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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버>에서 함께 연기했던 조디 포스터가 제니퍼 로렌스에게 지금까지 연기한 인물들의 공통점에 대해 물었다. 제니퍼 로렌스의 대답은 이랬다. “전부 어두워요.” 별거 아닌 간단한 대답 같지만 이 대답이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1990년에 태어난 젊은 배우이기 때문이다(참고로 위의 대답은 2011년, 그러니까 그녀가 22살 때 했던 말이다). 몇편의 TV드라마에서 단역으로 활동하다 19살 때 출연한 <포커 하우스>(감독 로리 페티, 2008)로 첫 영화연기를 시작한 제니퍼 로렌스는 그 뒤로 항상 어두움을 갖고 있는 인물들을 연기해왔다. 게다가 이 어두움이란 단순한 십대 소녀의 우울함이나 충동적으로 우발적 범죄를 저지르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14살 소녀를 연기한 <포커 하우스>에서 그녀는 성폭행을 당했고, <버닝 플레인>(2008)에서는 문자 그대로 엄마를 불태워버렸다. 어른들에게 눈에 멍이 들도록 맞아야 했던 <윈터스 본>(2010
[제니퍼 로렌스] 섀도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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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 암에 걸린 노인과 그를 간병하는 젊은 여인 사이에 피어나는 욕망에 관한 영화 <야관문: 욕망의 꽃>의 주연을 맡은 신성일 선생과의 인터뷰가 있던 날이다. 선생께서 골목길을 지나 카페에 들어선 순간, 사진기자의 표정이 굳어진다. 영락없이 운동복 차림이다. 일정을 착각했다는 말씀과 동시에 장소를 당신 집으로 옮기자고 한다. “그게 사진 찍기도, 말하기도 편하겠다”며. “우리 집으로 가자. 머리에 물이라도 묻혀야 사진을 찍지, 안 그래?” 1시간 뒤쯤, 공덕동 어느 아파트. 책이 가득한 책장, 조각상, 각종 트로피가 벽에 둘러져 있다. 탁자 위에는 서양 고전음악 해설서와 피카소 전시회 자료집과 영화 사설이 스크랩되어 있는 신문 뭉치들, 먹다 남은 음식 부스러기 몇개가 널려 있다. 그리고 저 멀리 운동기구. 텔레비전 아래에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 <그랜 토리노> <이만희 컬렉션> <로마의 휴일> DVD가 뒤섞여 있다. 그렇게 집
[신성일] 꽃보다 할배? 말로만 그러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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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가를 인터뷰할 때, 요즘 젊은 작가 중 누구를 좋아하시나요 물으면 가장 자주 나오는 이름이 있다. 바로 황정은이다.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말과 글의 맛이 고루 살아 있는 문장과 환상성, 숨어 있는 유머감각은 빠지지 않는다. 경장편 <百의 그림자>로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았고, 단편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을 쓴 그녀의 신작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도 어머니의 폭력에 노출된 여린 형제의 아픈 현실과 솜털처럼 간질거리는 유머가 기묘하게 손가락을 얽은 그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사실적인 상황 전개마저 환상적으로, 비현실적으로 느끼게 하는 소설을 잘 쓴다. 소설을 쓸 때 분위기와 내용, 어떤 걸 먼저 생각해내나.
