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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올빼미의 성>의 결말은 얼핏 이해되질 않는다. 어느 시골농가에서 젊은 남녀가 땀흘려 일한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고, 이 한쌍의 부부는 한폭의 그림처럼 불변의 사랑을 나눌 것만 같다. 언젠가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은 인터뷰중에 “난 해피엔딩으로 마감되는 영화가 싫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인물들이 과연 행복할까, 라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한 적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건대 <올빼미의 성>의 평온한 결말은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답지 않다. 1960년대 일본의 누벨바그 세대로서, 줄곧 처절한 운명론과 자기파괴의 미학을 스크린에 펼쳐보였던 노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올빼미의 성>은 시바 료타로의 원작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일본 전국시대를 가로지르는 정치사가 작품 배경이 되고 있다. 가족을 몰살당한 닌자는 복수를 계획하고, 통치자에게 칼날을 들이대지만 그의 목을 베지는 못한다. 그저 “복수로 세월을 보내게 해줘서 고맙다”라
올빼미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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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천국>의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말레나>에서 자신이 역시 성장영화쪽에 강점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네마 천국>의 토토가 영화를 통해 세상과 사랑에 대해 눈을 뜨게 되는 것처럼 <말레나>의 레나토는 한 여인의 존재로 인해 부쩍 자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말레나는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어 왕성하게 피어나는 레나토의 육체와 정신에 햇빛과 물과 영양분을 공급하는 여신이다. 그는 머릿속에서 그녀의 옷을 입히고 벗기기를 반복하며 침대 스프링이 떨어져나가라 수음을 하기도 하고, 결국 부치지도 못할 연서를 수없이 쓰고 구겨가며 감성의 푸른 잎을 피우게 된다. 세상을 좀더 빨리, 넓게 볼 수 있게 하는 자전거나 성인 세계에 입장할 수 있는 통행증 같은 긴 바지처럼, 말레나는 레나토에겐 어른들의 세계를 가르쳐주는 교과서인 셈이다. 토르나토레는 <시네마 천국> 때와 마찬가지로 이같은 이야기를 질펀하고 왁자지껄한 이탈리아 시칠리아
말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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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노래한다. 프레스 기계의 시퍼런 칼날이 하얀 손목 근처를 배회할 때 쿵쾅거리는 톱니바퀴와 나사의 소음에 맞춰 춤을 추며 노래부른다. 그녀는 다시 노래한다. 공장에서 쫓겨나 빛도 희망도 볼 수 없을 때 “과거도 보았고 미래도 안답니다. 난 다 보았어요. 더이상 볼 것은 없답니다”라고 체념의 노래를 부른다. 그녀는 또 노래한다. 돈을 훔친 남자가 자신을 도둑으로 몰며 시커먼 절망의 절벽 아래로 밀칠 때 “바보 같은 셀마, 다 너 때문이야”라는 자책의 노래를 들려준다. <어둠 속의 댄서>는 사형대를 향해, 비극을 향해 경쾌한 탭댄스를 추며 나아가는 영화다. 오직 노래와 춤과 뮤지컬이 맘껏 숨쉴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던 눈먼 여인은 아들에게 자기 운명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그녀는 장님이 되지 않을 수도, 가난하지 않을 수도, 아껴주는 남편을 얻을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가련한 여인은 그 모든 걸 포기한다. 세상의 어떤
어둠 속의 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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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눈치챘겠지만, <더 댄서>는 춤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영화다. 이야기보다 춤이 강하고, 배우보다 댄서가 전면에 있다. 17살 때 뤽 베송에게 발탁돼 그가 제작하는 영화의 안무를 했던 미아 프레에게 뤽 베송은 언어장애가 있는 댄서 인디아 역을 주었다. 캐릭터에 신비를 더하는 한편으로 연기보다는 춤에 능한 그녀를 배려한 설정임을 짐작할 수 있다. 미아 프레는 이 영화에서 놀라운 춤솜씨를 보이는데 대사가 없는 역을 연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라기보다는 아직 댄서로만 보인다. 이러한 ‘춤의 우위’는 영화 전반을 규정한다. 뇌쇄적인 미아 프레의 춤추는 모습을 담는 카메라는 뮤직비디오가 대상을 보여주는 방식을 따르며, 영화는 종종 드라마에서 뮤직비디오로 전환됐다 돌아오곤 한다.보이는 그대로 <더 댄서>의 개성은 바로 그 담백한 ‘전시’에 있다. 애초에 댄서 미아 프레의 매력에 중점을 둬 기획된 영화인 만큼 <더 댄서>는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기꺼이 춤을
