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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나의 마을>은 정말 상투적인 표현을 빌자면 한폭의 수채화 같은 영화다. 천진난만한 동심의 세계와 동심을 받쳐주는 신비로운 현상들이 어우러져 1940년대 말 일본 시골의 풍경 속으로 안내한다. 물론 이 시대는 동아시아전쟁에서 패망한 일본이 힘겹게 살던 시기였다. 영화 초반부는 짐마 할아버지가 ‘맥아더 장군’을 원망하는 대사나 쌍둥이의 급우인 하쯔미의 가난한 삶을 통해 그러한 역사의 단편을 들춰내기도 한다. 하지만 감독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아이들의 삶이다. 영화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짐마 할아버지의 죽음,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로 대변되는 가족의 삶, 쌍둥이가 겪어야 했던 질병과 온갖 말썽들 그리고 성에 대한 호기심까지.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길게 찍기의 미학을 통해 찬찬히 그리고 과장되지 않게 동심의 세계를 전해준다. 그 위에 덧붙여지는 것은 일본 특유의 설정들이다. 바람을 일으키는 신령 같은 세 할머니의 등장이나
한폭의 수채화 같은 영화, <그림 속 나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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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같이 살고 젊은 나이에 죽어 아름다운 시체를 남긴다.”
보니와 클라이드, <트루 로맨스>의 클레런스 같은 부류의 막 가는 청춘을 위한 이 슬로건은 뤽 베송 감독이 잿더미 속에서 부활시킨 15세기 프랑스 성녀 잔 다르크에게도 꼭 들어맞는다. 뤽 베송이 연인 밀라 요보비치의 육체에 불어넣은 잔 다르크의 영혼은 흡사 고조기에 접어든 조울증 환자다. 구원받고 구원하려는 신열에 들떠 한시도 자신을 가만두지 못하는 그녀는 잠자지 않아도 피곤을 모르며 허벅지에 화살이 꽂혀도 아픈 줄 모른다.
1899년 이래 열여덟편에 이르는 ‘잔 다르크 영화’가 만들어진 사실이 웅변하듯 오를레앙의 처녀는 스크린이 누구보다 경애하는 성인(聖人)이다. 칼 드레이어(<잔 다르크의 수난>(1928))의 잔이 지복에 닿은 순교자였고, 빅터 플레밍(<잔 다르크>(1948))의 여성 전사가 페미니스트의 원조였으며, 오토 프레밍거(<성녀 잔>(1957))의 히로인이 감당
스타일의 소화불량, <잔 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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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의 재미, 5%의 교훈.” 나카노 히로유키 감독의 신조답게, <사무라이 픽션>은 순수한 오락 영화다. 캐릭터들은 만화 같고, 영화의 리듬은 MTV와 일치하며, 영화음악은 록에서 댄스 비트까지 오간다. 히로유키 감독은 평소 일본영화의 ‘천황’ 구로사와 아키라를 흠모한다고 전해진다. 감독은 <사무라이 픽션>에서 일본의 전통 시대극 분위기를 흑백 영상으로 살리되, 철저하게 찰나적 재미를 추구한다. 주인공 헤이지로는 친구의 복수를 다짐하지만, 칼을 다룰 줄도 모른다. 엉뚱하게 돌팔매 연습만 죽어라 한다. 그리고 징징대는 목소리로 “꼭 없애버릴 테다”라고 뇌까린다. 황당함의 견지에서 한편의 만화다.
<사무라이 픽션>은 스타일이 살아 있는 영화다. 이야기 구조엔 별로 신경쓸 필요가 없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해도 웃고 즐길 수 있으니까. 여기서 일본 시대극의 규칙은 무시되거나 아예 비틀린다. 잠복중이던 닌자는 천장에서 몸을 날린 뒤 바닥에 철퍼덕
한편의 ‘사무라이 코미디’, <사무라이 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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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가 실종됐다. 이건 큰일인가. 사건 축에도 못 끼는가. 의외의 소득인가. 즐거움인가. <플란다스의 개>에선 그 모든 것이다. 강아지를 생의 마지막 위안으로 여기던 노파에겐 죽음이고, 그보단 덜 쓰라리다 해도 강아지를 동생처럼 돌보던 아이에겐 사랑의 상실이다. 반면 신경 예민한 시간강사에겐 소음 제거라는 목표의 달성이고, 개의 육질에 매혹된 경비원과 부랑자에겐 영양 보충의 귀한 계기다. 엉뚱하게도 경비실 여직원에겐 자아실현의 기회도 된다. <플란다스의 개>는 강아지 실종이라는 작은 사건을 아파트라는 소시민의 생활공간에 던져놓고, 멀쩡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예기치 못할 소동에 빠져드는지를 관찰하는 짓궂은 농담이다.