=소설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장소나 장면을 떠올릴 때가 있다. ‘그 장면을 소설로 이야기하고 싶다’에서 시작한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세상이 곧 망할 것 같으면서도 그렇게 빨
[trans x cross] “무엇을 쓰느냐보다 어떻게 쓰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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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시>는 근미래 SF영화다. 블랙홀 내 웜홀을 통해 시공간 이동이 가능하다는 이론에 근거, 정우석(정재영) 박사는 지구 핵 에너지인 코어 에너지를 활용해 웜홀을 지탱하고 타임머신이 진입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처럼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 난무하는 <열한시>에서 정재영은 ‘박사’다. 거대한 시간여행 연구소 앞의 정우석 박사는 얼핏 그가 지금껏 연기해온 캐릭터들과 무척 달라 보인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오랜 기간 촬영했다는 점도 이전과 다른 요소 중 하나다. 이에 대해 정재영은 “최근 빠듯한 일정 때문에<그래비티>를 보지 못한 게 가장 안타깝다”며 “<열한시>는 시간여행 혹은 SF 장르에 대한 오랜 관심으로 출연하게 된 작품”이라고 말한다. 참고로 이런 부류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대니 보일의 <선샤인>(2007)이라고. 말하자면 ‘이런 작품을 하고 싶어 기다려왔다’는 얘기다. 어쩌면 <열한시>는 우리가
[정재영] 정재영 시대의 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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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감독일 거라고 생각한 건 이성은이라는 이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성은 감독의 첫 장편영화 <사랑해! 진영아>는 서른살의 여성 시나리오작가 진영(김규리)의 사랑과 진로 그리고 가족에 대한 고민을 그려낸 작품이다. 때로는 섬세하게, 또 때로는 귀엽게 진영과 그의 주변 인물을 묘사한 솜씨 때문에 감독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여성 감독의 영화로 착각할지도 모르겠다. “여성 감독인 줄 알았다”고 인사를 건네자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얘기 많이 들었다. 예전에 초등학교 여학생 진영이의 성장통을 그렸던 <진영이>(2006)로 서울독립영화제 사전 감독모임에 갔는데 강릉씨네마떼끄 박광수 사무국장이 여성 감독인 줄 알고 나를 한참 찾다가 내 얼굴을 보고 크게 실망하고 돌아선 적도 있었다. (웃음)”
-<사랑해! 진영아>는 단편 <진영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들었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는데 한 학생이 <진영이>를 보
[flash on] 서른, 비로소 성장하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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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영화의 발굴과 제작지원을 목표로 한 부산국제영화제(이하 BIFF)의 야심이 제대로 들어맞았다. 방글라데시의 영화감독 모스타파 사르와르 파루키의 발견은 단연 돋보이는 성취다. 2009년 BIFF에선 그의 <제3의 인생>이 소개됐고, 아시아영화펀드 지원으로 완성된 <텔레비전>은 지난해 BIFF 폐막작으로 선정된 뒤 각종 해외 영화제로부터 기분 좋은 관심을 받고 있다. 방글라데시 영화계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주목받고 있는 파루키 감독이 <텔레비전>의 개봉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다. 그에게 방글라데시영화라는 신세계에 대해 전해 들었다.
-<텔레비전>은 2003년 투레쿠에 마수드 감독의 <클레이 버드> 이후 방글라데시영화로는 두 번째 해외 개봉작이다.
=대단히 기쁘다. 두 번째 해외 개봉까지 굉장히 긴 시간이 걸렸다. 그간 방글라데시의 젊은 영화감독들은 아시아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지만 끊임없이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의 방식으로 해보
[flash on] 잘 만든 픽션은 다큐처럼 다가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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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근처에 나온 건 정말 오랜만이거든요.” 인터뷰 장소에 들어온 김유미는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카페 벽에 걸려 있는 액자 속 그림을 살펴보기도 하고, ‘셀카’를 찍어 자신의 SNS에 올리기도 했다. 오랜만의 외출만이 그녀의 마음을 들뜨게 한 건 아니다. 출연작 <붉은 가족>과 <블랙 가스펠>이 11월6일과 14일, 한주 간격으로 연달아 개봉했다는 사실도 그녀를 자극했을 것이다. 두 작품은 김유미가 <리턴>(2007) 이후 6년 만에 출연한 영화다. “기분이 어떻냐고요? 씨앗을 뿌렸다가 한꺼번에 추수하는 기분? 여배우들이 작품이 없어 많이 힘들어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참여한 영화 두 편이 동시에 개봉하는 건 행운인 것 같아요.”
