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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쌩쌩 효과음을 동반한 편집과 아드레날린을 펌프질하는 음악, 정지동작으로 소개되는 등장인물들. <이대로, 죽을 순 없다>의 시작은 <춤추는 대수사선>이나 <수사반장> 같은 TV 수사시리를 보는 듯 긴박하다. 주인공 이대로 형사(이범수)는 미친 듯이 차를 몰아 용의자를 추격하는 중이다. 혹시 그는 불나비 같은 영웅? 천만에. 평소, 검거현장 대신 러브호텔의 애인에게 출동하고 용의자 빼돌려 뇌물 챙기기 분주한 이대로 형사의 본색을 아는 자라면 물을 것이다. “어디 아파요?” 혹은 “죽을 때가 됐나?”라고. 실은 둘 다 맞다. 뇌종양 말기 선고를 받은 이대로는, 홀로 남겨질 딸 현지(변주연)에게 보험금이라도 남기려면 몇달 안에 반드시 사고로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그는 순직을 도모한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자 죽고 죽고자 하는 자 산다는 옛말의 섭리에 따라, 이대로는 죽긴커녕 9시 뉴스를 주
불량 형사의 사생결단 순직작전, <이대로, 죽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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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방비 도시>(로베르토 로셀리니, 1945)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처형 임무를 맡은 이탈리아 군인들은 신부를 향해 제대로 총구를 겨눌 수가 없었다. 영화는 적극적인 악의 역할을 철저히 나치 독일이라는 ‘외부’에 부과했고 그 절대악에 맞서 싸우거나 그로부터 희생당한 이탈리아인들의 장중한 이야기가 곧 당시의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이것이 혹독했던 한 시기에 대한 ‘공식적인 이야기’이거나 혹은 ‘좋은 기억’이라고 한다면 타비아니 형제의 <로렌조의 밤>에서 그런 식의 이야기는 심히 훼손된다. 여기서 우리는 동족끼리, 그것도 서로의 이름까지 뻔히 아는 같은 지역 사람들끼리, 죽고 죽이는 부조리하게 비극적인 상황을 보게 된다. (여러모로) <로렌조의 밤>에 대한 최선의 정의들 가운데 하나는 <무방비 도시>(를 비롯한 네오리얼리즘영화)에 대한 수정주의적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도입부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레이터는 오래전 산 로렌조의
두편의 타비아니 형제의 영화, <로렌조의 밤><피오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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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는 수많은 효녀·효자들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먹고 싶다”는 당신의 말 한마디면, 한국의 효자들은 한겨울에 딸기가 ‘있어선 안 된다’는 자연의 진리마저 아무 의심없이 뒤엎어버린다. 부모를 정성으로 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부모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불가능한 일이라도 일언반구하지 않고 따르는 그 모습들이 가끔은 무섭다. 효녀 심청의 이야기는 그런 설화의 최고봉이다.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에 물불 가리지 않고 책임지지도 못할 약속을 하는 아버지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꽃다운 몸을 던지는 딸. 아무리 효도가 아름답다지만 아버지가 눈뜨는 것이 딸의 목숨보다 더 중하다는 논리는 폭력이다.
넬슨 신은 이 낡은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서 그런 지점에 약간의 각색을 가했다. 심청의 아버지 심학구는 조정의 강직한 충신으로 설정되었는데, 역적의 위해로 모든 것을 잃고 딸 청이만을 구해 은둔한다. 그 와중에 그는 눈이 멀었지만 늘 품위있고 다정하다. 딸에게 무조건 의지하지 않
남북이 합작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 <왕후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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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과학자 리드(이안 그루퍼드)는 유전자의 비밀에 다가갔지만 연구를 계속할 자금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파산 위기에 몰린 리드와 그의 단짝 벤은 사업가로 성공한 대학동창 빅터를 찾아가고, 그의 후원으로 DNA 연구를 위해 우주여행을 떠난다. 동행한 사람은 리드의 옛 애인이자 빅터의 약혼녀인 과학자 수(제시카 알바), 수의 남동생인 파일럿 자니, 그리고 빅터. 방사능 폭풍에 휘말려 유전자 변형을 일으킨 이들은 서로 다른 초능력을 얻어 ‘판타스틱4’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된다. 남은 한 사람 빅터는 당연하게도, 악당이다.