영화아카데미 11기 출신인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이름난 단편 <지리멸렬>에서처럼, 생활공간에서 일어난 일상적 사건을 통해 사람들의 비루한 욕구를 유머러스하게 극화하고 있다. 제목 때문에 <플란다스의 개>에서 따뜻한 동화의 위안
소시민들의 비루한 욕구, <플란다스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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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경찰>에서 정작 즐거운 사람은 경찰 롤랜드 샤프(토미 리 존스)가 아니라 치어리더인 여학생들이다. 위험에 처한 그들은 언제나 웃고 떠든다. 반대로 ‘정의의 수호자’인 샤프의 얼굴은 항상 굳어 있다. 원하는 것이 명쾌한 소녀들과 달리 샤프는 범인 검거, 아이들의 보호, 딸에 대한 그리움 등 세상사의 고민 앞에서 갈팡질팡한다.
악당 코플랜드 사건의 중요한 증인인 모건 볼을 뒤쫓는 텍사스 경찰 롤란드 샤프. 그 과정에서 동료 엘렌이 총에 맞는다. 모건 볼은 다른 킬러한테 살해되고 그 광경을 다섯명의 여학생이 목격한다. 살인사건의 목격자인 앤, 이비, 헤더, 테레사, 바바라는 치어리더다. 경찰서로 불려온 아이들은 용의자들의 몽타주를 보고 외모를 평가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후 샤프는 여학생들과 ‘합숙’하며 그들을 보호하기로 결정한다. 한편 그는 치어리더팀의 교사로 학교에 위장전입한다. 이혼한 샤프에게는 딸 엠마가 있다. 엠마와 비슷한 또래인 아이들은 그런 샤프를 장난감
텍사스 레인저와 치어리더가 만나다, <즐거운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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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방 몰래카메라의 한 장면. 뿌연 실루엣으로 보이는 남녀의 뒤편으로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우연히 이 몰카를 손에 넣게 된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는 혼령이 되어 여관방을 맴도는 남자의 사연을 파헤친다. 남녀의 대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힌트 삼아 여관의 위치를 추적하고, 여관 건물 주인의 인터뷰를 진행하던 제작진은, 20여년 전 부산에서 발생한 장남의 일가족 살해사건과 몰카 속 혼령이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닫는다. 폐가가 된 당시의 사건현장을 탐색하고, 살해된 막내딸의 친구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 무속인, 음향전문가, 아동심리학자 등 십여명의 관계인들을 인터뷰하면서 이들은 서서히 문제의 핵심에 접근해간다.
똑같은 이야기라도 화자의 입담에 따라 그 재미가 천지차이로 달라지는 경험,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 직접 겪은 생생한 일화가 지지부진한 일상으로 둔갑할 수도 있고, 사돈의 팔촌이 전한 뻔한 소문이 흥미진진한 모험담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열악한 제작환경에서 만들
맛깔스런 호러다큐멘터리, <목두기 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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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와 설정만 놓고 보면, 한국영화의 시대극은 점점 대담해지고 있다. 갑옷 두르고 수염 기른 근엄한 장군들의 입에서 사투리와 욕지기가 터져나오고(<황산벌>), 정숙과 순결의 규방에서 불그스름한 욕정의 게임들이 버젓이 벌어지고(<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급기야 <천군>에선 성웅 이순신마저 물욕에 사로잡힌 방탕한 사내로 그려진다. “현대의 남북한 군인들이 400여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 이순신 장군 만들기에 동참한다”는 줄거리의 <천군>은 시치미 뚝 떼고 엉뚱한 상상력을 피워 올린 한국판 <백 투 더 퓨처>다.
