룡의 스승으로 알려진 엽문(1893∼1972)을 연기한다. 엽문은 1930년 일제침략기 혼란스러운 정국, 남방무술의 새
[양조위] 보이지 않는 적과의 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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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종사>의 주요 공간 중 하나인 금루는 사람의 혼을 빼가는 곳이었다. 중국 광둥 지방 최초의 승강기가 설치되고, 아름다운 기생들이 모이고, 온갖 화려한 소품들로 장식된 화려한 요정이기 때문은 아니다. 강호의 영웅들이 드나들며 서로의 내공을 확인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일대종사>가 금루라면 이는 <2046>(2004) 이후 거의 10년 만에 한자리에서 만난 왕가위 감독, 양조위, 장쯔이 세 고수 덕분일 것이다. 영화에서 장쯔이는 스스로 옳다고 판단한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궁이 역을 맡아 일생일대의 연기를 펼쳐내고, 양조위는 묵묵히 무예의 길을 지키는 엽문을 연기해 서사의 중심을 단단하게 잡는다. 6월15일 왕가위 감독과 함께 내한한 양조위, 장쯔이를 서울 시내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라”는 극중 궁 대인의 대사처럼 <일대종사>를 되돌아보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다음 장부터 펼쳐진다.
[일대종사] 검무의 예술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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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우 감독의 시나리오를 받아보고 사장님이 이걸 재미있게 읽으셨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예순이 넘으셨지만 안목은 젊으세요.” “왜 자꾸 나이 얘기를 하고 그래. 내가 철딱서니가 없어서 얘한테 야단맞을 때도 많긴 한데.” “말에 뼈가 있는데요. (웃음)” 티격태격, 옥신각신.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부녀 지간처럼 지내온 이춘연 대표와 전려경 PD의 대화는 여느 때와 비슷했다. 씨네2000 창립이 꼭 20주년인 2013년, 그들의 작은 재난영화 <더 테러 라이브>가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결코 작지 않은 승리를 이어가고 있는 8월19일에도, 그들의 표정은 평온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이면 “과거는 히스토리, 미래는 미스터리, 현재는 선물(present)”이라는 이춘연 대표의 목소리에서 사뭇 밝은 기운을 감지할 수도 있었다. 간만에 수백만 관객이 건네온 선물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받아든 그들을 만나 테러 중계 작전의 뒷이야기와 제작자-PD-감독의 삼위일체 포메이션에 대
[이춘연, 전려경] 우린 사람 영화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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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효 감독과 함께 위안부 그림책 작가 권윤덕의 스토리를 쫓아온 시간만 4년. 그 시간이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킨 것 같냐는 질문에 안보영 PD는 “잠깐 생각해봐야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망설였다. 그러고도 끝내 드라마틱한 변곡점들을 찍어 보여주기보다 “작가님이 12권의 더미본을 수정했듯 우리도 12편 이상의 편집본을 고치고 또 고쳤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그 지난한 과정 끝에 <그리고 싶은 것>의 개봉까지 성사시킨 그녀의 표정에는 호들갑스러운 데가 전혀 없었다. 개봉 당일인 8월15일 <그리고 싶은 것>이 종일 상영되고 있는 인디스페이스 앞에서 그녀를 만나 그녀가 권효 감독과 비로소 그려낸 것과 앞으로 그녀가 독립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서 그려내고 싶은 것에 대해 물었다.
-광복절 개봉은 애초 계획했던 건가.
=빤하지만 최적이라 판단했다. 365일 유효한 이슈라는 건 없으니까.
-올해도 아침부터 인터넷이 야스쿠니 참배 신사 문제로 시끄럽더라.
=올
[flash on] 호들갑 떨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