딱딱한 여자. <붉은 가족>에서 김유미가 연기한 백승혜는 위장 가족 간첩 ‘진달래’의 조장이다. 시아버지 조명식(손병호), 남편 김재홍(정우), 딸 오민지(박소영) 등 가짜 가족을 통솔해 북에서 내
[김유미] 설렘을 입고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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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2001)는 2000년대 초반 한국 영화계의 최대 흥행작 중 한편이었다. 이 영화는 각종 유행어를 낳았고 향수를 자아냈다. 동수(장동건)와 준석(유오성)이라는 두 주인공도 자주 회자되었다. <주유소 습격사건>(1999) 등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졌던 유오성은 <친구>를 계기로 일약 스타가 됐다. 하지만 그 뒤로 유오성은 오랜 시간 정체해야만 했다. 적어도 영화배우로서는 뚜렷한 대표작 없이 10여년을 보냈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 <친구2>에 다시 출연한 지금, 그는 다시 준석이 되어 있다. 그의 소회가 궁금했다.
-이 시리즈는 “<친구2>로 끝나야 한다”고 단호하게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친구3>에 관한 계획을 묻기에 그렇게 답한 것일 뿐 다른 뜻은 없었다. <친구>라는 귀중한 원석이 있기에 여기까지 온 게 사실이지만, <친구2>를 지나고, 나중에 또 어떻게 구현될지 그건 모르는 일이
[유오성] ‘어른’이 된 준석이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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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 누드, 자연, 환상, 자유…. 라이언 맥긴리의 사진에는 그런 것들이 어김없이 담겨 있다. 2003년, 25살 나이에 휘트니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최연소 작가로 유명세를 얻은 그는 청춘의 속살을 가장 적나라하고도 아름답게 담아내는 작가로 꼽힌다. 그는 취미로 파티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어대다가 사진의 길에 들어섰다고 한다. 10년 사이 모델이나 배우를 더 많이 찍게 되고, 연출에 익숙해지고, 필름이나 디지털카메라를 쓰게 됐지만, 마법과도 같은 생동감을 품은 그의 누드 사진들은 여전하다. 대림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라이언 맥긴리-청춘, 그 찬란한 기록>전을 기념해 서울을 찾은 그가 가장 자주 쓴 단어도 ‘마법’이다. 그가 말한, 마법으로서의 사진술에 관해 여기 옮겨 적는다.
-모델이나 피사체를 선택할 때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나.
=예술가들을 가장 선호한다. 내 작품세계를 잘 이해하고, 누드 촬영에도 관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trans x cross] 자유로운 영혼의 마법 같은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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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한 줄만 알았던 칠봉이의 역습이 시작됐다. 나정 앞에선 말간 얼굴로 웃기만 하던 칠봉이가 술기운을 빌려 나정에게 입을 맞추는 그때부터, 상황은 역전됐다. 저돌적인 그 입맞춤의 주인공이 유연석이었기에 더 속이 시원했는지도 모른다. 유연석이 <응사>에서 맡은 역할은 93년 봉황대기 고교야구대회서 일곱 경기 연속 완봉승을 거두며 MVP로 뽑혀 ‘휘문고 칠봉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준’이다. 준의 이름은 아직 다 밝혀지지 않았다.
<건축학개론>의 강남 선배 재욱, <늑대소년>의 얄미운 지태,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의 잔혹한 수행원 지원을 거치며 ‘국민 나쁜놈’ 이미지를 완성한 유연석이 착한 얼굴로 돌아왔다. 악역을 연기할 때 더 빛이 나고, 화제가 되었던 것이 아쉬웠던 걸까. “왜 하필 비호감 캐릭터를 했던 영화만 대박이 터졌는지 모르겠다”며 아이같이 투덜거리는 모습이 덩치에 안 맞게 귀엽기까지 하다. “칠봉이가 실제 모습과 많이 비
[유연석] 칠봉이의 역습은 이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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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겉과 속이 다른 배우라니! 오해는 말자. 11년차 배우 고아라를 향한 순수한 감탄사일 뿐이다. 인형 같은 외모만큼이나 응당 그 속내마저 도도하고 새침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무슨 난데없는 썰렁개그며, 아저씨 같은 추임새인지. <응사>의 나정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털털한 모습이다.