북한장교 강민길(김승우)은 남북이 공동으로 개발한 핵무기 비격진천뢰가 미국쪽에 양도되자 불만을 품고 비격진천뢰를 탈취한다. 남한 핵물리학자 김수연을 인질로 삼고 도주한 강민길을 잡기 위해 남한장교 박정우(황정민)가 투입된다. 마침 433년 만에 한반도 상공에 거대한 혜성이 지나고, 압록강 유역에서 대치하던 이들은 갑작스런
남북한 군인들의 이순신 장군 만들기, <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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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다가스카>는 뉴요커(New-Yorker: 뉴욕에 사는 사람)에 대한 영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신없는 거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전형적 인물으로서의 뉴요커에 대한 영화다. 네 마리의 동물 캐릭터들, 사자 알렉스(벤 스틸러), 얼룩말 마티(크리스 록), 기린 멜먼(데이비드 시머), 하마 글로리아(제이다 핀켓 스미스)는 하릴없는 뉴욕의 예찬자들. 심지어 몇몇 대사들은 뉴욕중독증 환자들이 주연인 <섹스&시티>의 대사들(“누군가가 뉴욕을 떠나는 걸 볼 때마다 항상 놀라워. 내 말은, 대체 여기 말고 어디 가서 살 수 있냐고?”-사만사-)에서 따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뉴욕이 갑갑해지기 시작한다면?
<마다가스카>의 이야기가 그들의 탈출욕구에서 시작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심지어 우디 앨런조차도 일시적인 일탈을 꿈꾸지 않았는가. 결국 얼룩말 마티는 남극으로의 탈출을 시도하는 사이코 펭귄갱단에 감화되어 ‘야생’을 찾아
네 마리 뉴요커 동물들의 뉴욕 귀환 프로젝트, <마다가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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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괴담> 시리즈는 괴담 아래에 애(愛)와 애(哀) 두 가지 정서를 포개어두었다. 점프컷으로 튀어오르는 원혼과 거대하게 부풀어오른 소녀의 눈동자를 헤치면, 기름 먹인 스트레싱 페이퍼 밑으로 희미하게 비치는 글자와도 같던, 사랑과 슬픔이 새어나오곤 했다. 사자(死者)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어린 영혼들. 혼자서 죽어간 그 아이들은 생과 사를 가르는 심연을 거부하면서 그저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있고 싶다고 아이다운 고집을 세운다. 그 고집은 산 자에겐 공포가 되고, 죽은 자에겐 올가미가 될 뿐이다. 죽은 이는 보내야만 한다. 그러나 어떤 냉정한 목소리도 아이들이 울먹이면서 저승으로 떠나는 <여고괴담>의 끝자락에 성불이나 해피엔드라는 무심한 내레이션을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노래 연습을 하던 여고생 영언(김옥빈)은 누군가 자신의 노래에 화음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언은 그 목소리로부터 달아나려고 하지만, 엘리베이터 앞에서 악보
소녀들의 절박한 목소리, <여고괴담4: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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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드레스>는 한국과 일본의 합작 애니메이션이다. 일본 스탭들이 제작에 참여한 애니메이션으로선 국내 최초의 극장 개봉작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개방을 앞둔 시점에서, 일종의 실험 프로젝트라 할 만하다. 동화와 원화 부분은 한국에서, 그리고 시나리오와 연출 등은 일본 스탭들이 담당했다. 많은 이들의 이목이 쏠린 것도 당연한 이치다.
<건드레스>는 제작과정이 복잡하다. 일본의 닛카쓰와 파나소닉 디지털 콘텐츠, 이너브레인 등의 회사가 동아수출공사와 공동으로 제작비를 댔다. 거대 프로젝트라 일컫어도 어색하지 않다. 국내 스탭이 기획 및 제작, 배급에 참여했고 각본과 캐릭터 설정 등 주요 부분은 주로 일본인 스탭의 손을 거쳤다. 스탭 진용은 쟁쟁한 편이다. 주목할 인물은 <애플시드>와 <공각기동대> 등의 SF물로 잘 알려진 만화가 시로우 마사무네. 캐릭터 설정을 맡아 예의 날렵한 사이버펑크풍의 여성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연출자 야타베 가쓰요시는 &
한국과 일본의 합작 애니메이션, <건드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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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땐 누구나 한번쯤 ‘난 혹시 미운 오리새끼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봤을 것이다. 나만 유별나다는 섣부른 자의식은 견디기 힘든 형벌이었고, 친구들로부터 외돌아졌다는 소외감은 하루에도 몇번씩 ‘마음의 감옥’을 들락거리게 했다. 그 시절의 상처는, 무뎌지기는 해도 잊혀지지는 않아서, 지금도 기억 속에서 느닷없이 기어나와 그때의 나를 뼈아프게 각성시킨다. 조시 또한 그랬다. 유능하고 현명한 어른인 조시는 취재기자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서 다시 고등학교로 뛰어들지만, 정작 그녀가 맞닥뜨린 건 ‘특종거리’가 아니라 그녀의 옛날이다.