<판타스틱4>는 마블 코믹스가 1950년대부터 발행한 만화책 시리즈가 원작인 영화다. 원작자 스탠 리는 “슈퍼히어로라고 팀을 이루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라는 제안을 받고 <판타스틱4>를 구상했고, 주인공들에게 몸을 자유자재로 늘일 수 있는 탄성이나 불꽃을 뿜는 능력, 바위처럼 단단한 피부 등과 같은 초능력을 고루 배분해주었다. 이렇게 태어난 ‘판
특수효과의 힘, <판타스틱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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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콕은, 대사는 시나리오를 다 쓰고 맨 나중에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진 감독의 <박수칠 때 떠나라>에서 대사는 시나리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묵직한 비중이다. 그것은 시나리오를 쓰기 전부터 구상된, 아니 시나리오 구상의 씨앗이자 열매가 아닐까 싶다. 그 많은 대사 가운데 절반은 재치와 웃음을 자아내는 데 쓰인다. 장진의 코미디는 아주 난처한 상황 속에서 웃음을 건져내려는 시도임을 확인하게 된다.
<박수칠 때…>는 히치콕식의 서스펜스물이다. 9군데를 난자당한 채 호텔방에서 발견된 미모의 여인 정유정이 있다. 그리고 히치콕식의 살인자 누명을 쓴 남자 김영훈(신하균)이 있다. 김영훈은 사건 발생 뒤 한 시간 만에 호텔 지하주차장에서 발견된 유력한 용의자다. 김영훈은 정말 범인인가? 또는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린 사람인가? 이 질문은 장진 감독 작품 가운데 가장 강렬한 극적 긴장감을 자아낸다.
장진 감독은 기이하게도, 누명을 쓰고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살인사건에 관한 가장 수다스러운 수사, <박수칠 때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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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에서 어른거리는 하얀 소복과 함께,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는 처녀귀신의 강력한 무기라 불릴 만하다. 선혈이 낭자하고 내장이 튀어나오는 끔찍한 사지절단도, 귀를 찢는 살벌한 비명도 대신할 수 없는 머리카락의 어두운 공포는 여성적이고 동양적인 한의 정서를 담는다. 밖으로 내보이지 않고, 자꾸만 안으로 삼키게 되는 한, 혹은 어떤 과거는 슬플 수밖에 없다. 안이 보이지 않는 구멍처럼, 머리카락 속에 감춰진 귀신의 얼굴은 상상력을 자극하여 더없이 무섭기만 하다. 은근함과 익숙함에서 유발되는 낯선 공포를 호러장르의 신종 규칙으로 자리잡게 만든 J호러와 함께, 기분 나쁘게 휘감기는 길고도 검은 머리카락은 일찍이 이 장르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자리잡았다.
한올한올이 살아움직이는 듯한 누군가의 머리카락에서 시작하는 영화, <가발>의 주인공은 그 머리카락이 품고 있는 기억 그 자체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지난한 투병 때문에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버린 동생 수현(채민서)에게
여성적이고 동양적인 한의 정서, <가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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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의 문학을 이끄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대표적인 여성작가 루이사 발렌수엘라의 단편 <탱고>에는 ‘소냐’라는 이름으로 낮과 밤을 달리 사는 여성이 등장한다. ‘산드라’ 아니 ‘소냐’는 탱고를 추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남성들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을 기꺼이 호흡한다. 분명 춤은 그녀에게 새로운 육체를 가져다주었고, 무대 위에서의 은밀한 교환은 그녀를 누구보다 당당하게 만든다. ‘댄스’ 영화가 스토리의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매번 끊이지 않고 만들어지는 것에는 위와 비슷한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댄스 영화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은 춤을 통해 변신한다. 엇비슷한 공식이지만 변신의 과정 속에는 파트너로 등장하는 남성과의 갈등과 화해가 있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춤을 통해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다. 이 묘한 공식이 춤이라는 해방구를 통해 재현되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이다.
