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가지 소원>이었던가. 소세지를 두고서 벌어진 승강이 때문에 어처구니없이 소원을 날려버린 어느 불행한 부부의 이야기. 영화 <일곱가지 유혹>에서 악마의 표적이 되는 이도 그들 부부의 처지와 비슷하다.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컴퓨터 회사의 고충처리반원으로 일하는 리처드는 동료들에게 괄시와 놀림의 대상이다. 동정을 보내는 여인 한명쯤 곁에 두고 있으련만, 어찌된 일인지 청년이 가슴에 품고 있는 여인은 그의 존재 자체도 모른다. 동료들의 장난에 넘어가 그녀에게 접근하는 용기를 과시하지만, “누구시더라” 하는 쌩한 여인의 반응에 특유의 넉살을 부리던 리처드라도 풀이 죽게 마련이다.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듯 암담한 리처드에게도 기회가 온다. <파우스트>의 메피스토에 버금가는 악마가 매혹적인 팜므파탈의 의상을 걸치고 나타나 그에게 소원을 들어줄 테니 영혼을 달라고 제안하는 것. 7가지 소원을 영화 속에서 모두 보여줘야 하는 리처
일곱가지 유혹
-
<더 길티>에는 시체에 단서를 남기는 연쇄살인마나 그를 집요하게 쫓는 형사가 없다. 음습하게 젖어오는 안개나 무거운 어둠, 차갑게 내쏘는 형광등도 없다.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탈출하는 긴박한 순간도 없다. 대신에 성공한 변호사와 감옥에서 갓 나온 젊은이, 성공하고 싶은 젊은 여성과 눈먼 보스가 지휘하는 갱단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이 잔뜩 등장한다. 그러나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그들이 기묘한 운명의 끈으로 연결되면서 그들의 세계는 살인과 배신, 음모로 가득 찬다.인생은 묘한 것이야. 캘럼은 말한다. 그는 여직원을 강간하고, 해고했다. 여직원은 그가 연방판사직을 수락하면 언론에 알리겠다고 협박한다. 그녀의 입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녀가 죽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누구에게? <더 길티>는 시작부터 이곳저곳, 이 사람 저 사람을 연이어 보여준다. 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순간, <더 길티>의 사건이 시작되고 반전이 일어
더 길티
-
<번지점프를 하다>는 어느 날 어떤 장소에 못 박혀 영영 멈춰 있는 감정을 불러내는 영화다. 입영열차를 타던 날, 약속했던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 남자의 심장은 더이상 뛰지 않는다. 살아 있어도 그를 두근거리게 할 일은 이제 없다. 그녀 손을 잡으면 흥분해서 딸꾹질이 나오던 수줍고 풋풋한 사랑과 작별한 것이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세월이 흘러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이 된 그 앞에 나타난 17살난 앳된 소년, 그 아이를 보면서 남자는 가슴이 터질 듯 아파오는 걸 느낀다. 그는 소년에게 옛 연인의 이름을 부르고 만다.‘운명이 갈라놓은 연인’이라는 익숙한 주제를 다루지만 <번지점프를 하다>가 보여주는 상상력은 낯설고 신선하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환생하고 미처 몰랐던 과거가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노스탤지어와 판타지를 오가며 미스터리를 함축한 이야기라면 <은행나무침대>나 <동감>도 있지만 <번지점프를 하다>는
번지점프를 하다
-
가능할까? 미야자키 하야오, 그의 대표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비교적 간략하게 소개할 수 있을까. 내내 고민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명도를 확인하는 작업은 그다지 실속없을 것 같다. <이웃의 토토로> <붉은 돼지> 등 그의 애니메이션들은 국내에서 재패니메이션과 동일어 수준으로 인식되고 있으니까.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감독이 원작을 쓴, 어느 견지에선 미야자키 감독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1호’로 부르기에 적당한 작품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한마디로, 걸작이다. 따로 설명할 방법을 찾기 곤혹스럽다. 이후 미야자키 감독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스타일과 세계관, 그리고 주제의식이 한데 뭉쳐서 한편의 애니메이션에 응축되어 있다고 하면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보는 시각에 따라서 해석이 분분해지고, 때로 모호한 신비감이 감도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