<25살의 키스>는 이렇듯 어른을 주인공으로 한 10대 코미디 영화. 조시의 시선으로 요즘 10대들이 사는 법을 유머스럽게 스케치한다. 조시가 잠입한 학교는 더이상 꽉 막힌 공간이 아니다. 무엇도 아이들을 가두지 않으며 아이들은 경쾌하고 풍요롭다. 그럼에도 친구 만들기는 여전히 만만치 않으며, 그곳에서 조시는 ‘또다른 조시’를 발견하고 분노한
요즘 10대들이 사는 법, <25살의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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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를 표방한 <인코그니토>는 <토요일 밤의 열기> <블루썬더> <니나> <고공침투> <닉 오브 타임> 등을 연출했던 존 바담 감독의 최신작. 렘브란트의 그림 한점을 그려주면 50만달러를 주겠다는 브로커들의 덫에 걸려든 해리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렘브란트 작품을 모조하는 데 혼신을 다한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진품(?)을 훔쳤다는 누명. 체포되어 법정에 선 그는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위작을 또 한번 그려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해리의 인생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두장의 그림 사이에 <인코그니토>는 익숙한 스릴러 장르의 복선과 장치들을 채워놓았다.
자신의 재능을 확인할 때라곤 남의 그림을 베낄 때 뿐인 해리와, 생계를 위해 당대 유럽의 최고 화가였던 루벤스의 그림을 따라 그려야 했던 렘브란트. 사전 정보를 조금 챙겨보면 그렇게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와 <인코그니토>의 해리
결백한 도망자, <인코그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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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지인 홍콩보다 오히려 국내에서 컬트가 된 주성치 영화는 품위와 상식에 대한 기대를 버리면 버릴수록 재미가 더해지는 희한한 종류의 코미디다. ZAZ 사단의 패러디 정신과, 인분이나 정액을 과감히 등장시키는 패럴리 형제의 악취미가, <주성치의 007> <홍콩레옹> <홍콩 마스크> <식신> 등으로 이어지는 주성치 코미디에 고루 깃들어 있다. <희극지왕>은 그의 영화치고 좀 점잖은 축에 속해서 주성치를 섬기는 교파에 입문하기에는 비교적 적당한 코스다.
진지함을 뒤집는 데 달인의 경지에 오른 주성치가 <희극지왕>에서 패러디하는 것은 <007>이나 <마스크> 같은 할리우드영화가 아니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영화현장 자체다. 홍콩에서 최고 몸값을 받는 배우인 그는 스스로 엑스트라가 되는 경험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꿈을 대신한다. 영화에서 무능력한 사내가 현실에서 백마탄 기사가 된다는 <희극지왕>
주성치의 낭만과 낙관이 넘실대는 무대, <희극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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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마흔두살인데, 일년 안에 죽을 것이다. 물론 난 아직 그걸 모르고 있다”
이게 무슨 소린가. 불치병에 걸린 걸까. 사고를 당하나. 자살한다는 건가. 죽는다 해도 이 말은 누가 언제 하고 있는 걸까. <아메리칸 뷰티>는 첫 내레이션에서부터 시점(時點)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슬쩍 지우며 시작한다. 목소리의 주인공 버냄은 중년의 미국 화이트 칼라다. 대도시 근교의 멀쩡한 집에서 아주 정상적으로 살고 있다. 아니, 말하는 걸 봐서는 정상적이지 않은 것 같다. 외양은 매끈하기 짝이 없다. 집도 근사하고, 미인 아내는 부동산 중개업을 열심히 하고 있으며, 고등학교 다니는 딸도 몹시 예쁘다. 그런데도 내레이션은 이렇게 이어진다. “난 이미 죽어있는지도 모른다. 내 아내와 딸은 내가 엄청난 패배자라고 생각한다.”
<아메리칸 뷰티>라는 제목의 뜻은 ‘①가장 고급스런 장미의 이름, ②금발에 파란 눈, 전형적인 미국 미인, ③일상에서 느끼는 소박한 아름다움’이라
병든 가족, 벌레먹은 꿈, <아메리칸 뷰티>