<살사>에서도 이러한 전개는 마찬가지다. 스토리를 놓고 보자면, 적절한 우연(알고보니
살사 댄스가 뿜어내는 열기와 쾌락, <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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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용’ 애니메이션이라는 딱지의 가치는 기괴한 상상력에 의해 발동 걸린 성적자극의 강도와 비례한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양념이 폭력. 성적 자극과 폭력이 어떤 비율로 섞이느냐에 따라 요리의 맛은 천차만별이다. <헤비메탈 F.A.K.K.2>이 선택한 비법은 줄리의 말랑하고 뽀얀 살결 위에 빨간 가죽 띠를 두르고 칼을 쥐어주는 것이다. 여전사가 전면에 등장하지만 페미니즘과는 거리가 멀다. 모든 시선이 아슬아슬한 의상 사이로 향하기 때문. ‘성인용’을 딱히 원하는 고객이 아니라면 <헤비메탈 F.A.K.K.2>는 영양식이라고 보기 힘들다.
<헤비메탈 F.A.K.K.2>는 1981년 미국에서 제작되어 2천만달러의 흥행수입과 2백만개 이상의 비디오 판매고를 기록한 <헤비메탈>의 속편격인 작품. 원작은 사이먼 비슬리, 에릭 탈보트 그리고 제작자이기도 한 케빈 이스트만이 함께 만든 만화 <용광로>다. 성인 잡지 <팬트하우스>의
‘성인용’ 애니메이션, <헤비메탈 F.A.K.K.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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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좀더 새로운 재료 찾기, 혹은 익숙한 재료를 낯설게 요리할 방법 찾기에 골몰하는 할리우드가 주목한 신소재 하나. 바로 <에어 콘트롤>이 파고든 관제사들의 세계다. <에어 콘트롤>의 시작은 96년 <뉴욕타임스 선데이 매거진>에 실린 기사로 거슬러올라간다. 다시 프레이가 쓴 그 글은 관제탑 업무와 스트레스와 불안에 시달리는 관제사들에 대한 것이었다. <히트> <파이트 클럽> 등을 제작한 중견 프로듀서 아트 린슨은 일 자체의 극적인 위험과 직업상 독특한 생활문화를 갖는 그들의 세계가 새로운 소재라는 판단에서 이내 영화화 판권을 확보했다. 인기 TV시리즈 작가 글렌과 레스 찰스 형제가 시나리오를 맡았고, 감독 제의를 받은 마이크 뉴웰은 <도니 브래스코>를 마치고 원래 쉬려던 계획을 접고 합류할 만큼 흥미를 보였다.
뉴웰의 말을 빌리자면 <에어 콘트롤>은 “비행기 충돌이 아니라 사람들의 충돌”을 다루는 코미디.
사람들의 충돌을 다루는 코미디, <에어 콘트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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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단 한가지 이유에서다. 로빈 윌리엄스의 연기? 이 정도 코미디 연기는 그의 이력에는 차고도 넘친다. 크리스 콜롬버스 감독? <나홀로 집에>나 <스텝 맘>을 만드는 재주와 시나리오 작가의 역량은 살만하지만 끌리는 감독은 아니다. 원작자는 ‘로봇 공학의 세 가지 법칙’이라는 좀 딱딱하게 들리는 원칙을 세운 인물이다. 또한 자신이 세운 이 법칙을 바탕으로 ‘로봇’에 관한 소설들과 과학 이야기들을 펼쳐 보인 기념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SF소설가 정도로 알려진 아이작 아시모프는 1976년에 <바이센테니얼 맨>이라는 중편 하나를 썼다. 지면상 옮길 수는 없지만 아시모프는 마치 화두처럼 소설의 서두에 ‘로봇 공학의 세 가지 법칙’을 써놓았다. 원작은 이후 이 법칙을 바탕으로 사건을 전개시켜 간다. 앤드류는 이 법칙의 지배를 벗어나 법정 투쟁을 불사하며 자유로운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윤색과정에서 ‘로봇 공
로봇과 인간의 사랑, <바이센테니얼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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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번째 전사>는 피와 살점이 튀는 활극이지만, 서사극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 실존인물 아메드 이븐 파들란의 모험담을 토대로, 마이클 크라이튼이 펴낸 소설 <시체 먹는 사람들>이 영화의 원전. 따라서 이야기는 북구인의 삶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아랍 시인 아메드의 순진한 시점에서 전개된다. 북구의 오지를 삶의 터전으로 나눈 바이킹의 선조들과 식인 부족들의 대결 구도 사이에서 그가 전사의 용태를 갖춰가는 과정엔, 서로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이뤄지는 교환수업의 의미가 보태진다. 아랍인은 북구인에게 글의 쓰임새와 일신교의 의미를, 북구인은 아랍인에게 자기방어의 능력을 일깨워 준다. 우정과 의리는 민족의 담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해묵은 주제와 함께.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강렬한 요소는 역사적인 맥락이나 배경도, 신의를 강조하는 목소리도 아니다. 비장미와 역동감의 전투신이다. 안개 속에 펼쳐지는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의 장대한 숲과 벌판, 500여명의 기