더 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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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대사를 쓰는 감독이 있다 하자. “오래 산 부부들의 ‘사랑해’라는 말은 ‘치즈 샌드위치’라는 말과 차이가 없지.” 그리곤 남자는 여자를 쳐다보며 살짝 고백한다. “에이미, 난 널 치즈 샌드위치 해.” 재치있는 대사의 행간에 상큼한 연애의 방점을 찍고 여기에 끈적거리지 않는 섹스라는 소스를 친다는 점에서, <러브 앤드 섹스>는 여성관객 앞에 내놓는 저칼로리식 샐러드처럼 보인다. 산뜻하고 톡톡 튀는 근심걱정 없는 로맨틱 코미디의 세계에 다시 여류감독이 나타난 것이다. <러브 앤드 섹스>의 감독 발레리 브레이먼은 남과 여의 차이에 민감지수 100인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노라 에프론과 낸시 마이어스의 계보를 잇는 신예감독.특히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랑과 섹스라는 슬로건에 걸맞게 영화는 여주인공 팜케 잰슨의 내레이션을 통해 여성의 주체적인 시선으로 섹스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 나가려 한다. 사랑에 대해서뿐 아니라 자신이 관계를 맺은 13명의 남
러브 앤드 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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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아프다. 가슴을 저리게 하고 때로는 갈가리 찢어놓는다. 더이상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랑이라면 고통은 배가된다. 이를테면 부재의 로맨스다. <도쿄 맑음>에서 사진작가는 자신의 모델이자 부인이던 여성을 한없이 그리워한다. 세상을 등지고 영영 이별한 여인을. 눈앞에 있는 대상이 아닌 심상으로만 오롯이 남아 있는 사랑에 관한 영화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러브레터>와 흡사하다. 여주인공도 겹친다. 큰 눈망울의 그녀, 조용히 입가에 웃음을 띠우는 것만으로 주변 풍경을 바꿔버리는 마력을 지닌 나카야마 미호가 <도쿄 맑음>에서 이루지 못할 서글픈 사랑에 재도전한다.<도쿄 맑음>은 예쁜 영화다. 마치 사진첩을 한장한장 넘기듯 정갈하고 세련된 장면이 많다. 도쿄 시내는 물론이고 관광지의 수려한 경치까지 감상할 수 있다. 실내와 실외를 막론하고 은은한 파스텔톤으로 일관하는 색감은 이 영화의 큰 매력이다. 얼핏 다케나카 나오토의 영화라고 믿기지 않는다
도쿄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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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초콜릿을 맛보면, 누구든 사랑에 빠진다. 마약보다 더 좋은 것.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드는 그 무엇. 정체 모를 그 묘약은, 먼저 마음의 족쇄를 풀라고, 관능적인 매혹에 솔직해지라고 부추긴다. 달콤한 초콜릿의 성찬은, 금욕과 위선과 편견으로 무장한 한 마을에, 사랑의 훈풍을 불러온다. 달콤쌉싸름한 사랑의 맛이 오감으로 느껴지는 영화 <초콜렛>은, 사랑만이, 사람만이 세상의 희망임을 이야기한다.여느 음식영화처럼 식욕과 성욕을 연결짓고 있지만, <초콜렛>은 신비와 순수의 공기를 곁들인다. 초콜릿의 유래와 기능을 상징하는 여인의 존재도 그 속에서 빛을 발한다. 성당에서 앳된 신부가 “진리는 어디에 있냐”고 목청을 높일 때, 그에 대한 대답인 듯 거센 북풍이 불어닥치고, 이방의 모녀가 마을에 당도한다. 얄궂게도 빨간 망토를 뒤집어쓰고. 미혼모와 그 딸.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가슴팍에서 주홍글씨를 읽으려 한다. 괴상한 접시(마야의 유물로 밝혀지지만)로 점을 보면서,
초콜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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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지 소원>이었던가. 소세지를 두고서 벌어진 승강이 때문에 어처구니없이 소원을 날려버린 어느 불행한 부부의 이야기. 영화 <일곱가지 유혹>에서 악마의 표적이 되는 이도 그들 부부의 처지와 비슷하다.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컴퓨터 회사의 고충처리반원으로 일하는 리처드는 동료들에게 괄시와 놀림의 대상이다. 동정을 보내는 여인 한명쯤 곁에 두고 있으련만, 어찌된 일인지 청년이 가슴에 품고 있는 여인은 그의 존재 자체도 모른다. 동료들의 장난에 넘어가 그녀에게 접근하는 용기를 과시하지만, “누구시더라” 하는 쌩한 여인의 반응에 특유의 넉살을 부리던 리처드라도 풀이 죽게 마련이다.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듯 암담한 리처드에게도 기회가 온다. <파우스트>의 메피스토에 버금가는 악마가 매혹적인 팜므파탈의 의상을 걸치고 나타나 그에게 소원을 들어줄 테니 영혼을 달라고 제안하는 것. 7가지 소원을 영화 속에서 모두 보여줘야 하는 리처