마산에서 상경한 신촌하숙 딸내미 나정은 연세대 농구부 “‘이상민 오빠야’의 극렬 빠순이”다. 강의실 출석보다 체육관 출석에 더 열심인 나정은 어느 순간부터 “머릴 쓰다듬던 (쓰레기) 오빠의 손, 오빠의 숨소리, 오빠의 냄새가 낯설어진다”. 똑같은 ‘순이’지만 <응칠>의 성시원(정은지)과는 여기에서 캐릭터가 확실히 갈린다. 어른이 되기 전까지 사랑을 몰랐던 시원과 달리, 갓 어른의 세계로 접어든 나정은 사랑을 할 줄 아는 것이다. “작가님이 ‘빠순이는 사랑과 순이질을 동시에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더라. 순이질은 사랑보다 더하다고 하셨다. 나정이는 이제 쓰레기의
[고아라] 모든 걸 내려놓고 ‘비커밍 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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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그때였다. 허릿병이 도진 나정에게 과자봉지를 툭 던져두고 나가던 그 시점. 정우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저분하고 바보 같아 ‘쓰레기’라고 불리던 오빠는 알고보니 천재과 레지던트였고 나정의 친오빠도 아니었다. 이 경상도 남자는 막말 속에 따뜻한 애정까지 장착한 고품격 멜로남이었다. <응사>가 시작된 이래 매 화 ‘정우의 멜로 폭탄’이 터지는 중이다. 나쁜 남자로 점철된 ‘실장님’ 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멜로드라마계에서 쓰레기는 흥미로운 별종이고, 매력적인 이단이다. ‘그 드라마 봤어?’가 ‘정우 봤어?’로 회자되고, 일찌감치 메인 CF 출연까지 대거 예약했으니, 그야말로 정우의 나날이다.
“닮긴 했는데 난 쓰레기보다 더 따뜻한 남자다. (웃음) 쓰레기는 나보다 열살 정도 어리니까 철부지인 면을 보탰다. 진지함과 코믹함의 적정선을 찾는 게 관건이었다.” 정우에게 쓰레기는 회심의 도전은 아니었다. 장르는 다르지만 액션영화 <바람>의 ‘짱구’를 쏙 빼닮은 데다,
[정우] 쓰레기보다 더 따뜻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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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한 게임의 시간. 벌칙을 받은 칠봉이(유연석)가 나정(고아라)에게 키스를 했다. 이미 곯아떨어진 하숙생들을 패닝하던 카메라가 멈춘 곳은, 키스하는 그들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쓰레기(정우)의 표정이다. <응답하라 1994>(이하 <응사>)가 6화에서 미래 다섯 신랑의 구도를 좁혀, 삼각멜로의 본색을 드러냈다. 먼지 쌓인 결혼식 비디오테이프처럼 굳이 꺼내보지 않았던 1994년의 기억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안절부절, 노심초사는 앞으로 더욱 끓어오를 것이다.
삼각관계로 한데 묶인 정우, 고아라, 유연석, 세 배우는 사진 촬영 내내 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이 모습이 현장 분위기 그대로”라는 정우의 말처럼, 셋은 스스럼없는 사이임을 줄기차게 과시했다. 물론 그들의 애정을 증폭시킨 진짜 원동력은 <응사>에 대한 뜨거운 반응이었을 것이다. “감독님이 대본을 아예 주지 않아”서 도무지 이 사랑의 끝이 어떨지 역시 짐작하지 못한다고 입을 모으는 세 배우들은 19
[응답하라 1994] 그들이 응답하는 삼각멜로의 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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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타운>(2008), <애니멀 타운>(2009), <댄스 타운>(2010) 등 이른바 ‘<타운> 3부작’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전규환 감독은 가장 왕성한 창작욕을 과시하고 있는, 한국 영화계의 진정한 독립영화감독 중 하나다. 이후 <불륜의 시대>(2011)를 지나 <무게>(2012)로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베니스 데이’ 부문에 초청돼 ‘퀴어사자상’을 수상했다. <무게>는 시체안치실에서 시체를 닦아 관에 담는 일을 하는 ‘꼽추’ 정씨(조재현)와 성기를 잘라내고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그의 배다른 동생 동배(박지아) 등 태생적인 ‘무게’를 떠안은 채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또한 지속적인 장르 실험을 해오고 있는 그에게 <무게>는 ‘판타지 멜로’다. 물론 그는 이후 몇번의 실험을 더 끝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마이 보이>(2013)와 유준상 주
[flash on] 비울수록 많이 보이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