전형적인 마초적 세계관, <13번째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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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 우드의 B급 SF 영화에 대한 기억에서 <에드 우드>와 <화성침공>을 끄집어낸 팀 버튼이 이번에 들고나온 발명품은 해머 공포 영화의 이미지로 채색한 <슬리피 할로우>다. 50∼60년대 영국 영화사 해머 프로덕션은 드라큐라, 프랑켄슈타인, 미이라 등 30년대 미국 유니버설 공포 영화 캐릭터들을 소생시켜 인기를 누렸다. 팀 버튼은 그 시절 해머 영화의 특징인 기괴하면서도 로맨틱한 이미지를 머리없는 귀신 호스맨의 전설에서 찾아 환상적 세트 위에 펼쳐놓는다.
괴담을 구성하는 요소는 단순하다.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주인공이 있고, 댕강댕강 목을 치는 무서운 귀신 호스맨이 등장하며, 주인공을 매혹시키는 신비의 여인이 끼어든다. 하지만 정색을 하고 덤비는 해머 공포 영화와 달리 팀 버튼은 어깨에 힘을 빼고 조니 뎁을 코믹하게 만든다. 애당초 명탐정이 되기엔 겁이 너무 많은 주인공 크레인은 놀란 토끼눈을 한 채 꺼벙한 표정을 지으며 요란스런 모양에 비해 별
잔혹함과 순수함이 어우러진 팀 버튼의 마을, <슬리피 할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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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면? “오직 어머니만이 슬퍼할 것이다.”(롤랑 바르트) 망자(亡者)로 인해 삶의 궤도를 바꿀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지만, 여기에 어머니라는 존재는 예외라는 것이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이처럼 아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한 어머니, 그녀가 상실의 슬픔을 더욱 숭고하고 폭넓은 사랑으로 승화하는 여정을 그린 영화다. 죽은 아들의 빈 자리를 메우려는 노력 속에서 타인에 대한 헌신을 실천하는 주인공 마뉴엘라의 이야기는 꽤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다. 어느덧 50줄에 들어선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역시 어머니의 원숙함을 체현한 탓일까? 그의 13번째 장편 영화인 이 작품이 이른바 알모도바르적이라 불리는 요소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에 일종의 평정(平靜)의 미학을 덧씌워주고 있는 것이. 예컨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알모도바르 특유의 알록달록한 야만적인 원색주의는 온
상실의 슬픔을 사랑으로 승화하는 여정, <내 어머니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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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뎐>의 줄거리를 말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한국에서 중등교육 받은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이야기, 불멸의 고전 <춘향전>을 영화로 만든다는 건 그래서 대단한 모험이다. 줄거리야 이미 뻔하고 게다다 수십번 영화로 TV드라마로 재탕돼온 이 오래된 이야기에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게 아직 남아 있기나 한 걸까. 임권택 감독은 조상현씨의 판소리 완창 ‘춘향가’를 듣고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어떤 좋은 시나리오를 봤을 때보다도 더 감동적이었다.” 영화 만드는 일로 평생을 보낸 사람이라 그 느낌을 자기 안에 가둬둘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귀에서 판소리가 계속 윙윙거려 임 감독은 결국 영화 <춘향뎐>에 손을 댔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문제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이었다. 판소리의 리듬과 감흥을 판소리 자체보다 훨씬 뜨겁게 살려내는 방식. 임 감독이 택한 길은 판소리와 영화의 경계를 없애는 것, 그래서 판소리의 효과를 끌어오는 게 아니라
한국적 영화미학, <춘향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