일곱가지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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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길티>에는 시체에 단서를 남기는 연쇄살인마나 그를 집요하게 쫓는 형사가 없다. 음습하게 젖어오는 안개나 무거운 어둠, 차갑게 내쏘는 형광등도 없다.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탈출하는 긴박한 순간도 없다. 대신에 성공한 변호사와 감옥에서 갓 나온 젊은이, 성공하고 싶은 젊은 여성과 눈먼 보스가 지휘하는 갱단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이 잔뜩 등장한다. 그러나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그들이 기묘한 운명의 끈으로 연결되면서 그들의 세계는 살인과 배신, 음모로 가득 찬다.인생은 묘한 것이야. 캘럼은 말한다. 그는 여직원을 강간하고, 해고했다. 여직원은 그가 연방판사직을 수락하면 언론에 알리겠다고 협박한다. 그녀의 입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녀가 죽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누구에게? <더 길티>는 시작부터 이곳저곳, 이 사람 저 사람을 연이어 보여준다. 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순간, <더 길티>의 사건이 시작되고 반전이 일어
더 길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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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점프를 하다>는 어느 날 어떤 장소에 못 박혀 영영 멈춰 있는 감정을 불러내는 영화다. 입영열차를 타던 날, 약속했던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 남자의 심장은 더이상 뛰지 않는다. 살아 있어도 그를 두근거리게 할 일은 이제 없다. 그녀 손을 잡으면 흥분해서 딸꾹질이 나오던 수줍고 풋풋한 사랑과 작별한 것이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세월이 흘러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이 된 그 앞에 나타난 17살난 앳된 소년, 그 아이를 보면서 남자는 가슴이 터질 듯 아파오는 걸 느낀다. 그는 소년에게 옛 연인의 이름을 부르고 만다.‘운명이 갈라놓은 연인’이라는 익숙한 주제를 다루지만 <번지점프를 하다>가 보여주는 상상력은 낯설고 신선하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환생하고 미처 몰랐던 과거가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노스탤지어와 판타지를 오가며 미스터리를 함축한 이야기라면 <은행나무침대>나 <동감>도 있지만 <번지점프를 하다>는
번지점프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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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할까? 미야자키 하야오, 그의 대표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비교적 간략하게 소개할 수 있을까. 내내 고민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명도를 확인하는 작업은 그다지 실속없을 것 같다. <이웃의 토토로> <붉은 돼지> 등 그의 애니메이션들은 국내에서 재패니메이션과 동일어 수준으로 인식되고 있으니까.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감독이 원작을 쓴, 어느 견지에선 미야자키 감독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1호’로 부르기에 적당한 작품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한마디로, 걸작이다. 따로 설명할 방법을 찾기 곤혹스럽다. 이후 미야자키 감독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스타일과 세계관, 그리고 주제의식이 한데 뭉쳐서 한편의 애니메이션에 응축되어 있다고 하면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보는 시각에 따라서 해석이 분분해지고, 때로 모호한 신비감이 감도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